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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랜드 킴 님의 서재입니다.

인간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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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랜드킴
작품등록일 :
2021.05.13 21:41
최근연재일 :
2022.11.17 22:25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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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3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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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0,477

작성
21.05.14 2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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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2. 과거의 유산遺産(2)

DUMMY

"저기..."


창현은 미처 다가가진 못하고 곁눈질로 여인을 지켜보다가 결국 힘들게 한마디를 꺼냈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사실 말을 하는 것이 오히려 더 이상할 거였다.


흡사 시체처럼 호흡에 의한 몸의 기복마저 없는 저 육체가, 그에겐 도저히 살아있는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쪽으로 생각이 기울어갈 즈음에 때마침 그녀의 가슴이 미미하게 융기하기 시작했다.


무기질에 영혼이 들어가면 저런 모습이겠다 싶을 정도로 생경한 모습이었다. 죽었던 사람이 되살아나는 모습 같아서 순간 창현은 짧게 숨을 몰아쉬었다. 숨 몇 모금 들이키는 짧은 시간이 지나고, 창현은 어느 사이엔가 자신과 눈을 마주치고 있는 그녀를 인식했다.


"..."


목소리의 주인이 이런 모습이었던가. 입 밖으로 거의 나왔던 말도 당황해서 도로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시선을 피할 수도 없었다. 창현과 그녀의 시선 사이에 어떠한 마력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었다.


그녀가 미소를 지었다. 꽃이 피어 나는 듯했다. 그럴 리 없겠지만 향기마저 맡아지는 것 같았다. 그녀는 일어나 유리관 안쪽의 한 면을 손으로 짚었다. 곧 그 면을 기준으로 유리관에 종으로 선이 생겨나고 좌우로 절개되었다. 그렇게 열린 틈 사이로 그녀가 걸어 나왔다.


"안녕하세요? 정식으로 소개하죠. 저는..."


"인사는 일단 나중에 하고 일단 옷이라도 좀 입으세요. 이건 도저히..."


끝에 지독하다는 말은 차마 하지 못했다. 어떻게 그러겠는가. 이런 아름다움을 앞에 두고 자신의 생각을 온전히 말로 다 표현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사람이 아닐 테다.


창현은 말끝을 흐리며 황급히 고개를 돌렸으나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그녀의 알몸, 모든 은밀한 치부까지 모조리 머릿속에 들어와 박혀버린 것이다.


"아..! 응대 프로세스가 지금 엉망이라 실례했군요.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그녀는 자신의 위아래를 살피더니 문제를 파악한 듯 다시 창현에게 양해를 구했다.


"그럼 잠시만 더 기다려 주시겠어요?"


창현은 아예 몸까지 돌려버린 채 쳐다보지도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잠시 어딘가로 들어가더니 도톰한 흰 가운을 걸치고 다시 나타났다.


"이제 되었으니 돌아보세요."


약간의 웃음기를 머금은 목소리였다. 그녀가 다시 돌아올 때 분명 인기척을 내었지만, 그때까지도 고집스럽게 시선을 피하는 창현이 재미있는 모양이었다. 창현은 그 말을 듣고서야 그녀를 바라보았다.


허리 아래에서 찰랑거리는 길고 풍성한 머릿결. 먹물을 뿌려놓은 듯 까만 머리 색에 그것과 다르지 않은 눈동자. 피부는 잡티 하나 없이 새하얗게 빛났다. 두꺼운 가운으로도 그녀의 탄력적인 몸매를 전부 가리기엔 한참이나 부족했다. 창현은 약간 멍청해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저는 이창현(李蒼玄)이라고 합니다. 서쪽에서부터 아홉 날을 걸어 이곳으로 왔습니다. 그곳에 저희 마을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곳은 어디입니까?"


그녀는 창현의 질문에 조용히 미소 짓더니 작고 도톰한 입술을 움직여 말을 꺼냈다.


"이곳은 한반도에 있는 태백산이란 곳입니다. 창현씨 당신은 사용하는 언어도 그렇고 외모의 특색을 봐도 한국인이 분명한데 잘 모르시는군요?"


이 땅은 동아시아 대륙에 붙어있는 반도(半島)로, 예로부터 한반도라 이름했다는 설명이었다. 이 한반도 땅 위에는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의 국가가 있었으며, 크기는 작으나 대단한 국력을 안으로 감춘 세계적 강국이었다는 설명도 덧붙여졌다.


창현도 과거 이 땅 위에 존재했던 나라의 이름이 대한민국이라는 말을 어른들로부터 이야기를 들어 알고 있었다. 하지만 태백산은 금시초문이었다. 사실 전해지는 이야기로 들은 것 외에 다른 지명(地名)에 대해선 문외한이라고 봐야 옳기 때문에 그다지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창현은 이 대답이 만족스럽지 않았다.


"그런데.. 당신은 누군데 여기에 있는 겁니까? 혹시 사람입니까?"


창현은 말을 하고 금방 후회했다. 자신이 생각해도 너무 멍청한 말이기 때문이었다. 창현은 그녀가 화를 낼 거라고 생각했다. 사람이 아니면 대체 뭐겠는가?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예상과 달랐다.


"그러게 제가 말했잖아요. 저는 안드로이드 시스템이고, 이름은 한백이라고요. 당연히 사람이 아니죠."


뭔가 재밌는 말을 들은 것처럼 옅은 웃음까지 띠며 조곤조곤 이야기했다. 자신은 사람이 아니라고.


"사람이 아니라면 뭡니까? 아니 그전에 안드로이드라는 건..?"


창현은 어안이 벙벙해져서 다시 바보처럼 되물었다.


"저는 이 뉴클리어 쉘터의 관리자인 통합 시스템이에요. 이 공간의 모든 제어를 제가 담당하고 있죠. 몸은 안드로이드 공학으로 만들어져 제가 필요할 때 동기화해서 쓰고 있는 거고요. 물론 자주 그렇게 하는 건 아니고, 지금처럼 특별한 경우에만 그렇게 하죠."


창현은 습관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다가 하나의 생각이 번개처럼 뇌리에 스치는 것을 느꼈다. 대재앙 이전 고대의 인간은 허공을 날고, 수명을 초월해 나이를 먹지 않고, 그 능력이 하늘에 닿아 있다는 이야기. 기계라는 걸 만들어 세상을 이롭게 바꾸고 이젠 땅에 남아있지 않은 미지(未知)를 찾아 하늘 밖으로 여행을 떠나는 인간.


위대한 인간!


촌장님을 조르면 감질나게 한 구절씩 흘러나오는 옛이야기에서, 인간은 말 그대로 신화적인 존재였다. 도저히 자신과 똑같은 인간이라고 생각되지 않는 그 무한한 지혜와 능력들. 지구 유일의 지성을 가지고 다른 모든 존재를 발아래 두는 위엄과 존귀한 그 생명의 가치. 이 여자는 혹시 옛이야기로만 듣던 고대인과 어떤 연관이 있지 않을까.


"당신은... 혹시 고대의 사람입니까?"


그녀, 한백은 투명한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곧 맑은 웃음을 터트렸다.


"제 말을 하나도 이해 못 하셨군요. 많은 설명이 필요하겠어요. 그래도 전보단 낫군요."


"무슨 말입니까?"


그녀의 눈이 광채를 발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잠시 생각을 정리하더니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지금은 A.D(Anno Domini) 2675년, A.W(After Cold Wave) 535년이니 시간이 많이 지났네요. 당신이 제 말을 이해 못 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에요."


거기까지 말한 한백이 창현을 보니 그저 눈만 껌뻑거리고 있었다. 한백이 작게 한숨을 내쉬고 다시 말했다.


"그러니까 눈이 내리고 세상이 얼어붙기 시작한 지 오백 년이 넘었다는 말이에요. 이곳은 세상이 얼기 전, 아직 인간이 건재할 때 지어진 일종의 대피소구요. 그리고 다시 말하지만 전 인간이 아니에요. 쉽게 설명하자면... 인간을 본떠 만든 기계라고 해두죠."


설명을 듣고 나서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대충이나마 이해가 갔다. 그러나 먼 옛날의 이야기가 그러하듯 피부로 와 닿지는 않았다.


대피소가 어떤 의미인지는 그도 알고 있었다. 그의 마을에도 만일의 사태를 위한 대피소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무엇으로부터 피해야 했기에 이런 깊고 커다란 대피소가 필요한 것인지, 그것만은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그리고 마지막 말에 생각이 닿았다. 인간이 만든 기계라니? 짐승이든 인간이든 어미의 뱃속에서 나는 건 그 어떤 생명이든지 똑같다. 고대의 인간들은 생명까지도 만들 수 있었던 걸까? 아무리 고대인이라지만 정신과 생명에 관한 한 신의 영역까지 넘나들었단 말인가?


창현은 그만 막막해져 버렸다. 그녀의 말에 의하면 지금 눈앞에 이 아름다운 여성은 기계이고, 자신은 기계와 대화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창현의 고민이 어떤 것인지 대충 안다는 듯 한백이 다시 설명해 주었다.


"이해하기 쉽게 기계라고 한 것이지 사실 엄밀히 따지면 그렇게 말하기도 힘들어요. 육신은 휴머노이드 공학으로 만들어져 일부는 기계가 맞지만 나머지 부분은 아니죠. 또 정신과 의식은 오래전에 프로그래밍이 된 하나의 시스템이고요. 이렇게 말해도 모를 테니, 그냥 인간의 손에 의해 몸과 영혼이 만들어졌다고 생각하세요. 예전의 인간들은 정말 뛰어난 과학적 과업을 달성했거든요.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저랍니다."


"정말 대단하군요."


그 말밖에 중얼거릴 말이 또 있을까. 그렇다면 그녀는 고대인들이 남긴 정말 위대한 업적의 결실이리라. 어떤 원리와 어떤 방법으로 수백 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자신과 이야기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녀 말대로라면 고대인의 비밀을 어느 정도 알 수 있을는지 모른다.


이미 창현은 이 모든 것이 참인지 거짓인지 판단할 여지를 모조리 버린 상태였다. 그러나 이것이 꿈이 아니라면, 오히려 이 공간과 한백의 이야기가 거짓이라고 의심하는 게 더 이상하지 않을까? 지금 겪은 모든 사실과 이야기를 인정하고 진실로 받아들이는 게 더 현명하지 않을까?


"잠깐, 그럼 나이가..?"


이야기를 듣다 보니 그 생각은 나중에 든 모양이었다. 나이 쉰이면 장수했다고 하여 잔치를 하고, 육순이면 마을 원로로서 우대를 받는다. 나이 들어 명이 다해 죽으면 호상(好喪)이라며 사람들이 곡(哭)조차 잘 하지 않는다. 소위 잘 죽었다는 것이다.


`세상이 얼어붙기 이전`은 역사, 혹은 신화라고 불러야 할 시간이지 나이로 셈할 수 있는 것이 절대 아니다. 그런데도 한백은 그 시간을 논하고 있다.


"2119년에 처음 프로그램이 가동되었으니까요. 지금까지 햇수를 계산하면 556년이 되네요. 나이를 따진다면 그 정도겠죠?"


확실히 인간의 수명이 아니다. 하지만 옛사람들은 엄청 오래 살았다고 한 말이 떠올랐다.


"그럼 옛날 사람들도 그 정도로 오래 살았다는 말이오?"


"아니요. 특별히 장수하는 사람들은 기대수명이 200세까지는 됐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백 년을 미처 못살았어요. 의학과 과학이 고도로 발달했어도 그 혜택을 받기 위해선 많은 경제적 대가가 필요했거든요. 오염된 대기와 물, 토양은 인간들의 수명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쳤어요.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 자신의 건강에 투자할 여력이 없는 사람들은 대체로 수명이 짧았죠. 사실 그런 사람들이 대다수였어요."


한백은 창현을 한쪽에 있는 문으로 인도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처음 들어온 큰 공간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넓은 공간이 나타났다. 방이라고 표현하기 민망할 만큼 큰 공간에 2열로 된 책장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한쪽 구석으로는 편히 앉을 수 있는 의자가 있었는데, 한백이 먼저 가서 앉고 나서 창현에게도 자리를 권했다.


"대재앙 이전의 가치 있는 책들을 모아놓은 것이죠. 분야별로 인간에게 도움이 될 만한 책들만 추려 놓았지만 아마 머리가 하얗게 셀 때까지 읽어도 다 읽진 못할 거에요."


한백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창현을 보며 설명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실로 놀라운 이야기였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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