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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성케이투 님의 서재입니다.

산과 달과 바람과 칼(화랑연환도 편)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대체역사

완결

행성케이투
작품등록일 :
2020.08.11 13:41
최근연재일 :
2021.02.16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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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08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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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쪽

10장. 납치(1)

DUMMY

10장. 납치

1.

아소의 이야기는 구름에 잠긴 달이 벗어나며 끝났다. 호국사 스님들을 따라와 아소의 얘기를 듣고 있던 유세나가 허무한 듯 말했다.


“원본 같은 건 없어요. 필사본에 향찰로 쓰인 게 전부에요.”


통역의 말을 들은 아소가 얼굴을 들어 유세나를 노려봤다.


“나쁜 년, 날 속였구나!”


유세나는 화풀이 하는 냥 앙칼지게 쏴 부쳤다.


“그때 내가 해석한 것을 주지 않았어요? 그것으로 끝내고 날 풀어주었으면 이런 꼴 안 당했죠.”


“완벽하게 해석되지 않을 걸 가지고 어떻게 찾으라고!”


아소의 원망어린 탄식이 검은 하늘을 헛되어 흔들었다. 아소의 소리가 역겨웠는지 유세나는 몸을 돌려 뛰다시피 해 절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유세나가 떠나자 혜공은 아소를 노려보며 위엄이 들어간 소리로 말했다.


“두 가지 선택이 있다. 하나는 경찰에 넘겨져 국제적으로 망신을 당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내일 당장 조용히 일본으로 돌아가 다시는 한국 땅을 밟지 않는 것이다. 대신 너희들은 누구도 연환도법서가 있다는 얘기를 꺼내서는 안 된다. 그랬다간 도법서 끝에 있다는 그 시도 같이 공개될 것이고 전 세계 사람이 금광을 찾아 나서게 될 거다.”


백산이 혜공에게 찬사를 보냈다.


“스님의 제안이 훌륭합니다. 연환도법서가 있다는 소문이 나지 않는다면 호국사도, 상무암도, 조용해 질 것입니다.”


선택지가 두 가지라 했지만 실상 아소에게는 하나 밖에 없었다.


“내일 당장 일본에 돌아가고 연환도법서에 대해서는 아무 말 않겠다.”


아소가 약속하자 혜공은 호국사 스님들을 절 안으로 철수시켰다. 그동안 박용진은 혼자 계곡 비탈에 쓰러진 채 가슴을 찌르는 고통을 참고 있었다. 절강에, 백산에, 이제는 혜공이란 고수를 경험한 박용진은 검은 하늘에 무수히 반짝이는 별을 보며 세상은 넓고 고수는 많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껴야만 했다. 박용진은 고통이 어느 정도 가라앉자 천천히 몸을 움직여 일어섰다. 그렇다고 호국사 스님들이 득실거릴 길 위로 올라갈 생각은 없었다.


박용진은 계곡 비탈을 기다시피 해 차를 세워둔 아래쪽으로 내려갔다. 가슴이 아픈데다 관목과 나무가 우거졌고 물기에 젖은 풀마저 미끄러워 이동이 쉽지 않았다. 그래도 박용진은 기를 쓰고 움직였다. 한참을 가자 혜공이 아소에게 다짐받는 소리가 들렸다. 박용진은 움직임을 멈추고 길 위가 조용해지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백산과 유세나 그리고 호국사 스님들이 자리를 떠나자 박용진은 비탈에서 기어 올라와 아무 말 없이 자신의 차로 갔다. 아소가 박용진을 발견하고 노려보며 나직이 욕을 뱉었다.


“빠가야로!”


그러나 그 욕은 아소 자신에게 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둘 다 처참한 패배자라는 걸 깨달은 아소가 곧 눈을 돌렸다. 박용진은 아소의 욕을 들었지만 그대로 무시하며 젖은 흙이 잔뜩 묻은 옷을 틀고 차에 올라탔다. 박용진은 바로 호국사를 떠났다. 그런 이후에야 아소 일행은 이영운 교수가 사라졌다는 걸 알았다. 밴 운전사가 이영운 교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계곡 아래 아득이서 벨소리가 들렸다. 밴 운전사 둘이 휴대폰 벨 소리를 따라 계곡으로 내려가 머리가 깨어져 죽어있는 이영운 교수를 발견했다. 당황한 운전사가 놀라 길 위로 뛰어올라왔다. 아소는 백산에게 얻어맞은 옆구리를 부여잡고 이영운 교수가 죽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아소는 자신이 호국사를 습격했고 이영운 교수의 사망과 관련 있다는 소문이 나면 입장이 얼마나 곤란해질지 재빨리 알아챘다.


“빨리 여길 뜨자.”


아소는 자신이 타고 왔던 밴 운전사를 재촉했다. 밴 운전자가 박용준의 비서에게 전화를 했고 곧 실족사로 처리하라는 연락이 왔다. 일단 아소와 일본 무사들을 태운 밴이 황급히 호국사를 출발했다. 혼자 남은 밴 운전자가 구급차를 불렀다. 그는 계속 박용준의 비서실과 통화하며 안좌사의 지시를 받았다. 이영운 교수가 지리산 거림 계곡을 탐방하다 실족사 한 것으로 공식화 된 건은 이틀 뒤의 일이었다.


아소는 서울로 오는 동안 한 숨도 자지 못했다. 백산에게 얻어맞은 옆구리가 계속 욱신거렸기도 했지만, 토모키루가 발견했다는 보물의 장소를 영영 찾을 수 없다는 절망감이 더 고통스러웠다. 이른 새벽, 아소는 서울 성북동 숙소에 도착했다. 집에 들어가자마자 바로 짐을 챙겼다. 동경 행 첫 비행기로 일본에 돌아갈 생각이었다. 아소는 절망과 패배를 이대로 안고 돌아 간다는 생각을 하자 울분이 끓어올랐다.


‘토모키루의 보물을 찾지 못한다면 용일 그룹이 피바다가 되는 꼴이라도 봐야겠다!’


아소는 형제간에 싸움을 붙이기로 했다. 공항으로 가는 새벽길을 달리며 아소는 박용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 시각 박용진은 판교 자신의 집에 돌아와 죽은 듯 자고 있었다. 혜공에게 맞고 밤새 운전을 하느라 아프고 지친 몸이라 전화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빠가야로, 멍청한 새끼”


아소는 전화를 받지 않는 박용진에게 욕을 퍼부었다. 아소는 대신 박용준에게 전화를 돌렸다. 박용준의 이영운 교수의 사망 소식에 새벽부터 깨어있던 참이었다. 전화를 받은 박용준에게 아소는 이영운에 대한 애도는 표하지도 않았다. 아소는 자기 할 말만 하면서 박용준에게 결사의 투지를 불어넣었다.


“박 부회장, 위임장은 이번 한번이다. 이 위임장으로 네가 회장이 되지 못하면, 그걸로 끝! 나는 다시는 너를 밀어주지 않는다. 그럴 이유도 없고.”


아소는 바로 전화를 끊었다. 아소는 9시 첫 비행기를 타기 직전 다시 박용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번에는 박용진이 전화를 받았다. 아소는 경멸감을 잔뜩 넣어 말했다.


“네 능력은 원숭이보다 못했다. 계곡 아래에 숨어있다 기어 올라오는 꼴은 한심해도 너무 한심해 봐줄 수가 없었어. 그래서 박용준에게 위임장을 줬다. 네 형이 회장이 된 뒤, 돼지 농장 관리인 자리라도 주길 빌어라.”


아소는 자기말만 던지고 전화를 끊은 뒤 비행기를 탔다. 마음에서는 백산과 혜공에 대한 복수심이 부글거렸다.

‘난 반드시 돌아온다.’

아소는 몇 번이 다짐하고 다짐했다.


******

아소가 한국을 떠난 날, 용일그룹 부회장실은 조용하면서도 분주했다. 이영운 교수의 죽음과 박용준과의 연결을 차단하는 것이 가장 큰 목표였다. 이영운 교수가 타고 간 밴이 그룹 소유라는 게 걸렸지만, 이영운 교수가 고문으로 있어 때때로 이용한다는 보도 자료를 만들어 놓았다. 한편으로 밴 운전자들의 입을 막고 말을 맞춰야 했다. 안좌사가 분주하게 움직였다.


“다행히 백산이나 호국사 쪽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습니다.”


박용준은 안좌사의 보고에 비로소 안도했다.


“그들이 왜 조용히 있는 걸까요?”


“떠들어봤자 얻는 게 뭐가 있겠습니까?”


“그렇긴 한데, 그나저나 이영운 교수가 없으니 이제 어떡한다.”


“부회장님이 원하시는 것은 손에 넣었으니 바로 주주총회를 하시죠. 주총 여는데 이영운 교수가 왜 있어야합니까?”


“그래, 그래요. 우리의 목표는 달성했어요. 안좌사 말대로 주총이나 빨리 합시다.”


아소를 비롯한 일본인 누구도 자신들을 추종하던 조선인의 죽음을 애도하지 않았고 기억하지 않았다. 한국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도 친일 지식인 이영운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았다. 이영운 교수는 그렇게 잊혀져버렸다.


******

아소의 전화를 받은 박용진은 잠시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시간상 위임장을 어제 밤과 오늘 새벽 사이에 주었을 리는 없어 보였다.

‘그 늙은 놈이 진작부터 나를 가지고 논 게 틀림없어.’

박용진은 이를 갈았지만 아소가 눈앞에 없는 이상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박용진에게는 마지막 기댈 곳이 있었다. 박용진은 바로 유이와 최승희를 찾아갔다.


“아소가 형에게 위임장을 주었다고 자랑하던데, 우리 최승희씨는 뭐하고 있나! 나와 한 약속은 벌써 잊으신 건 아니시겠죠?”


박용준이 아소의 위임장을 받았다는 말에 최승희는 잠시 얼굴이 굳어졌다. 그러나 최승희는 곧 밝은 얼굴로 돌아와 박용진에게 희망을 주었다.


“그래봐야 25%에요. 회장님 지분은 35%잖아요? 거기에 기관 몇 군데만 끌어 모으면···”


“그러니까 그 아버지 지분 35%가 언제 내 손에 들어 오냐는 말이에요.”


최승희가 유이를 돌아봤다.


“그건 유이 아가씨의 도움도 있어야 하고요, 용일 홀딩스의 주식을 가지고 있는 기관들의 협조도 얻어야 해요.”


최승희의 말에 유이가 흥하니 콧소리를 냈다.


“왜 나를 끌어들여요? 그건 최승희씨가 한 약속 아니에요?”


“요즘 회장님이 유이씨에게 각별한 관심이 있다는 걸 알죠? 유이씨가 조금만 협조하면 일이 쉽게 되요. 어려운 일도 아니에요. 친절하고 따뜻하게만 대해드리면 되요. 그 이상은 바라지 않을게요.”


유이가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나에게는 그게 제일 힘든 일인 줄 알잖아요?”


최승희가 자신의 양손을 기도하듯 맞잡고 간곡히 사정했다.


“알아요. 하지만 조금만, 조금만, 참아 주세요. 네!”


유이는 사정하는 최승희에게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최승희는 유이를 설득하자 박용진에게 얼굴을 돌렸다.


“우릴 도와줄 또 한사람이 있어요. 김 비서실장이죠.”


김 비서실장은 오랫동안 박 회장의 비서실을 맡아오며 바깥 세계와 박 회장을 이어주는 연결고리였다. 김 비서실장 얘기가 나오자 박용진이 웃음을 터뜨렸다.


“김 비서실장? 그 사람은 벌써 형한테 붙었어요. 여기서 일어나는 일들을 사사건건 형에게 일러바치는 걸 몰라요?”


최승희가 방긋 웃었다.


“그래서 우릴 더 크게 도와줄 수 있죠.”


박용진이 의문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최승희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박 사장님은 조금 더 기다리세요. 25%짜리가 아니라 35%의 주주권 얻어 드릴 테니까요.”


최승진의 확언을 들은 박용진은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최승희는 그렇게 박용진을 돌려보냈지만 마음은 갑갑했다. 최승희는 화랑연환도법서를 두고 모두가 좀 더 다투기를 바라고 있었다. 아소와 박용진이 비밀 협약을 맺을 걸 박용준에게 알려 주었던 것도 아소와 박용준을 서로 믿지 못하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힘이 한쪽으로 쏠리지 않아야 박용진, 아소, 박용준은 더 심하게 싸우고 힘은 소진될 것이다. 그런데 이제 일이 틀어져버렸다. 최승희는 창 너머로 서울의 스카이라인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미세먼지 때문인지 뿌연 하늘이 보기 안 좋았다.


‘아소로부터 위임장을 받았다면 박용준은 무었을 하려할까? 분명 주주총회를 열려 할 것이다.’

최승희는 그 부분에서 시작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

그날 오전 김 비서실장은 갑자기 박 회장의 부름을 받았다. 12시까지 용일 호텔로 와 현황 보고를 하라는 지시였다. 현황 보고는 수요일 오후에 잡혀있었지만 갑자기 당겨진 것이다. 김 비서실장은 왜 갑자기 업무 보고를 하라는 이유를 몰라 당황했다. 박 회장이 정신이 왔다 갔다 한다지만 정신이 돌아올 때도 많았다. 그런 때 현황을 잘못 말했다가 호되게 욕먹었던 일이 종종 있었다.


김 실장은 부랴부랴 자료를 챙기고 용일 호텔 로열패밀리 룸으로 달려갔다. 박 회장은 거실에서 최승희와 함께 차를 마시고 있었다. 박 회장은 앞에 공손히 서있는 사람이 누군지 모르는 것처럼 김 비서실장을 한참 봤다. 마침내 박 회장이 입을 열었다.


“김 실장 아닌가?”


“예, 회장님. 현황보고를 하라고 해서요.”


“내가?”


“예. 그렇게 연락을 받았습니다.”


김 비서실장이 당혹함을 숨기며 대답하자 최승희가 웃으며 박 회장에게 말했다.


“아까 현황 보고를 받아야겠다고 김 실장님을 부르라고 하셨잖아요? 하남 신도시 수주 건이 어떻게 돼가나 궁금해 하셨잖아요?”


최승희가 말하자 박 회장이 바로 반응했다.


“아참, 그랬지, 그래. 김 실장, 하남 쪽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어?”


박 회장은 건설업이 본업이라 파악이 아주 빨랐다. 김 실장은 긴장했다.


“예, 2지구는 확실히 우리 단독으로 결정되었습니다. 4지구가 문제인데, 그곳은 아무래도 컨소시엄을 구성해야 될 것 같습니다.”


최승희가 미소를 띠며 일어섰다.


“실장님, 자리에 앉으셔 말씀하세요. 저는 잠시 나가 있을게요.”


박 회장 옆에 끝까지 붙어 앉아 그룹 상황을 다 들을 수도 있었지만 최승희는 오늘만은 눈치 빠르게 자리를 비켰다. 김 비서실장은 주제 넘는 짓을 하지 않는 최승희를 마음에 들어 하며 자리에 앉아 설명을 계속했다. 30분이 넘어서자 박 회장의 말은 맥락에서 멀어졌다. 김 비서실장은 일어서야 할 때라는 걸 알았다.


“회장님, 나머지 부분은 원래대로 수요일 오후에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그러는 게 좋겠군. 그땐 컨소시엄도 구성되어 있겠지?”


그건 불가능했지만 김 실장은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열심히 노력해 보겠습니다.”


김 실장이 인사를 하고 거실을 나왔다. 주방에서 최승희가 달려 나왔다.


“어머, 김 실장님 돌아가시게요? 지금 점심시간인데 식사나 같이 하고 가시죠.”


“아, 괜찮습니다.”


“아니에요. 회장님이 식사 시간에 호출하셔서 제가 죄송하네요. 잠깐만 기다리세요.”


최승희는 거실로가 박 회장을 휠체어에 태워 나왔다.


“오늘 점심은 김 실장님도 같이 하시는데 괜찮죠?”


“김 실장도? 그럼, 그럼. 괜찮지.”


“유이 아가씨도 같이 할까요?”


“유이도? 그럼 그래야지. 내 딸 유이도 같이 먹어야지.”


박 회장은 최승희의 말은 무조건 들어주고 있었다. 김 실장은 그런 모습을 보며 최승희에 대해 왠지 모를 두려움을 느꼈다. 곧 유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유이야, 유이야!”


박 회장은 유이를 부르며 손을 잡았다. 유이는 그런 박 회장에게 어색한 웃음을 보냈다. 오랜 동안 박회장 측근으로 일해 온지라 박 회장 개인사에 대해서도 잘 아는 김 실장은 박 회장에게 웃는 유이를 보며 깜짝 놀랐다. ‘역시 돈 때문인가!’ 김 실장은 유이에게 고개 숙여 인사를 하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곧 다이닝 룸의 테이블에 네 명이 둘러앉았다. 박 회장의 양 옆으로 최승희와 유이가 앉고 맞은편에 김 실장이 앉았다. 구운 한우 갈비와 전복죽이 주 메뉴였다. 모두가 박 회장이 좋아하는 것이었다. 최승희는 박 회장 옆에 바싹 붙어 앉아 식사 시중을 들었다. 갈비에서 살만 잘라내 입에 넣어주고 죽은 거의 떠먹여주다시피 했다. 그러다 문득 최승희가 김 실장에게 물었다.


“용일 홀딩스 주총이 열린다던데 혹시 들어보셨어요?”


김 실장은 입으로 가져가던 젓가락을 잠시 멈췄고 놀라 되물었다.


“주총요?”


“예, 그런 소문이 돌더라고요.”


최승희가 예쁜 눈을 반짝이며 대답했다. 물론 이 말은 최승희가 짐작으로 한 말이었다. 박 회장의 눈이 갑자기 커지며 버럭 소릴 질렀다.


“아니, 주총이라니! 어느 회사가 주총을 연다는 거야?”


김 비서실장은 가슴이 뜨끔했다. 사실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은밀히 주총을 준비하는데 도와달라는 박용준의 전화를 받았던 터였다. 정기 총회가 아닌 임시 총회라는 데서 박용준의 의도는 뻔한 것이었다. 김 비서실장은 박 회장이 있는 자리에서 최승희가 먼저 이 얘기를 꺼냈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알아챘다. 김 비서실장의 등에는 자신도 모르게 땀이 흘렀다.


“그런 소문이 있기는 합니다만, 회장님 허락 없이 어떻게 주총이 열리겠습니까? 그냥 낭설일 뿐입니다.”


김 비서실장은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부정했다. 갑자기 유이가 숟가락을 놓고는 아래를 보며 힘없이 말했다.


“나는 일본에 다시 갈까 봐요.”


박 회장이 퍼덕 놀랬다.


“그게 무슨 말이냐? 왜 갑자기 간다는 거야?”


“김 실장님은 아니라지만, 소문은 무성해요. 누군가가 ‘성인 후견인’을 신청한다는 얘기도 있고요, 그렇게 되면 내가 여기에 있을 수 있겠어요? 그런 꼴 되기 전에 일본에 가서 하던 공부라 계속 할까 해서요.”


유이가 떠난다는 말에 화가 났는지 박 회장의 음성이 높아졌다.


“성년 후견인이라니, 그게 뭐야?”


최승희는 사전에 얘기가 없었는데도 박자를 맞추는 유이에게 웃는 눈빛은 보내며 박 회장을 달랬다.


“그런 나쁜 말은 아실 필요가 없어요.”


“유이가 갑자기 떠난다지 않아?”


“유이 아가씨가 회장님 곁에 있도록 제가 만류할게요. 걱정 마세요.”


최승희는 박 회장에게 죽을 한 숟갈 먹인 후 유이에게 물었다.


“유이 아가씨는 어디서 그런 소문을 들었어요?”


유이는 최승희를 보지 않고 김 비서실장을 보며 말했다.


“아소 회장이 왔다고 하지 않아요? 박 부회장님과 만났다는 소문이 있던데 김 실장님은 거기에 관해서 아세요?”


유이는 박용진과 함께 직접 아소를 만났었지만 그런 티는 하지 않고 전혀 모르는 것처럼 김 실장을 봤다.


“예? 아소 회장이요? 그건 금시초문인데요.”


김 비서실장보다 박 회장이 더 놀랬다.


“아소? 아소? 그 친구가 왜 와? 왔으면 나를 봐야지 왜 용준이를 만나?”


“회장님, 그냥 소문이라잖아요. 진정하세요.”


최승희가 웃으며 박 회장을 달랬다. 박 회장은 최승희의 웃는 얼굴에 말을 멈추고 흐리멍덩한 눈을 두세 번 끔뻑거리더니 김 실장에게 말했다.


“김 실장, 지금 당장 아소 회장과 통화를 해 봐야겠어. 당장 연결 좀 해.”


자신의 돈과 지위를 지키겠다는 의지는 인간의 본능이었다. 박 회장처럼 자수성가로 거대 기업을 이룬 사람은 그것에 대한 집착이 더 강했다. 오래 전부터 박 회장을 모셔온 김 실장은 박 회장의 욕망과 성질을 알고 있었다. 김 비서실장은 밥을 먹다말고 급하게 일어서 휴대폰을 꺼내들고 방을 나갔다. 십 분이 지나고 박 회장 앞의 그릇이 치워진 후에 김 비서실장이 돌아와 심각할 얼굴이 되어 박 회장에게 보고했다.


“아소 회장의 비서와 연락을 취해 봤는데, 지금은 통화하기 어렵다고 합니다. 비서실로 연락을 해도 연결이 되지 않는다 하고요.”


유이가 일어서 주머니에서 전화를 빼들었다.


“회장실의 나카모토 전무와 저희 회장님이 또 절친이지 않아요? 일본에 있을 때, 저도 인사한 적이 있는데, 전무님께 한번 제가 한번 전화를 해 볼게요.”


김 실장은 얼굴이 굳어졌지만 박 회장은 좋아했다.


“그래, 유이야, 아소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네가 나카모토에게 알아봐라.”


유이는 그 자리에서 능숙한 일본어로 나카모토에게 전화를 했다. 유이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잠시 후 유이가 전화를 끊고 평소와는 다르게 난감한 어투로 망설이며 말했다.


“아소 명예 회장이 용일 그룹 후계 문제 때문에 한국에 갔다는 소문이 있던데, 사실이냐면서 오히려 제게 물었어요.”


박회장이 고개를 높이 들어 앞에 서있는 김 비서실장을 봤다. 어떤 말을 하려하지만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박 회장은 말하기를 포기하고 얼굴을 숙였다. 박 회장의 입에서 희미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아소가, 용준이랑···.”


박 회장은 머리를 뒤로 해 휠체어에 기대고 멍한 얼굴로 생각에 잠겨 들었다. 최승희가 김 실장을 보았다.


“이만 돌아가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김 실장은 진작 이곳을 벗어나고픈 마음이 굴뚝같았다. 최승희의 말이 끝나자마자 박회장에게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회장님,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박 회장은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 김 비서실장이 떠나자마자 박회장이 머리를 꼿꼿이 세웠다.


“내가 이 모양이니, 아무래도 용준이가 무슨 일을 저지르고 있는 것 같아.”


최승희가 박 회장의 손을 잡고 다정스레 말했다.


“회장님이 이렇게 계신데 무슨 일을 저지르겠어요?”


“아냐, 그 놈은 욕심이 많았어. 이 자리에 앉는다면 단단히 사고 칠 놈이야.”


박 회장이 곁에 서있는 유이를 봤다. 눈에는 불안감이 가득했다.


“유이야, 유이야, 아소랑, 용준이가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지 네가 좀 더 알아봐라. 나카모토에게도 다시 전화하고, 부회장으로 있다가 퇴직한 가토에게도 전화해봐. 너도 알지 않니? 가토 말이야. 가토 그 친구가 아소랑 친하니 뭔가 알려줄지도 몰라.”


박 회장이 유이를 손을 잡았다.


“내가 전화를 하면 좋겠는데, 이젠 일본어고 뭐고 말이 잘 안 나와.”


최승희가 옆에서 다시 달랬다.


“이렇게 잘 하시는데 왜 그런 말씀을 하세요.”


박 회장은 힘이 드는지 다시 휠체어에 머리를 기댔다. 곧 눈처럼 퀭한 침묵 속으로 들어갔다. 박 회장은 잠이 들었다. 박 회장에게 무릎 담요를 덮어주고 나오는 최승희를 유이가 붙잡았다.


“이젠 어쩔 셈이에요?”


“우리가 먼저 주총을 해야죠.”


“박용진 사장을 앞세우고요?”


최승희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은요?”


“나는 선욱이의 권리만 지키면 돼요.”


“그 권리의 한계가 뭘까······”


유이가 비웃으며 최승희를 남겨두고 거실을 나갔다. 유이는 다른 방으로가 옆의 빌딩과 하늘을 보며 카토와 나카무라에게 전화를 했다. 내용은 그냥 안부 인사였다. 그러다 통화가 끝날 때 즈음 아소 회장이 박용준 부회장을 지지하고 있지 않냐고 슬쩍 운을 띄웠다. 카토도, 나카무라도 그런 것 같기는 하지만 잘 모른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유이는 ‘그런 것 같다’는 부분이 중요했다. 박 회장이 낮잠에서 깨어났다는 말을 듣자 유이는 박회장을 찾았다.


“유이야, 나카모토와 카토에게 전화를 해 봤느냐?”


박 회장이 자기 전 했던 말을 기억하지 못할까 유이는 걱정했다. 하지만 박회장은 유이를 보자마자 그것부터 물었다. 권력와 돈에 대한 집착의 발현이었다. 유이는 안도하며 걱정스레 말했다.


“카토도, 나카모토도 정확하게 말해주지 않아요. 하지만···”


“하지만 뭐냐?”


“뭔가가 있는 건 분명한 것 같아요.”


박 회장 옆에 바싹 붙어있던 최승희가 말했다.


“박 부회장님을 불러 직접 물어보는 게 어때요?”


유이가 반대했다.


“회장님이 묻는다고 바르게 답할 사람이에요? 차라리 박용진 사장을 불러 들은 게 없냐고 묻는 게 어때요? 뭔가 알고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최승희가 맞장구쳤다.


“그게 좋겠네요. 박용진 사장님이 의외로 발이 넓다는 소문이 있어요.”


박 회장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돌아다니며 싸우기나 하는 용진이 그놈이 제 형 욕밖에 더하겠어?”


유이는 평소처럼 자기와는 상관없는 일이라는 듯 무표정하고 딱딱하게 말했다.


“박 부회장 얘기를 듣자는 게 아니에요. 아소에 대한 이야기를 듣자는 거죠. 연락이 안 되는 아소와 박 사장이 어떤 정보를 주고받았을지도 모르니까요.”


유이도, 최승희도 박용진과 아소간의 거래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둘은 박회장에게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 박 회장은 멍한 표정으로 유이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용진이를 불러봐.”


최승희가 정부장에게 회장님의 말씀을 전했고 정부장이 박용진에게 전화를 했다. 박용진은 용일 호텔로 오는 동안 유이의 전화를 받았다.


“박 회장이 부를 거야. 아소와 용준의 관계에 대해 물을 건데, 모든 걸 다 말하지 마. 박 사장이 박 용준을 비난하면 회장님이 당장 의심할 거야. 그 정도 정신 상태는 돼. 그러니 알쏭달쏭하게 말하란 말이야.”


유이는 무심하게 말했다.


“그리고 박 사장과 내가 아소를 만났다는 것도 몰라. 그러니 절대 입 밖에 꺼내지 말고.”


“그럼 난 뭘 말하면 되는 데?”


유이가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아소가 주식 위임장을 박 용준에게 줬다는 것만 말해.”


“그럼 아버지가 주식을 나한테 줄려나?”


“여우같은 최승희가 무슨 공작을 펼치겠지. 내가 옆에서 보니까 그 여자 정말 구미호다.”


박용진이 희미하게 웃으며 맞장구쳤다.


“어련 하려고. 구미호도 그런 구미호가 없지.”


유이도 따라 웃으며 전화를 끊었다. 옆에서 최승희가 듣고 있었다. 유이가 자신을 구미호라고 말했을 때 최승희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유이가 물었다.


“구미호씨, 다음은 무슨 재주를 부릴 거예요?”


“너무하다! 날 그렇게 나쁘게 보다니.”


말은 그렇게 했지만 최승희는 기분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최승희는 작은 소리로 혼잣말처럼 유이의 질문에 대답했다.


“다음은 회장님이 하시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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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과 달과 바람과 칼(화랑연환도 편)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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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12장. 복수의 끝자락(3) 21.02.12 211 2 16쪽
49 12장. 복수의 끝자락(2) 21.02.09 211 2 13쪽
48 12장. 복수의 끝자락(1) 21.02.05 212 1 20쪽
47 11장. 추격과 습격(4) 21.02.02 218 1 18쪽
46 11장. 추격과 습격(3) 21.01.29 225 1 14쪽
45 11장. 추격과 습격(2) 21.01.26 197 1 14쪽
44 11장. 추격과 습격(1) 21.01.22 228 1 15쪽
43 10장.납치(4) 21.01.19 234 1 12쪽
42 10장.납치(3) 21.01.15 230 1 22쪽
41 10장.납치(2) 21.01.11 225 1 15쪽
» 10장. 납치(1) 21.01.08 214 1 25쪽
39 9장. 토모키루의 칼(5) 21.01.05 240 1 31쪽
38 9장. 토모키루의 칼(4) 21.01.02 242 1 13쪽
37 9장. 토모키루의 칼(3) 20.12.31 218 1 13쪽
36 9장. 토모키루의 칼(2) 20.12.28 207 1 17쪽
35 9장. 토모키루의 칼(1) 20.12.25 229 1 13쪽
34 8장. 유세나의 위기(6) 20.12.22 211 2 26쪽
33 8장 유세나의 위기(5) 20.12.18 209 2 18쪽
32 8장. 유세나의 위기(4) 20.12.15 208 3 13쪽
31 8장. 유세나의 위기(3) 20.12.12 231 2 16쪽
30 8장. 유세나의 위기(2) 20.12.08 222 2 23쪽
29 8장. 유세나의 위기(1) 20.12.04 213 2 14쪽
28 7장. 백산의 위기(5) 20.12.01 209 2 23쪽
27 7장. 백산의 위기(4) 20.11.27 217 2 13쪽
26 7장. 백산의 위기(3) 20.11.24 215 2 12쪽
25 7장. 백산의 위기(2) 20.11.20 276 2 17쪽
24 7장. 백산의 위기(1) 20.11.15 234 2 14쪽
23 6장.배반의 배반(3) 20.11.09 240 2 19쪽
22 6장.배반의 배반(2) 20.11.05 240 2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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