2. 과거의 유산遺産(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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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백은 대재앙 이전 시대 생활상과 발달한 문명에 대해 말해 주었다. 물론 거기에서 대재앙을 촉발시킨 세계전쟁과 그 배경에 관한 이야기도 빠질 수 없음은 물론이었다.
간추려서 설명했다지만 개략적인 인류의 역사는 앉은 자리에서 논하기엔 너무나 방대한 양이었다. 한백이 이야기를 끝마쳤을 때는 이미 상당한 시간이 흐른 뒤였다.
창현은 심한 피로감을 느꼈다. 허기도 몰려들었다. 무언가 더 말을 하려다 창현의 상태를 알아봤는지, 그제야 한백이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배려가 부족했군요."
이 청초한 얼굴이 어떻게 500년을 넘게 살아온 존재일 수 있을까. 기절할 것 같은 와중에도 창현은 그런 생각이 들어 쓴웃음을 지었다.
"잠깐. 하나만 대답해 주시오. 처음 본 내게 왜 이런 이야기를 해주는 겁니까?"
무슨 말이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한백이 되물었다.
"왜 이야기를 해주다니요? 당연히 이 쉘터가 인간을 위한 장소로 지어졌기 때문이죠. 아! 정작 이곳의 목적에 대해서는 설명을 안 드렸군요."
아직도 할 이야기가 많이 남았나 보다. 창현은 이미 반은 끊어진 정신을 붙잡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이야기를 마저 들었다.
"이곳은 옛날 김무을 박사님의 주도로 지어진 핵 방공호입니다. `대재앙`이전, 인간들 사이에 큰 전쟁이 벌어졌다고 한 말을 기억하고 계시죠? 그 전쟁은 사실 몇 년 전부터 조짐이 보였다고 했어요. 박사님 말에 따르면요. 환경이 극도로 파괴되고 인간들의 삶도 점점 피폐해져 갔죠. 같은 인간들 사이 반목과 불신이 자리 잡은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을 거예요."
완공까지 20여년 가까운 세월이 걸린 쉘터의 동기였다.
그러나 한백은 이 쉘터가 지하 200M 깊이에 암반층을 파내고 외곽은 특수합성 콘크리트 층, 100mm 두께의 합금강 층, 그리고 중성자탄에 대비한 납과 구리 패널 층이 교차 반복되어 감싸고 있다는 것까지 설명하지는 않았다.
사실 그뿐 아니라 이 기가 막힌 건축물은 거미줄처럼 정교하게 뻗어 나간 에어 덕트와 고탄성 제진장치 및 면진장치가 각 층 사이마다 빽빽하게 둘러쳐져 있어 외부의 충격을 거의 완벽하게 흡수할 수 있었다. 건축 방식부터 그 안에 투입된 기술력은 2100년대 건축공학의 결정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김 박사님은 이곳이 단순한 대피처 이상의 장소가 되길 바라신 거에요. 핵전쟁이 벌어지면 단순히 몇 명 죽고 끝나는 게 아니에요. 직접 겪어보지 못하면 그 위력을 알 수가 없죠. 김 박사님은 인류가 멸종에 이를 수도 있다고 걱정하셨어요."
"인간이.. 모두 죽는다고? 어떻게 그럴 수 있는거지?"
"2100년대에 들어 자연파괴는 엄청난 속도로 진행되었고, 재해의 발생 빈도 또한 급증했어요. 국제정세의 변화와 망가지는 자연환경을 고려했을 때, 가까운 미래에 인류가 생존하기 힘들 거라고 보신 거죠. 하지만 주변 사람들에게 그 걱정을 털어놓으면 터무니없는 소리라고 타박을 많이 들었다고 했어요. 그때는 너무 앞서나간 생각이었던 거에요. 물론 그건 나중에 저에게만 몰래 말씀해 주신 거지만.. 저를 프로그래밍한 분도 김 박사님이시거든요."
너무 졸려서 잠깐 꿈을 꾸었다고 생각하는 게 저 말을 믿는 것보다 합리적일 것 같았다.
"말도 안 돼."
창현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괴물도 그 무엇도 아닌 인간끼리의 싸움에 그럴 수가 있을까? 마을 역사에서도 살인자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것은 정도가 지나친 생각었이다.
"제 말은 사실이에요. 하지만 혹여 인간들끼리 전쟁을 벌이지 않았더라도 인류는 살아남았을까요? 십 년, 백 년, 혹 이백 년은 더 번창했을 수도 있었겠죠. 그러나 그 이후는 어땠을까요?"
지이잉-.
말을 끊으며 한백이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그러자 머리 위 천장의 한쪽 면이 열리더니 밝은 빛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창현은 잠이 달아나는 것을 느꼈다. 처음 그를 감싸던 그 빛이 연상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빛은 그를 향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빛은 한백과 창현이 앉은 쪽 벽에 어떤 영상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산보다 높이 솟은 건물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불길이 치솟고, 인간은 무기력하게 그 사이에서 생명을 잃어갔다. 무너진 그 건물을 땅이 뒤집혀 삼켜버리고, 모든 살아 있는 것과, 모든 죽어 있는 것과, 모든 죽어가는 것들이 전부 함께 묻혔다.
"박사님은 혹시나 하면서도 그런 걱정을 떨쳐버리지 못하셨죠. 하지만 그것보다도 약화된 지반과 균형을 잃어버린 대기가 더 큰 문제였어요. 전쟁과 핵은 터지기 일보 직전인 지구에 불을 당긴 것이나 마찬가지였죠."
벽에 아로새겨지는 수백 년 전의 아픔을 창현은 그 순간 같이 공유하고 있었다. 한백 역시 음울한 눈으로 영상을 바라보았다.
"세상은 전쟁으로 어수선했고 사람들은 더욱 살기 어려워졌지만 아직 그리 심각하게는 생각하지 않았죠. 전쟁은 곧 끝나고 삶도 예전처럼 돌아갈 거라고 여긴 거였어요. 하지만 전쟁은 오래도록 끝나지 않았죠."
물과 땅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대기는 눈에 띄게 흐릿해졌다. 폭음과 폭연이 온 지구에 범람하고 있었다. 집을 잃고 황야에서 서성거리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건 약속된 죽음이 전부였다. 영상엔 온통 절망과 불행과 고통뿐, 소리 없이 재생되는 그 영상은 인간의 비참한 말로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박사님은 전쟁 이전부터 이 쉘터를 구상하고 계셨어요. 다가올 재해를 미리 대비해야 된다고 누누이 말씀하셨죠. 그래서 이런 준비까지 하게 된 거에요."
"무엇을 준비했다는 말입니까?"
"인류의 문화를 위한 준비에요. 그보다는 인류가 이룩한 문화와 문명을 자손들이 알게 하는 것이란 게 정확하겠군요. 모든 사람이 반대했지만 그분은 끝까지 생각을 꺾지 않으셨어요. 만약 자신이 틀렸다면 자신은 행복하게 죽을 거라고 얘기하곤 했었죠. 그 만약을 위해서 실제로 죽기 직전까지 노력하셨고요. 사실 그분은 누구보다도 간절히 자신의 생각이 틀리길 바랐어요. 불행히도 정확히 맞아버렸지만."
스스로 인간이 아니라는 그녀의 마지막 말에서는, 너무도 선명한 인간의 감정이 담겨 있었다. 창현은 알아들을 수 없는 단어가 계속해서 나왔지만 참을성을 가지고 그녀의 설명을 들었다. 문맥을 살피면 이해 못 할 내용이 아니기도 하거니와 그녀의 말에서 느껴지는 왠지 모를 비애가 더욱 입을 열 수 없게 만들었던 것이다.
"기원전부터 지금까지의 인류역사와 그들이 이룩한 전반적인 문명이 여기 있어요. 아까 말씀드린 이야기는 정말 얼마 되지 않는 일부분에 지나지 않아요. 의료, 건설, 과학, 법률, 종교, 예술 및 그들의 모든 업적과 생활상을 총망라하는 방대한 양이에요. 한 인간의 일생동안 모두 습득하기 어려울 정도로요. 저의 도움 없이는 말이죠."
잠시 말을 쉬며 한백이 빙긋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 손가락을 들어 자신의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그리고 김무을 박사님의 가장 큰 준비는 바로 저에요. 일부는 이곳 서가에 보관되어있지만 대부분 자료는 제 데이터베이스에 있거든요. 제 또 다른 임무가 바로 그 지식들을 보존하고 인류에게 전하는 거랍니다."
어느새 곯아떨어진 창현을 한동안 물끄러미 바라보던 한백은 숨을 내쉬듯 속삭였다.
"그래서 더욱 반가워요. 내 존재의 의의이자, 오래전 안배된 약속의 이행자여."
* * *
허공으로 뛰어올라 손에 쥔 창을 강하게 내지른다. 버들잎처럼 날렵하게 뻗은 창날이 소리도 없이 가슴에 파묻히고, 떨어진다. 모래 속으로 떨어진 한 방울 물처럼 아무런 저항감도 느껴지지 않는다. 창을 빼내는 탄력으로 회전. 창날은 다시 괴물의 목에 붙었다 떨어진다.
이번엔 빠져나오며 창날이 한 바퀴 돌았다. 창날의 폭과 똑같은 넓이의 구멍이 뚫리고 목이 너덜너덜해진다. 검고 탁한 살점과 피가 허공에 번진다. 여기저기에서 튀어나오는 괴물들.
그리고 같은 행동의 반복들. 찌른다. 뺀다. 쳐서 뼈를 끊고 근육을 가른다. 피로 물들어 검고 붉게 번들거리는 손. 사방을 가득 메우는 광포한 고함과 괴성들. 허공에 손을 저으면 만져질 것만 같은 끈적한 살기. 오로지 살의로 충만한 눈동자.
다시 한 놈. 창의 파단(巴端)으로 얼굴을 뭉갠다. 창날로 목을 벤다. 다시 또 한 놈. 심장에 구멍을 뚫어 버린다. 그러나 그 뒤에 또. 그 옆에 또. 끊임없이 몰려오는 괴물들. 괴물의 파도. 절망에 가려 빛을 잃은 창과 붉은 눈빛. 광기로 매몰되는 육신. 그리고 그 피로 축배를 드는 괴물들. 괴물들. 괴물들.
"헉."
창현은 허탈한 눈빛으로 상체를 일으켰다. 평소 악몽 따위에 시달릴 정도로 약골은 아니라고 자부하던 그였으나 이건 너무 노골적인 환상이었다. 주름 잡힌 미간 사이로 한 방울 식은땀이 주르륵 굴러내렸다.
일그러진 눈매 속 눈동자가 불안하게 떨렸다. 아직도 사방에서 짙은 피 냄새가 진동하는 것 같았다.
창현은 곧 자신이 어떤 낯선 방안의 침대에 누워있음을 깨닫고서야 잠들기 전까지의 일이 꿈이 아니라는 걸 인정할 수 있었다.
그는 멍청한 눈으로 천장을 올려다 보다가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고서야 고개를 움직였다. 한백이 들어오고 있었다.
"일어나셨네요."
"아, 예."
변함없는 태도의 한백과 달리, 창현은 데면데면하기만 했다. 이해 저편의 존재라는 사실이 보이지 않는 벽을 만들었을까.
"오늘은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할 거예요."
"..."
밑도끝도없이 꺼낸 얘기였다. 그녀는 잠시 뜸을 들이다 마저 말을 이어갔다.
"절 도와주세요. 당신 몸이 필요해요."
창현은 어이없다는듯 입을 크게 벌렸다.
"지금... 뭐라 그랬소?"
"당신의 몸이 필요해요."
한백은 흔들림 없는 모습으로 또박또박 말했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창현은 혼란스러웠다. 난데없이 무슨 소릴 하는 건지 이해도 되지 않았다. 몸이 필요하다니?
"이해하지 못하리란건 알아요. 하지만..."
더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창현이 옆 탁자에 기대어있는 창을 집어 들고 벌떡 일어났다. 그리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문을 향해 걸어갔다.
"잠깐."
한백은 그의 이름을 부르고 잠시 뜸을 들였다.
"지금은 안됩니다. 갈 수 없어요."
"그게 무슨 말이오?"
"아직 용건이 끝나지 않았어요."
창현의 얼굴이 이상하게 굳어졌다. 그녀의 말에서 심상치않은 낌새를 느꼈던 것이다.
"대체 무슨 용건이길래 나한테 이러는거요? 몸이 필요하다니?"
"어제 말씀드렸었죠. 제겐 임무가 있다고. 인류의 문화와 그 지식을 지키고 전달하는 것이 제 임무고 그것은 반드시 수행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직 제 임무는 끝나지 않았죠. 당신이 도와 주어야 해요. 인간으로서요."
대체 그게 나랑 무슨상관인가 라며 따지고 싶었지만, 한백이 먼저 말을 꺼내는 바람에 창현은 입만 뻐끔거리고 말았다.
"당장 이해를 바라진 않을게요."
"뭐라고..?"
"나중에... 나중엔 다 알게 될 거예요. 얘기는 그때 다시 하기로 해요."
처음과 똑같이 편안한 어투였지만 창현은 그 말에서 어떤 위협을 느꼈다. 그와 동시에.
피슉-.
네모난 방의 천장 각 모서리에서 수증기 같은 하얀색 기체가 구름처럼 아래로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정체는 몰랐으나 본능적인 위기감에 창현은 문 쪽으로 크게 뛰었다.
아무리 밀치고 당겨도 열리지 않는 문. 창현은 문 앞에서 절망했다. 그러는 사이에도 이미 기체는 방 안을 가득 채우고 벽과 바닥과 천장 어디 한 군데 빈틈없이 몽글거리며 흘러다니고 있었다.
"이..!"
순식간에 정신이 흐려지고 눈앞의 사물이 똑바로 보이지 않았다. 즉시 호흡을 멈췄지만 한 모금 잠깐 들이켠 가느다란 숨에도 바로 효과가 나타나고 있었다. 목구멍이 꽉 막힌 것 같았다. 몸에서 빠르게 힘이 빠져나갔다. 잠들기 직전의 나른함과 몽롱함 속에서 세상이 흔들려 보였다.
"지금은 어쩔 수 없어요. 이미 너무 오랜 시간을 지나왔으니까요."
무게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듯 한백이 쓰러진 창현을 가볍게 안아 들었다. 돌아서 방문을 나서는 그녀의 뒷모습이 왜인지 쓸쓸해 보였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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