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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성케이투 님의 서재입니다.

산과 달과 바람과 칼(화랑연환도 편)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대체역사

완결

행성케이투
작품등록일 :
2020.08.11 13:41
최근연재일 :
2021.02.16 10:00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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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 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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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3쪽

8장. 유세나의 위기(2)

DUMMY

2.

상무암에는 폐사처럼 적막이 흘렀다. 백산은 천천히 암자로 들어가 건물을 살폈다. 상무암을 습격했던 무리가 철수하며 암자를 뒤졌던 모양으로 요사채는 엉망이었고 대웅전 불상에도 손을 댄 자국은 있었지만 없어진 물건은 없었다. 돈이라도 몇 푼 나가는 물건이 작은 암자에 있을 턱이 없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대웅전과 요사채를 돌아본 백산은 꿈을 떠올리며 왠지 긴장하며 나한각으로 가 문을 열었다. 불단에 놓였던 64개의 나한상들은 놓였던 곳에서 벗어나 흩어져 있고 몇 개는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상무암을 습격했던 자들이 귀중한 것은 아닌지 나한상을 들어 보다 넘어뜨리고 흩뜨려뜨린 것 같았다. 비록 넘어지고 흐트려진 게 있지만 나한각도 이상이 없다는 데 안도하며 백산은 나한각 바닥 마루에 앉아 잠시 숨을 골랐다. 그제야 백산이 돌아왔음을 알았는지 염초봉 위에서 산비둘기가 울기 시작했다.


유세나로 부터 문자가 왔다. 오늘도 아무 일 없이 학교에 나와 일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대낮 길거리에서 표창을 던져 유세나를 죽이려한 것은 분명 그럴 이유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 이유가 무의미 해졌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었다. 유세나로 부터 하루 두 번 그런 문자를 받을 때마다 백산은 이치에 맞지 않다는 어색함을 느꼈다. 백산은 작은 한숨을 쉬고 몸을 일으켰다. 이왕 들어와 앉았으니 나한각 부터 정리하기로 했다.


나한상은 높이가 대략 70cm정도였다. 재질은 소나무 같기도 하고 참나무 같기도 한데, 인상이나 채색 모두가 투박해 백산이 보기에도 예술적 가치는 없었다. 거기에 모든 나한상은 채색이 바래지고 세월의 때에 거뭇해져 길거리에 내놓아도 아무도 가져가지 않을 몰골이었다. 그런 나한상 64개가 8열로 8개의 층을 이루며 빼곡히 세워져 있었다.


임거사도, 진산도 나한상이 만든 시대를 말해주지 않았다. 무술가인 그들이 그런 것에 관심 없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백산도 그들과 마찬가지였다. 백산이 나한상을 이렇게 자세히 본적은 상무암에 들어와 처음이었다. 괜스레 미안해진 백산은 하나하나 정성들여 흩어지고 떨어진 나한상을 제자리에 놓았다. ‘나한을 보라’는 말이 도법서의 끝 구절마다 있다는 유세나의 말이 떠올라 나한 하나하나에 자꾸만 눈길이 멈췄다. 그러다 문득 64개의 나한상의 손 모양과 팔 위치가 조금씩 다르다는 걸 깨달았다. 십년 가까이 일주일마다 먼지를 털어낼 때는 무심코 넘겼던 차이였다.


백산은 놀라움과 호기심에 멍하니 그 자리에 서서 64개의 나한상을 처음부터 자세히 살폈다. 뭔가 자신이 알고 있는 것과 연관이 있는 듯 했지만 잡히지 않는 실마리에 안타까워하며 30번째 나한상까지 눈이 왔을 때, 머리를 망치로 맞는 듯 한 충격이 왔다. 백산은 떨리는 마음으로 요사채로 달려가 유세나의 노트를 집어 들고 나한각으로 돌아왔다. 노트를 펴 30번째 동작이 적혀있는 페이지를 열고 유세나가 휘갈겨 쓴 글을 읽었다. 나한상의 동작을 보며 해석 하지 못한 부분을 마음으로 그려 넣자 30번째 나한상이 뻗은 팔이 칼만 들지 않았을 뿐이지 유세나가 번역해 놓은 동작과 같았다.


백산은 훙분을 가라앉히고 유세나의 노트와 나한상의 동작을 비교해가며 하나씩 도법을 시현해 보았다. 번역되지 않는 부분이 많아 어색한 동작, 자연스럽지 않는 칼 움직임이 이어졌다. 그때마다 백산은 동작을 멈추고 해석된 부분의 앞뒤의 문맥과 나한상의 팔과 손 모양을 참고해 동작이 이어지도록 했다. 때로는 자신이 알고 있는 도법을 넣어봐야 할 때도 있었다. 한 동작 한 동작 드러나는 칼의 흐름은 물처럼 부드럽게 적의 빈틈을 파고들어 쇠처럼 강하고 단호하게 베었다. 여덟 개의 칼이 각자의 방향으로 동시에 움직인다면 가공할 파괴력을 낼 것 같았다.


백산의 상무암을 청소하다말고 해가 질 때까지 유세나의 노트와 나한을 보며 도법을 연구했다. 64개의 구절과 나한이 취하고 있는 자세를 비교하며 직접 동작을 취해볼수록 도법을 만든 의효대사의 의도가 무엇인지 이해가 되어갔다. 통일 속에 변화가 있고 변하는 가운데 강약이 있고 강약이 있는 중에 예기와 살기가 있었다. 그러나 백산은 부칙으로 딸려있는 10구절을 시현하는 데서 진도가 멈췄다. 그것을 시현해 보이는 나한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백산은 멈추지 않았다. 64개의 구절 속에서 비슷한 부분을 골라 앞뒤로 짜 맞추어 갔다.


시간은 쉬지 않고 흐르고 밤은 바다 속에 잠기듯 깊어갔다. 백산은 잠시도 쉬지 않고 해석된 부분과 글자로만 남아 있는 부분을 나한상의 자세를 참고삼아 비교해가며 시현해보았다. 나한각이 너무 좁아 백산은 결국 마당으로 나왔다. 동작이 어색하거나 막히는 부분, 다음 동작과 자연스럽게 이어지지 않는 부분, 상대에게 틈을 보이는 부분이라 생각되면 몇 번이나 바꾸어가며 실험하고 연구했다. 막히는 부분을 확인하고 나한상의 자세를 보기 위해 나한각을 수십 번 들락거렸다. 그렇게 부칙으로 딸린 10구절의 동작을 하나씩 완성해 갔다.


그러는 동안 새벽이 오는지 하늘 끝이 희뿌연 해졌다. 백산은 잠시 휴식을 갖기 위해 나한각의 마당에 앉았다. 숨을 돌리고 호흡을 가다듬으며 이제 화랑연환도법의 도법 자체는 완성할 수 있다 생각했다. 그러나 칼에 기운을 담는 법은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 내력이 실리지 않으면 칼은 그냥 쇠판때기에 불과할 뿐이었다. 그것을 생각하자 기운이 빠졌다. 백산은 나한각이 서있는 기단에 걸터앉아 조금씩 어둠이 가시는 하늘을 보았다.


화랑연환도법을 만든 의효대사는 칼에 기운을 넣어야 한다는 사실을 몰랐을까! 백산은 고개를 흔들었다. 의효대사는 누구보다 더 그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꿈에서는 빛을 발하던 나한상이 아직도 생생했다. 의효대사가 책에 그림을 넣지 않고 나한상을 만들어 동작을 실현했다면 기운을 넣는 방법도 나한상에 있지 않을까! 백산이 스스로 생각을 확인하기 위해 나한각으로 들어가려 일어서는 순간 상무암으로 들어오는 계단에서 인기척과 살기가 올라왔다.


살기는 아래에 있는 것만 아니었다. 상무암을 주위의 모든 곳에서 사람 기척과 함께 살기가 물씬거리고 있었다. 백산은 재빨리 요사채로 갔다. 지난번 독이 묻은 표창에 맞은 것이 너무나 뼈아픈 경험이었다. 그 같은 습격이 다시 있을 때를 대비해 뭔가 준비를 해둬야겠다 생각하다 자신도 던지는 무기를 가지기로 했다. 백산은 요사채 마루 밑에서 낡은 나무 상자를 꺼내 열고 그 속에 들어있던 허리띠를 꺼내 허리에 찼다. 허리띠에는 손바닥 길이의 날카롭게 번쩍이는 단검 여덟 개가 좌우에 나뉘어 꽂혀있었다. 백산이 채비를 마치는 순간 적들이 일제히 모습을 드러냈다. 안좌사와 다스케를 선두로 지난번에 싸웠던 일본 무사들이었다. 자오원앙월와 언월도를 든 중국인도 그들 사이에 끼어있었다. 그리고 체인과 쇠파이프, 회칼을 든 깡패들처럼 보이는 자들이 열 명 정도 있었다. 안 좌사가 숫자를 늘리기 위해 모아 온 자들이었다.


그들 모두 합한 숫자가 스무 명을 훌쩍 넘었다. 안좌사가 한 밤이 아니라 밝아지는 동틀 녘에 백산을 공격하려 한 이유도 있었다. 지난번 부상당한 백산을 놓친 이유가 어둠 때문이라 생각해서였다. 안좌사는 이번만큼은 백산을 놓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들 무리가 상무암 마당에 들어서자 체인과 쇠파이프를 든 깡패 둘이 서둘러 좌우에서 백산에게 덤벼들었다. 백산은 손에 든 환도를 보고도 거침없이 덤비는 깡패들을 보며 살짝 긴장했다. 백산을 쓰러뜨리는 깡패에게 천만 단위의 돈을 주겠다고 안 좌사가 약속했다는 걸 몰랐던 것이다.


체인을 든 왼쪽이 빠르게 뛰어들며 오른쪽 위에서 왼쪽으로 체인을 내리치다 갑자기 방향을 틀어 목을 향해 체인을 날렸다. 호리회리한 몸에 어울리지 않게 체인의 속도와 힘을 조절하는 능력이 상당했다. 실제로 그는 체인하나로 서울의 양아치들을 제압한 자로 이름 꽤나 있는 자였다. 백산은 몸을 숙여 체인을 머리위로 가볍게 흘려보냈다. 동시에 체인의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그러나 체인을 든 자는 그런 방법을 알고 있다는 듯 체인을 반대 방향으로 돌려 이번에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내려쳤다. 백산은 환도로 체인을 감아 체인이 내려오는 힘을 이용해 쇠파이프가 날아오는 쪽으로 틀었다. 어느 틈인가 쇠파이프를 든 자가 접근해 자신이 무기를 휘두르고 있었던 것이다.


체인이 쇠파이프를 막은 순간 백산은 체인에 감겨있는 칼집에서 환도를 뽑음과 동시에 몸을 180도 돌려 뒷머리를 가격해오는 다른 쇠파이를 막아 내고는 바로 이전 방향으로 몸을 돌려 체인을 든 자가 다른 손으로 찔러오는 회칼을 막음과 동시에 칼을 살짝 움직여 회칼을 잡은 손의 손가락 세개를 자르고 다시 몸을 90도로 돌려 체인에 감긴 쇠파이프를 쥐고 있는 자의 팔을 칼등으로 내리쳐 부러뜨린 뒤 또다시 몸을 90도로 회전시켜 뒤에서 쇠파이프로 가격했던 깡패의 목을 회전력이 실린 칼등으로 쳐 쓰러뜨렸다. 쓰러진 남자의 입에서 거품이 보글거리는 가운데 백산을 공격하기 위해 상무암 마당이 있던 사람들 사이에서 침묵이 흘렀다.


믿기 어려운 백산의 빠른 몸놀림과 시퍼런 환도에서 뿜어지는 기운에 모든 사람들의 몸이 얼어붙은 것이다. 안 좌사의 얼굴도 굳어졌다. 백산의 실력이야 이미 알고 있어 놀라운 게 못 됐다. 안좌사는 애써 모은 깡패들의 실력이 실망이었다. 애초부터 깡패들을 믿은 건 아니었지만, 단 몇 초 만에 세 명이 나가떨어질 줄은 몰랐던 것이다. 독에 중독되어 회복된 지 얼마 안 됐었을 백산의 체력을 소진 시키려는 목적이 틀어질 것 같아 안좌사가 버럭 소릴 질렀다.


“공격해라. 수십 명이 하나도 못 잡아서야 체면이 서냐?”


안좌사의 일갈이 촉발시킨 건 오히려 백산의 공격 본능이었다. 백산은 빠르게 땅에 떨어진 칼집에 환도를 꽂아 들어 올렸다. 깡패 같이 세상을 쑤시고 다녔을 인간들을 죽여서는 곤란할 것 같아서였다. 백산은 화랑연환도법의 부속 구절에 딸린 10개의 초식으로 자신을 둘러싼 채 얼어붙어 있는 깡패들을 치고 들어갔다. 기운을 싣지 않은 칼이라 안 좌사 같은 고수와 싸울 수는 없겠지만, 깡패들을 상대로 해 도법을 실험하기 좋은 기회였다. 과연 도법의 힘은 대단했다. 찌르고 베는 동작이 물 흐르듯 자연스레 이어지면서도 상대가 예측할 수 없는 변화가 있었다. 뜻을 잘못 이해했는지 두어 군데의 동작에서 어색한 부분이 있었지만 상대가 깡패들인지라 큰 반격을 당하지는 않았다.


깡패들이 곧 밀려나며 몇은 도망치고 몇은 칼을 맞고 고통에 비명을 지르며 땅을 굴렀다. 그렇게 깡패들을 처리하는 데 몇 분도 걸리지 않았다. 그 뒤편에는 일본 무사들이 서있었다. 그들은 일제히 칼을 뽑아 백산의 공격을 막았다. 백산도 다시 칼집에서 환도를 뽑아들었다. 백산은 연환도법 중 왼쪽을 막는 8가지 초식만으로 왼쪽 한 방향만을 치고 들어가며 한 방향으로만 몸을 움직였다. 뒤가 비어 있는 만큼 동작을 더 빨리해야만 했다. 초기에는 칼의 변화가 적의 숫자를 압도했지만, 혼자로서는 곧 한계에 다다랐다. 뒤에서 내리치고 베어드는 일본 무사의 칼을 몇 번 가까스로 피한 뒤 백산은 연환도법을 포기하고 상무암의 도법으로 돌아왔다.


그런 와중에도 백산은 연환도법으로 일본 무사 한 명의 팔뚝을 자르고 또 한명을 팔꿈치로 턱을 가격해 쓰러뜨렸으며 한명은 사정을 봐주어 심장이 아니라 그 옆 어깨를 찔러 넘어뜨렸다. 백산은 싸우는 동안 뒤를 봐주는 동료 한 명만 있다면 연환도법만으로 십 수 명의 일본 무사들을 제압할 수 있었을 거라 생각했다. 이윽고 다스케가 백산 앞에 섰다. 백산은 환도를 좌우로 짧게 휘둘러 먼저 다스케의 칼을 쳐 다스케가 다른 수를 쓰는 걸 막으며 뒤에 신경을 쏟았다.


두 명의 일본 무사가 백산의 등 뒤 좌우에서 칼을 내려 그었다. 백산을 그들을 상대하지 않고 다스케의 칼을 밀어내며 앞으로 굴러 다스케의 뒤쪽으로 빠졌다. 백산은 계곡 시선을 앞쪽에 두고 일어서며 칼을 뒤로 해 옆구리 높이에서 다스케를 찔렀다. 다스케는 재빠르게 몸을 돌려 피했지만 허리를 스친 칼이 옷과 살을 찢었다. 다스케가 놀라 두 걸음 물러나났다. 백산의 등 뒤에서 공격했던 일본 무사 둘이 다시 내리치기로 백산의 뒤를 공격했다. 백산은 급하게 몸을 돌려 왼쪽 칼은 몸을 비스듬히 해 피하고 오른쪽 칼은 환도를 들어 막은 후 일본도를 살짝 밀어내며 오른쪽으로 밖으로 빠져 나가 환도를 잡았던 한 손을 빼 손날로 일본 무사의 목을 가격했다. 일본 무사는 소리도 못 내고 뒤로 넘어졌다.


백산은 다시 몸을 돌리며 칼을 두 손으로 쥐고 그대로 나가 앞에 있는 다스케를 어깨를 내리쳤다. 부상을 입은 다스케는 백산의 날카로운 칼 기운에 대항할 의욕을 잃고 정신없이 뒷걸음질 치며 백산과의 거리를 벌렸다. 백산은 칼을 좌우로 휘두르며 다스케를 따갔지만 사실은 언월도와 자오원앙월을 든 두 중국인의 움직임을 신경 쓰고 있었다.


과연 짧은 언월도를 든 장평이 다스케를 쫓는 백산 앞에 훌쩍 뛰어들었다. 장평은 언월도를 빙빙 돌려 백산의 칼을 쳐냄과 동시에 백산 몸 안쪽으로 밀고 들어왔다. 백산은 언월도의 무게와 기세에 밀려 뒤로 서너 걸음 물러나다 갑자기 몸을 틀어 장평을 옆으로 흘려보냈다. 그리고는 몸을 한 번 더 틀어 뒤에서 짧게 갈라 들어오는 양출을 자오원앙월을 막고는 다시 몸을 돌려 두 걸음 물러나 거리를 확보했다. 그 순간 장평의 언월도가 백산의 목을 갈랐다. 백산은 몸을 뒤로 누이며 땅을 한번 굴러 언월도를 피했다.


백산이 몸을 일으키자마자 이번에는 양출의 자오원앙월이 백산의 몸통을 베어왔다. 백산은 환도를 좌우로 휘둘러 양출의 자오원앙월을 막으며 재빨리 옆으로 돌아 빈틈을 노리는 장평의 언월도를 환도 쳐 합동 공격을 사전에 봉쇄했다. 백산이 양출의 자오원앙월을 막는데 집중하는 동안 장평이 뒤에서 공격해 백산의 자세를 빼앗아 궁지로 몰 생각이었으나 백산이 자오원앙월과의 싸움을 피하고 언월도를 먼저 견제하자 양출과 장평의 호흡이 흔들리게 되었다. 양출이 타이밍을 놓치고 주춤하는 사이 백산은 오직 자신의 팔 힘과 단전의 힘만을 환도에 실어 연환도법의 열 가지 부가식으로 맹렬하고 번개처럼 칼을 휘두르며 장평을 향해 돌진해 들어갔다.


장평은 당황해하며 언월도를 어깨높이에서 좌우 아래로 내리치며 백산의 환도를 막았다. 언월도와 부딪치며 환도를 잡은 손이 저리고 뼈가 아팠다. 내력을 싣지 못한 탓이었다. 백산은 이를 악물고 참으며 좌를 치고 들어가다 갑자기 몸과 칼을 틀어 빠르게 우를 베었다. 장평은 좌우 두 수는 막았으나 변화가 들어간 세 번째 수는 막지 못하고 오른쪽 옆구리를 깊숙이 베이고 말았다. 장평은 비틀거리며 물러났다. 원래 허리가 두 동강 났어야 하나 내력이 제대로 실리지 못한 데다 백산이 사정을 봐줬기 때문이었다. 장평도 그것을 알았다. 장평이 당하자 양출이 기다란 괴성을 지르며 백산의 뒤를 파고들었다.


이런 경우 원래 도법서대로라면 한쪽을 맡은 우리 편이 양출을 막아야 했다. 그러나 백산은 혼자였고, 이런 불리함을 예상했던 바였다. 백산은 몸을 돌려 자오원앙월을 막지않고 도망치듯 앞쪽으로 뛰었다. 앞 쪽에 서있던 깡패하나가 엉겁결 쇠파이프를 들어 올렸으나 백산이 휘두르는 환도의 기세에 질려 쇠파이프를 든 채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 백산은 환도를 휘두르며 앞으로 달려 양출과의 거리를 벌린 후 다시 환도를 세워 들어 자세를 바로 했다. 다스케도 당하고 장평마저 피를 흥건히 흘리며 쓰러지자 안좌사가 다급히 외쳤다.


“뭘 하고 있는 거냐? 빨리 덤벼 저 새끼를 죽여라.”


깡패 하나가 쇠파이프와 회칼을 양손에 들고 쓰러진 동료를 넘어 백산에게 덤벼들었다. 그러나 백산의 한칼 밀려 쇠파이프를 놓치고 쓰러진 동료위에 널 부러지고 말았다. 그때 백산은 재빨리 몸을 돌리며 한손으로 허리에서 단검 두개를 꺼내 양출을 향해 던졌다. 장평이 쓰러지자 양출은 혼자 싸워 이기기 어렵다고 보고 백산이 깡패 쪽을 보는 사이 뒤에서 독이 묻은 표창을 던진 것이다.


양출은 눈 한번 깜짝할 사이 표창 네 개를 던졌다. 백산은 이전에 당했던 양출의 작전을 예상하고 기운을 모아 감시하던 터였다. 등을 지고 있어 직접 보지는 않았지만 갈라지는 공기의 흐름에 백산은 독 표창이 날아오는 걸 알아챘다. 백산이 던진 단검 둘이 포창을 둘을 정확히 맞춰 떨어뜨렸다. 보고 있던 일본 무사나 깡패들의 눈이 튀어나올 정도의 기술이었다. 백산은 한 손에 환도를 쥐고 있었고 몸도 돌려야 했기에 단검을 두개 밖에 던지지 못했다. 백산은 자신에게 날아오는 표창 하나는 환도로 쳐내고 다른 하나는 상반신을 비틀어 뒤로 흘려보냈다. 표창의 위기를 넘긴 백산은 허리띠에서 단검을 네 개 연속하여 뽑아 양출에게 던짐과 동시에 짧은 기합 소리와 함께 양출을 향해 돌격했다.


양손의 자오원앙월로 단검을 받아내던 양출은 백산의 기합소리와 돌격에 당황해 마지막 단검을 받지 못하고 오른쪽 팔 상단에 맞고 말았다. 백산이 자신이 당한 것을 그대로 갚아준 것이다. 다른 게 있다면 백산의 단검에는 독이 없다는 것이었다. 양출은 고통을 참으며 위에서 내리쳐들어오는 환도를 양손의 자오원앙월 모두를 사용해 머리위에서 힘겹게 막았다. 그러나 백산의 칼 기운이 너무 셌다. 양출은 한차례 비틀거리며 주저앉고 말았다. 백산이 누르던 칼을 살짝 들어 올려 양출의 팔을 베려는 순간 안 좌사가 뛰어들어 짧은 검으로 백산의 옆구리를 찔렀다. 백산은 훌쩍 뛰어 물러나 안 좌사의 검을 피했다. 백산은 자신의 환도로 충분히 안 좌사의 검을 막고 반격을 할 수 있었으나 그 틈으로 양출이 공격할까 걱정했다. 백산이 물러서며 시간과 공간이 생기자 안 좌사는 짧고 큰 소리로 명령했다.


“철수해라.”


안좌사의 판단은 옳았다. 다스케의 부상으로 일본 무사는 완전히 전의를 상실한데다 실력으로도 백산의 적수는 못되었고, 소모용으로 생각해 큰 기대를 하지 않았어도 깡패들의 실력은 기대 이하에, 그들은 백산의 기술에 아예 정신이 나가 있어 움직일 생각도 못했다. 거기에 믿었던 장평과 양출마저 부상당한 처지라 계속 싸울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던 것이다.

안 좌사는 명령을 내리자마자 자신부터 등을 돌렸다. 자신이 원수라는 걸 알고 있는 백산의 추격이 무서웠던 것이다. 상무암을 내려가는 계단을 딛는 순간 과연 백산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오늘 다른 놈은 놔줘도 너만은 잡는다.”


안 좌사는 더욱 황급해져 백산이 쫒아오기 어렵도록 계단을 벗어나 잡목과 나무가 빼곡한 산비탈로 들어서 급경사의 비탈을 정신없이 내달렸다. 백산도 안 좌사를 추적하기 위해 상무암에서 비탈로 바로 뛰어 내렸다. 그러나 백산은 안좌사를 계속 쫓을 수 없었다. 양출이 도망가며 부상당하지 않은 팔로 백산을 향해 독 표창 두개를 연속으로 던진 것이다. 백산은 바람의 움직임으로 날아오는 표창을 눈치 채고 옆의 소나무 뒤로 잠깐 숨어 독 표창을 피했다.


그 틈에 안좌사는 멀어졌다. 백산이 안좌사에 신경 쓰는 동안 양출과 장평, 다스케가 빠르게 도망쳤다. 기술도, 도망도 하수인 깡패들만이 비실대며 계단을 내려가며 백산의 길을 막고 있었다. 백산은 그들을 추적하지 않았다. 억지로 연환도법을 실시했기 때문인지 몸에 기운이 빠지고 팔과 가슴이 욱신거렸다. 그의 목표는 스승과 사형, 사제를 죽인 박용준과 안좌사 일파를 죽이는 것일 뿐, 깡패는 애초부터 목표가 아니었다. 백산은 상무암으로 올라왔다. 날은 어느 사인가 희끄무레한 어둠의 흔적마저 사라지고 이른 아침으로 변하고 있었다.


백산은 상무암 기단에 앉아 이번 결투를 복기해보았다. 전번과는 다르게 일본 무사도, 중국 무사도 모두 압도했다. 처음이 아니어서 머릿속에서 몇 번이나 대응방법을 그리며 훈련을 했다는 것이 승리의 요인이었다. 특히 자오원앙월과 언월도의 연합 공격을 어떻게 받아야 할지를 호국사에 누워있으면서 마음으로나마 고민하고 연습해 본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백산에게는 연환도법의 위력을 실감한 싸움이었다. 연환도법을 몰랐다면 장평을 그렇게 간단히 쓰러뜨릴 수 없었을 것이다. 도법에서 정해진 내력을 칼에 싣지 않고 오직 자신의 기운만으로 싸웠는데도 그 정도였다. 물론 내력 없는 칼로 무거운 언월도와 오래 싸울 수 있다고는 믿지 않았다. 단지 치고 들어가는 기세와 예측할 수 없는 변화를 그 짧은 몇 수 동안 실현함으로서 이길 수 있었던 것이다.


백산은 상무암으로 돌아가 나한상을 물끄러미 보았다. 분명 여기에 비밀이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백산은 짧은 한숨을 쉬고 눈을 감았다. 독에 당했다 회복된 지 얼마 되지 않는 몸으로 도법을 연구하는 데 밤을 새웠고, 새벽에는 혈투까지 벌렸다. 백산은 앉은 채로 사르르 잠이 들었다. 그러다 백산은 퍼뜩 한 번 잠을 깼지만 자신도 모르게 몸을 옆으로 누이고 다시 잠을 잤다. 백산이 놀라 눈을 뜬 건 오전 9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3시간 정도를 정신없이 잠들었던 것이다. 누군가가 습격했더라면 꼼짝없이 죽었을 정도로 깊은 잠이었다. 백산은 경계심 없이 잠들었던 걸 반성하며 몸을 일으켰다. 뭔가 허전하고 정상이 아니라는 느낌이 싸하게 마음을 지나갔다.


백산은 바로 싸한 마음의 원인을 깨달았다. 어제 밤부터 유세나로 부터의 연락이 없었던 것이다. 백산은 황급히 휴대폰을 찾아 문자를 확인했지만 어제 아침 학교 연구실에 도착했다는 문자가 마지막이었다. 백산은 전화를 걸었지만 유세나는 받지 않았다. 연락을 바란다는 문자를 넣고 30분을 초조하게 기다렸어도 답장은 없었다. 백산은 대학 연구실로 전화를 걸었다. 연구실 조교도 유세나가 연락 없이 나오지 않아 걱정하고 있다는 대답이었다. 이제 유세나에게 일이 생긴 건 너무나 확실해졌다. 어제 밤 연환도법과 나한상을 연구하는데 몰두해 유세나의 안전을 까먹고 있었다는 자책이 백산의 가슴을 아프게 파고들었다. 백산은 상무암 마당을 서성거리며 어떻게 해야 할 지 생각했다. 백산은 곧 유세나가 어떤 상황에, 어디에 있는지에 대한 정보를 실마리라도 알아낼 만한 사람을 기억해냈다. 백산은 망설이지 않고 최승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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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과 달과 바람과 칼(화랑연환도 편)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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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종장: 새 제자 21.02.16 281 5 11쪽
50 12장. 복수의 끝자락(3) 21.02.12 214 2 16쪽
49 12장. 복수의 끝자락(2) 21.02.09 214 2 13쪽
48 12장. 복수의 끝자락(1) 21.02.05 217 1 20쪽
47 11장. 추격과 습격(4) 21.02.02 220 1 18쪽
46 11장. 추격과 습격(3) 21.01.29 227 1 14쪽
45 11장. 추격과 습격(2) 21.01.26 201 1 14쪽
44 11장. 추격과 습격(1) 21.01.22 233 1 15쪽
43 10장.납치(4) 21.01.19 236 1 12쪽
42 10장.납치(3) 21.01.15 234 1 22쪽
41 10장.납치(2) 21.01.11 227 1 15쪽
40 10장. 납치(1) 21.01.08 217 1 25쪽
39 9장. 토모키루의 칼(5) 21.01.05 241 1 31쪽
38 9장. 토모키루의 칼(4) 21.01.02 244 1 13쪽
37 9장. 토모키루의 칼(3) 20.12.31 220 1 13쪽
36 9장. 토모키루의 칼(2) 20.12.28 210 1 17쪽
35 9장. 토모키루의 칼(1) 20.12.25 233 1 13쪽
34 8장. 유세나의 위기(6) 20.12.22 212 2 26쪽
33 8장 유세나의 위기(5) 20.12.18 211 2 18쪽
32 8장. 유세나의 위기(4) 20.12.15 214 3 13쪽
31 8장. 유세나의 위기(3) 20.12.12 234 2 16쪽
» 8장. 유세나의 위기(2) 20.12.08 224 2 23쪽
29 8장. 유세나의 위기(1) 20.12.04 215 2 14쪽
28 7장. 백산의 위기(5) 20.12.01 213 2 23쪽
27 7장. 백산의 위기(4) 20.11.27 219 2 13쪽
26 7장. 백산의 위기(3) 20.11.24 216 2 12쪽
25 7장. 백산의 위기(2) 20.11.20 279 2 17쪽
24 7장. 백산의 위기(1) 20.11.15 238 2 14쪽
23 6장.배반의 배반(3) 20.11.09 244 2 19쪽
22 6장.배반의 배반(2) 20.11.05 242 2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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