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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랜드 킴 님의 서재입니다.

인간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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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랜드킴
작품등록일 :
2021.05.13 21:41
최근연재일 :
2022.11.17 2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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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580,477

작성
22.01.25 0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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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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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23. 갈망하는 자만이 얻을 수 있다(3)

DUMMY

사실 이번 거사는 첫 구상부터 마지막까지 창현이 주도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비록 명모 때문에 어영부영 합류한 모양새였지만, 창현은 언제 뜸 들였냐는 듯 이번 일에 그 누구보다도 적극적이었다.


심지어 그렇게 도와달라던 덕문과 타말이 말리고 나설 정도였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가 제시한 계획 자체가 너무 위험했기 때문이다.


"놈들이 가장 원하는 것을 저일 테니, 제가 미끼가 되겠습니다. 놈들의 시선이 제게 쏠리면, 그때 사람들을 데리고 정문으로 빠져나가세요."


조금 더 시간을 두고 안전한 방법을 모색하자는 의견에도 창현은 단호했다.


"우리에게 시간은 곧 목숨입니다.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릴 길을 포기하자는 말입니까? 놈들의 전력이 분산되어 있는 지금을 노려야 합니다. 다음엔 기회가 없을지 모릅니다. 그리고... 이건 저를 위한 싸움이기도 합니다."


한백의 목적을 이루려면 무엇보다 많은 사람이 필요했고, 창현은 지금이 그 적기라는 것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사정을 이미 알고 있는 덕문은 물론이거니와, 이야기를 전해 들은 타말도 결국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 또한 창현이 제시한 방법이 가장 빠르고 효과적임을 알고 있었다. 당연했다. 수백에 달하는 사람들이 벽을 타 넘거나 개구멍으로 조금씩 빠져나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니 말이다. 위험하다는 것도 결국 핑계에 지나지 않았다. 안전이란 말은 사치다. 그것이 어느 구석에 숨어 있을지는 모르나, 적어도 그들에겐 없는 가치였다.


평생토록 맘 편하게 고개조차 들지 못했던 노예들을 데리고 정문으로 당당히 빠져나가는 모습을 상상에서라도 해 봤을까. 솔직히 두려웠던 것이다. 말로는 탈출하겠다고 했지만 그런 생각을 행동으로 옮길 용기가 그들에겐 부족했던 것이다.


그러나 어차피 이대로 가다간 목줄이 채워진 채 말라 죽을 일만 남게 된다. 목숨을 걸고 미래를 잡을 것인가, 아니면 순한 개처럼 정해진 운명에 끌려 갈 것인가.


그들은 고민 끝에 후자를 택했다. 그때부터 타말을 중심으로 한 그들만의 조직은 바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창현의 의견을 통해 동지들을 설득하고 각자 임무를 맡기는 데에만 며칠이 소요되었다.


그 일에 희남과 그의 친구들이 활약해 준 것은 대단히 고무적인 것이었다. 계획은 순조롭게 진행되었으며 아무런 문제도 일어나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 생각해야 할 점은, 아무리 그래도 시간은 그들의 편이 아니라는 거였다. 놈들이 먼저 눈치를 채거나, 혹은 정택을 위시한 다른 군인들이 돌아오기라도 한다면 지금까지의 모든 노력이 물거품처럼 사라져버릴 테다. 그래서 그들은 최대한 빠르게 행동했고, 드디어 준비했던 큰 한 걸음을 떼어 놓을 수 있었다.


창현은 최근 며칠에 걸친 기억과 군인을 생각하다가 불현듯, 웃음으로 포장한 정택의 살기 짙은 얼굴을 떠올렸다. 왜 그런 생각이 떠올랐는지는 몰랐다. 아마도 짙은 피 냄새 때문일까. 그때 숲 속 가득 몰아치던 중압감. 그리고 끝내 살인을 포기하고 도망치기만 했던 자신의 뒷모습까지 선명하게 그려졌다.


두근. 두근.


그때처럼 심장이 격렬히 뛰었다. 심장에서 퍼 올린 피가 사지로 시원스럽게 뻗어 나갔다. 그에게 이제 살인은 일상적인 것이 되었으며 첫 살인 이후, 오히려 충만감을 불러일으키는 행위가 되었다. 창현은 거리낌 없이, 죄책감도 없이 팔을 휘둘렀다.


쉬이익! 푹!


"크아악!"


창이 번쩍이고, 또 한 명의 군인이 어깨를 부여잡은 채 쓰러졌다. 창날이 돌아가며 게걸스럽게 피를 마셔댔다. 쓰러진 그의 몸은 비슷한 상처들로 온통 피투성이였다. 뇌 속을 하얗게 태우는 고통에 군인은 다시 한번 소리를 질렀다. 이제 보니 다른 군인들도 만신창이의 모습으로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으아아악! 이 개자식!"


삐이이이이-! 삐이이이이-!


쓰러진 군인 뒤에서 신경을 자극하는 호루라기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창현은 그 소리가 무얼 뜻하는지 알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 소리와 함께 멀리서 얼마의 군인들이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창현은 즉시 뒤로 돌아 달아나기 시작했다.


"잡아라! 절대 놓치면 안 돼!"


아침나절부터 이어진 성곽 위에서의 싸움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금방 세 번째 녀석들을 처리했으니, 지금 달려오는 놈들이 네 번째다. 놈들은 다섯 명씩 짝을 지어 몰려다녔으므로 벌써 열다섯이나 되는 군인들을 처리했다는 뜻이 된다.


모두 죽이지는 않았다. 전력을 깎아 먹을 정도의 상처만 입혀도 충분했다. 그래야 지금처럼 다른 녀석들을 불러다 줄 게 아닌가? 혼자 일일이 찾아다니며 소란을 피우기엔 군인들은 너무 많았고, 대양은 너무 넓었다. 놈들이 찾아오게끔 만들어야 했다.


'후욱!'


얼마나 달렸을까. 조금 전 쓰러뜨린 군인의 비명소리가 아스라이 들려온다. 어쩐지 숨이 가빠 온다고 생각했는데, 꽤나 먼 거리까지 도망친 것이다. 그제야 창현은 손안에 창을 고쳐잡으며 몸을 멈춰 세웠다. 그리곤 번개처럼 뒤돌아 먼발치에서 허겁지겁 따라오고 있는 군인들을 노려보았다. 새로운 희생양들이었다.


번쩍-! 화르르륵-!


장내에 변화가 생긴 건 그때였다. 높은 성곽 위인지라 전망과 시야가 좋았는데, 때마침 고개를 돌리던 창현의 눈에 하늘 높이 치솟아 오르고 있는 커다란 불길이 들어왔다.


그와 동시에, 대양 여기저기에서 그와 비슷한 모양의 불이 번져나가기 시작했다. 화려한 불꽃의 향연. 상황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장관이라 불러도 좋을 만큼 멋진 장면이었다.


"불이야! 불이야!"


"아아악!"


누군가의 비명과 외침이 들린다. 그것을 기점으로 도시는 혼란에 잠겨 들고 있었다. 양동이로 불을 퍼 나르는 사람, 허둥지둥 도망치는 사람 등이 뒤섞여 아수라장으로 변해 버렸다.


창현은 그걸 보고 잔인한 웃음을 베어 물었다. 동정심 따윈 일지 않는다. 놈들의 정신을 빼놓기 위한 계획이 생각보다도 훌륭한 효과를 발휘했다는 사실에 그저 웃음이 났다.


먼저 경계를 맡고 있던 군인 놈들을 쳐서 흔들어 놓고, 그다음 불길로 이목마저 차단한다. 야기된 혼란을 틈타 사람들을 빼낸다. 이것이 작전의 핵심이었던 것이다.


대양을 살피느라 한눈판 짧은 사이, 뒤쫓아 오던 군인들은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하지만 이전 조처럼 섣불리 덤벼들지는 않았다. 그들은 침착하게 무기를 꺼내 들었다. 성곽 위 좁은 통로라 포위하지는 못했지만, 창을 뻗어 위협하기에는 충분했다. 맨 앞에서 창을 겨눈 군인이 소리쳤다.


"지금이라도 무기를 버리고 얌전히 군다면 우리도 그에 맞는 대우를 해주마! 하지만!"


그의 얼굴은 긴장으로 온통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식은땀마저 흥건하게 흘러내렸다. 그러나 창현의 태도는 그런 긴장과는 거리가 있는 거였다.


"하지만?"


태연스레 되묻는 말에 그는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그는 속으로 조장이라는 직함만 아니었다면 이렇게 앞으로 나서지 않았을 텐데, 라는 한탄을 했지만 어쩔 수 없게 되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세게 어깨를 내리눌렀다. 그는 입술을 질끈 깨물고 말을 이어갔다.


"계속 까분다면 뼈도 못 추릴 줄 알아라! 이미 네놈에 대한 추살령이 떨어졌다. 네놈이 얼마나 대단한지 모르나, 우리 전부를 상대할 순 없을 거다. 만에 하나 그렇다 하더라도! 네 녀석이 대양을 벗어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항복해라! 그리고 혹시 모를 동정과 아량을 구하며 빌어라! 어쩌면 재상님께서 널 살려주실지도 모른다."


목소리에 억지로 실은 힘이 그나마 추한 모습을 가려주었지만, 그것도 얼마 가지 못했다. 그는 경악과 공포로 두 눈을 크게 치떴다. 더욱 거세어진 화염과 그것이 만들어낸 메케한 연기가 드디어 그들의 시야에도 들어왔던 것이다.


"부, 불이!"


군인중 한 명이 놀라움에 가득 찬 음성으로 소리쳤다. 조장의 얼굴이 저절로 일그러졌다. 평생을 살아온 대양에서 이 정도의 불은 본 적이 없었다. 그것도 하필 지금 같은 시기에 불이라니. 이게 정말 우연일 수 있을까? 연신 고개를 내젓던 그는 무언갈 생각하더니 또다시 처참한 얼굴을 했다.


"설마 이것도... 네놈 소행이냐?"


설마, 혹시나 하였으나 만면에 사악하기 그지없는 미소를 떠올린 창현을 보고, 그는 자신의 불길한 상상이 맞아떨어졌다는 것을 확신했다.


"그럼 저게 우연이라고 생각하나?"


"이...! 악마 같은 놈!"


너무도 태연한 말에 그는 분통을 터트렸다. 아니면 점점 짙어지고 있는 저 흉악한 웃음 때문인가.


"네놈이 그러고도 사람의 자식이란 말이냐! 뭣 때문에 이러는 거냐! 무고한 백성들은 어쩌라고 이런 짓을 벌였단 말이냐!"


"무고한 백성이라..."


창현은 대답하는 대신 '무고한 백성'이란 말을 입안에서 두어 번 굴렸다. 그리고 고개를 외로 꼬았다.


노예를 개처럼 부리는 인간들이 무고한 백성이라면, 그들 머리 꼭대기 위에 있는 정택이나 재학 같은 인간은 성인군자쯤 된단 말인가. 이 세상에서 그렇게 생각하는 건 오직 괴물 놈들과 군인 녀석들뿐일 게다.


대양 여기저기에서 피오르는 연기와 불길은 노예들이 직접 행동하기 시작했다는 신호였다. 며칠에 걸쳐 희남과 그 친구들이 전한 소식 가운데는 '탈출하기 전에 꼭 불을 놓을 것'이란 지령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과연 얼마나 그 지시를 잘 따라줄지 미지수였으나 이걸로 증명됐다. 대양을 탈출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의지는 그의 생각보다 훨씬 크다는 것이.


"이런 식으로 네 녀석이 얼마나 버티는지 두고 보겠다! 네놈이 얼마나 강하던, 무슨 계획을 세웠든 다 필요 없다! 동료들이 돌아온다면, 네놈은 끝장이야!"


군인은 악에 받쳐 소리쳤다. 자욱한 연기가 마침내 그들이 서 있는 성곽 위쪽에까지 밀려들고 있었다. 사방이 연기로 가득했고 눈과 코가 따끔따끔 매웠다. 창현은 더 시간을 끌면 안 되겠다 싶어 얼른 창을 들어 올렸다. 아무리 날고 기는 재주가 있어도 쏟아지는 화염과 연기에는 방법이 없다.


삐이이익-! 삐이이익-!


그가 잔인한 마음을 먹고 있을 때, 안개처럼 드리운 연기 바깥에서 또 다른 호각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이번엔 창현의 뒤편이었다. 그의 표정이 굳어지는 것과 반대로 앞에서 대치하고 있던 군인들의 표정은 활기를 띠었다. 드디어 지원군이 도착한 것이다. 아까 전에 울린 호각 소리를 듣고 근처의 다른 조가 움직인 모양이었다. 이 이상 말은 필요 없었다. 창현은 고민하지 않고 앞으로 창을 내질렀다.


푹!


어둠마저 꿰뚫어 보는 그의 눈에도 연기 속은 불투명 하기만 했다. 그러나 창으로 전해지는 이 아찔한 감각은 상대의 목숨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그에게 말해주었다.


'아아-!'


그는 속으로 탄식했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생물의 펄떡거림이 전달하는 기묘한 흥분이, 이 순간 마치 사정하는 것과 같은 쾌락이 되어 그의 뇌를 후벼 팠다. 심장이 더욱 빠르고 격하게 뛰었다. 뒷목을 부르르 떨며 창현은 희열했다. 하지만 그 느낌은 찰나 간에 지나가 버렸다.


대신 이번엔 아교처럼 끈적한 욕망이 그의 마음속에 자리 잡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생명의 숨통을 가르고 파괴하려는 본능, 진정한 살의 그 자체였다.


"아아-!"


결국 탄식은 소리가 되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손에 쥔 창에서 더 이상 그를 자극하는 떨림이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타는 듯한 갈증이 엄습했다. 온 신경이 한 점에 쏠린 기분. 창현의 붉은 눈이 탁한 연기 속에서도 확연히 보일 만큼 짙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크윽!"


그는 창을 빼 들고 한 마리 야수처럼 앞으로 돌진해 나갔다. 군인들을 향해서였다.


"마,막아!"


"으악!"


자욱한 연기를 뚫고 나타난 창현의 모습은 인간이라기엔 너무나 광폭하고 이질적으로 보였다. 조장까지 잃은 군인들은 그야말로 속수무책, 순식간에 네 구의 시체로 변해버렸다.


"으아아아!"


창현은 한줄기 긴 외침을 내뱉고 나서 다시 연기 속으로 뛰어들어 갔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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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23. 갈망하는 자만이 얻을 수 있다(2) 22.01.18 123 5 12쪽
84 23. 갈망하는 자만이 얻을 수 있다(1) 22.01.10 126 7 11쪽
83 22. 방황하는 분노(2) +4 22.01.03 137 6 14쪽
82 22. 방황하는 분노(1) +2 21.12.27 146 8 14쪽
81 21. 피와 욕망(3) +2 21.12.20 177 8 15쪽
80 21. 피와 욕망(2) +2 21.12.12 143 6 14쪽
79 21. 피와 욕망(1) +3 21.12.05 154 6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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