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아이린
격한 흔들림에 감았던 눈이 저절로 떠지기 시작했다. 서서히 정신이 들어가며 나는 누군가의 허덕임과 내가 누군가에게 엎혀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눈을 뜨자 보이는 것은 누군가의 등이였다. 내가 깨어난 것을 알아챈 모양인지 그는 나에게 말했다.
" 괜찮아? 엘리? "
이 목소리, 프레이 라그나로크의 목소리다. 어째서 그가 나를 엎고는 뛰어가고 있는거지? 막 깨어난 정신에 영문을 알 수 없는 일이 눈 앞에 이미 펼쳐져 있으니 머리회전이 잘 되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숙였다. 이마가 그의 등에 부딪혔고 나는 그 상태로 다시 눈을 감고는 침착하고 안정을 찾으려고 했다.
팔은 이미 그의 목을 감싸고 있는 상태였다. 아니 걸쳐져 있다는게 더 정확한 표현이다. 이정도면 정신이 꽤나 돌아온 것 같다. 나는 그에게 말했다.
" 프레이. 왜 여기에 있는거야? "
최대한 엘리 라그나로크와 비슷해 보이기 위해서 그녀의 정보를 바탕으로 연기했다. 사실 연기따위는 필요없을지도 모른다. 정확한 것은 모르겠지만 아마 줄리어스가 그에게 무엇인가를 했을테니까.
그는 나를 엎고 여전히 숨을 헐떡이며 뛰어가고 있었다. 이정도 속도면 체력소모가 꽤나 심할텐데 그는 몇분이 지나도 계속해서 뛰었다. 그리고 나의 질문에 대답을 했다.
" 부끄러운 일이지만, 네 생각에 가만히 있을 수 없었어. 널 또 잃어버린다고 생각하니 다른 도시에서의 방어임무같은 것은 어떻게 되든 상관없어. "
그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말했다. 끊김이 없고 그리고 목소리에는 각오가 들어있었다. 그의 말대로일지도 모른다. 그는 여지껏 방관을 해왔으니까. 하지만 나는 내 진심을 속이지 못했다.
" 멍청하고 불쌍한 사람. "
아....아직 정신이 덜 든 모양이다. 생각하고 있는 것을 그대로 입밖으로 내버리다니. 나는 곧바로 프레이의 상태를 살폈다. 그는 여전히 달리고 있었지만 나의 말에 기운이 죽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 하하. 할말이 없는걸. 하지만 나는 멍청해도 좋아. 불쌍해도 좋아. 너를 다신 잃지 않겠어. "
오히려 그는 웃었다. 더 이상 미래가 보이지 않는 세상속에서 웃었다. 지금 당장 도망친다고 어떻게 산다는 보장도 없는데 그는 다리에 힘을 꽉 주고 달렸다. 나는 그런 그를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묻고 싶었다. 어떻게 그렇게 긍정적일 수 있냐고.
어째서 이 순간에 긍정적이 될 수 있냐고 묻고 싶다. 이제껏 뭐 하나 제대로 자신의 뜻대로 해본 적도 없는 사람이 왜 이제와서 이런 행동을 하냐고. 이제껏 대체 뭘 해온 거냐고. 이 사랑을 왜 진작에 표현하지 않았냐고.
나도 뭔가 이상해진 것 같다. 나는 아이린 풀문이다. 아이린 풀문. 분명....나는 좀 더 단순한 행동을 패턴을 했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뭔가 복잡해진 것 같다. 성장한건가? 정신이? 아니면 에리온느의 정신이 돌아오기라도 하는건가? 아니다. 나에겐 그 기억만이 존재할뿐. 내가 그녀라는 자각자체가 없어. 난 그녀를 알지만 그녀가 아니야.
" 엘리? "
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나는 이내 생각하던 것을 멈췄다. 나는 곧 그의 목을 감싸고 편하게 그에게 기대며 말했다.
" 충분히 왔잖아. 이제 그만해. "
이미 주위는 내가 쓰러져있던 해안격벽지대에서 훨씬 먼곳으로 변해있었다. 프레이도 곧 주위를 훑어보기 시작했고 운 좋게 벤치가 있어 그곳에서 쉬기로 했다. 우리들은 벤치에 앉았다.
하지만 여전히 주위에는 사라지지 않는 마력안개가 끼어있었고 프레이는 여전히 경계를 풀지 못했다. 나는 아무렴 좋았다. 이미 확답을 받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경계하고 있는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는 눈을 감았다.
" 프레이. "
" 응. 엘리. "
그의 이름 부르자, 그는 담백하게 대답했다. 여전히 경계를 풀지 못해 온 몸에 힘이 들어가 있다는 걸, 기대고 있는 어깨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나는 눈을 감은채로 조용히 씨익하고 웃었고는
" 나는 엘리 라그나로크가 아니야. "
고백했다. 하지만 기대고 있는 어깨에는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듯이 대답하기 시작했다.
" 무슨 소리를 하는거야. 너는 엘리야. 엘리 라그나로크. 아...혹시 풀문으로 입양되서 아이린 풀문이 됬다는 소리라면....그렇긴 하네. "
나는 기대고 있던 어깨에서 벗어나 고개를 들었다. 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봤다. 나의 시선을 느낀 모양인지 그도 나를 바라봤다. 줄리어스가 그에게 어떤짓을 해서 나를 엘리 라그나로크로 보이게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내 능력이 그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손을 뻣어 그의 뺨에 가져다 댔다. 나의 손길을 느낀 그는 오히려 미소를 지었다. 멍청하고 불쌍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다시 들었다. 나 역시 그런 그의 미소를 보며 그렇게 행복하지만은 아닌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그의 정신을 바짝 차리게 만들었다.
순식간의 일이였다. 나의 마력이 내손을 타고 빛을 발했고 그는 마치 감전이 된 것 같이 한번 크게 요동치더니 곧 쓰러졌다. 그는 내쪽으로 서서히 기울어져 쓰러졌다. 나는 그의 머리를 내 다리맡에 놓고는 그를 벤치에 눕혔다. 그리고 그가 깨어날 때를 천천히 기다렸다.
여전히 주위에는 마력안개가 퍼져있었지만 마력중독자들의 모습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것도 없는 고요의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다. 마력안개만 없었다면 더욱 멋진 밤하늘을 바라볼 수 있을텐데.
그렇게 몇십분이 지났다. 그에게 걸려있는게 진짜 지혹했던 모양이다. 아직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한 것을 보면. 그나저나 나는 왜 그에게 이렇게 집착을 하고 있는건지 모르겠다. 아니 알 것 같기도 하다. 이 멍청하고 불쌍한 사람에게 현실을 알려주고 싶어서다. 나는 엘리 라그나로크를 끝까지 연기할 자신이 없다. 연기를 할 필요가 없다고 하더라도 그러고 싶지 않다. 엘리 라그나로크를 진심으로 대하는 그의 모습은 참으로 견디기 힘들다. 나에게는 진심따위는 진작에 사라진지 오래니까.
아버지를 위해서 줄리어스의 말을 들어왔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아버지도 없다. 가족이나 다름이 없던 리히타르젠도 괴멸되었고 마치 이 세상에는 나 혼자 남은 것 같았다. 몰두할 곳이 필요했다. 항상 편하게 말을 건넬 수 있고 간단한 농담으로 미소를 지을 수 있는 그런 장소와 사람들이 사라졌다. 달늑대는 나에게 맞는 조직이 아니였다. 그래서 그랬다. 사람의 관계따위 어떻든 상관없다. 그저 더 이상 어떤 생각도 들지 않게 몰두했다. 연구에.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탈출구가 될 수 없었던 모양이였다. 그녀의 기억에는 내가 이랬다.
" 으으으... "
슬슬 그가 정신을 차리는 모양이였다. 나는 고개를 숙여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가 눈을 뜨자마자 나의 얼굴을 볼 수 있게. 내가 엘리 라그나로크가 아니라는 사실을 바로 받아들일 수 있게 말이야.
조금씩 그의 눈이 뜨이기 시작했다. 그의 눈속에 비친 나의 얼굴이 보였다. 그는 눈을 뜨기도 전에 나의 머리맡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 미안해. 엘리. 잠깐 정신을 잃은 모양이야. 피로가 쌓였나. "
하지만 그는 곧 두 눈을 감은채로 손가락으로 눈을 마사지하고는 나를 다시 바라봤다. 그의 당황하는 모습이 보인다. 그 눈빛은 타인을 바라보는 눈이였다.
" 나는 엘리 라그나로크가 아니야. "
그는 굳어 있었다. 다시 한번 말했지만 그는 오히려 혼란스러워했다. 곧 벤치에서 일어나고는 그는 한손으로 자신의 이마를 감싸고는 생각에 빠지기 시작했다. 그는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를 찾기 시작했다. 스스로 속삭이며 자신이 겪었던 사건을 하나하나 나열하기 시작하고는 그 속에서 어디가 잘못되었지 누구에게 속았는지를 그리고 언제부터 속았는지를 잘 떠오르지 않는 기억속에서 찾으려고 안간 애를 쓰기 시작했다.
" 당신은...대체...누굽니까. 어째서 엘리의 목소리를...."
내 목소리와 엘리 라그나로크의 목소리는 전혀 같지 않았다. 따지고보면 내 목소리가 조금 더 굵은 편이다. 하지만 이미 그의 머리속은 뭐가 진실인지 판단하는게 불가능해진 모양이다. 다행이도 외모는 분간이 가능해보이니 그건 다행이라고 말해도 되는건지 모르겠다.
" 난 아이린 풀문이야. "
" 예? 대체 무슨 말을.... "
그는 깨닫지 못했다. 하긴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그는 정신을 잃기전까지만 해도 엘리 라그나로크를 눈앞에서 확인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환상이 깨져버리자 허상만을 쫓을뿐이였다.
" 그녀는 죽었어. "
" 거짓말이야. "
" 엘리 라그나로크는 프레이 라그나로크, 당신이 북미아포칼립토 달늑대지부에 파견되고 나서 죽었어. "
" 허황된 말을 하는게 아닙니다. 아까전만 해도 엘리가 여기에... "
그는 도중 말을 멈췄다. 이미 나와의 대화에 그는 천천히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고 목소리는 이미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진 것같이 떨리고 있었다. 한번도 본적이 없는 나를 바라보며 그는 계속해서 엘리 라그나로크의 이름을 속삭였다.
하지만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곧 다시 벤치로 다가와 내옆에 앉았다. 진정이 된 것 같이 보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자포자기한 모습으로 보였다. 그는 나를 바라보지 않고 고개를 푹 숙인채 말했다.
" 그럼...난 이제 대체 뭘 위해서 살아가면 되지? "
오히려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난...오빠인 유안 풀문과 언니인 유이 풀문을 위해서 살 생각이였다. 아이린 풀문은 그렇게 살고 싶었다. 있다 없어진 가족의 소중함을 잘 알고 있기에, 에릴온느가 내 속에서 사라졌을때 본능적으로 그렇게 느꼈다.
나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이상했다.
하늘에 마력안개가 사라져 있었다. 마력안개는 온데간데 보이지 않았고 그저 밝은 빛이 저 멀리 달늑대 본사쪽에서 빛나고 있었다.
" 프레이. 저거 보여요? "
나는 급하게 옆에 있던 프레이에게 저 빛을 가리키며 말했다. 하지만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고개를 숙인채로 멈춰 있었다. 나는 그의 어깨를 잡고는 흔들었다. 그래도 움직이지 않았다.
달늑대본사쪽에서 빛나던 빛은 더더욱 커지기 시작했다. 마치 이 세상을 모두 잡아먹어버릴만큼 서서히 커져가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빛이 내 눈을 모두 가릴때까지 아무것도 할수 있는 일이 없었고 곧 빛에 삼켜졌다.
다시 눈을 뜨자 그곳은 아까와 있던 곳과 다르지 않는 곳이였다. 다만 벤치에 앉아있는 프레이 라그나로크를 제외하고도 주위에 사람들이 지나다니고 있다는 것일까. 나는 다시 한번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그 순간. 뭔가가 내 머리속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없어졌던 것이 다시 생기기 시작했다. 사라졌던 것이 다시 돌아오고 나는 나를 되찾았다.
" 이게 뭐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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