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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성케이투 님의 서재입니다.

산과 달과 바람과 칼(화랑연환도 편)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대체역사

완결

행성케이투
작품등록일 :
2020.08.11 13:41
최근연재일 :
2021.02.16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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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1 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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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3쪽

7장. 백산의 위기(5)

DUMMY

6.

귓가를 어른거리는 사람소리에 백산이 눈을 떴다. 희미한 두 개의 얼굴이 보였지만 누군지 금방 기억나지 않았다.


“정신이 들어요? 괜찮아요?”


두 얼굴중 하나가 여자 소리를 내었다. 백산은 눈을 모았다. 희미한 윤곽이 서서히 굵어지며 뚜렷한 사람얼굴이 되었다. 유세나와 혜공이었다. 그제야 백산은 정신을 잃어가며 병원직원에게 보호자의 전화번호로 혜공의 번호를 불렀다는 걸 기억해 냈다.


“당장 고비는 넘겼다지만 아직 독은 풀리지 않았소.”


혜공이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담담하게 말했다. 실제로 백산은 팔에 꽂힌 주사를 통해 여러 개의 수액이 자신의 몸에 들어오고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유세나가 답답한 얼굴로 걱정스레 백산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백산이 설명하려 했으나 퉁퉁 부은 입술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혜공이 백산을 내려다보며 대신 말했다.


“왼팔에 자상이 있었다고 의사가 말했으니 아마 박 부회장 쪽에서 보낸 사람의 암수에 걸려 독이 묻은 단검이나 표창을 맞은 것 같소. 그렇지 않으면 백산 실력에 이런 꼴을 당할 리 없지.”


백산이 긍정의 의미를 담아 눈을 껌뻑거렸지만 눈꺼풀도 쉽게 움직여지지 않았다. 혜공이 말을 계속 이었다.


“잠들어 있을 때 맥을 잡아봤는데, 여러 개의 독을 섞어 썼는지 맥이 영 단순치 않았소. 온몸이 퉁퉁 붓고 몸이 검어진 것으로 보아 피를 굳게 하는 독인 것만은 분명해요. 의사들이 대응해 당장 살아있기는 한데 독을 완전히 제거하지 않으면 결국 죽을 거요.”


혜공은 승복 안을 뒤지더니 작은 상자를 꺼냈다. 상자에는 엄지손가락 굵기의 검은 환약이 들어있었다. 혜공은 환약을 문질러 가루를 내어 물에 섞었다.


“산에서 수련하다 뱀에 물렸을 때 쓰라고 가지고 다니는 약이요. 효과 면에서는 우리 절이 자부합니다. 당장 환약을 삼킬 수 없을 테니 일단 이렇게라도 약을 씁시다.”


혜공이 약을 섞은 물을 백산의 입에 천천히 조금씩 부어넣었다. 백산은 목젖과 혀를 간신히 움직여 입안을 적시는 물을 삼켰다. 약의 효과는 놀라웠다. 유세나와 혜공이 식사를 하고 다시 병실을 찾았을 때 백산의 부기는 전보다 절반이나 가라앉았고 발음이 어눌하기는 했지만 말도 할 수 있었다. 백산은 유세나와 혜공에게 일본과 중국 무사에 의해 상무암이 공격당한 얘기를 했다. 혜공이 침울한 얼굴로 의견을 말했다.


“아마 그들도 백산의 생사를 확인하고 있을 것이요. 이 몸으로 그들에게 발각된다면 끝장이요. 내가 지금 가진 약도 없으니 당장 호국사로 옮깁시다.”


혜공은 바로 사설 구급차를 대절해 백산과 유세나 태우고 지리산 거림계곡의 호국사까지 내달렸다. 구급차 대절비는 혜공이 대었다.


“우리 절의 보물을 찾아주었는데 이 정도는 해드려야죠. 그리고 무인의 도리이기도 하지 않소. 주지스님도 양해해 주실 거요.”


감사해 하는 백산을 보며 혜공은 호탕하게 웃었다.

*******

백산은 밤늦게 거림 계곡 호국사의 한 승방에 누웠다. 마음이 안정되었기 때문인지 혜공이 건네주는 환약을 갈아 마시자 바로 잠이 들었다. 다음날 새벽, 백산은 문득 눈을 떴다. 4시면 일어나는 평소습관대로였다. 방문 밖에서는 호국사의 스님들이 새벽 예불을 위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백산은 억지로 몸을 일으켜 앉았다. 부기는 아직도 남아있었지만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된 자체가 놀라운 향상이었다.


범종소리가 들리자 백산도 바르게 앉아 참선을 하려했지만 몸이 영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백산은 그대로 벽에 기대 눈을 감고 상무사에서 중국과 일본 무사들과 싸웠던 일을 되돌려보았다. 자신과 겨루었던 한명 한명과 일대일로 싸웠다면 모두 이길 수 있었다. 그러나 머릿수의 위력은 당해내기 어려웠다. 무산이라도 있어 자신을 도와주었다면 이렇게 목숨이 위험해지고 남의 도움을 받게 될 처지까지는 가지 않았을 것이다. 무산을 생각하자 백산은 가슴이 아렸다. 그 아픔 때문인지 백산은 문득 한 가지 깨달은 것이 있었다.


임 거사는 항상 두 명의 제자를 키웠다. 한 명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면 대가 끊기기 때문이라 생각했지만 이 처지가 되어보니 꼭 그것만이 이유가 아니었다. 두 명의 제자를 두는 것은 혼자로서는 싸우는데 한계가 있기 때문이었다. 백산은 한 숨을 내쉬었다. 무산도, 진산도 없었다. 몸이 나으면 상무암에 돌아가 암자를 지켜야 하지만 또 수적 열세에 빠져 이런 꼴이 또 되지 말라는 보장이 없었다. 당장 사제를 키울 수 없으니 혼자 여러 명을 상대할 뭔가 비법이라도 있어야 했다. 하지만 백산에게는 부은 몸뚱이 뿐이었다. 그렇게 백산은 고민하며 아침을 맞았다. 스님이 가져다주는 죽을 먹고 나자 혜공과 주지 남전이 찾아와 백산의 상태를 들여다보았다. 그들의 돌아간 후 유세나가 왔다. 유세나는 진지한 얼굴이었다.


“도법서를 대충 해석해봤어요. 그런데 이건 정말 중요한 책 같아요. 향찰 연구에 새로운 장을 여는 열쇠라고 할까요. 그런데 너무 어려워요.”


유세나는 작은 한숨을 쉬고는 말을 이었다.


“더군다나 ‘도법서’라면서도 칼 쓰는 동작을 보여주는 그림은 없고 설명하는 글뿐이라 이해하기가 더 어려워요.”


도법서에 동작을 보여주는 그림이 없다는 것은 백산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만약 도해 같은 게 있었다면 임 거사나 진산이 이미 도법을 익혔을 것이다.


“그러게요. 그림이 없으니 스승님이나 사형도 도법을 익히지 못하고 있었죠. 조상들이 왜 그림 없이 글로만 도법을 풀어 놓았는지 원망스러울 뿐이었어요.”


유세나는 백산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계속했다.


“처음 보는 글자가 많아요. 다른 향찰문을 참고하고 앞뒤 문맥에 따라 유추해 뜻을 풀기는 했는데, 그 해석이 올바르다고 확신할 수는 없어요. 아니,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완벽한 해석을 하려면 여러 자료를 비교해가며 몇 년은 해야 될 거예요.”


유세나는 잠시 시선을 바닥으로 돌렸다. 자신의 능력을 넘어서는 해석의 어려움에 더 이상의 진척을 포기한 듯 보였다. 백산은 왠지 모르게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잘은 모르지만, 향찰 해석이 어렵다는 건, 저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당장 해석할 이유도 없고 필요도 없어요. 시간을 가지고 천천히 연구하면 좋은 결과가 나오겠죠.”


“일단 지금까지 해석한 부분만 설명을 해드릴게요. 그래야만 할 것 같아요.”


유세나가 고개를 들고 설명을 시작했다.


“책의 내용은 그러니까, 짧은 서문이 있고요, 본문은 64구절로 되어 있어요. 그리고 각 구절마다 그것을 설명하는 열 구절이 별도로 이어져 있어요. 도법서의 마지막 부분은 본문의 내용과는 좀 동떨어진 것 같은데, 도법서를 만든 감회에 시 같은 것이 쓰여져 있는 것 같아요. 여기에 ‘편篇’이란 글자와 ‘작作’이란 글자가 나오고 불문자 의효라는 이름이 나오는 걸 보아 아마 그 분이 스님으로 이 책의 저자인 것 같아요.”


유세나는 자신 없어 하는 투로 얘기하다 말에 힘을 주었다.


“다행스러운 점은 반복되는 어구가 많다는 거예요. 한 예로 모든 문장 끝이 ‘나한을 보라’라는 구절로 되어있어요.”


“나한요?”


백산은 놀라움에 급하게 물었다.


“예, 팔을 옆으로 들었다가 앞으로 민다. 나한을 보라. 이런 식으로요. 물론 동작을 지시하는 부분, 여기서는 ‘들었다가’ 하는 부분은 제 추측이지만요.”


나한이라면 불화나 나한상에서 쉽게 볼 수 있었다. 나한은 오백 명이나 되니 그리는 사람에 따라 모습도 동작도 제각각이었다.


“어느 나한을 보라는 말은 없습니까?”


“그런 말은 없어요. 그런데, 또 하나 이상한 것이 있어요. 방금 말한 책의 마지막 장요. 그건 전혀 다른 내용 같아요. 백촌강과 보국사라는 고유명사들이 한문으로 나오고요, 왜의 칼, 철불, 봉헌 이런 한자어들이 이어져 적혀 있는데, ‘화랑연환도법으로 백촌강에서 왜적을 베고 칼을 빼앗아 수미산 보국사에 철불로 봉헌한다.’ 이런 정도로 해석을 유추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백산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그 말이 무슨 뜻인가요?”


“글쎄요. 그 말 그대로가 아닐까 싶어요. 백제 부흥군와 왜의 연합군이 백촌강에서 신라와 당의 연합군과 크게 싸웠거든요. 그때 이야기를 말하는 것 같아요.”


백산은 그제야 한때 고시 공부를 하던 중 한국사에서 봤던 내용이 떠올랐다.


“그럼 이 도법으로 왜를 물리쳤다는 얘기가 되는 군요.”


유세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 책은 그야말로 보물이에요. 그래서···”


유세나가 백산을 정면으로 보았다. 유세나의 눈에는 결의로 채워져 있었다.


“이 ‘화랑연환도법서’의 필사본을 가지고 서울로 돌아가야겠어요. 교수님이 돌아가셨으니 새로 오실 교수님께 학위를 받아야 할 것 같지만, 이런 책이 있다는 사실은 우선 보고해야 할 것 같아요.”


유세나가 학계에 보고 한다면 ‘도법서’의 내용도 세상에 알려진다. 무술인이라면 깜짝 놀랄만한 절기가 세상에 공개되어질 수도 있는 일이다. 백산은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책을 숨겨놓지 않았다면 임 거사나 무산이 그렇게 죽음을 당했을까! 이제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도법서의 존재를 알고 있다. 절기가 알려지더라도 그것을 제대로 수련해 자기 것으로 만드는 건 또 다른 문제였다. 백산은 유세나가 학계에 알리겠다는 데는 토를 달지 않았다. 그러나 유세나가 안전해졌다고 믿을 순 없었다.


“유세나 씨를 죽이려는 사람들은 어떻게 할 겁니까?”


“경찰이 보호해 준다고 했어요.”


“그렇게 쉽게 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유세나씨를 향해 날아왔던 표창을 생각해보세요. 박용준인지, 박용진인지 정확한 배후는 모르겠지만 한국 굴지의 재벌입니다. 경찰이라고 끈이 없겠습니까?”


백산은 담담히 말했지만 어두워지는 유세나의 얼굴을 보며 다시 갈등에 빠졌다. 유세나는 침통하게 말했다.


“하지만 언제까지 이곳에 숨어있을 수만은 없잖아요?”


그 말은 사실이었다. 유세나는 이곳에 계속 있을 순 없었다. 이번에는 백산이 한숨을 쉬었다. 유세나는 들고 왔던 노트를 백산에게 건넸다.


“도법서의 내용을 대강 정리한 것이에요. 조사는 대부분 내가 달았어요. 직역본이라 읽기가 힘들 거예요. 내가 좀 악필이기도 하고요.”


유세나는 겸연쩍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사실은 절반 이상을 추정해 써넣었어요. 정확한 뜻인지는 모르지만, 사람이 구현할 수 있는 몸동작으로는 그럴 것이라고 생각해서···”


백산은 유세나가 이 노트를 주는 이유를 곧 알았다. 절을 떠날 준비를 하는 거였다. 유세나는 백산의 반응을 보았다. 백산은 자신의 처지로는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 일단 드리는 거니 몸조리하며 심심할 때 보세요.”


유세나는 말을 마치고 몸을 일으켰다.


유세나가 돌아간 뒤 백산은 부은 몸을 벽에 기대고 노트를 들여다보았다. 유세나의 말대로 동작을 지시하는 말들이 어색한 표현으로 비딱하게 휘갈겨져 있었다. 한번 읽기만으로는 바로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백산은 같은 문장을 끈기 있게 반복해 읽었다. 백산은 무도인이었다. 문장하나가가 동작과 연결된다고 확신하며 문장을 반복해 읽자 머릿속에서 동작이 하나씩 그려졌다. 백산을 감탄하게 한 것은 칼의 이어짐이었다. 한 초식 한 초식 그 하나로는 크게 놀랍다고 할 수 없을지라도 그것을 이어 사용한다면 사방의 적을 막고 벨 수 있는 위력을 발휘했다.


백산은 도법의 이름에 '연환'이라는 말이 들어간 이유를 이해하게 되었다. 그러나 얼마 못가 백산은 강한 의문에 사로잡혔다. 이 책에 쓰여 진 대로의 칼질은 한 사람이 연결해 하기가 불가능하다는 걸 알아챈 것이다. 백산은 해석이 잘못되었나 싶어 처음부터 다시 읽었지만 도법 하나하나를 떼어놓고 본다면 실행하는 데에는 물리적으로 문제가 없었다. 단지 그것을 이어서 펼칠 때가 문제였다. 그걸 한 사람이 하기에는 동작이 컸고 틈이 많았다. 이해 할 수없는 부분을 만나 고심해서였을까! 백산은 현기증과 함께 체력의 소진을 느끼며 노트를 내려놓고 비스듬히 누웠다.


그렇게 한참을 누워있다 백산은 누운 채로 도법에 관해 다시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동작 하나하나는 이해가 되었지만 상대에게 반격할 틈을 너무 많이 준다는 것에서 도저히 그 동작에 동의할 수 없었다. 그렇게 고민하던 중 잠이 들었다. 백산이 눈을 떴을 때는 공양간 스님 한분이 죽과 약을 가져와 백산의 머리맡에 내려놓고 있었다. 속에 음식이 들어가자 머리가 맑아지며 기운이 났다. 약까지 마시고 잠시 누워 있던 중 혜공이 다시 찾아왔다.


“좀 어떠시오?”


백산이 몸을 일으키며 대답했다.


“여러 스님이 고생해주시는 덕분에 많이 나았습니다.”


혜공이 백산의 맥을 짚었다.


“음, 나아지고는 있습니다만, 아직은 몸을 쓰면 안 돼요.”


혜공은 백산의 손목을 놓으며 말을 돌렸다.


“유세나씨가 내일 서울로 가겠답니다.”


“아까 제게 와서 그런 의사를 밝혔습니다.”


혜공은 걱정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하지만 백산도 그게 얼마나 위험한지는 알고 있지 않아요?”


“알고 있습니다만, 목표가 있는 젊은 여자분을 언제까지 이곳에 숨어있어라 할 수도 없는 일 아닙니까?”


혜공의 표정이 더 깊어지며 긴장된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미타암 암주 스님이 한 말인데, 그제 미타암에서 낮선 남자 둘이 찾아와 암자 이곳저곳을 기웃거렸답니다. 그런데 행색은 등산객이었지만, 기운은 조폭이나 양아치들이었답니다.”


“그럼, 교수를 살해하고 유세나 씨마저 죽이려한 쪽이 유세나 씨를 찾아냈단 말입니까?”


“유세나씨는 오자마자 경찰과 통화를 했고, 부모님과도 가끔씩 통화를 했어요. 그뿐이겠소. 대학 연구실의 다른 학생들과도 연락을 주고받았지. 그 사람들에게 자신이 있는 장소는 말하지 않았지만, 요즘 잘 한다는 위치추적 같은 건 할 수 있었겠지. 경찰이라면 더 그랬을 것 같은데.”


백석은 상대가 용일 그룹이라는 데 불안감이 더 커졌다.


“유세나씨가 서울로 가는 걸 말려야겠습니다.”


혜공이 고개를 흔들었다.


“내가 몇 번이나 말해보았지만, 젊은 아가씨가 산 속 절에 숨어 있는데 한계에 온 것 같소. 서울에 가자마자 경찰서에 찾아가 보호 요청을 하겠다고 하는데, 과연 경찰이 얼마나 신경써줄 수 있을지 모르겠군.”


혜공이 품안에서 환약을 한 알을 꺼내 백산에게 먹였다. 처음 먹었던 것과는 또 다른 맛이었다.


“이건 해독보다 보양을 위한 약이요. 십여 년 전, 산행을 하다 발견한 지리산 산삼을 응겨냈는데 거기에 다른 약초들도 넣었지.”


“그런 귀한 걸 저에게 주시다니···”


“약도, 사람도, 다 인연이 있는 거요.”


빙긋 웃으며 일어서려는 혜공을 백산이 붙잡았다.


“혹시 유세나 씨가 도법서의 내용을 얘기해 주지 않았습니까?”


혜공이 정색을 했다.


“그건 상무암의 것인데 우리가 어찌 함부로 얘기를 듣겠소?”


“유세나 씨는 서울로 가 도법서의 존재를 학계에 알리겠다고 했습니다. 도법서가 상무암거라 하지만 학문적 입장에서 저러니 막을 방법도 없고, 상무함 홀로 그 책을 가지고 있었기에 사부님과 사제가 변을 당한 것 같기도 하고···”


백산은 깊은 한숨을 쉬고는 혜공에게 노트를 내밀었다.


“유세나 씨가 해석한 도법서입니다. 향찰이라는 게 워낙 어려워 유세나씨도 추측으로 넣은 부분이 반 이상이라고 합니다. 저도 읽어봤는데 한 동작 한 동작은 이해가 되지만, 연결해서는 틈이 너무 많은 것 같고. 스님이 한번 보시고 가르침을 주십시오.”


혜공은 무술인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화랑연환도법이 뭔지 그간 궁금했던 차였다. 노트를 받는 혜공의 손이 자신도 모르게 떨리고 있었다. 혜공은 자세를 바로하고 노트를 열어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혜공이 긴 숨과 함께 노트를 닫았다.


“백산의 말이 맞소. 한 수, 한 수는 훌륭하지만 연결하면 틈이 있소. 그런데···.”


혜공이 말을 잠시 멈추고는 고개를 살짝 흔들며 말했다.


“이 책에는 내력을 싣는 방법이 없어요. 술(術)만 있고, 진(眞)은 없다는 말과 같은데, 졸(卒)을 만나면 이기겠지만, 내력이 강한 진짜 고수를 만나면 아무리 무거운 칼을 쓰도 밀리고 말거요.”


그제야 백산도 깨달았다. 노트를 읽는 내내 마음이 허전했던 게, 어디에 기를 넣는지 가르침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맞습니다. 스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백산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리듯 말했다. 혜공이 말을 이었다.


“이건···, 연구를 좀 더 해봐야겠지만, 한 사람을 위한 도법은 아닌 것 같소. 한 사람이 시연하기에는 틈이 너무 많아!”


혜공은 30년 이상 무술을 익히며 사찰 무술만 아니라 다른 문파의 무술도 폭넓게 공부한 사람이었다. 해박한 지식을 가진 눈으로 ‘화랑연환도법’에 관한 의문을 바로 짚어내고 있었다. 혜공의 의구심에 백산도 동조하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저와 그게 이상했습니다.···”


백산이 말끝을 흐리며 1,2초간 생각하다 혜공에게 물었다.


“도법서의 제목이 연환이지 않습니까? 왜 그 말을 집어넣었을까요?”


“연환이라면 쇠사슬을 말하는 거요. 추상적 의미로는 계속 이어진다는 뜻이지. 그런데 한 사람이 칼질을 이어지게 하기에는 빈틈이 많으니까···”


백산은 눈빛을 반짝이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이건 여러 사람이 하나가 되어 사용해야 되는 것입니다. 책에 쓰인 백촌강 전투 얘기가 그런 의미였습니다. 절기를 가진 한, 두 명의 힘으로는 그렇게 큰 전투에서는 이길 수 없을 테니까요.”


혜공도 백산의 의견에 동조했다.


“마지막 부분의 내용과 연결하면 그렇군.”


백산은 뭔가 결심한 듯 몸을 바로 잡고 혜공을 보았다.


“‘화랑연환도법서’를 호국사에서 계속 맡아 주시겠습니까? 호국사에서 도법서를 연구해 스님들에게 익히게 하면 엣 신라 화랑의 비술을 다시 살려낼 수도 있고요.”


단순히 가지고만 있어달라는 게 아니라 그 도법서를 읽고 연구해도 좋다는 의미에 혜공은 눈을 크게 떴다.


“그래도 되겠소?”


“마음으로는 책을 그냥 드리고 싶습니다만 오래전부터 상무암에 전해지던 물건이고 사부님이 소중히 여기시던 것이라 아주 드리겠다는 말은 못하겠습니다.”


혜공이 이해한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상무암의 제자는 저 하나 뿐입니다. 저 하나로서는 연환도법을 익힌대도 유용하게 쓸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책을 노리는 자들이 많으니 혼자 감당하기도 어려울 것 같구요. 그럴 바에야 호국사에 아예 맡겨놓는 것이 유용하지 않겠습니까?”


“백산의 뜻을 알겠소. ‘화랑연환도법서’를 장기 임대한 걸로 합시다. 사정이 좋아져 돌려달라면 언제든지 돌려드리겠소.”


혜공이 호탕하게 웃었다. 혜공이 백산의 처소에서 나간 뒤 얼마 되지 않아 호국사주지 남전과 다시 왔다. 도법서를 자유롭게 볼 수 있게 하겠다는 데 감사의 말을 하기 위해서였다.


“혜공의 말로는 기운 쓰는 법이 빠져 있다고 하던데, 거기에는 숨은 뜻이 있을 거요. 우리가 정심으로 연구한다면 칼을 쓰며 기를 어떻게 운용하는지 알아낼 수 있을 거요. 시간이 꽤나 걸리겠지만, 내 반드시 화랑연환도법을 되살리겠소.”


남전은 합창으로 백산에게 약속했다. 남전과 혜공이 돌아가고 백산은 혼자가 되었다. 화랑연환도법서를 내려놓고 상무암 요사채처럼 작은 방에 홀로 앉아 사부와 사형, 사제와의 추억을 회상하는 백산의 마음은 허전하기도 하고 가볍기도 했다. 공양간 스님이 약과 저녁을 갖다 주었다. 잠시 후 저녁 예불 소리가 들렸다. 백산은 아련한 독경소리를 들으며 바로 수저를 잡지 않았다.


백산은 밤새 유세나의 노트를 반복해 읽으며 머릿속으로 동작을 그렸다. 노트를 오래 들여다보고 있을만한 몸이 아니고, 기운 쓰는 법이 들어있지 않아 반쪽자리 도법이지만 백산은 무술가로서의 호기심을 참을 수 없었다. 게다가 이 도법을 위해 사부와 사제가 죽기까지 했다. 백산은 기력이 떨어지고 또 살아나기에 따라 자리에 누웠다 일어나기를 앉기를 반복하며 계속해서 노트를 읽고 또 읽었다. 그렇게 새벽녁이 되어 백산은 자신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의상봉이 빤히 보이는 북한산 상무암에서 백산은 환도를 들고 초식을 펼치고 있었다. 도법서에 적혀있던 도법이었다. 환도를 휘두르며 몸을 날려 공중에서 방향을 틀고 비스듬히 내리치며 땅에 앉자 초식을 보고 있던 임 거사 손을 들어 가리키며 뭐라고 했다. 백산은 임 거사가 가리키는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그곳에 나한각이 보였다. 백산은 어느새 나한각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진산과 무산이 불단에 세워진 나한상들을 닦고 있었다. 백산이 뭘 하냐고 물었지만 둘은 답하지 않고 계속 나한상을 닦기만 했다. 진산과 무산이 나한상을 닦을 때마다 나한상의 색이 벗겨졌다.


백산이 둘을 말렸지만 둘은 나한상 닦기를 멈추지 않았다. 색이 사라지며 나한상이 빛나기 시작했다. 백산은 놀라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나한상에서 나오는 빛은 온 세상이 덮을 듯 밝아지며 백산을 덮쳤다. 눈이 부신 백산이 손으로 눈을 가렸지만 빛은 손을 뚫고 날아와 눈에 꽂혔다. 백산은 악 소리를 지르며 잠에서 깨어났다.


날이 훤한 늦은 아침이었다. 백산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머리맡에는 약과 죽이 놓여있었다. 백산이 새벽잠에 빠져있는 사이 공양간 스님이 두고 간 모양이었다. 꿈속에서 빛을 내었던 나한상이 당장 눈앞에 있는 것처럼 생생했다. 갑자기 상무암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곳 나한들이 자신을 부르는 것 같았다. 백산은 부기가 남아 있는 몸으로 조용히 일어나 방밖으로 나갔다. 청아하고 상쾌한 지리산의 아침 공기가 폐 깊숙이 빨려 들어왔다. 혼탁한 도시의 기운이 섞일 수밖에 없는 북한산의 공기와는 차원이 다른 맑은 기운이 들어있었다. 백산은 자신도 모르게 바로 앞 풀 위에 앉아 가부좌를 틀고 깊은 호흡을 시작했다.


그날 오전 유세나는 자신이 머물고 있던 미타암에서 내려와 호국사를 떠났다. 백산도 같이 움직이려했지만, 남전과 혜공이 강하게 막아섰다. 몸이 이전으로 돌아오지 않은 것은 백산 자신도 인정하는 일이라 고집을 피우지는 못했다. “서울에 도착하면 바로 경찰에 신변보호를 하세요. 가능하면 집 안에만 있고요, 학교에 갈 때는 반드시 택시를 타고 다니세요. 절대로 밤에 돌아다니지 마시고요.”

백산은 당부하고 또 당부했다. 유세나도 백산만큼 걱정하고 겁이 났지만, 더 이상 숨어있을 여유가 없다는 사실에 귀경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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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종장: 새 제자 21.02.16 281 5 11쪽
50 12장. 복수의 끝자락(3) 21.02.12 214 2 16쪽
49 12장. 복수의 끝자락(2) 21.02.09 214 2 13쪽
48 12장. 복수의 끝자락(1) 21.02.05 217 1 20쪽
47 11장. 추격과 습격(4) 21.02.02 220 1 18쪽
46 11장. 추격과 습격(3) 21.01.29 227 1 14쪽
45 11장. 추격과 습격(2) 21.01.26 199 1 14쪽
44 11장. 추격과 습격(1) 21.01.22 233 1 15쪽
43 10장.납치(4) 21.01.19 236 1 12쪽
42 10장.납치(3) 21.01.15 234 1 22쪽
41 10장.납치(2) 21.01.11 227 1 15쪽
40 10장. 납치(1) 21.01.08 217 1 25쪽
39 9장. 토모키루의 칼(5) 21.01.05 241 1 31쪽
38 9장. 토모키루의 칼(4) 21.01.02 244 1 13쪽
37 9장. 토모키루의 칼(3) 20.12.31 220 1 13쪽
36 9장. 토모키루의 칼(2) 20.12.28 210 1 17쪽
35 9장. 토모키루의 칼(1) 20.12.25 232 1 13쪽
34 8장. 유세나의 위기(6) 20.12.22 212 2 26쪽
33 8장 유세나의 위기(5) 20.12.18 211 2 18쪽
32 8장. 유세나의 위기(4) 20.12.15 210 3 13쪽
31 8장. 유세나의 위기(3) 20.12.12 234 2 16쪽
30 8장. 유세나의 위기(2) 20.12.08 223 2 23쪽
29 8장. 유세나의 위기(1) 20.12.04 215 2 14쪽
» 7장. 백산의 위기(5) 20.12.01 213 2 23쪽
27 7장. 백산의 위기(4) 20.11.27 219 2 13쪽
26 7장. 백산의 위기(3) 20.11.24 216 2 12쪽
25 7장. 백산의 위기(2) 20.11.20 279 2 17쪽
24 7장. 백산의 위기(1) 20.11.15 237 2 14쪽
23 6장.배반의 배반(3) 20.11.09 244 2 19쪽
22 6장.배반의 배반(2) 20.11.05 242 2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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