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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성케이투 님의 서재입니다.

산과 달과 바람과 칼(화랑연환도 편)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대체역사

완결

행성케이투
작품등록일 :
2020.08.11 13:41
최근연재일 :
2021.02.16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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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05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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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쪽

9장. 토모키루의 칼(5)

DUMMY

5.

밤이 지나고 새벽이 되자마자 사이노무라지은 여전히 기세 좋게 장군들을 불러 모았다.


“어제 막판 저쪽 강변까지 당군을 몰아붙였는데, 날이 어두워져 이기지 못했다. 오늘은 아침부터 같은 방법으로 공격한다. 반드시 당군을 쓸어버리고 사비성으로 진격해 백제를 되살리자.”


사이노무라지의 결의가 너무 강해서일까, 아니면 모두가 같은 착각에 빠져서일까. 어느 장수들도 사이노무라지의 말에 토를 달지 않았다. 왜군은 서둘러 아침을 먹고 어제와 같은 방식으로 함대를 두 개로 나누어 당의 함대를 향해 돌진했다. 당의 수군도 어제처럼 육상의 당군의 지원을 받으며 치열하게 맞섰다.


어제 오후와는 다르게 강변에 있는 당군의 모습이 뚜렷이 보인다는 것이 왜군에게 유리했다. 또한 왜군은 비록 하루의 경험이지만 전쟁이라는 게 어떻다는 걸 알게 된 것도 이점이었다. 왜군은 압도적인 화살 공격에 대비해 방패를 촘촘히 늘어놓았다. 전투는 어제보다 더 치열하게 진행되었다. 왜군은 수적 우위로 당군의 노련함을 상쇄시키며 당군을 압박했다.


전투가 벌어진지 한 시진이 지나면서 당군은 조금씩 몰리기 시작했다. 왜선에서 벌이진 백병전보다 당의 배에서 벌어지는 싸움이 훨씬 많아졌다. 당선 몇 척이 불길에 휩싸였고, 좌초되어 왜병이 뒤쪽 당선에 올라가는 데 발판이 된 배도 여럿 나왔다.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한 사이노무라지는 미친 듯 북을 치며 싸움을 돋웠다. 싸움이 정점에 달했을 때, 백촌강의 남쪽 강변을 수비하던 왜와 백제 부흥군 진영에서 북과 징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왜의 장수들이 눈을 돌려 백촌강 남쪽 강변쪽을 보았다. 작은 나룻배 수십 척에 나누어 탄 수백 명의 신라군이 백제 부흥군의 진지를 급습하고 있었다. 곧 백제 진영에서 불길이 일었고 구원을 바라는 북소리가 요란했다.


“신라의 화랑들이다.”


사이노무라지의 배에서 어느 부장이 탄식하듯 외쳤다. 백제 부흥군이 지키는 곳이 신라의 손에 들어간다면 그곳을 근거로 왜의 수채가 공격당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그것은 천 척의 배와 4만의 대군에게 보급될 식량과 무기가 끊긴다는 말이기도 했다. 당황한 사이노무라지은 우측을 맡고 있는 카미츠케노노키미에게 전령을 보내 우측 뒷열의 함선 백 척을 빼 신라의 거룻배들을 격멸시키고 백제 부흥군을 도우라는 명령을 내렸다.


백 척의 배들이 열을 이탈해 강을 거슬러 올라간 후 얼마 되지 않아 왜군과 백병전을 벌리던 당의 배 수십 척이 갑자기 왜의 배들을 밀어내고 옆으로 움직여 방어대열을 이탈했다. 당의 함선들은 빠르게 강의 중앙으로 나와 백제 부흥군을 지원하러 간 왜선들을 쫓는 척 하더니 갑자기 방향을 틀어 배가 빠져나가 허술해진 왜의 우측 뒤쪽으로 돌격해 들어왔다. 카미츠케노노키미를 비롯해 왜의 함선들이 당황하고 놀라는 사이 당의 배들은 자리가 비어 약해진 왜선의 전열 안으로 교묘하고 사정없이 파고들었다.


곧 카미츠케노노키미의 우측 함대 전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뒤에서 일어난 혼란은 곧장 앞쪽으로 전해져 당군과 치열한 접전을 벌이고 있는 왜선의 앞 열까지 흔들리게 되었다. 모든 왜병이 뒤에서 당의 함선이 부딪쳐오는 공포에 잡혔다. 악을 다해 싸우던 기세가 약해지며 왜의 공격에 힘이 빠졌다. 이때를 맞추어 당의 함선들이 일제히 왜의 전열을 밀고 들어왔다. 왜선끼리 부딪쳐 깨어진 배, 당군이 던진 횃불에 불이 붙은 배, 왜의 우측 함대는 완전히 무너져 뒤죽박죽이 되어버렸다.


좌측 후위를 지키던 토모키루가 이 장면을 보고 자신의 배를 빼 왜의 우측을 공격하고 있는 당선을 공격했다. 요이치와 다른 아소가의 함선들이 토모키루를 뒤따랐다. 그러자 좌측의 당의 함대 대열에서 당선 몇 척이 빠져나와 왜의 좌측 우위를 공격했다. 당선의 숫자가 적었기에 치명적인 순간을 만들지는 못했지만 혼동은 좌측까지 번져 당과 왜 전 함대가 엉겨 싸우게 되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토모키루의 판단이 옳았다. 우측 후위를 흔들던 당의 배들은 후에서 들이닥친 토모키루가 이끄는 왜선 포위되어 하나씩 불타기 시작했다. 남은 당선들은 가까스로 포위를 뚫고 왜선의 대열에서 빠져 나와 도망쳤다.


후위가 안정 되자 전방의 왜선도 전열을 다시 가다듬었다. 그러나 물때가 바뀌어 물이 빠지고 있었다. 배가 펄에 좌초되어 버린다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사이노무라지는 철수 명령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모처럼 잡은 승기를 놓아두고 왜선들은 일제히 본진으로 방향을 틀었다.


백촌강 건너 본진으로 돌아와 피해를 점검하니 백 척이 넘는 배들이 침몰하거나 좌초되어 돌아오지 못했다. 병력은 2천 넘는 손실을 입었다. 재빠른 구원으로 백촌강변의 백제 부흥군 진지가 점령당하지 않았다는 것이 위안이라면 위안이었다. 왜의 함선이 오는 걸 본 화랑들이 포위당할 걸 우려해 재빨리 퇴각을 한 것이다. 사이노무라지의 배에서 다시 작전회의가 열렸다. 사이노무라지를 비롯해 모두가 승기를 놓친 걸 아쉬워했다. 사이노무라지가 장수들을 북돋웠다.


“비록 기회는 놓쳤지만 적의 배들도 수십 척이 격침되는 피해를 입었소. 병사도 몇 백은 죽었을 거요. 계속 밀어붙이면 승리는 우리 것이요.”


그 말은 사실이었다. 당의 수군도 이십 척 이상이 침몰했고 돛이 부러지고 삭구가 잘려나가 원활하게 기동이 어려운 배도 이십 척이 넘었다. 병력의 손실도 커 어제와 오늘 전투로 천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숫자를 겁내 수비를 하다간 끝이는 라는 걸 당의 대장 유인궤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유인궤는 전략을 바꾸어 화선을 이용해 기습 공세에 나서기로 했다. 한편으로 유인궤는 신라에 전령을 보내 강력한 지원을 요청했다.


어제처럼 오후가 깊어지자 물이 밀려들었다. 왜선들이 나가 싸우기 위해 정렬을 했다. 이번에는 배치가 달라졌다. 오전처럼 신라 화랑들이 습격할 것을 대비해 비교적 피해가 덜하고 전력도 우수한 토모키루와 요이치가 이끄는 아소의 함대가 왜 함대의 우측을 맡으며 백촌강가의 백제 부흥군을 지원하기로 했다. 왜의 함대는 반드시 당의 수군을 격멸시키고 백촌강 너머에 상륙해 사비로 진격할 것이라는 결의를 다지며 강의 중앙으로 나갔다.


그러나 이번에도 당의 수군이 강의 연안을 수비할 것이라는 예상은 출격과 동시에 빗나갔다. 왜의 함선들이 강 중앙에 닿기도 전에 당의 수군들의 흐르는 강물을 타고 재빠르게 강의 중심부를 나왔다. 당군은 왜의 함대를 포위하듯 큰 원으로 대열을 이루었다. 수적으로 비교되지 않게 적은 함대가 큰 함대를 둘러싼다는 게 우스웠지만 당은 믿는 게 있었다.


당의 함선에는 작은 거룻배가 하나씩 매달려 있었는데 왜의 함선을 포위하자마자 거룻배에 불을 붙여 왜의 함대 쪽으로 흘려보냈다. 거룻배는 바다로 흘러드는 물살을 타고 금세 왜의 함대에 접근했다. 경험 있는 수군이라면 대열을 벌려 거룻배를 뒤로 흘려보낼 것이지만 왜의 수군들은 불이 타오르며 빠르게 접근하는 거룻배를 보자 당황했다.


곧 왜선의 대열에서는 혼란이 일어났다. 간격을 벌려 거룻배를 흘려보내는 배, 거룻배를 피하려다 옆 배와 부딪쳐 부서지는 배, 거룻배와 충돌해 불길이 옮겨 붙은 배, 거기에 앞의 배가 흘려보낸 거룻배를 피하지 못해 불이 붙은 뒤 열의 배까지 왜의 함대는 바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 틈을 이용해 당의 함선들이 달려들었다. 후위에 있던 토모키루의 함대도 혼란에 빠졌기는 마찬가지였다.


토모키루는 혼란을 수습하고자 자신의 배를 먼저 앞으로 빼 아소 함대를 본대에서 이탈시켰다. 30여척의 배가 거룻배를 피하며 토모키루의 배를 따랐다. 토모키루의 배들이 빠지자 오른쪽에 있던 나머지 배들도 불타는 거룻배와 아군의 배를 피할 공간이 생겼다. 그러나 거룻배의 공격과 서로 충돌하는 피하며 우측의 왜선들은 대열이 무너졌다. 곧 당의 배들이 흐트러진 왜의 함선에게 달려들었다.


몇 척이 당선과 충돌에 깨어지고 몇 척에서는 배끼리 붙어 백병전이 벌어졌지만 수적으로 압도적인 왜의 수군은 점차 당선을 포위하며 우위를 잡기 시작했다. 토모키루는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해 자신의 주위에 있는 함선들을 모두 당선의 대열로 돌격을 명했다. 토모키루의 함대는 곧 당의 배를 향해 돌진했다. 누군가 크게 외쳤다.


“돛단배다. 화랑의 돛단배가 이쪽으로 몰려온다.”


토모키루가 우측의 강 상류 쪽을 보니 수십 척의 돛단배가 바람과 조류에 힘입어 그야말로 손살 같이 밀려오고 있었다. 신라 화랑들의 목표는 분명했다. 당과 싸우는데 정신없는 왜선의 측면과 후위를 쳐 당과 함께 왜의 함대를 포위하려는 것이었다. 돛단배 중 한척이 다른 배보다 크고 지휘용 누각이 있는 토모키루의 배를 표적으로 삼아 빠르게 다가왔다.


“배를 불러들이는 북을 쳐라.”


토모키루가 다급히 외쳤지만 당군을 향해 돌격하고 있는 배들이 바로 방향을 바꿀 수는 없었다. 토모키루의 함대 중 뒤쪽에 있던 배 몇 척에 벌써 화랑들이 갈고리를 걸었다. 화랑들은 왜병이 쏘는 활을 막으며 순식간에 배에 뛰어올랐다. 곧 칼싸움이 벌어졌다. 그러나 왜병과 화랑의 칼싸움은 그 실력 차가 너무도 명확했다. 열 명이 이룬 원형의 검진에서 여덟이 팔방을 막으며 원 가운데 있는 둘이 번갈아 앞으로 나와 찌르고 베며 종심으로 밀고 들어가는 진법이자 도법에 왜병들은 속수무책이었다.


왜의 전선 한 척에 이백 명 가까이 타고 있었지만 순식간에 도륙이 났다. 보이는 대로 왜병을 모두 벤 화랑은 배에 불을 지르고 다음 왜선으로 옮겨 타 똑같은 살육을 감행했다. 그건 정말이지 살육이었다. 토모키루의 배에도 화랑들이 뛰어올랐다. 곧 처절한 칼싸움이 벌어졌다. 하지만 왜병들은 두 합 이상을 버티지 못했다. 화랑 각각의 실력이 비상한데다 서로 엄호하고 막아주며 쉴 새 없이 위치를 바꾸어가며 베고 찌르니 화랑을 포위했어도 왜병들은 배겨 낼 재간이 없었다. 갑판은 순식간에 피바다로 변하고 왜병의 시체에 발 디딜 틈도 없었다. 화랑들은 대장이 있어 보이는 누각을 향해 돌진해 왔다. 그 앞을 막는 왜병은 바로바로 쓰러졌다.


토모키루는 최후를 각오하며 명문을 새긴 칼은 허리에 찬 채 자신의 두 번째 칼을 뽑았다. 곧 화랑의 원형진이 누각 바로 아래까지 와 선두의 화랑이 계단을 올랐다. 계단에 있던 왜병 넷과 부장이 창과 칼을 휘두르고 찌르며 화랑을 막아섰다. 다행히도 계단이 좁아 화랑들은 서로 엄호를 못하고 각자의 실력으로 계단을 지키는 왜병들과 맞서야 했다. 그래도 왜병들은 얼마 버티지 못하고 하나씩 화랑의 칼에 쓰러졌다.


이제 누각 위에는 토모키루와 부장 넷만 남았다. 화랑 하나가 빠르게 계단으로 올라오며 칼을 내려 긋는 척하다 번개처럼 방향을 틀어 옆으로 베고 들어왔다. 가장 앞에 선 토모키루의 부장이 칼을 세워 베어 들어오는 칼을 막았지만 뒤에 있던 화랑이 갑자기 앞의 화랑 등 뒤에서 돌아들어오며 목을 베었다. 부장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두 동강이 나버렸다. 토모키루와 남은 부장은 누각으로 올라온 화랑 둘에게 일제히 덤벼들었다. 칼질을 한번 씩 교환하고 화랑들이 다음 도법으로 옮기는 순간 배가 충돌로 흔들리며 다른 배에서 왜병들이 토모키루의 배로 뛰어들어왔다. 왜병의 함성을 듣자 화랑들은 도진을 유지하기 위해 일단 누각 아래로 내려갔다. 토모키루를 구하러 온 건 요이치였다.


“장군, 제 배로 피하십시오.”


요이치는 크게 외치며 앞으로 돌진했다. 요이치를 따르는 왜병 수십 명이 곧 누각 앞으로 몰려들었다. 그러나 다시 진형을 갖춘 화랑의 공격에 왜병들은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토모키루가 누각에서 요이치를 급하게 불렀다.


“요이치, 이 칼을 받아라.”


토모키루는 금광의 위치를 새긴 칼을 요이치에게 던졌다.


“칼을 마사히루에게 전해라. 열 여섯가 글자가 가리키는 곳을 찾아라. 우리 가문을 살릴 물건이 있다.”


요이치는 칼을 받아들고 외쳤다.


“어서 저희 배로 피하십시오.”


그러나 토모키루는 높은 누각에서 뛰어내릴 수 없었다. 뛰어내려 다리가 부러지지 않는다 해도 낫에 베이는 풀처럼 쓰러지는 왜병들 따라 화랑의 칼에 쓰러질게 뻔했다. 화랑의 선두가 왜병 서넛을 베고 요이치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요이치 명령이다. 어서 피해라.”


그 틈에 화랑이 지른 불이 누각에 옮겨 붙고 있었다. 매운 연기가 솟구치고 공기는 분화하는 아소 화산처럼 뜨거웠다. 토모키루는 칼을 들고 누각을 내려갔다.


“요이치, 어서 피해라. 넌 살아 꼭 칼을 전해라. 우리 가문의 희망이다.”


토모키루는 힘을 다해 다시 외쳤다. 살아있는 부장 둘이 좌우에서 토모키루를 호위했다. 하지만 누각 밑에 벌어지고 있는 칼싸움에 휘말리자말자 버티지 못하고 쓰러졌다. 토모키루는 앞서 싸우는 부장 뒤를 돌아 화랑들의 검진 안으로 들어갔다. 검진 안에 적이 들어간다면 검진이 흔들릴 거라 생각해서였다. 그러나 검진 안에는 팔방을 막고 있는 화랑 외에도 두 명의 여유가 있었다. 진 밖으로 나가 싸우는 화랑 한명을 뒤에서 엄호하는 한명이 검진의 이동에 따라 수시로 진의 안팎을 오가고 엄호하고 있었던 것이다.


토모키루는 바로 그 역할을 하는 화랑과 마주쳤다. 곧 칼싸움이 벌어졌다. 토모키루가 머리치기로 화랑을 먼저 공격했다. 토모키루의 공격은 능란했고 예리했다. 분노와 절망마저 들어간 칼이 칼바람을 일으키며 화랑의 머리를 내리쳤다. 그러나 앳되기 조차한 화랑은 위에서 내려오는 칼의 위세를 조금도 겁내지 않고 칼을 들어 막는척하다 갑자기 발을 비스듬히 내디디며 몸을 앞으로 가져갔다. 토모키루의 칼이 화랑의 어깨 옆으로 흘러갔다. 그 순간 화랑은 칼을 비켜 그어 토모키루의 옆구리를 베었다.


토모키루의 칼도 빨랐지만 화랑은 더 빨랐다. 칼을 들어 올리는 척하다 보법을 변화시켜 상대의 칼을 흘려보내고 공격의 틈을 만든 것이 성공의 요인이었다. 토모키루는 옆구리로 들어오는 칼을 피하지도 막지도 못했다. 뜨끔한 뭔가가 옆을 지났다고 느낀 순간 갑옷아래에서 피가 배어나오며 다리에 힘이 빠졌다. 옆구리를 베고 지나간 화랑은 그대로 검진 밖으로 빠져나가 다른 왜병을 가격하고 있었다. 토모키루는 사라지는 힘을 모아 몸을 돌려 화랑의 뒤를 공격했다.


순간 그 방향에서 앞을 보며 왜병과 싸우던 화랑이 갑자기 몸을 180도로 돌려 반쯤 앉은 자세를 취하며 토모키루의 배를 갈랐다. 낮은 몸높이와 정확하고 빠른 공격에 자신과 싸웠던 화랑만을 쫒았던 토모키루는 그 칼을 막을 틈이 없었다. 복부를 완벽하게 베인 토모키루는 피를 뿜어내며 그대로 주저앉듯이 쓰러져 절명하고 말았다. 그 동안 요이치는 토모키루가 던진 칼을 받아 자신의 배에 뛰어 탔다. 요이치는 몸을 돌려 눈으로 토모키루를 찾았다. 칼에 옆구리를 베이고 몸을 돌렸어나 다른 화랑의 칼에 쓰러지는 장면이 고스란히 눈에 들어왔다.


“장군.”


요이치는 절규했다. 요이치의 배는 불이 붙고 있는 토모키루의 배에서 떨어져 난전 속으로 들어갔다. 왜 함대의 본진은 대열이 무너져 사방이 아비규환이었다. 불이 붙은 거룻배의 공격과 당선의 포위공격에다 뒤쪽 측면이 화랑의 공격까지 받아 서로 엉기고 부딪쳐 함대라고 할 수조차 없는 상황으로 되어가고 있었다. 토모키루가 이끌던 아소의 함대도 마찬가지였다. 화랑에게 몰살당한 뒤 불타는 배들이 부지기수였다. 사방에서 불길과 연기가 솟았고 그렇게 불타는 배는 십중팔구 왜의 함선이었다. 요이치는 어떤 명령도 내리지 못하고 잠시 물결에 배를 맡겨두고 있었다. 곧 마음을 잡은 요이치는 일단 배들을 모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우리 배들을 부르는 깃발을 올려라.”


요이치의 명령에 초요기가 올라갔지만 당장 달려오는 배는 없었다. 요이치는 다른 배들이 깃발을 잘 볼 수 있도록 연기가 옅은 곳으로 나가기로 했다.


“우현으로 몰아 저쪽 빈 곳으로 간다.”


그러나 요이치의 배는 난전에서 벗어나기도 전에 당의 함선과 맞닥뜨렸다. 근접전이 벌어지게 전에 왜와 당의 병사들은 서로 화살을 쏘았다. 흔들리는 배에서 쏘는 화살이라 대부분은 방패와 함체에 꽂혔지만 병사가 맞아 쓰러지는 일도 빈번했다. 당의 함선은 화살을 퍼부으며 곧바로 요이치 배로 돌진해 왔다. 요이치는 흩어진 자신의 함대를 보며 여기서 난전을 벌였다간 아소의 함대를 모으지 못할 것이라 생각해 접전을 피하기로 했다.


“좌현으로 틀어 적선을 피해라.”


북에 맞춰 한쪽 노들이 움직이고 다른 쪽은 멈추어 배를 좌현으로 튼 다음 빠르게 전진했지만 그 방향은 배들이 엉겨 혼전을 벌이고 있는 곳이었다. 요이치는 배 사이를 헤집고 다니며 계속 자신의 함대를 부르고 대열을 다시 이루러했지만 공황상태의 왜병들은 쉽게 방향감각과 조타 감각을 찾지 못했다. 그것은 실전 상황에서 배를 운용하는 능력의 차이였다.


요이치의 배는 추격하는 당선은 피했지만 어느 틈엔가 접근한 화랑들이 던진 갈퀴에 걸리고 말았다. 왜병들은 느지막이 발견한 갈퀴의 밧줄을 잘라내며 화살을 쏴 배에 오르는 화랑들을 막으려 했지만 이미 때를 놓친 상황이었다. 오히려 화랑들의 화살에 갈퀴 근처의 왜병들이 먼저 쓰러졌다. 화랑들이 쉽사리 배에 뛰어 올랐다. 곧 칼싸움이 벌어졌다.


요이치는 화랑들이 배에 오르는 순간 승패는 끝났다고 생각했다. 당장 눈앞에서 자신의 부하들이 짚단처럼 쓰러지고 있었다. 반드시 살아남아 마사히루에게 칼을 전하라는 토모키루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윙윙거렸다. 그렇다고 마냥 도망칠 수는 없었다. 일군의 장수로서 지더라도 싸우고, 죽더라도 부하들과 함께 죽어야했다. 요이치는 한손에 자신의 칼을 빼들고 다른 손에는 칼집에 넣어진 토모키루의 칼을 쥐고 칼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쪽으로 나갔다.


화랑 하나가 좌우로 칼을 두 번 연거푸 휘둘러 왜병 둘을 한 번에 쓰러뜨렸다. 요이치는 그 화랑에게 뛰어가며 연속으로 칼을 비켜 내리쳤다. 그러나 화랑은 요이치를 상대하지 않고 슬쩍 물러서며 검진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검진을 이룬 화랑은 각자 앞과 옆의 왜병을 찌르고 베며 좌로 검진을 이동시켰다. 요이치가 검진 안으로 뛰어들려는 순간 오른쪽으로 몇 걸음 떨어져 있던 화랑이 무릎을 꿇어 몸을 낮추며 낮은 무릎을 축으로 빙글빙글 회전해 요이치의 복부를 베어 들어왔다. 요이치는 몸을 회전시켜 화랑의 칼을 피한 후 내리치기로 화랑의 머리를 갈랐다. 순간 아까 요이치와 대결을 피하고 검진 안으로 들어갔던 화랑이 갑자기 앞으로 나와 요이치의 칼을 막았다. 그와 동시에 무릎을 꿇고 배를 가르려 했던 화랑이 칼의 방향을 바꿔 요이치의 배를 찔렀다. 요이치는 황급히 다른 손에 쥐고 있던 토모키루의 칼로 복부로 찔러오는 화랑의 칼을 비켜 막아냈다. 검진에서 나와 요이치의 칼을 막았던 화랑이 가볍게 튕기듯 해 요이치의 칼을 밀어내며 손목을 틀어 요이치의 목을 찔러왔다.


일대일로 싸워도 이기지 못할 판에 상하로 공격받은 요이치는 목으로 들어오는 칼을 막을 방도가 없었다. ‘이제 끝이다’.라’는 생각이 찰나로 지나는 순간 꽝하는 소리와 함께 배가 밀려나며 곧 옆으로 크게 기울기 시작했다. 왜선 한척이 불타며 표류하다 요이치 배의 옆구리를 들이받은 것이다. 순간적으로 전해진 충격으로 요이치의 목으로 들어왔던 칼이 빗나가 갑옷의 끈을 베고 지나갔다. 요이치의 갑옷이 벗겨지며 배 바닥에 굴렀다. 화랑들의 자세와 검진도 무너졌다. 넘어진 화랑들은 곧 몸을 바로 세웠지만 급격하게 기울어가는 배가 침몰하는 건 시간문제였다.


화랑들은 재빨리 돛단배로 뛰어내렸다. 요이치는 자신의 몸 위로 쏟아지는 시체와 물건들을 밀쳐내고 일어섰지만 급해지는 경사에 몸을 바로 세우지 못했다. 요이치는 기우는 배위를 굴러 바다에 빠지고 말았다. 그러나 요이치는 왼손에 쥐고 있던 토모키루의 칼만은 놓치지 않았다. 요이치는 물위로 몸을 내밀고 주위를 둘러봤다. 주위는 온통 왜병의 시체들이었다. 그 시체들 사이로 부서진 배 조각인지 커다란 널빤지가 물결을 따라 넘실대며 떠있었다. 팔 길이 두세 배의 거리였다. 요이치는 몸을 움직여 널빤지로 가 그 위에 올라탔다. 그대로 누워 숨을 고르고 여유가 생기자 몸을 일으켜 강 주위와 함대가 있던 자리를 봤다.


강과 바다가 불타는 왜의 배들로 온통 붉은 색이었다. 아소 함대가 견제에 실패했기 때문인지 백촌 강변의 백제 부흥군의 목책마저 불타고 있었다. 요이치는 패배의 절망에 몸이 떨렸다. 요이치를 더 절망스럽게 한 것은 왜의 함대 본진이 도주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직 싸울 수 있는 수백 척의 왜선들이 백촌강 하구를 벗어나 큰 바다를 향해 필사적으로 도망치고 있었다. 이제 구하러 올 아군은 없다는 걸 깨달은 요이치의 눈에서 자신도 모르는 눈물이 흘렀다. 살기위해서는 땅에 올라야 했다. 요이치는 백제 부흥군이 점령하고 있던 백촌 강변 쪽으로 손을 저어 널빤지를 움직였다. 널빤지는 조류에 밀리고 바람을 타며 요이치의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요이치는 몇 차례나 물을 뒤집어썼고, 널빤지는 휘청거리며 이러 저리 방향을 바꾸었다. 그럴 때마다 요이치는 팔이 빠지라 손을 노처럼 저어야 했다. 한 시간이 넘는 요이치의 분투 덕에 널빤지는 이제 검은 연기만을 뿜고 있는 백제 부흥군의 지역에 닿았다. 질펀한 개펄과 갈대가 첩첩히 쌓여진 곳에서 요이치는 널빤지에서 내려 갈대를 헤치고 육지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갯벌에서 한발 떼기도 힘들었지만 요이치는 이를 악물었다. 요이치를 도와 준 게 있다면 갯벌을 메우다시피 한 왜병의 시체였다. 요이치는 그 시체들을 붙잡거나 밟으며 허리까지 빠지는 갯벌을 빠져나왔다. 그러나 요이치는 땅에 올라서자마자 갈대 속에 몸을 숨기고 왜의 함대를 감시하고 있던 신라군에게 포로로 잡히고 말았다.


개펄 흙으로 범벅이 된 옷이 장군 요이치의 신분을 숨겼다. 아소가 출신의 장수로 백여 척의 배를 지휘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면 항복을 강요당할 것이고 거부할 시 목이 장대에 걸길 것이라는 건 뻔한 일이었다. 요이치는 칼을 빼앗기고 손이 뒤로 묶여 널찍한 강변의 모래해안으로 끌려갔다. 그곳은 왜와 백제군의 포로 수백 명이 잡혀와 있었다. 승리의 기쁨 속에 몸을 쉬고 있던 화랑들도 그곳에 있었다.


대장인 듯한 화랑이 요이치를 잡은 신라군이 들고 있던 토모키루의 칼을 발견하고 강제로 빼앗다시피 해 칼을 차지했다. 요이치는 무릎이 꿇리고 손이 묶인 채 그 광경을 멀리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요이치는 전쟁포로가 되어 신라로 끌려갔다. 싸우다 갑옷이 풀어지고, 바다를 표류하고 갯벌을 지나며 옷도 찢어지고 더러워진데다 주위에 아소 출신의 포로도 없어 아무도 요이치의 신분을 몰랐다. 요이치가 다른 포로들과 함께 줄에 묶여 경주에 닿았을 때 임존성 함락 소식이 들렸다. 본국으로 철수한 왜의 함선이 절반도 되지 못했다는 소문도 돌았다. 요이치는 숨은 울음을 삼켜야 했다.


전쟁에 패해 노비가 된 처지에 백부이자 가주인 토모키루도 전사하고 부탁했던 칼도 빼앗겨버렸다. 요이치는 암담한 현실에 죽고 싶었지만, 아소가로 돌아가 토모키루 최후의 분투를 후손에 전해야 한다는 의무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전쟁포로은 노비가 되어 전공을 크게 세운 자에게 상으로 내려지거나 관청이나 절에 배분되었다. 백촌강 전투에 참여한 신라군중 가장 큰 활약을 한 것은 화랑이었고, 특히 화랑들에게 검법을 가르치고 수련시켰던 곳이 경주 남산 보국사였다.


요이치는 수십 명의 포로와 함께 보국사에 하사되어 절의 노비가 되었다. 보국사는 농사짓는 노비만 백 명이 넘는 큰 절로 노비의 출신도 왜, 백제, 고구려에 신라인까지 다양한 했다. 요이치는 그들에 섞여 농사를 지으며 2년을 보냈다. 요이치는 혹시나 신분이 탄로 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다른 노비들과는 잘 어울리지 않았다.


신라어가 어느 정도 가능하게 된 어느 날 일하고 있는 논으로 떡과 전 등의 음식이 내려왔다. 요이치는 자신의 몫을 받아 언제나처럼 다른 노비들과는 멀찍이 떨어져 앉았다. 음식을 가져온 노비가 신라인으로 평소 안면이 있었다. 농사를 짓다보면 뱀 같은 작은 동물들을 잡을 일이 있는데, 요이치는 잡은 동물을 별미 재료로 신라인 노비에게 준 적이 몇 번 있었던 것이다. 신라인 노비가 아는 체 하며 혼자 있는 요이치 옆에 앉았다. 요이치는 신라인 노비에게 물었다.


“이건 무슨 음식인가? 귀족이 재라도 올렸나?”


“아냐. 철불 봉헌식을 하고 내리는 음식이야.”


“철불? 불상을 새로 들인 건가?”


신라인 노비가 묘한 웃음을 띠며 말했다.


“백촌강 전투에서 노획한 왜의 칼을 모아 철불을 만들었어. 승리에 대한 감사로 부처님에게 바치려는 거지.”


요이치는 자신이 빼앗긴 칼을 떠올리고는 분노와 안타까움에 입술을 깨물었다. 그런 요이치의 감정을 눈치 채지 못한 신라인 노비는 자신의 정보력을 자랑하듯 신이 나서 말했다.


“백촌강에서 말이야, 화랑 조장인 천원랑이 칼을 노획했는데, 그걸 써보니 정말 명검이라는 거야. 그런데 그 칼을 탐내는 화랑들이 많아 싸움이 몇 번 있었데. 결국 화랑의 스승인 의효대사의 제안으로 그 칼도 철불 안에 넣어 봉헌할 예정이라는 군.”


강렬한 충격이 요이치의 머리를 때리고 지나갔다. 요이치는 떨리는 소리로 물었다.


“그 칼이 누구의 칼이었다든가?”


“그걸 어떻게 알아? 워낙 잘 베어지는 데다 근사한 글자까지 새겨져 있어 신분 높은 왜장의 칼이었다는 것만 짐작할 뿐이지.”


신라인 노비는 떡을 질근질근 씹어 넘기고는 주위를 한번 둘러 본 뒤 요이치만 알고 있어라는 듯 소리를 낮추었다.


“그런데 부처님 배안에 칼을 넣어 봉해버리면 다시 꺼내기 어렵잖아? 그래서 승리의 기념으로 그 칼에 새겨져 있던 열여섯 글자의 명문을 연환도법서에 써 넣을 거라고 해.”


“뭐? 열여섯 글자.”


열여섯 글자가 가리키는 곳을 찾으라는 토모키루의 말이 방금 전의 일처럼 생생했다. 그렇다면 부처의 뱃속에 봉안 될 칼은 토모키루의 칼이 틀림없었다. 요이치는 흥분으로 고이는 침을 삼켰다. 토모키루가 칼을 전하라고 한 것은 칼에 그 열여섯 글자가 새겨져 있기 때문이었다. 요이치가 토모키루의 칼을 받았을 때의 상황이 너무 급박해 칼을 빼 글자를 보지 못한 것이 평생의 후회로 남아있는 터였다. 요이치는 뛰는 가슴을 숨기며 아무렇지 않게 떡 하나를 입에 넣고 씹으며 천천히 물었다.


“정말 아는 것도 많구먼. 그런 재밌는 이야기는 어디서 들었나?”


신라인 노비가 묘한 웃음을 띠며 킥킥거렸다.


“천원랑의 여자 몸종과 내가 그렇고 그런 사이거든.”


“재주가 대단하구먼.”


요이치도 같이 웃으며 다시 물었다.


“그런데 연환도법서라니, 그런 책도 있나?”


신라인 노비는 깜짝 놀라 손사래를 치며 소리를 더 죽였다.


“의효대사의 허락을 받지 않으면, 화랑들도 그 책 근처에 가지를 못하는 데, 우리 같은 것들이 그 책에 대해 말하면 바로 목이 날아가.”


요이치는 웃으며 말했다.


“우리가 책이 있다는 걸 알아도 어떻게 하겠어. 그나저나 보국사에 그 책이 있나 보지?”


신라인 노비가 픽 웃었다.


“보국사는 너무 큰 절이고, 위치도 경주 옆이라 도법을 익히는 데 안 좋다고 하더구만.”


신라인 노비는 다시 목소리를 낮추었다.


“얼마 전에도 말이지, 난리가 났었어. 화랑 몇이 경주에 가 술 먹고, 계집질하느라 훈련을 빼먹은 거야. 관련된 화랑들은 몽땅 쫓겨나 고구려와의 접경지로 보내졌어.”


신라인 노비는 재밌는 듯 나직이 웃고는 말을 이었다.


“그래서 도법을 만든 의효대사는 경주에서 멀리 떨어진 절로 옮길 거라 하더군. 아마 화랑들도 따라 갈 거야. 도법서 같은 책이 있으면 아무래도 입조심, 몸조심을 해야 하는 우리에게는 잘 된 거지.”


요이치는 다시 아무렇지도 않는 듯 물었다.


“의효대사와 화랑들이 가는 절은 죽음이겠네. 그럼 그 절이 어딘지는 들었어?”


“그건 몰라. 북쪽으로 간다고만 들었어. 내가 아는 건 거기야.”


신라인 노비는 너무 오래 시간을 보냈다는 듯 서둘러 일어섰다. 요이치도 다시 논일을 시작했다. 하지만 요이치의 가슴은 희망으로 끓고 있었다. 절에 안치된 무거운 철불 안에 든 칼을 빼내기는 어려울지라도 연환도법서라는 책을 신라에서 훔쳐내 왜로 가져갈 수는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요이치는 1년을 더 노비로 일하며 이리 묻고 저리 들으며 연환도법서와 의효대사가 어디로 갔는지 알아내려 했다. 그러나 고구려와의 분쟁이 한창 인 설악으로 갔다는 말도 있고, 월악산으로 갔다는 소문도 있었다. 지리산과 계룡산에다 북한산 이름까지 들렸다. 의효대사는 한 곳에 머물지 않고 명산을 다니며 화랑들을 연마시키는 것 같았다. 요이치의 정보 수집능력은 곧 한계를 맞았다. 경주 남산 아래에서 농사 짓는 노비가 얼마나 알 수 있겠는가!


한편으로 요이치는 오래전부터 마음에 품고 있던 탈출을 시행하기로 했다. 의효대사를 추적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왜인에 도망친 노비의 신분으로 신라를 돌아다녔다가 잡히기라도 한다면 바로 참수였다. 그런 위험을 회피하고자 요이치는 차라리 왜로 돌아가 훗날을 기약하기로 했던 것이다. 어차피 그 열여섯 글자가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건 자신만 아는 일이었다. 자신의 대에 연환도법서를 찾지 못한다면 아소가의 장자들에게 비밀을 남겨 후세라도 찾게 할 생각이었다.


마침 왜와 신라의 관계는 조금씩 좋아지고 있었다. 신라는 고구려를 치기위해서 뒤가 평안해야했고, 왜는 지원군의 패배에서 회복해 천왕의 권위를 되찾기 위해서는 평화가 필요했다. 마침 감포에 왜선이 들어왔다는 소문이 들렸다. 천황이 신라왕에게 친서를 보냈다는 말도 나돌았다. 경주에서 추령재를 넘으면 감포이니 열심히만 걸으면 반나절도 걸리지 않는 거리였다. 노비를 감시하는 보국사 중들과 마름들의 눈을 속이기만 한다면 성공할 가능성이 높았다.


요이치는 밤이 되자 탈출을 감행했다. 신라에서 3년을 보냈으니 감포가 어느 방향에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요이치는 사람 눈에 띄지 않게 산길로만 미친 듯 걸었다. 날이 밝을 때 즈음 요이치는 왜선이 정박해 있는 감포에 다다랐다. 왜선을 경비하는 신라군은 아침을 먹느라 정신이 없었다. 요이치는 그 틈을 이용해 심부름 나온 노비처럼 당당하고도 바쁜 걸음으로 다른 배를 지나 왜선에 오를 수 있었다.


“아소가의 선봉장 요이치다.”


도둑인 줄 알고 칼을 뽑아든 왜병을 향해 3년 만에 써보는 왜의 말은 그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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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과 달과 바람과 칼(화랑연환도 편)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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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12장. 복수의 끝자락(1) 21.02.05 217 1 20쪽
47 11장. 추격과 습격(4) 21.02.02 220 1 18쪽
46 11장. 추격과 습격(3) 21.01.29 228 1 14쪽
45 11장. 추격과 습격(2) 21.01.26 201 1 14쪽
44 11장. 추격과 습격(1) 21.01.22 233 1 15쪽
43 10장.납치(4) 21.01.19 236 1 12쪽
42 10장.납치(3) 21.01.15 234 1 22쪽
41 10장.납치(2) 21.01.11 228 1 15쪽
40 10장. 납치(1) 21.01.08 217 1 25쪽
» 9장. 토모키루의 칼(5) 21.01.05 242 1 31쪽
38 9장. 토모키루의 칼(4) 21.01.02 244 1 13쪽
37 9장. 토모키루의 칼(3) 20.12.31 221 1 13쪽
36 9장. 토모키루의 칼(2) 20.12.28 211 1 17쪽
35 9장. 토모키루의 칼(1) 20.12.25 233 1 13쪽
34 8장. 유세나의 위기(6) 20.12.22 212 2 26쪽
33 8장 유세나의 위기(5) 20.12.18 212 2 18쪽
32 8장. 유세나의 위기(4) 20.12.15 214 3 13쪽
31 8장. 유세나의 위기(3) 20.12.12 235 2 16쪽
30 8장. 유세나의 위기(2) 20.12.08 224 2 23쪽
29 8장. 유세나의 위기(1) 20.12.04 216 2 14쪽
28 7장. 백산의 위기(5) 20.12.01 213 2 23쪽
27 7장. 백산의 위기(4) 20.11.27 220 2 13쪽
26 7장. 백산의 위기(3) 20.11.24 217 2 12쪽
25 7장. 백산의 위기(2) 20.11.20 279 2 17쪽
24 7장. 백산의 위기(1) 20.11.15 238 2 14쪽
23 6장.배반의 배반(3) 20.11.09 244 2 19쪽
22 6장.배반의 배반(2) 20.11.05 243 2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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