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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성케이투 님의 서재입니다.

산과 달과 바람과 칼(화랑연환도 편)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대체역사

완결

행성케이투
작품등록일 :
2020.08.11 13:41
최근연재일 :
2021.02.16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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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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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쪽

1장.화랑연환도법서(花郞連環刀法書)(1)

DUMMY

1장. 화랑연환도법서

1.

달 없는 밤이었다. 순연한 어둠에 바람도 끼어 들지 못하는지,5월 끝자락의 무성한 나뭇잎이 부딪치는 소리도 없었다. 지리산 거림계곡 초입에 자리한 호국사는 조용하다 못해 으스스하기까지 했다.

호국사 산문에서 멀찍이 떨어진 시멘트 길에 검은 밴 5대가 닿았다. 차 두 대가 간신히 지날만한 좁은 길에 밴이 열을 지어 서자 30명의 검은 양복의 사내들이 마스크를 하고 쇠파이프와 손도끼를 들고 조용히 차에서 내렸다. 그들은 길 옆 나무 아래로 몸을 숨긴 채 어두운 길을 소리 없이 올라갔다. 사내들은 잠그지 않은 천왕문을 조용히 밀고 절 안으로 들어와 대웅전 오른쪽에 있는 성보각에 닿았다. 신라 때 화랑이 수도하던 곳이라는 호국사의 보물을 모아놓고 전시해 놓은 전각이었다. 절 마당 한 구석의 보안등 불빛을 받으며 「특별전시회 : 화랑의 숨결」이라는 현수막이 성보각 처마에 길게 걸려 있었다.


검은 양복의 사내 들 중에서도 유달리 눈매가 날카롭고 깡마른 40대의 안 좌사라는 사내가 눈짓을 하자 뒤에 있던 사내 둘이 달려들어 손도끼로 성보각 나무문의 자물쇠를 깨기 시작했다. 문의 자물쇠가 떨어져 나가자 곧 나무문이 밖으로 젖혀지며 비밀번호를 눌러야 열리는 여닫이 유리문이 나타났다. 안 좌사가 들고 있던 쇠파이프로 유리를 내리쳤다. 안 좌사의 힘이 대단하지 특별히 제작된 1㎝ 두께의 유리가 펑 하는 소리와 함께 한 번에 깨어져 내려앉았다. 보안 시스템의 경보가 요란스레 울렸다. 시끄러운 소리에도 자물쇠를 깬 사내가 스스럼없이 안으로 손을 넣어 잠금장치를 옆으로 밀어 문을 열었다. 랜턴을 켠 안좌사가 전각 안쪽으로 곧장 들어갔다. 2주전 전시회가 시작되자 안 좌사는 이 영운 교수, 마사코와 함께 이 성보각을 세 번이나 찾아와 그들이 찾는 책자가 있는지를 확인했던 터였다.


안 좌사는 곧 책자가 전시되어 있는 유리 상자 앞에 섰다. 두터운 유리장 안에서 ‘화랑연환도법서’(花郞連環刀法書)라는 표지의 책이 랜턴의 불빛을 받고 있었다. 안 좌사는 쇠파이프를 들어 유리장을 내리쳤다. 두터운 유리가 둔탁한 소리와 함께 깨어져 흩어졌다. 바깥에서 울리는 경보음에 유리장에 달린 경보음이 더해졌다. 안 좌사는 빠르게 책을 집어 유리가루를 털고 품안에 넣은 뒤 성보각을 나왔다.


마당 한 가운데에서 쌍도를 등에 교차해 매고 복면을 한 마사코가 기다리고 있었다. ‘도둑이야!’ ‘누구냐!’ 하는 요란한 고함과 함께 성보각 뒤쪽 요사채에서 잠자던 호국사 스님들이 뛰어나왔다. 마사코는 그 스님들은 신경 쓰지 않고 안 좌사에게 손을 내밀었다. 안 좌사는 품에서 책을 꺼내 마사코에 던졌다. 경찰이 지리산 거림계곡까지 오기까지는 아무리 빨라도 20분 이상은 돼야 할 것이고, 도착한대도 안 좌사나 마사코의 상대는 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무술을 익힌 호국사 스님들은 달랐다. 마사코가 책을 가지고 절을 떠나는 동안 안좌사가 호국사 스님들을 막아 낼 요량이었다.


도법서를 받은 마사코가 몸을 돌리는 순간 절 마당과 요사채를 가른 낮은 담장을 뛰어넘어 스님 한명이 마사코 앞을 막았다. 호국사의 호법으로 있는 혜공이었다. 혜공은 50대로 키가 크고 건장했다. 전래 사찰무술뿐만 아니라 세속의 무술과 병장기에도 밝고 내력도 상당한 고수였다.


“도둑놈, 어디를 가느냐?”


혜공은 마사코가 무엇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 채 소릴 질렀다. 내공이 실린 중후한 소리가 절 마당을 울렸다.

마사코는 혜공이 내지른 소리에 담긴 내력에 멈칫 했으나 곧 등에서 보통보다 약간 짧은 일본도를 뽑아 혜공에게 달려들며 위에서 아래로 비스듬히 내려 그었다. 진검이 뿜어내는 서늘함에다 마사코의 내공이 더해져 예리하고 차가운 검기가 혜공의 몸으로 베어 들어왔다. 혜공은 성보각의 보안 경보가 울리자 단순히 도둑이라 생각해 아무른 병장기를 가져오지 않았다. 그런데 복면의 상대가 진검으로 공격했고 그 검기가 예사롭지 않자 놀라고 당황해 몸을 급하게 돌려 땅을 구르며 일본도를 피했다.


마사코는 내리치는 칼의 방향을 그대로 틀어 구르는 혜공을 따라 찔러 들어갔다. 칼 따라 몸이 가는 것이 아니라 마음 따라 칼을 제어하는 걸 보고 혜공은 더욱 놀라며 땅을 데굴데굴 굴러 자신을 찌르는 칼을 피했다. 혜공은 상대의 몸집으로 보아 여자라고 생각하며 자신을 땅에 구르게 할 정도의 여자 고수를 떠올려봤지만 아무도 생각나지 않았다. 마사코는 연속적인 찌르기 공격이 실패하자 칼을 땅에 그으며 혜공을 살짝 뛰어넘었다. 혜공은 허리와 다리에 힘을 넣어 재빨리 몸을 일으켜 몸으로 드는 칼을 피했다.


마사코가 몸을 돌리며 등에서 일본도 하나를 마저 뽑아 쌍도를 교차하며 혜공의 위와 아래를 동시에 베어 들어왔다. 혜공은 그대로 훌쩍 뛰어 칼을 피하며 공중에서 몸을 회전해 마사코의 머리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육중한 내력이 실린 주먹바람이 위에서 내려오자 마사코은 고개를 숙이며 땅에 굴러 주먹을 피한 뒤, 반동을 이용해 몸을 세워 뒤쪽의 혜공을 돌아 보고지도 않고 머리위로 쌍도를 번갈아 휘둘러 혜공의 접근을 막고는 몸을 돌려 같은 초식으로 혜공을 공격했다. 상대가 예사롭지 않는 검술의 고수라 맨손뿐인 혜공은 다시 뒷걸음치며 물러 날 수밖에 없었다.


이를 기회로 마사코는 칼에 더욱 기를 모아 혜공 쪽으로 치고 들어갔다. 물러나던 혜공이 옆으로 멀리 땅을 굴러 마사코의 살기어린 공격을 피했다. 뒤로 물러서던 혜공이 갑자기 옆으로 굴러 칼을 피하자 마사코도 옆으로 굴러 따라오며 혜공을 향한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혜공은 땅에 엎드린 상태에서 훌쭉 공중으로 솟구쳐 굴러왔던 쪽으로 떨어지며 몸을 바로 세웠다. 마사코가 움직인 것과 반대로 움직여 칼의 들어오는 틈을 주지 않으려는 임기응변이었다. 마사코도 몸을 세워 이번에는 한 칼로 목을 찌르고 다른 칼로 복부는 베는 초식으로 혜공을 공격해 들어왔다. 칼이 하나라면 공격자의 틈을 노려 반격 할 수도 있겠지만 칼이 위아래로 나뉘어 들어오니 틈이 보여도 쉽사리 반격 할 수 없었다. 그러나 혜공은 침착하게 칼이 가까이 오기를 기다려 목으로 들어오는 칼을 머리로 돌려 피하면서 몸을 공중에 가로로 띄워 복부를 베어오는 칼을 몸 아래로 흘러 보낸 것과 동시에 몸을 회전시키며 다리로 마사코의 몸통을 가격했다. 공중에 몸을 수평으로 누인 놀라운 경공술에 칼을 당겨 막지 못한 마사코는 그대로 다리에 얻어맞아 헉 하는 소리를 내며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마사코가 혜공 쪽으로 뛰어들어 왔기에 힘이 집중된 혜공의 발등이나 발끝에 맞은 것이 아니라 정강이에 맞았고, 맞는 순간 마사코도 본능적으로 내력을 발동시켜 타격을 밀어내었기에 정신을 잃거나 뼈가 부러질 정도의 충격을 받지는 않았다. 예상치 못한 절기에 당한 마사코는 칼을 집고 재빨리 몸을 일으켰지만 다시 공격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혜공도 마사코의 예사롭지 않는 검술이 두려워 연이어서 공격하지 않았다. 둘은 빈틈을 찾으며 서로를 노려보며 서있었다. 안 좌사는 자신에게 덤벼든 안국사 스님의 발 공격을 피하며 마사코에게 소릴 질렀다.


“그만 싸우고 빨리 차로 가.”


안 좌사를 공격한 스님의 발차기는 힘 있고 날카롭긴 했지만 안 좌사의 상대는 아니었다. 스님의 공격과 동작에는 무수한 틈이 있었다. 한번 공격이 빗나가자 몸을 돌리며 감았던 다리를 다시 뻗는 스님의 안쪽으로 파고 들어가 안 좌사는 주먹으로 스님의 가슴에 일격을 날렸다. 갈비뼈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스님은 억 하는 소리를 내며 날아가 성보각 앞에 떨어졌다.


그러나 호국사 스님을 이긴 건 안 좌사뿐이었다. 수적으로 우세하고, 손도끼와 쇠파이프 같은 무기를 들었지만 안좌사가 데리고 온 사내들은 성보각을 열었던 두 명을 제외하고는 진주나 사천에서 긁어모은 동네 조폭이나 양아치였다. 절에서 수련의 일환으로 규칙적이고 혹독하게 무술을 닦은 호국사 스님들의 상대가 애초부터 아니었다. 손에 무기를 들었다 해도 원래 실력에서 차이가 나면 맨손보다 못할 때가 많다. 상대방의 회피와 반격은 생각지 않고, 손도끼나 쇠파이프만 믿고 거침없이 몸을 놀렸던 검은 양복의 사내들은 바로 스님들의 주먹에 얻어맞고 발길에 채여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거기에 요사채에서 늦게 나온 스님에게는 목봉이나 죽도가 들려있었다.


검은 양복 사내들은 여기저기에서 스님들에게 제압당하며 쓰러지기 시작했다. 그런 와중에 ‘빨리 차로 가라’는 안 좌사의 말은 후퇴 명령이나 마찬가지였다. 검정 양복의 사내들은 도망치기 시작했다. 마사코는 안 좌사의 외침을 들었지만 혜공의 견제에 쉽게 움직일 수 없었다. 안 좌사는 꼼짝하지 않는 마사코를 보자 초조해져 자신을 잡으려는 또 다른 스님의 공격을 무시하듯 피하며 혜공에게로 와 들고 있던 쇠파이프를 비스듬히 휘둘렀다. 혜공은 예상치 못한 내력을 느끼고 어깨를 틀어 쇠파이프를 피하며 주먹으로 안좌사의 오른팔을 공격했다. 안 좌사는 혜공의 움직임을 예상한 듯 휘둘렀던 쇠파이프를 당겨 몸을 막으면서 발로 혜공의 몸통을 찼다. 혜공은 뻗었던 주먹을 급하게 거두들이며 다른 손으로 안좌사의 발을 막고 몸을 띄워 발차기로 안 좌사를 공격하려 했다. 순간 측면에서 마사코의 칼이 들어왔다. 혜공은 딛고 있을 발에 힘을 넣어 그대로 공중으로 떠올라 칼을 피하며 뒤로 물러섰다.


그 틈에 마사코가 몸을 돌려 천왕문 밖으로 달려 나갔다. 혜공이 쫒으려 했지만 허벅지로 안좌사의 쇠파이프가 날아들었다. 혜공은 한쪽 다리를 번쩍 들어 쇠파이프를 피하며 든 다리를 틀어 돌려 안 좌사에게 발을 날렸다. 안 좌사는 몸을 굽혀 발을 피한 후 바로 몸을 세워 자신의 발을 날렸다. 혜공도 안좌사의 발이 오는 쪽으로 자신을 발을 날려 두 발의 발바닥이 공중에서 부딪쳤다. 둘은 상대방의 내력에 동시에 뒤로 밀려나 주저앉았다.


“호법님 이거 받으세요.”


뒤에서 스님 한명이 목봉을 던졌다. 혜공은 허리에 반동을 주어 일어서며 던져진 목봉을 잡아 쥐었다. 안 좌사의 쇠파이프가 머리로 날아들었다. 혜공은 목봉으로 쇠파이프를 쳐내고는 바로 목봉을 휘돌리며 안 좌사에게로 돌진했다. 혜공의 목봉이 일으키는 바람소리가 맹렬했다. 안 좌사는 밀려난 쇠파이프를 가슴 앞에 세우고, 단전에서 기를 모아 올린 뒤 쇠파이프를 바람개비처럼 돌려 머리로 들어오는 혜공의 목봉을 막았다. 팍 하는 소리를 내며 쇠와 나무가 부딪혀 서로 움직이지 않았다.


안 좌사와 혜공은 각자의 내력을 모두 동원해 상대방의 무기를 밀고 있었다. 그러나 주위 사정은 혜공 편이었다. 검정 양복의 사내는 거의 모두 호국사 스님에게 제압당하고 쓰러져 천왕문 밖으로 도망간 사람은 열 명도 되지 않았다. 안 좌사는 도법을 가진 마사코가 이미 절을 나갔고, 여기서 내력 대결을 계속 하고 있다간 호국사 스님들에게 포위당할게 빤하다 보고 모든 힘을 다해 혜공의 목봉을 밀어 간극의 틈을 만들면서 몸을 틀었다. 혜공의 힘이 한쪽으로 살짝 돌려졌다. 범인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틈이 고수에게는 땅과 하늘만큼 벌어진 간격이 될 수 있다. 안 좌사는 그 틈을 타 몸을 굴려 혜공의 목봉이 미치는 거리에서 벗어났다.


안 좌사는 바로 절담을 향해 달려가 담을 뛰어 넘었다. 혜공도 내력을 거두고 안 좌사를 쫓아 담을 넘었다. 안 좌사가 넘어간 담 밖은 거림계곡으로 내려가는 급격한 경사지였다. 칠흑 같은 밤에 보이는 건 없고 단지 멀리서 누군가 계곡물을 건너는지 철벙거리는 소리만 날 뿐이었다. 혜공은 안 좌사가 계곡 건너편으로 도망치는 소리라 생각하고 나무 가지와 돌무더기를 헤치고 밟으며 소리를 따라 계곡을 건넜다. 그러나 단지 소리만을 따라 어둠에 파묻힌 지리산의 울창한 숲을 뚫고나가는 건 애초부터 무리였다. 혜공은 추적을 포기 할 수밖에 없었다.


혜공은 차로 가라는 그들끼리의 말을 떠올리며 계곡에서 올라와 산문을 향해 길을 뛰어 내려갔다. 산문 밖에는 안국사 스님에게 제압당해 떠나지 못한 밴 3대가 있었고 목봉과 죽도를 든 몇몇 스님들이 밴 주위를 돌아다니며 감시하고 있었다.


“쌍도를 사용했던 여자는 어디로 갔나?”


혜공의 물음에 한 스님이 분에 찬 듯 씩씩거리며 대답했다.


“우리가 쫓아왔을 때 길을 내려가는 차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 차를 타고 도망갔는지 보이지 않았습니다.”


혜공이 어쩔 수없이 절로 돌아가기 위해 몸을 돌렸을 때 경찰차 사이렌이 들렸다. 혜공을 경찰과 함께 절로 돌아왔다. 절 마당에는 검정 양복의 사내들이 줄지어 무릎을 꿇고 있었다. 나이 칠십을 넘긴 주지스님이 침울하게 경찰을 맞아 성보각으로 안내했다.


“없어진 건 ‘화랑연환도법서’라는 책뿐입니다.”


“귀중한 겁니까?”


마당에 줄지어 무릎을 꿇고 있는 사내들을 보고는 놀라고 긴장한 늙수그레한 경찰이 물었다.


“화랑의 도법에 관해 설명해 놓은 책이라 합디다. 신라의 도법에 대해 논했다고 했지만, 오래전 그 책을 조사한 어떤 전문가는 조선시대에 쓰여진 것으로 도법에 대한 감상과 논고 정도이지 실제 도법서는 아니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저희들도 수장고에 모셔만 놓고 상세한 내용은 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무술에 관해 논한 책은 희귀하고 드물어 상당한 가치가 있다고는 들었습니다만.”


주지 스님은 책에 대해 잘 모르는 것이 겸연쩍은지 작은 소리로 말하며 합창을 했다.


“수장고에 있던 책이 왜 나왔습니까?”


“이 절에서 화랑들이 무술을 연마했다고 알려져 있지 않습니까? ‘화랑의 숨결’이라는 주제로 경상대의 도움을 받아 절이 가지고 있던 화랑에 대한 자료와 무구들을 전시하는 행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경찰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성보각 밖으로 나가 무릎을 꿇고 있는 사내 앞에 섰다. 경찰이 몇 가지 질문을 했지만 자신들은 용역 업체의 소개로 일당을 받고 왔을 뿐이라는 말만 했다. 먼저 출동한 경찰이 지원을 요청해 새벽녘이 되자 정장 입은 사내들을 줄줄이 수갑을 차고 경찰 버스에 올라 절을 떠났다. 지방 신문 기자 몇이 와 사진을 찍었지만 정작 신문에는 한 줄짜리 기사만 실렸을 뿐, 크게 다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혜공은 자신이 무능해 절의 보물을 훔친 도둑을 잡지 못했다는 자괴감에 괴로워했다. 자기와 싸웠던 자들이 여간내기가 아닌 고수였다는 것을 작은 변명거리로 삼을 수 있었지만, 30년 동안 수련한 무술이 고작 2명에 가로 막혀 절의 보물을 잃게 했다는 자책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시간이 갈수록 혜공의 자괴심은 커져갔고 그만큼 그들에 대해 의혹과 자기 손으로 도법을 되찾겠다는 결의도 깊어졌다.


*****


안 좌사는 어둠속에서 산자락 하나를 넘어 동트기 전 지방도로와 마을길이 교차 하는 삼거리 앞에 섰다. 주변은 상점이나 집이 없는 황량한 산골이었다. 계획한 대로 마사코가 타고 있는 밴이 곧 나타났다. 안 좌사를 태운 밴은 희미한 새벽빛을 받으며 서울로 내달렸다.


“책은?”


안좌사의 물음에 한국인과 별 차이 없는 발음으로 마사코가 간단히 대답했다.


“품에 가지고 있어요.”


“좀 보면 안 될까?”


“아소 회장님과 박 부회장님이 보기 전에는 안 되는 걸 알잖아요?”


복면을 거둔 마사코가 눈을 살짝 찌푸렸다. 이제 30대 중반으로 어릴 때부터 아소 집안의 무사로 자란 마사코는 아소 家에 대한 충성심이 절대적이었다. 안 좌사는 도법서를 보는 걸 포기하고 눈을 감고 어제 밤 싸움에 대해 돌이켜보았다. 자신과 대결했던 스님의 실력이 상당했었다. 만약 스님이 처음부터 무기를 가지고 일대일로 싸웠다면 절을 벗어나기 어려웠을 것이다. 30년 가까이 여기저기를 떠돌며, 심지어 중국까지 가 무술을 배우고 연마했지만 한국의 산속에만 있었을 스님 하나 제압하지 못했다는 자조가 안 좌사의 가슴에서 올라왔다.


“그 스님 말이야, 정말 고수 아니었나?”


안 좌사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래요. 일대일로 싸웠더라면 곤란했을 거예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대답한 마사코도 어제 밤의 싸움을 복기하고 있었다. 호국사라는 절이 스님이 모여 무술을 수련하는 곳이라 아주 쉽지는 않을 것이라 예상은 했지만 자신을 도망치게 할 만큼의 고수가 있었다는 점은 충격이었다. 아소가에 속해 어릴 때부터 근 20년을 닌자 무술에서 중국 검술까지 익혔지만 산골짜기에 숨어있는 중에게 도망쳐야 했다는 사실을 생각하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안 좌사는 용기를 내어 개인적인 질문을 했다.


“왜 아소家를 위해 일하지?”


“조상대대로 아소家의 무사였으니까요. 이번 대에는 남자 없이 딸 하나인 내가 아소 집안의 무사가 되는 건 당연한 일이죠.”


마사코는 자신의 숙명이 당연하다는 듯 담담히 말하고는 안 좌사에게 되물었다.


“그럼 안 좌사는 왜 박용준 부회장을 위해 일해요?”


“돈을 받으니까! 그것도 많은 돈을 받으니까. 요즘 세상에 나 같은 무술가를 쓸모 있다 인정해 임원 대우를 해주겠어? 난 이래 뵈도 용일 그룹 상무야.”


“그건 알겠는데 왜 별명이 안 좌사에요?”


“중국에서 2년간 권법을 배웠는데, 그때 날 가르쳤던 분이 한 무술 영화에 나온 좌사와 닮았다고 붙여 준거야. 나도 나쁘지 않는 것 같아 본명을 감추기 위해 줄곧 사용하고 있지.”


왕복 4차선 국도에 들어선 밴이 고속도로를 향해 속도를 올렸다. 밤새 잠을 자지 못한 두 사람은 이내 잠이 들었다. 밴이 서울에 도착한 건 오전 시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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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12장. 복수의 끝자락(1) 21.02.05 217 1 20쪽
47 11장. 추격과 습격(4) 21.02.02 220 1 18쪽
46 11장. 추격과 습격(3) 21.01.29 227 1 14쪽
45 11장. 추격과 습격(2) 21.01.26 199 1 14쪽
44 11장. 추격과 습격(1) 21.01.22 233 1 15쪽
43 10장.납치(4) 21.01.19 236 1 12쪽
42 10장.납치(3) 21.01.15 234 1 22쪽
41 10장.납치(2) 21.01.11 227 1 15쪽
40 10장. 납치(1) 21.01.08 217 1 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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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9장. 토모키루의 칼(4) 21.01.02 244 1 13쪽
37 9장. 토모키루의 칼(3) 20.12.31 220 1 13쪽
36 9장. 토모키루의 칼(2) 20.12.28 210 1 17쪽
35 9장. 토모키루의 칼(1) 20.12.25 233 1 13쪽
34 8장. 유세나의 위기(6) 20.12.22 212 2 26쪽
33 8장 유세나의 위기(5) 20.12.18 211 2 18쪽
32 8장. 유세나의 위기(4) 20.12.15 210 3 13쪽
31 8장. 유세나의 위기(3) 20.12.12 234 2 16쪽
30 8장. 유세나의 위기(2) 20.12.08 223 2 23쪽
29 8장. 유세나의 위기(1) 20.12.04 215 2 14쪽
28 7장. 백산의 위기(5) 20.12.01 213 2 23쪽
27 7장. 백산의 위기(4) 20.11.27 219 2 13쪽
26 7장. 백산의 위기(3) 20.11.24 216 2 12쪽
25 7장. 백산의 위기(2) 20.11.20 279 2 17쪽
24 7장. 백산의 위기(1) 20.11.15 238 2 14쪽
23 6장.배반의 배반(3) 20.11.09 244 2 19쪽
22 6장.배반의 배반(2) 20.11.05 242 2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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