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을지는 날은 누군가와 말을 나누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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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원명이 교체되고도 백여 년이 흐른 더운 팔월의 어느
여름날 오후였다.
부의 도읍인 절강성 항주에는 무림 각파의 세력들이 호시
탐탐 서로를 견제하며 집결해 있었다.
그중 백화장원은 남궁세가의 세력 관할중 작은 하나였으며,
항주를 가로 지르는 남쪽 물길중 남천포구와 인근 주루를 관
할 사업으로 하고 있었다.
항주의 8월은 본래 유난히 더웠고 백화장원의 키큰 석류나무
아래 한 허름한 백의 차림의 청년이 손에 전지가위를 들고 서
있었다.
청년의 외모는 보통 키에 단아한 이목구비 하며 맑고 선한 눈
빛에 태도는 단정했다.
그가 푸른 하늘에 외로이 떠가는 흰 구름을 올려다보며 혼잣
말을 했다.
“여기 온지 이제 석 달, 나는 아무 걱정 없이 잘 지낸다. 어제
도 고향의 어머님께 적은 돈이나마 부쳐 드렸다. 정말 잘 되었
다”
백화장원의 장주는 청풍검 장이심이었으며 부인과 아들 그리
고 늦게 얻은 여식이 하나 있었다.
장원의 인원은 100여명이었고 그중 무인이 70여명 되었고,
30여명은 무인들을 뒷바라지 하는 식솔들이었고 청년은 그중
한명 있는 정원사였다.
청년이 장주부인 집안 큰어른의 소개로 특별히 채용된 것이다.
청년이 다시 전지가위로 정원의 죽은 꽃가지를 마저 자르려
하던 때였다.
두 사람의 인물이 목책문을 열고 정원에 들어섰다.
한 사람은 호리해 보이나 키가 크고 맑은 기상의 인물이었고,
곧 소장주인 장명휴였다.
옆의 소녀는 천상의 소녀 같이 흰옷에 기품이 있고, 이목구비
는 조각을 한듯 했고 석류나무 붉은 꽃잎사이로 비쳐드는 여
름의 태양이 두눈 속에 빛나며 보는 사람을 취하게 하는 미소
녀였다.
소장주의 누이동생인 장의경이었고 정원을 돌보는 신분인
백의청년과는 21살로 동갑이었다.
백의청년이 급히 허리를 숙이며 두 사람을 향해 인사했다.
“소장주님, 그리고 소저, 안녕하십니까”
“이정, 잘 지냈느냐?”
소장주 장명휴가 웃으며 인사말을 받았다.
그의 시선이 백화가 만발한 정원으로 향하더니 면전의 키높
이에 피어난 노란 능소화 덩굴 꽃을 향했다.
“이정아, 능소화 꽃이 일찍 피어났다. 능소화꽃이 피면 가을 장
마가 시작된다 했는데 평년보다 한달이나 빨리 피었구나”
“예, 어제 밤중에 시원한 비가 한차례내린 탓인지 오늘 아침
갑자기 개화 했습니다”
“오늘 아버님이 이 황홀한 꽃들을 아쉽게도 못 보았구나”
“예, 장주님이 평소와 달리 오늘 아침에는 들러지 않았습니다”
장주인 청풍신검은 아침마다 정원에 산책을 했고 이정이 모
시고 안내했다.
이정의 말에 소장주가 미간에 갑자기 어두운 빛을 띄며 말했
다.
“아버님이 어제 저녁무렵 남궁세가에 가셨다. 아마 빨라도 오
늘 저녁에야 돌아 오실 것이다”
소장주는 천기공자라는 명호마냥 기인과 도인의 득도한 기풍
을 띄고 있었다.
그가 이정을 직시했다.
“이제 네가 온지 석 달이 되었으니 지금부터 무공을 배우도록
해라. 본래 백화장원의 모든 식솔들은 무공을 배워 익히는 법
이다. 일단 내가 기본 심법과 초식을 가르쳐 줄 것이니 나머지
는 조노인에게 배우도록 해라“
그때 잠자코 있던 장의경이 말했다.
목소리가 낮고 조심스러웠으나 심산의 바위틈을 흐르는 물소
린양 청량했다.
“오라버니, 전지가위는 잘못 다루어도 주인을 크게 다치게 하
지 않으나 검은 잘못 주인을 죽이기까지 하지요. 먼저 그의 의
사를 듣는 것도 좋을듯 하네요”
장명휴가 총명하면서도 항상 신중하고 배려가 있는 그의 누이
동생을 잠깐 돌아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정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나무가 뿌리박은 이 땅이
어느 날 적들에게 빼앗겨 백화장원과 함께 정원이 불타는 것
을 바라지는 않을 것이다. 어떻느냐? 연약한 장미도 자신을
보호하는 가시가 있지 않느냐? ”
그렇다.
그것이 곧 백화장원이 한 손에 호미와 동시에 검을 쥔 이유였
다.
이정이 충분히 알아들었고, 이미 장원 사람들에게 들어 백화
장원의 모든 식솔들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가벼운 무공이라도
몸에 익히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고개를 숙이며 지시를 따랐다.
“알겠습니다. 제 자질이 부족하오나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그리고 소장주가 백화장원의 기본심법인 백화심결중 장원의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는 기초부분을 일러주고 또한 한 초식의
검법을 가르쳐 주었다.
그가 잠시 이정의 맑은 눈빛을 보더니 스스로 탄식하며 말했
다.
“열심히 해라. 단지 대부분의 무림의 유실된 신공절기와 같이
백화장원의 무공이 한 때는 무림을 뒤흔든 적이 있으나 지금
은 요체가 많이 유실되어 그렇지 못한 것이 안타깝구나. ”
“나머지 무공은 조노인에게 사사를 받도록 하라. 내가 나중
일러둘 것이다”
그리고 두 사람이 이정의 안내를 따라 정원을 한 바퀴 둘러
보았다.
이정이 보니 평소와 달리 두 사람의 신색이 무거웠다.
문득 앞서 말한 장주님이 남궁세가로 간 이유와 연관이 잇는
것으로 이정의 머릿속에 떠올랐으나 그가 물을 사항이 아니었
다.
두 사람이 돌아간 후 이정이 정원에 있는 자신만의 소축으로
갔다.
소축은 날씨가 추워지는 가을 이후에는 사용할 수 없지만 붉
은 벽돌로 담과 지붕을 만들고 일부는 창고로 사용하고 있었
다.
그가 평소 백화장원의 숙소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방을 사
용하나 여름인 지금은 이곳에서 잠을 자기도 했다.
열린 창문을 통해 저녁 무렵의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며 멀리
활짝 피어난 능소화 꽃 넝쿨이 보였다.
하늘을 능히 이기는 꽃(凌花)!
그래서 능소화라 했다.
꽃 그 자체로 아름다우면서도 하늘이 내린 지상의 온갖 역경
을 이기고 하늘에 닿는 꽃이었다.
능소화 꽃 같은 아름다운 여인인 장의경 소저의 모습 또한 눈
앞에 떠올랐다.
수화검(羞花劍) 장의경!
백화장원에 백 가지의 꽃이 있으나 꽃이 그 아름다움에 고개
를 숙인다며 세인들이 수화검이라 명호를 붙인 그녀였다.
그녀의 무공과 총명함 그리고 인품 역시 뛰어났기에 그녀에
게는 수화검 외에도 여러 아호로 불리기로 했으며 그녀를 흠모
하는 청년기협들이 당연히 많았다.
처음 이정이 그녀가 자신과 21살 동갑인 것이 믿기지 않았다.
그녀의 현현한 분위기는 그녀가 마치 그의 연상인듯 했고, 그
녀가 가끔 환한 미소를 지을 때는 그가 오히려 나이가 너무
많이 들어 늙은듯 했다.
그녀는 그가 보아온 한란보다도 국화보다도 오월의 장미보다
도 정원에 피어나는 어떠한 꽃보다도 청초하고 아름다웠다.
이정이 창문가 자신의 방 의자에 앉아 잠시 그녀의 모습을 떠
올리더니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아서라! 네가 그녀를 생각하는 것은 지상의 두꺼비가 하늘의
거위고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녀가 너를 무시하지 않고 잘 대
해주는 것만도 정말 고맙지 않느냐. 너는 정말 그녀와 대공자
같은 분들과 함께 있을 수 있는 것만도 행복한 것이다.네가
책에서 읽기에는 도회의 사람들은 잔인하여 사람을 짐승과 같
이 대하고 혹사한다고 하지 않더냐? 그런데 너는 이곳에서 마
치 온실속의 화분같이 작은 노력에도 칭찬을 받고 보수도 받
으며 대우를 잘 받지 않느냐”
이정이 일어나 서편 저녁 붉은 노을을 바라보았다.
노을 지는 날은 무언가 자신의 심정속의 말을 누군가와 나누고
싶은 날이다.
이정이 빈한한 살림에 고생하는 고향의 모친과 어린 동생들을
생각하며 다짐의 말을 했다.
“이정아, 너는 지금 정말 행복하구나. 그리고 그만큼 너를 위해
주는 장원의 윗분들을 실망시키면 안될 것이다”
그리고 이정이 방에 누워 소장주가 마침 주고 간 작은 책자를
넘겼다.
책자에는 백화심법의 기초구결이 적혀 있었고, 이정이 앞서
소장주의 설명을 하나하나 기억하며 읽어나갔다.
그리고 그가 정좌해서는 심법을 따라했다.
정좌한 그가 조그마하고 따뜻한 기감을 느끼기는 어렵지 않았
다.
그러나 책자에는 여기서 기혈과 기운의 운용이 막힌다 했다.
임독맥이 막힌 일반인이 지금 느끼는 기감을 키우고 막힌 임
독맥을 뚫고 몸을 주천하는 소주천에만도 십년 이상이 걸린다
했다.
그러나 이정이 책자의 내용과 달리 자신의 몸이 무언가 이상
함을 느끼고 안색이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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