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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랜드 킴 님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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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랜드킴
작품등록일 :
2021.05.13 21:41
최근연재일 :
2022.11.17 2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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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0,477

작성
21.05.16 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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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9쪽

2. 과거의 유산遺産(4)

DUMMY

기계들이 가득 들어찬 방안 한가운데 창현이 누워있었다. 벌거벗은 채 맥없이 원탁 위에 올려진 모습이 마치 도축된 고깃덩이를 연상케 했다. 한백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 옆에 조용히 서 있었다.


그녀가 허공에 손을 휘젓자 원탁 가장자리가 열리고 몇 개의 관절로 이루어진 기계 팔이 튀어나왔다. 양옆으로 다섯 개씩 총 열 개의 팔이 솟아올랐는데 손에 해당하는 끝부분의 모양들이 제각각 모두 달랐다.


작은 칼날과 집게발처럼 생긴 오퍼레이션 모듈이었다. 섬뜩한 빛을 내뿜는 수술용 메스와 크기가 서로 다른 칼날들, 용도 불명의 송곳과 바늘, 가위 등 전부 시퍼렇게 날이 서 있었다.


한백이 다시 손을 휘젓자 천장이 열리며 그곳에서도 기계 팔과 몇 개의 호스, 케이블 등속이 나타났다.


이어진 것은 끔찍한 수술이었다. 송곳 같은 주삿바늘들이 온몸 여기저기를 찌르고 관을 박아 넣었다. 입과 코에는 가느다란 호스가 물렸다. 그곳으로 투명한 액체가 들어가기도 하고, 나오기도 했다.


작은 수정체가 달린 모듈에선 레이저가 뿜어져 나왔다. 곧 척수의 위쪽, 뒷머리의 두개골이 절개되고 그 사이로 정연한 움직임의 다른 모듈들이 들락날락했다.


인간을 해체하는 잔혹한 광경이었다. 그럼에도 당사자인 창현은 의식을 차리지 못했다. 피가 튀고, 기계들은 계속 움직였다. 국부조명과 바이탈 메터의 디스플레이에서 번지는 파르스름한 빛은 어두운 방 안을 조심스레 밝히고 있었다.


한백은 이 공간 안에서 외따로 떨어진 섬처럼 홀로 무감동했다. 온갖 약품과 피 냄새가 뒤섞여 코를 찌르고 섬찟섬찟한 기계음, 그리고 칼날과 살갗이 부딪히는 파육음이 신경질적으로 귀를 자극하는데도 그러했다.


이 순간 한백은 그녀 스스로가 소개한 대로, 확실한 이곳의 관리인이자 공간을 장악한 지배자였다.


* * *


예전, 마을의 영역 서쪽 산기슭을 감아 흐르는 꽤 깊은 강에서 고기를 잡다가 물살에 휘말린 적이 있었다. 숨이 콱 막히고, 위아래를 따로 구분할 수가 없이 빙글빙글 세상이 돌고, 팔다리는 제멋대로 움직였다. 창현은 그때의 아찔했던 기억이 떠오르며 동시에 정신이 들었다.


"컥!"


하얀 광구가 눈앞에서 정신없이 왔다 갔다 했다. 눈꺼풀 안쪽에서 번쩍번쩍 빛이 터지며 쉴 새 없이 동공을 찔렀다. 마치 예전 물에 빠졌을 때처럼 숨이 탁 막혀왔다. 그리고 두개골 내부를 뚫고 칼로 직접 헤집는 것 같은 통증이 엄습했다.


"크으으윽!"


지독한 통증에 고개를 처박고 팔로 머리를 감싸 쥔다. 아니다. 이것은 생각뿐이다. 머릿속을 후벼 파는 그 감각에, 팔다리가 인형처럼 제각각 펼쳐져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조차 그는 인식하지 못했다.


사실 잔뜩 억눌린 비명이 입 밖으로 터져 나온 것도 알지 못했다. 모든 인식의 경계를 넘어 지금 그를 지배하는 단 하나는 머릿속에 나무처럼 단단히 뿌리를 틀어박은 고통뿐이었다.


어떤 생각을 해도, 어떤 인내를 해도 통증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겨 낼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오직 죽음, 이 고통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죽음뿐이라는 생각이 치밀었다.


몇 번의 혼절, 계속되는 몸부림 사이 얼마의 시간이 흘러갔는지 몰랐다. 아득한 의식 속에서 시간관념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방금 스쳐 지나간 생각이 어제의 생각이었는지 혹은 일주일 전의 생각이었는지 구별을 할 수가 없었다.


가닥가닥 끊어져 연속되지 않는 생각과 기억이 민들레 홀씨처럼 망상의 하늘을 떠돌았다. 몸과, 마음과, 생각 모든 것이 부유하며 떠올랐다가, 또 흐물흐물 녹아 사그라들었다. 고통이 옛날의 강물처럼 그를 집어삼켜 바닥으로 내동댕이치고, 다시 수면 위로 뱉어냈다.


지겹게 뒤채이길 얼마간이던가. 거짓말처럼 고통이 물러가고 명료한 정신이 대신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그리고 대자로 누워 어두운 천장을 바라보고 있는 그 자신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난 살아있는 건가...`


맑은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 `왜`는 그다지 궁금하지 않았다.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어차피 벌어진 사실은 과거가 되었으며 과거는 이미 지나갔기에 그러했다.


억울하지 않은 게 아니다. 분하지 않은 게 아니었다. 당장에라도 이 고통을 준 한백에게 복수하고 싶었다. 그러나 창현은 자신의 임무를 생각했다. 고통 속에 몸부림치며 죽음을 떠올렸을 때, 그가 버틸 수 있었던 단 한 가지 이유는 바로 마을이었다. 그 안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사람들의 얼굴이었다.


마을의 존립이 걸린 중한 임무에 사심이 끼어든 것 자체가 문제라면 문제였다. 따지고 보면 스스로의 욕심 때문에 여기까지 흘러와 이 꼴이 된 것이다. 아니다. 그것도 이미 과거가 되지 않았는가. 누구를, 무엇을 탓하겠는가.


`하지만...`


어떤 생각을 해도, 어떤 마음을 먹어도 지금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의 회오리가 가슴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창현은 입술을 질끈 깨물다가 자신의 몸에 생각이 미쳤다.


팔을 들어 올렸다. 근육통처럼 아릿한 통증이 올라왔지만 잘 움직여 주었다. 발목과 발가락에 힘을 주니 역시 무리 없이 돌아갔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정확히는 몰랐지만, 이미 마을로 돌아가기로 했던 기한은 한참이나 지나있을 터였다. 아마 지금쯤은 모두 자신이 죽었다고 생각할 게다.


`지금쯤 북쪽 산에 말뚝이 박혔을지도 모르겠군.`


이름이 새겨진 작은 참나무 말뚝은 산 자가 죽은 자를 보내며 가지는 마지막 의무였다. 사람들이 다 같이 모여 망자를 위한 묵념과 곡을 하는 것이 이가촌 장례의 전부. 그래서 마을 북쪽 끄트머리 작은 산언저리에는 수많은 말뚝이 꽂혀 있다.


그들은 시체가 없어도 떠나가 돌아오지 않는 자에게 주저 없이 말뚝을 꽂았다. 기다려서 돌아온 적이 없었던 것이다. 시체를 찾지도 않는다. 찾아서 발견한 적도 없거니와 막상 있다 하더라도 어차피 보시(布施)할 것이기 때문에 그랬다.


그리고 잊었다. 썩어가는 말뚝 아래 새겨진 이름만이 생전의 그를 증명할 따름이지만, 시간이 지나며 그것마저 퇴락하고 그의 기억 역시 희미해져 간다.


창현은 입술을 깨물었다. 쓸데없는 감상이라고 생각했다. 말뚝이 박혔다면 돌아가 직접 뽑아버리면 그만이다. 존재를 증명하는 것은 말뚝에 새겨진 이름 따위가 아니라 현실의 그 자신이 아니던가. 말뚝이 열 개가 꽂히든 백 개가 꽂히든 상관없는 일이다.


`돌아갈 테니까!`


일어나서 입구를 향해 걸었다. 처음 들어왔던 그 토굴이었다. 기절해있던 사이 다시 지상으로 누군가 옮겨놓았던 것이다. 창현은 빠드득 소리가 나도록 이를 사리 물었다. 깊게 고민하지 않아도 누군지는 뻔했다.


새벽이라 하늘에 별은 많이 보이지 않았다. 멀리서 파란 빛이 희붐하게 번져 오는 느낌이었다. 그 위로 불길한 새벽 샛별이 유난스럽게 반짝였다. 창현 그 빛을 보며 침을 탁 뱉었다. 그리고 자리에 주저앉아 아침을 기다렸다.


한번 왔던 길이라, 날이 밝은 뒤 내려가는 일은 그리 까다롭지 않았다. 창현은 흐드러지는 붉은 낙엽을 헤치며 걸었다. 이곳으로 올 적에는 쨍한 푸른빛이 온 산을 휘감고 있었지만, 지금은 듬성듬성한 나뭇가지 사이로 을씨년스러운 바람만이 무리 지어 몰려다녔다.


길을 가면서도 창현은 이게 어떻게 된 조화인지 한참 만에야 깨달을 수 있었다. 적어도 11월은 되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가 이곳에 온 지 적어도 석 달은 지났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새벽의 그 선뜻한 공기는 단지 새벽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눈에 한 번 익었던 길이고 내려가는 것뿐인지라 태양이 하늘 가장 높은 곳에 이르렀을 때에는 상당한 거리를 이동해 올 수 있었다. 빠르게 달려왔지만 이상하게 피로하거나 지치지 않았다.


금세 산을 벗어나 이전에 지나쳐 왔던 개울가까지 왔다. 고개를 들자 높고 쾌청한 하늘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음산한 푸른 빛의 새벽과 그 위에서 불안하게 빛나던 새벽 별은 꿈결처럼 멀어져 버리고 이제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같은 하늘이라 믿을 수 없을 만큼 극단적인 그 모습에 창현은 잠시 눈을 깜빡거렸다.


그는 갈증을 느끼고 천천히 개울로 다가갔다. 차가운 물에 손을 담그자 정신이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잔잔히 흐르는 개울물을 양손에 담아 들고 입으로 가져가는데, 그때 보았다.


물 위에 비친 두 개의 붉은 눈동자. 지난 새벽의 별빛보다 더욱 불길하게 번뜩이는 자신의 붉은 두 눈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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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22. 방황하는 분노(1) +2 21.12.27 146 8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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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21. 피와 욕망(2) +2 21.12.12 145 6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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