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변이變異(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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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었던 괴물의 외침. 그 절규 속엔 가슴 한켠을 서늘하게 무언가가 숨어 있었다.
"으으으...! 보르항이시여...!"
군인들은 치를 떨며 숨을 죽였다. 평소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신을 찾았다. 아무리 천하에 무서울 게 없다는 그들이지만, 괴물을 실제로 마주하고서는 일반인과 별반 차이가 없었던 것이다.
대양의 역사가 시작되고 난 후, 이야기로만 전해 들었지 실제로 괴물을 접한 사람은 거의 없었던 탓이다. 어찌 보면 그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해야 옳을 터였다.
군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창현의 울부짖음은 이제 거의 잦아들어 작은 흐느낌으로만 들렸다. 크게 숨을 들이켠 후에는 그마저도 괜찮아졌다.
신기하리만치 빠르게 감정이 정리되고 있었다. 거짓말처럼 깨끗해진 머릿속에서 그는 한가지 생각을 떠올렸다.
'결국 난 이렇게 되리란 걸 알고 있었어!'
그랬다. 사실 어느 순간부터 알 수 없는 힘이 솟구치고, 마음속에 충족되지 않는 갈증이 생겨날 때부터, 그는 오늘의 일을 예상했는지도 몰랐다. 물론 확신할 수는 없다. 그러나 한백이 보여준 짧은 영상만으로 지금의 모든 상황을 납득하고 이해할 수 있던 이유는 달리 그것밖에 없지 않겠는가.
단지 이해한다는 것과 그것을 온전히 받아들인다는 뜻은 다른 문제일 것이다. 때가 되면 계절이 바뀌는 것처럼, 창현은 이 상황이 왠지 모르게 여상스러웠다. 그래서 더욱 혼란스러웠다.
그것은 몸에 주입된 엑셀레이션 밤이 뇌 변이를 일으켜 마침내 사고회로에도 영향을 주기 시작했다는 의미였지만, 창현이 거기까지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그것도 아니라면, 지금의 상황을 아직 실감하지 못하는 것일지도...
잠깐 사이에 또다시 한 무리의 사람이 달려왔다. 근처에 있던 다른 조의 군인들이었다. 맨 앞에서 달려온 자가 대뜸 물었다.
"뭐야! 어떻게 된 거야?"
직급이 더 높았는지 먼저 와 있던 군인들은 그에게 존칭을 붙였다.
"조장님... 저기...!"
합류한 군인들도 창현을 보고 얼어붙긴 마찬가지였다. 신화 속에서 금방 튀어나온 듯한 모습. 성벽 위에 우뚝 선 그의 존재는 지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모두에게 공포를 심어줄 만큼 압도적이었다.
창현이 상념에서 깨어나 고개를 돌렸다. 마른침을 삼키며 관찰하던 군인들은 붉게 빛나는 그의 눈을 보고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고착된 상황은 창현이 허리를 굽혀 창을 집어들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제야 군인들도 정신을 차린 모양이다. 안절부절못하던 조장이 다급히 소리쳤다.
"젠장! 다들 조심해라! 먼저 공격하지 말고 방어에 집중해!"
"합!"
그 목소리에 반응한 십여 명의 군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무기를 추켜올렸다. 그리고 어깨를 붙여 서서 밀집대형을 만들었다. 다섯 명씩 두 줄을 이루어 물샐틈없는 인의 장막을 형성한 것이다. 잔뜩 굳어있을 때와 달리 민첩한 움직임들이었다.
기실 조장의 명령은 누구라도 고개를 끄덕일 만큼 합리적인 거였다. 그들의 대응 또한 훌륭했다. 그들은 여러 동료와 함께하는 싸움에 익숙했으며, 그것에 초점을 맞추어 훈련받아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창현이 가진 힘을 조금이나마 알았다면, 과연 그런 명령을 내렸을까. 그것은 끝내 풀지 못할 의문이다.
'놈들을 죽여!'
창현의 머릿속에서 누군가 그렇게 외쳤다. 아니다. 알지 못하는 누군가가 하는 말이 아니다. 바로 그 자신이 하는 말이다. 거기엔 단순한 충동 따위와 비교할 수 없는 힘을 내포하고 있었다.
창현은 스스로 해야 할 바를 명확히 인식했다. 그것은 완성되지 못한 약속. 아직 이루지 못한 그의 사명이었고, 머릿속의 외침은 그것과 부합하는 거였다.
'인간 같지도 않은 저놈들을 죽이고, 복수해야 해! 그리고 사람들을 구해!'
또다시 머릿속의 목소리가 외친다. 입에서 뜨거운 입김이 뿜어져 나왔다. 다음 순간, 은색으로 빛나는 창을 앞세우고 창현은 군인들에게 돌격해 들어갔다. 겨우 걸쳐져 있던 옷자락이 요란스레 펄럭이다가 이내 찢겨 날아간다.
"조심해!"
누군가 소리쳤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군인들은 눈 한 번 깜빡할 사이에 코앞으로 나타난 창현을 보고 크게 놀랐다.
"헉!"
놀란 것과 별개로 그들의 행동은 거침이 없었다. 앞줄에 선 군인들이 동시에 창을 내밀었는데, 한명 한명의 움직임이 자로 잰 듯 척척 맞아떨어졌다.
서로에게 유리함도 불리함도 없는 거리. 창현은 쏘아져 오는 다섯 개의 창에 맞서 횡으로 단창을 휘둘렀다. 커진 몸집 탓에 장난감 비슷하게 보이는 단창이 가볍게 허공을 날았다. 그러나 바람을 가르는 그 소리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따다닥!
부러진 창의 파편들이 눈앞을 어지럽혔다. 한순간에 다섯 개의 창을 모조리 박살 낸 창현은, 다시금 창을 끌어당기며 이번엔 반대편으로 휘둘렀다.
퍽퍽-!
조각난, 아니 그것보다 으깨졌다고 표현해야 마땅한 살점들이 튀어 올랐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단련된 군인들의 육신도 창현의 괴력 앞에선 무용지물인 것이다.
후두두둑-.
비처럼 쏟아져 내리는 피가 창현의 얼굴에도 튀었다. 선연한 피 때문일까. 아니면 코를 자극하는 짙은 피 냄새 때문일까. 혈관 안에 피가 더욱 빨리 도는 것 같았다. 그리고... 군침이 흐른다.
창현은 송곳니 사이로 뚝뚝 떨어지는 묽은 침을 닦아냈다. 의아한 눈으로 앞을 보는데, 정면에 쓰러져 있는 다섯 구의 시체가 확대되어 온다. 그것을 보는 순간 더욱 급격한 허기가 몰아쳤다.
'이거였던가!'
손만 뻗으면... 먹는 건 일도 아니리라. 미간이 참혹하게 구겨졌다. 시체들은 창현의 일격에 맞아 모조리 머리가 부서진 상태였다. 생리적 혐오감이 들법 하지만 그에겐 오히려 맛있는 성찬처럼 보였다.
'살을 먹어라! 피를 마셔라! 너의 존재 이유는 바로 그것이고, 그럼으로써 네 존재는 완성된다!'
예의 그 목소리가 다시금 그를 부추겼다. 그 생각이 들자 더욱 거센 갈증과 배고픔이 위장을 쥐어짰다. 힘으로 충만했던 몸이 온통 공허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했다.
등을 돌린 채 저만치 도망가는 나머지 군인들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창현은 무의식적으로 시체를 향해 손을 뻗다가 화들짝 놀랐다.
'난 지금... 뭐하는 거지?'
설마 '이것'을 먹을 생각이었단 말인가? 물론 누구라도 먹지 않으면 살 수가 없다는 만고의 진리는 뼈저리게 겪어서 알고 있다. 손으로 이마를 짚자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
'먹어라! 마셔라! 배를 채워라!'
악마의 속삭임처럼 끊임없이 그를 충동질한다. 그러나 같은 동족을 먹는 행위는 지금껏 그를 살게 해 온 신념과 가치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일이다. 배고픔. 혹은 먹는 것과 관련된 욕망. 이것은 개와 돼지에게도 있지 않은가?
평생을 살아가며 충족해야 할 욕구라지만 그것에 종속되어선 안 된다. 그렇다면 인간은 개돼지와 다를 바가 없어지는 것이다.
창현은 예전 진과 싸울 때 인간에 관해 피력한 적이 있었다. 인간을 얕본 괴물에게 통쾌한 일격을 선사한 적이 있었다. 상대적 약자였던 그가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짐승에게 없는 인간만의 자존심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아니야! 인간은 배고픔만으로 살진 않아! 난 그러지 않겠어!'
창현은 머릿속의 목소리에 대항해 그렇게 소리쳤다. 군인들을 죽인다는 것과 먹는다는 것에는 엄연한 차이가 있다. 괴물이 되었다는 현실은 어쩔 수 없어도, 그래도 포기할 수 없는 가치가 있지는 않을까.
머릿속의 목소리. 자신이 가진 무의식의 욕망에 휘둘려 줄 생각은 눈곱만치도 없다!
불현듯 에첵의 말이 뇌리를 스쳤다. 자신의 길을 가라고 했던가. 괴물이 되었다고 해서 옳다구나 인간을 먹어치우며 정말 괴물처럼 사는 게 자신의 길일까.
창현은 고개를 저었다. 한백이 말한 인간의 마음이란 걸 정확히 정의하진 못하겠다. 그러나 적어도, 그게 인간의 살점을 뜯으며 만들어지는 건 아닐 거였다. 무엇보다, 그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러고 싶지 않다.
변이는 육신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었으나, 그는 끝내 그것을 거부했다.
"퉷!"
마치 더러운 오물을 대하듯 침을 내뱉고 시체를 뛰어넘었다. 그리고 도망치는 군인들을 쫓아갔다.
놈들은 벌써 성벽을 내려가 골목길로 들어서는 중이었다. 창현은 그들을 일별하고 망설임 없이 성벽에서 뛰어내렸다.
쿵!
인간이라면 단번에 다리가 부러졌을 테지만, 어쩌면 죽기까지 했을 높이였는데도 태연스럽게 일어났다. 군인들은 어느새 골목으로 숨었는지 시야에 잡히지 않았다. 그래도 창현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들의 기척을 뒤쫓았다.
성벽 밑엔 연기가 더욱 심하게 깔려 있었다. 호흡하기도 점점 힘들어졌다. 그때쯤 터질 듯 부풀어 올랐던 힘이 슬금슬금 빠져나갔다. 허기 때문일까 했지만, 실상은 다른 이유가 있었다.
밤의 괴물에게 낮은 어울리지 않는다. 페이트는 태양에 소멸할 만큼 나약하고, 야힌이라도 활동하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창현 그 자신은 모르지만 1세대 야힌에게는 태양광에 대한 면역이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완전한 면역은 아니라, 온전한 몸 상태는 밤이 되어야 돌아오는 것이다. 창현은 피곤함을 느꼈지만 임무를 완수하기 전에는 쉴 수 없었다.
'녀석, 잘하고 있겠지?'
임무를 생각하자 명모가 떠올랐다. 성격도 그렇고 실력도 그렇고, 아마도 그는 맡은 일을 잘해낼 게 분명했다.
그러나 이 일이 끝난 이후, 명모를 다시 볼 수 있을까? 자문해 보지만 도저히 그럴 자신이 없었다. 괴물이 되어버린 친구를 본다면... 스스로에게도, 그 녀석에게도 저주 같은 만남이 될 테니까 말이다.
창현은 금세 침울해졌지만 달리는 다리에 힘을 풀진 않았다. 마침 저 앞에 도망치는 군인의 뒷등이 보였다. 반사적으로 창을 날렸다.
쒜에에엑!
날렸다기보다는 발사했다는 말이 어울릴 만큼, 창은 빛살처럼 뻗어 나가 군인의 등을 관통했다. 그의 등을 빠져나간 창은 어느 건물의 외벽에 박혀 들었다.
팍!
돌벽과 부딪히는 소리가 생경하다. 군인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즉사했다. 빠르게 지나치며 한번 쳐다본 것만으로 창현은 그것을 알 수 있었다. 돌벽에 단단히 꽂혀 있던 창을 뽑아들고 다시 추격을 이어나갔다.
모여봤자 의미가 없다고 느꼈는지, 군인들은 뿔뿔이 흩어지는 것을 택했다. 사실 이게 옳은 선택이었고, 처음부터 그렇게 했다면 살 확률이 더 높았을 거였지만 이미 때는 늦어버렸다. 결국 그들은 제각각 사냥당하는 꼴로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창현이야 본래 사냥꾼이라 무언갈 추격하는 일엔 능숙했다. 그는 침착하게 몸을 움직여 나갔다.
멀지 않은 곳에서 또 한 명을 죽인 후, 창현은 길이 꺾어지는 어느 골목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골목 사이에서 기척을 감지해 낸 것이다. 놈은 도망가는 대신 싸움을 택한 모양이었다. 창현은 모르는 척 그곳에 발을 들이밀었다.
"죽엇!"
쉬이익!
기다렸다는듯 두툼한 칼날이 목을 향해 짓쳐왔다. 훈련받은 군인인 만큼 간결하고 빠른 칼질이었으나 창현에겐 아무런 소용 없는 몸짓일 뿐이었다. 창현은 뒤로 물러서거나 피하는 대신 오히려 내던지듯 앞으로 몸을 기울였다.
군인의 놀란 얼굴이 보였다. 완벽한 기습이라고 생각했으니 놀라는 것이 당연하다. 칼은 창현의 등 뒤 허공만을 베고 지나갔다. 군인의 눈에 어둠이 깃들었다.
월등히 큰 체구로 바짝 달려드니 마치 포옹하는 듯한 자세가 되었다. 포옹이라 함은 따뜻한 마음을 나누는 대표적인 행위라고 할만하지만, 이 상황에서는 예외로 쳐야 할 거였다.
뿌드득!
목과 늑골이 동시에 복합골절을 일으키는 포옹 따위가 따뜻할 리 없기 때문이다. 길에 혀를 빼 문 시체를 내던져버리고 창현은 다른 먹잇감을 찾아 나섰다. 맘속에서 치솟아 오르는 살기와 허기를 갈무리한 그의 붉은 눈은 이미 야수의 그것을 닮아 있었다.
자욱한 연기는 달아나는 군인들의 모습은 감춰주었으나 기척만큼은 가려주지 못했다. 세 명을 잡았으니 이제 남은 것은 두 명. 그 소란이 있었는데도 다른 군인들이 오지 않았다는 것은, 달아난 두 명이 이 근방에 남은 전부라는 뜻일 테다.
서로 다른 방향으로 멀어져가는 놈들의 기척이 감지되었다. 창현은 길게 고민하지 않고 가까운 한 곳을 향해 뛰었다.
"으악! 오, 오지 마! 이 괴물딱지야!"
수시로 뒤를 돌아보며 도망치던 그는 금방 따라잡혔다. 무기마저 내팽개친 모양인지 빈손에, 얼굴은 공포로 파랗게 질려있었다. 사실 그가 딱히 심약하다기보단, 연기를 뚫고 뛰쳐나온 창현은 누가 보더라도 두려울 만한 거였다. 그는 오줌을 지리며 바닥을 기다가 그대로 머리를 밟혔다.
잘익은 수박처럼 머리가 박살 난 군인을 뒤로하고 창현은 다시 몸을 날렸다. 입맛이 쓰게 올라오는 것은 단지 살인을 했기 때문일까.
점점 짙어지는 연기가 그의 모습을 효과적으로 가려주는 역할을 했다. 그것은 차라리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누군가의 눈에 띄어서 좋을 게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성벽에 인접한 외곽이라 그런지, 아니면 대양의 큰 소요 때문인지 몰라도 근처에 다른 사람들의 기척은 없었다. 창현은 빠르게, 또 조심하면서 마지막 남은 군인의 뒤를 쫓아 달렸다.
놈의 뒤를 거의 따라잡았을 무렵, 창현은 근처로 다가오는 또 하나의 기척을 감지했다.
'또 한 놈이...?'
길잃은 다른 군인 같았다. 신경 쓸 것은 없다. 어차피 죽여버리면 되니까 말이다. 오히려 돌아다니지 않아서 더욱 편하지 않은가.
창현은 다가오는 녀석도 죽일 생각을 하면서 더욱 빠르게 앞으로 나아갔다. 얼마 가지 않아 도망치는 군인의 뒷모습이 보였다.
'일단 이놈부터!'
그의 손에서 굉음을 내며 또다시 창이 날았다. 꽤 먼 거리였음에도 창은 은색 선을 그리며 정확히 군인의 등을 찌르고 앞으로 빠져나왔다. 그러고도 힘이 남아, 이전처럼 어느 건물 외벽에 박혀 들었다. 사람이 일렬로 서있다면 몇 명이라도 족히 관통할만한 힘이었다.
즉사임은 보지 않아도 뻔하다. 그때 이쪽으로 다가오던 기척이 더욱 강하게 느껴졌다. 아마 근처까지 와 있는듯했다. 어차피 죽을 운명, 창현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창을 회수하기 위해 그가 막 발을 내디뎠을 때, 연기 속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그를 불렀다.
"창현아!"
그것은 명모의 목소리였다. 군인들을 피해 도망치던 명모가 어느덧 창현의 근처로 와 있었던 것이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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