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행성케이투 님의 서재입니다.

산과 달과 바람과 칼(화랑연환도 편)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대체역사

완결

행성케이투
작품등록일 :
2020.08.11 13:41
최근연재일 :
2021.02.16 10:00
연재수 :
51 회
조회수 :
12,933
추천수 :
112
글자수 :
361,650

작성
20.12.28 10:00
조회
210
추천
1
글자
17쪽

9장. 토모키루의 칼(2)

DUMMY

2.

토모키루와 종자는 계속 숲을 헤맸다. 한걸음 걸을 때마다 나무 가지가 얼굴을 찌르자 토모키루는 결국 말에서 내렸다. 이번에는 허리춤에서 관목이 거치적거렸다. 얼굴에는 빗물이 줄기가 되어 흘렀고 완전히 젖은 옷은 몸에 달라붙어 체온을 빼앗아갔다. 담대한 토모키루도 짜증이 나기 시작할 때 관목 더미를 헤치며 앞서 나가던 종자가 외쳤다.


“영주님, 여기 길이 있습니다.”


토모키루가 관목 더미를 넘어가보니 사람 하나가 간신히 다닐 정도의 좁은 길을 따라 물이 흘러내려오고 있었다. 토모키루와 종자는 얕게 경사 진 길을 따라 나뭇가지를 헤치며 반 리 정도 위로 올라갔다. 길 끝은 나무로 둘러싸인 작은 언덕이었다. 편평한 마당을 둘러싸고 움막집 세 채가 마을 같지 않는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쏟아지는 비 때문인지 마당은 비어 있었고 말발굽 소리와 인기척이 들렸음에도 어느 움막집에서도 사람은 나오지 않았다. 토모키루와 종자는 제일 큰 움막집 앞으로 가 큰 소리로 사람을 불렀다. 그제야 움막 안에서 30대로 보이는 남자가 얼굴을 내밀었다. 종자가 토모키루의 신분을 밝히자 곧 안으로 안내되었다. 움막에 사는 자들은 화전을 일구기도 하고 약초를 캐거나 사냥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들로서 일자무식의 무지렁이라 해도 그들이 살고 있는 땅의 주인 이름정도는 들은 적이 있었던 것이다.


움막 안에는 남자의 아내인 듯 한 아낙네와 네다섯 살 아래로 보이는 남자아이 둘이 낮선 방문객에 놀란 얼굴로 앉아 있었다. 겉은 움막이지만 안은 다섯 평은 넘을 것 같은 넓이로 나무를 다듬어 마루를 깔았고 약간의 세간과 음식을 할 수 있는 화로가 갖추어져 있어 그런대로 살림집 구색을 갖추고 있었다.


토모키루와 종자는 비에 젖은 겉옷을 벗고 아낙네가 갖다 준 천으로 얼굴과 머리를 대강 닦은 뒤 마루에 올라앉았다. 안은 바깥보다 더 어두워 멀찍이 떨어져 있는 아이들의 얼굴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남자가 마루 가운데 놓인 화로를 쑤셔 불꽃을 일으키자 집안이 흐릿하게 밝아졌다. 어색하고 짧은 침묵 끝에 토모키루가 남자에게 물었다.


“여기는 모두 몇 가구가 사나?”


“세 가구에 열 한명입니다.”


“본래 고향은 어디인가?”


“모두가 다릅니다. 각자 살길을 찾아보니 이곳에 모이게 되었습니다.”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하는 남자의 말 속에는 긴장과 두려움이 가득했다. 토모키루는 그들이 도망친 노비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지만 이 처지에 굳이 따지지 않기로 했다.


“걱정마라. 비만 그치면 바로 떠날 것이다.”


토모키루는 남자와 아낙네를 안심시키고 눈을 돌려 움막 안을 훑어보았다. 번개가 치며 움막 안으로 강한 빛이 지나갔다. 그 순간 토모키루의 눈에 마루 반대쪽 있는 돌덩이 두 개가 잡혔다. 돌덩이에 꽂힌 금색 알갱이가 심상치 않았다. 토모키루가 그 돌덩이에 눈을 모으는 사이 요란한 천둥소리에 이어 또 다른 번갯불이 움막 안을 밝히고 사라졌다. 돌덩이에 박힌 알갱이들이 누런빛을 반사했다.


“저 돌을 가져와봐라.”


천둥이 무섭게 울리는 가운데 남자가 주먹 두 개를 합친 크기의 돌을 가져와 굽신 거리며 토모키루에게 바쳤다. 토모키루는 찬찬히 돌을 살폈다. 얼굴은 평정을 가장했으나 심장은 급하게 뛰고 있었다. 토모키루는 흥분을 가라앉히려는 듯 긴 숨을 쉬었다.


“이 돌은 어디서 났는가?”


무릎을 꿇고 곁눈으로 토모키루의 기색을 살피던 남자가 몸을 낮게 하며 대답했다.


“오늘 아침 약초를 켜러 나갔다 우연히 동굴 하나를 발견했는데, 그곳에서 있던 돌입니다. 돌이 반짝거려 아이 장난감으로 삼으려 가져왔습니다.”


토모키루가 손에 들고 있는 돌에 박힌 건 분명 금이었다. 그러나 농사나 짓는 노비였을지도 모르는 남자는 금이란 걸 듣기는 했어도 제대로 본적은 없는 모양이었다. 더구나 보통 사람에게 더 보기 어려운 건 금보다 금광석이다.


“동굴이라고 했는데 거기엔 이런 돌이 많으냐?”


“안으로 들어갈수록 노랗게 반짝이는 게 많긴 했습니다.”


토모키루는 심장이 기쁨과 놀람으로 요동쳤지만 더욱 엄숙하고 침착하게 물었다.


“동굴은 얼마나 크냐?”


“동굴이 낮고 좁아 처음에는 기어 들어가야 했습니다. 들어 갈수록 조금씩 높아지기는 합니다만 동굴이 몇 갈래로 나뉘어 있어 돌아 나올 길이 무서워 안쪽으로 더 들어가지는 못했습니다.”


남자의 말로는 동굴의 깊이를 어림짐작하기도 어려웠다. 토모키루는 금광석을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백제 지원군을 보내는데 가문의 재산을 거의 소진할 위기였다. 그런데 숨겨놓은 금광이 있다면···. 모든 귀족들과 천황가마저도 빈곤해졌을 때 군사를 모을 수 있는 금광이 자신에게 있다면···. 토모키루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 동굴까지 날 안내할 수 있느냐?”


남자가 놀라 토모키루를 바라봤다.


“이 비속에요?”


“비가 내리면 안 되느냐?”


남자는 잠시 망설이다 마루에서 내려와 움막집 입구 거적을 들고 하늘을 보았다. 토모키루에게 행운이 따르는지 번개와 천둥이 멈춘 데다 빗줄기마저 약해지고 있었다.


“이 정도 비라면 갈만 합니다.”


남자가 풀을 엮어 만든 도롱이를 찾아 덮쳐있고 앞장을 섰다. 토모키루와 종자가 다른 집에서 얻은 도롱이를 걸치고 그 뒤를 따랐다. 숲은 큰 나무와 관목이 얽혀 있고 물이 흥건한 발밑의 풀은 걷기에 미끄러웠다. 젖은 풀과 옆으로 들이치는 비로 옷과 신발은 금세 물투성이가 되었지만 남자는 스스럼없이 앞으로 나갔다.


“이 방향이 어느 쪽이냐?”


토모키루가 앞장 선 남자에게 물었다.


“동쪽과 남쪽 사이입니다.”


남자를 따라 십여 분을 가자 폭이 네, 다섯 걸음은 될 것 같은 얕은 개천이 나왔다. 토모키루가 남자를 따라 개천을 건너자 녹나무가 주종인 숲이 펼쳐졌다. 남자가 녹나무를 피해가며 거침없이 2리 정도를 더 걷자 집채 만 한 바위들이 듬성듬성 놓인 언덕이 나타났다. 토모키루가 언덕 위를 보니 오십 걸음 정도 앞에 나무와 풀 사이로 사람 키 세 배 높이의 화강암 벽이 보였다. 암벽 대부분이 이끼와 풀에 덮였고 위에도 관목들이 자라고 있어 언뜻 봐서는 암벽인지 모를 정도였다.


남자는 키 만큼 자란 풀을 좌우로 밀어내며 암벽을 향해 언덕을 올랐다. 경사는 완만해 비에 젖은 풀이 미끄럽지만 않다면 단번에 오를 수 있을 정도였다. 토모키루는 두세 번 미끄러진 끝에 암벽 앞에 닿았다. 암벽은 좌우 길이는 대략 2백 걸음정도로 세로로 갈라져 틈이 곳곳에 있어 오랜 세월을 견뎠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남자는 오른쪽으로 틀어 삼십 걸음 정도 걸어 암벽 가운데 가 아래를 가리켰다.


“이게 동굴의 입구입니다.”


과연 그곳에 어른 한명이 기어들어갈 수 있는 틈이 있었다. 토모키루는 무릎을 꿇고 안을 들여다봤다. 입구 안쪽은 평범한 바위굴이었다. 토모키루는 말리는 종자를 뿌리치고 직접 안으로 기어 들어갔다. 얼마나 들어갔을까! 동굴은 차츰 넓어졌지만 입구에서 들어오는 희미한 빛마저 사라질락 했을 때 굴이 서너 개로 갈라지는 곳에 닿았다. 금가루가 박힌 돌 몇 개가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토모키루는 흥분을 억누르고 동굴 안쪽을 찬찬히 살폈다. 깊숙한 안쪽은 빛이 닿지 않아 어둠뿐이었다. 그러나 손톱만큼이라도 빛이 닿는 부분은 모두 별 같은 금가루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다른 갈래의 동굴도 마찬가지였다. 어떤 부분은 누른 부분이 엄지손가락정도로 굵은 곳도 있었고 은하수처럼 길게 띠를 이루며 보이지 않는 안쪽으로 뻗은 곳도 있었다.


토모키루는 더 들어가고 싶었으나 너무 어두웠다. 횃불을 가지고 오지도 않은 것이 후회되었다. 토모키루가 아쉬워하며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번개가 치며 좀 더 깊은 곳까지 빛이 들이쳤다. 토모키루는 자신도 모르게 헉하는 소리가 나왔다. 번개가 들이친 찰나의 순간에 드러난 동굴 갈래마다 사람 키만 한 크기의 누런 금맥이 안으로 뻗어 있었던 것이다. 요란한 천둥소리가 하늘을 흔들 듯 울렸지만 토모키루는 몇 초간 몸을 움직이지 못하다가 얼굴이 벌게진 채 몸을 돌려 밖으로 기어 나왔다.


방금 전 번개와 천둥이 마지막 신호인 듯 부설거리며 내리던 비는 이제 안개처럼 흩뿌려지고 있었다. 토모키루는 큰 숨을 쉬고 마음을 진정시킨 뒤 남자와 종자를 데리고 오를만한 곳을 찾아 암벽위로 올라갔다. 흙이 부족해 큰 나무 없이 관목과 풀만 여기저기 자라고 있는 암벽 위는 아래서 짐작했던 것 보다 편평했고 넓어 대충 보기에도 1리는 넘어 보였다.


암벽을 이루는 화강암층이 끝나는 곳부터 나무 밑에 관목과 풀에 덮인 언덕이 다시 시작되어 와이타 산기슭을 이루고 있었다. 토모키루는 금광이 암벽의 넓이만큼 될 거라 생각하자 더욱 가슴이 뛰었다. 토모키루는 자신을 안내한 남자에게 물었다.


“너희들은 이곳을 뭐라 부르느냐?”


“여긴 사냥거리도, 과실나무도 없어 잘 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딱히 부르는 이름이 없습니다.”


“그럼 여기 온 사람이 너 외에는 아무도 없단 말이냐?”


“그렇습니다. 돌이 예쁘게 반짝거려 하나는 장난감으로 주고 하나는 식량과 바꿀 수 있을지 몰라 오후에 마을에 가져가 볼까 생각했습니다만 비가 내려가지 못했습니다.”


오이타 산 정상 쪽에서 희미하게 번개가 몇 차례 더 치고 낮은 천둥소리가 뒤를 이었다. 토모키루 위의 구름이 엷어지며 땅은 좀 더 밝아졌고 시야도 그만큼 트였다. 토모키루는 암벽위에서 계속 이곳의 지형과 위치를 살폈다.


“어느 쪽이 와이타산 정상이냐?”


“저쪽입니다.”


남자가 1리 앞에서 시작되는 언덕의 왼쪽을 가리켰다.


“이치마 마을은 여기서 얼마나 가야하나?”


남자는 방금 가리켰던 반대쪽을 가리키며 20리 정도 가야한다고 말했다. 이치마 마을은 폭풍우를 만나기 전 들렸던 마을로 이 영지를 관리하는 마름이 있어 그곳에서 늦은 아침을 먹었던 곳이었다. 토모키루는 방향을 갸름하며 주위에서 위치를 특징지을 만한 걸 찾아봤다. 새로운 언덕이 시작되는 오른쪽으로 큰 삼나무 세 그루가 나란히 서 있었다. 모토키로는 그 삼나무를 마음에 새기고 움막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는 길을 잡았다.


녹나무 숲을 지나자 비는 거의 멈추었고 구름 또한 높아져 화전민을 무턱대고 따라왔던 아까와는 달리 토모키루는 거리와 방향을 확실히 잡을 수 있었다. 금광이 있는 암벽에서 서남쪽으로 대략 4리 정도 오자 움막집 마을에 들어섰다. 집에 앞에 서자마자 토모키루는 자신을 안내한 남자에게 말했다.


“좋은 걸 보여주었으니 상을 주겠다. 옆집까지 모두 모이게 해라.”


토모키루는 종자에게 말해 은자가 든 주머니를 가지고 오게 했다. 남자가 부르는 소리에 남자의 아내와 두 아들, 다른 두 집의 부부와 아이까지 모두 11명이 토모키루 앞에 모였다. 토모키루는 주머니에서 은자를 꺼내 어른은 두 개씩 아이는 하나씩 나누어 주게 했다. 움막집 사람들은 구경조차 어려운 은자를 받아들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여기 모인 사람이 모두냐?”


토모키루가 엄숙히 물었다.


“그렇습니다. 세 집 사람 모두 모였습니다.”


토모키루를 안내했던 남자가 대답을 채끝내기도 전에 토모키루는 차고 있던 칼을 빼내 남자의 목을 날렸다. 토모키루는 바로 이어 놀라 소리도 못내는 남자의 아내를 베고 그 뒤에 있던 옆집 부부의 목과 배를 갈라 쓰러뜨렸다. 토모키루는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도 모르는 아이마저 사정없이 베었다. 움막집 사람들을 모두 죽인 토모키루는 몸을 돌려 파랗게 질려 서있던 종자마저 베어 죽이고 말았다.


1,2분도 걸리지 않고 벌어진 살육이었다. 피가 더해진 빗물이 질펀하게 집 앞을 흐르는 걸 보며 토모키루는 칼을 흔들어 피를 털고 칼집에 넣었다. 토모키루는 금광석 두개를 모두 챙긴 뒤, 말고삐를 잡고 움막집으로 왔던 길을 거슬러 나갔다. 한참을 가자 숲이 헤쳐지는 소리가 나며 토모키루를 호위했던 무사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토모키루를 찾아 숲을 헤매다 이제야 만난 것이다. 호위대장이 반갑게 토모키루의 말고삐를 잡고 물었다.


“주군 괜찮습니까? 종자는 어디에 있습니까?”


“숲 저쪽에 움막집이 있어 잠시 쉬었는데, 거기 살던 놈들이 종자를 죽이고 은자를 빼앗으려 했다.”


“예? 그럼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아니다. 내가 모두 처리했다.”


토모키루는 냉정히 내뱉고는 자신의 말에 올라탔다.


“시간이 너무 지났다. 오이타 산을 넘으려면 서두르자.”


호위대장은 석연치 않는 얼굴이었지만 토모키루의 말고삐를 쥐고 앞장섰다.


“이 숲을 뚫고 오른쪽으로 사오리 정도만 가면 유스보 마을로 가는 길을 만납니다. 저희가 이 길로 유스보 마을까지 갔다 주군이 안 계셔 다시 찾으러 온 것입니다. 온천도 있으니 일단 그곳에서 하룻밤을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토모키루가 생각해도 그 편이 현실적이었다. 토모키루가 고개를 끄덕이자 곧 대열이 움직였다. 그러나 유스보마을까지 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정상적이라면 20리를 돌아가야 하는 거리였다. 질펀 거리는 숲의 풀을 헤치고 나무 가지를 자르며 나가야 했다. 물이 불어난 개울을 몇 개나 간신히 건넜다. 호위대들이 한번 헤매며 오갔던 길이라 여기저기에 흔적이 남아 있어 토모키루의 일행은 그나마 앞으로 나갈 수 있었다. 토모키루는 호위대가 자신을 찾아낸데 시간이 걸린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숲을 헤치고 나가면서도 토모키루는 금광의 위치를 마음속으로 되새기고 또 되새겼다. 토모키루가 유스보에 닿은 때는 완전히 어두워진 뒤였다. 다행이 날씨가 개여 달빛을 받을 수 있었기에 다시 길을 잃지는 않았다. 유스보는 토모키루의 영지가 아니었다. 그래도 신분이 신분인지라 토모키루는 촌장의 집으로 안내되어 젖은 옷을 갈아입고 온천에서 목욕을 했다. 온천을 하고 저녁을 먹는 동안에도 토모키루는 금광의 위치를 머리에 새기고 또 새겼다. 그러나 그런 집착이 독이 되었을까? 토모키루가 금광의 위치를 생각하면 할수록 자꾸만 헷갈리는 것이었다. 토모키루는 불안에 잠을 자지 못했다. 결국 토모키루는 밤중에 이부자리에서 일어나 금광의 위치를 열여섯 자의 시로 적어 가슴에 품었다. 아침이 되자 토모키루는 유스보의 촌장을 불렀다.


“어제 폭풍우를 만나 고생을 했다. 그 일을 잊지 않기 위해 내 칼에 명문을 새길까하는데 그런 재주를 가진 자가 있는가?”


“구마모토에서 철 그릇이나 농사도구에 정으로 이름을 쪼아 넣는 일을 하다 고향에 돌아와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촌장은 곧 60이 넘어 보이는 노인을 데리고 왔다. 토모키루가 칼과 열여섯자를 적은 종이를 주었다.


“여기에 적은 글자를 칼 면의 앞뒤로 새겨 넣었으면 한다.”


노인은 칼을 공손히 받아 한참을 살펴보다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이 칼은 쇠를 벼리고 벼려 만든 것이라 말할 수 없이 단단합니다. 저 같은 사람이 제대로 새길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토모키루는 잠시 고민했으나 태재부에서 새길 경우 사람들의 괜한 관심을 끌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모처럼 흥이 난 김에 지금 칼에 새기고 싶다.”


노인은 엎드린 채 말했다.


“예리하고 단단한 송곳으로 표면을 긁어 글자를 만들 수밖에 없습니다. 아름답지도 못하고 칼을 많이 쓰면 면이 닳아 글자가 없어지기도 할 것입니다.”


토모키루는 다시 망설였다. 그러나 태재부에서 장인을 부를 경우 칼의 명문을 향한 세간의 눈도 걱정이었고 태재부까지 가는 동안 위치를 적은 종이를 잃어버리거나 기억이 헷갈려버릴 일이 걱정이었다. 토모키루는 말이 나온 이상 이 자리에서 칼에 명문을 새기기로 했다.


“오늘 하루를 주겠다. 대신 내가 보는 데서 새기되 보통보다 두 배는 깊게 새겨라.”


“도구가 모두 저의 집에 있어 칼을 가지고 가야합니다.”


노인이 말하자 토모키루는 노인의 집으로 같이 가 노인이 칼에 명문을 새기는 걸 하루 종일 감시했다. 그렇게 토모키루의 칼의 앞뒤로 16자의 명문이 새겨졌다. 명문은 예상보다 깊게 새겨졌고 글자체도 아름다워 토모키루의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토모키루는 글자를 기억할지도 모르는 노인을 그냥두지 않았다. 마지막 글자의 한 획이 길다고 트집 잡아 노인을 베어버린 것이다. 토모키루는 명문을 적은 종이를 불태우고 늦은 오후 유보스를 떠나 태재부로 말을 몰았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산과 달과 바람과 칼(화랑연환도 편)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51 종장: 새 제자 21.02.16 281 5 11쪽
50 12장. 복수의 끝자락(3) 21.02.12 214 2 16쪽
49 12장. 복수의 끝자락(2) 21.02.09 214 2 13쪽
48 12장. 복수의 끝자락(1) 21.02.05 217 1 20쪽
47 11장. 추격과 습격(4) 21.02.02 220 1 18쪽
46 11장. 추격과 습격(3) 21.01.29 228 1 14쪽
45 11장. 추격과 습격(2) 21.01.26 201 1 14쪽
44 11장. 추격과 습격(1) 21.01.22 233 1 15쪽
43 10장.납치(4) 21.01.19 236 1 12쪽
42 10장.납치(3) 21.01.15 234 1 22쪽
41 10장.납치(2) 21.01.11 227 1 15쪽
40 10장. 납치(1) 21.01.08 217 1 25쪽
39 9장. 토모키루의 칼(5) 21.01.05 241 1 31쪽
38 9장. 토모키루의 칼(4) 21.01.02 244 1 13쪽
37 9장. 토모키루의 칼(3) 20.12.31 220 1 13쪽
» 9장. 토모키루의 칼(2) 20.12.28 210 1 17쪽
35 9장. 토모키루의 칼(1) 20.12.25 233 1 13쪽
34 8장. 유세나의 위기(6) 20.12.22 212 2 26쪽
33 8장 유세나의 위기(5) 20.12.18 211 2 18쪽
32 8장. 유세나의 위기(4) 20.12.15 214 3 13쪽
31 8장. 유세나의 위기(3) 20.12.12 234 2 16쪽
30 8장. 유세나의 위기(2) 20.12.08 224 2 23쪽
29 8장. 유세나의 위기(1) 20.12.04 215 2 14쪽
28 7장. 백산의 위기(5) 20.12.01 213 2 23쪽
27 7장. 백산의 위기(4) 20.11.27 220 2 13쪽
26 7장. 백산의 위기(3) 20.11.24 216 2 12쪽
25 7장. 백산의 위기(2) 20.11.20 279 2 17쪽
24 7장. 백산의 위기(1) 20.11.15 238 2 14쪽
23 6장.배반의 배반(3) 20.11.09 244 2 19쪽
22 6장.배반의 배반(2) 20.11.05 242 2 12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