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9 장 - 판관 (2)
<제 29 장 - 판관 (2)>
그렇게 말한 신형은 주연림과 홍화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응? 왜 그러는가?”
“그렇게 뚫어지게 보시면 부끄러워요.”
신형은 현실과 마찬가지로 합의부를 운영할 생각이었다. 판사 3명이 한 사건을 함께 담당하는 것으로, 혹여나 자신이 틀리더라도 다른 둘이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으리란 생각이다.
그리고 그런 신형의 생각을 들은 둘은 당황스러워했다. 하지만 당황스러워하는 이유는 서로 달랐다.
“오라버니. 일단 본인은 공주다. 공주의 권한 중에 재판권과 처벌권이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판관의 일을 할 시간은 없다.”
주연림이 평소에 하는 일은 그리 많지 않다. 다만 황족으로서 경험하고 배워야 할 일들이 산더미라 공부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꺄악! 함께 판관이 되자는 건가요? 할래요! 하고 말고요! 어머나 세상에! 하루 종일 신형 님과 함께 일을 할 수 있다니!”
주연림과 다르게 홍화는 기쁨의 당황이었다.
판관은 고변을 받은 후, 사건조사를 진행하고 재판을 개정한다. 현실로 따지면 경찰, 검찰, 판사의 일을 전부 하는 것과 마찬가지인지라 함께 일을 한다는 것은 항상 붙어 다닌다는 것과도 같았다.
“으…응. 그래. 도와준다면 고맙지.”
홍화가 왜 이렇게 난리를 피우는지 이해가 되지는 않았지만, 어찌되었든 도와준다니 고마울 따름이다.
“잠깐!”
주연림은 둘의 사이에 끼어들어 황급히 소리치고 생각에 잠겼다.
“어, 언제까지 할 셈인가?”
“판관? 글쎄. 어느 정도 기준이 생길 때 까지?”
“……나도 하겠다!”
“고맙기는 한데. 바쁜 것 아니었어?”
“시끄럽다! 그렇지 않아도 실무 경험을 쌓아야 했으니, 본인이 하겠다는 것을 말리지 말라!”
“말린 적 없는데….”
주연림은 귀까지 새빨개진 얼굴로 두 손을 파닥거리며 외쳤다.
“아니, 정말로 하실 셈입니까?”
사영은 신형이 정말로 판사 노릇을 할 것 같자 당황했다. 자신의 일이 줄어드는 것 같아 보이지만, 생각해보면 더 늘어날 가능성도 많다.
게다가 여전히 냉정하게 말해 신형은 그다지 믿음이 가는 존재가 아니다.
“……네가 그렇게까지 거부한다면 하지 않을게.”
“아뇨, 그런 말은 아니지만.”
사영으로서는 신형이 조금씩 나서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었으니 나쁘지 않은 선택이긴 했다. 다만 걱정이 될 뿐이다.
“그래도 안전장치는 충분히 되어 있으니 괜찮지 않을까?”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괜찮지 않다. 법이 장난도 아니고, 이렇게 섣부르게 달려들 가벼운 것이 아니다.
“하아. 부디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사영은 고개를 숙였다.
물론 그 고개 숙인 곳은 주연림과 홍화가 있는 곳이었다.
이렇게까지 무시당하면 사실 기분이 나빠질 수도 있는 법. 하지만 신형 또한 자신의 역량만으로는 힘든 일이라는 것만큼은 충분히 깨닫고 있었기에, 속으로 살짝 투덜거리는 정도로 넘어가기로 했다.
***
“으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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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림>
임무를 완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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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무>
달성도 : 130%
보상 : 신력 780, 복귀 3개월
복귀하시겠습니까? Y/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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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신력은 조금 전에 퀘스트 완료 보상으로 받은 신력을 포함해서 9,107이다. 곧 1만을 돌파하는 것도 꿈은 아니다.
“신력은 좋지만….”
돌아가느냐 마느냐.
여기서 선택을 잘 해야 했다. 이번에 복귀를 하지 않을 경우, 아마 1년 이상은 이 곳에서 보내게 될 가능성이 많다.
복귀를 하게 된다면 3개월을 현실에서 보내게 될 것이고, 그 사이 이 곳의 시간은 반 년 이상 흘러가 있을 가능성이 많다.
굳이 가능성이라 하는 이유는, 확실한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아아. 이거 꼭 해야 하나.”
신형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이거’라는 뜻은 퀘스트 전체를 의미했다. 이미 현실에서 목표로 삼았던 것은 대부분 이루어졌다. 그럼에도 현실에서 무엇인가를 하려는 것은 단지 쫓기는 느낌 때문이다.
정확하게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뭐라도 하지 않으면 낙오자가 되는 듯한 분위기. 그런 느낌을 어렴풋이 받고 있었다. 당장에 집에서만 해도 잠깐 빈둥댔다고 빗자루가 날아오지 않았던가.
‘아니! 약해지지 말자!’
신형은 그런 나약한 생각이 떠오르자 벽에 머리를 쿵쿵 박아댔다.
“내가 언제부터 잘난 사람이었다고!”
한때는 자기 혼자 잘났다고 날뛰기도 했었지만, 차분하게 돌이켜보면 앞뒤 없는 무모함을 어설픈 자존심으로 둘러댔던 것에 불과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생사의 위기를 수없이 넘기고, 큰 실수를 저질러 많은 사람을 죽일 뻔하고, 패기있게 도전했던 일들은 대부분 실패했다.
그나마 성공한 일들도 자신의 예상에서 벗어난 일들이 벌어진 덕분이었지, 자신의 힘으로 뭔가를 이루어 내는데 성공한 것은 엄밀히 따져보면 지렁이일 때 죽지 않고 버텨낸 것, 그리고 산삼을 캤을 때뿐이다.
그런 경험들로 인해 이제는 스스로 부족한 사람임을 충분히 자각하고 있다.
“그래! 무도공을 익히려고 그 난리를 쳤었는데!”
당시에 했던 절대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이제 희미한 기억만이 남았다. 그때는 절대자의 의미에 대해 고찰해보지 않았기에 그런 생각을 가졌던 것이다. 힘이 생긴다고 멋대로 굴면 그게 무슨 절대자인가. 그냥 무뢰배지.
신형은 아픈 머리를 흔들며 약한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 우선은 퀘스트를 차근차근 진행하면서, 무언가의 명확한 목표를 찾을 필요가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노! 안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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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림>
복귀를 거부하셨습니다.
복귀 일수가 신력으로 전환됩니다.
신력이 711 증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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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윽.”
안 간다고 말하자마자 전환되는 신력을 보고 후련하기는커녕, 갔다 올걸 하는 후회가 곧장 밀려왔지만 그런 기분은 그 반대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래도 상태창을 보면 배가 부르다. 신력 9,818. 1만의 고지가 정말 멀지 않았다.
“공주마마 납시옵니다.”
그렇게 상태창을 보며 후회감을 날리려 노력하고 있을 때, 밖에서 시녀의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라고 해.”
문이 열리고 성큼성큼 들어오던 주연림은 신형을 보더니 고개를 몇 번 갸우뚱하고 뺨을 긁었다.
“음? 무슨 일이 있었는가?”
“왜?”
“표정이 어째 좋지 않군. 웃으면서도 우는 그 표정은 대체 뭔가.”
“…티가 나나?”
“매우.”
그리고 주연림과 신형이 막 본격적인 대화를 시작하기 전, 다시 한 번 시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홍화 님께서 납시셨고, 촌장 또한 접견을 청하옵니다.”
“응. 알았어.”
신형의 대답에 홍화와 사영이 들어왔지만, 신형은 그 둘을 신경쓰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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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무>
화합하라.
위치 : 신룡촌
최소 보상 : 신력 3,000, 복귀 4개월
제한시간 : 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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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앞에 뜬 새로운 임무창을 보며, 신형은 입을 벌리고 멍하니 바라만 보았다.
‘화합? 무엇을? 계층 간? 아니면 나? 황제? 권력자들?’
퀘스트의 내용도 내용이지만, 이제는 제한시간이 무려 10년이다. 인구 수에 대한 퀘스트가 나왔을때도 5년이었으니 10년이 무슨 대수냐 싶을지 몰라도, 그러면 이 다음은 몇 년짜리라는 말인가. 20년? 30년?
물론 퀘스트는 그 기간이 길다고 난이도까지 무조건 높아지거나 하지는 않았었다. 이번에 완료한 마을 회관같은 경우 3년짜리 퀘스트였지만 신형이 한 일은 별로 없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확실히 긴 시간이 필요한 퀘스트라는 점에는 변함이 없다.
“신형 님?”
“신룡 님?”
홍화와 사영은 입을 헤 벌린 채로 멍하니 자신들을 쳐다보는 신형이 이상해 보여 신형을 불렀다.
“아, 미안. 다른 일 때문에.”
“혹시….”
“응. 퀘스트.”
“역시나 그렇군요.”
“그건 나중에 따로 이야기 해 줄게.”
“음? 무슨 소리인가? 뭔가 둘만의 비밀이 있는 것인가?”
주연림이 신형과 홍화가 서로 눈빛을 교환하는 것을 예리하게 감지하고 다급한 억양으로 물었다.
“호호. 네가 신경 쓸 일이 아니야. 이것은 둘만의 비밀이니까.”
“뭐, 뭣?”
“어차피 주연림에게도 알려 줄 생각이었어.”
신형이 끼어들어 둘을 중재했다. 그 말에 주연림은 화색이 돌았고, 홍화는 입술을 비죽이며 연신 ‘쳇’소리만 해댔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판관 업무 때문에 모인 것이 아니었습니까?”
“아아. 그렇지. 자,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에 대해서 의견을 나눠보자.”
“의견이라. 저는 일단 이야기를 듣도록 하겠습니다.”
사영은 한 발 물러서 셋을 쳐다보았다. 이 일은 신형의 의견으로, 신형이 주도적으로 해야 하는 일이었다. 사영은 그저 지켜보고 정 안될 것 같을 때만 나서는 것이 옳은 일이라 판단했다.
“…….”
그러나 세 사람은 깜빡이며 서로의 눈만 쳐다볼 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당장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럼 내가 먼저 할게.”
그나마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던 신형이 가장 먼저 입을 열었다.
“나는 일단 가장 필요한 것이 신문고라고 생각해.”
“신문고요?”
“그게 무엇인가?”
“관청 앞에 북을 놓아두고, 억울한 일을 당한 자가 북을 치면, 그 사안에 대해 재판을 여는 거지.”
“등문고로군요. 확실히 좋은 제도지요.”
사영이 신형의 이야기를 듣다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 등문고인가.”
“등문고? 그건 또 뭐지?”
주연림은 사영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고, 홍화는 여전히 인상을 쓰고 고개를 흔들었다.
“등문고?”
신문고는 들어본 적이 있지만 등문고는 들어본 적이 없다. 사영의 말을 듣고 비슷한 제도라 보여지니, 그저 그렇구나 할 뿐이다.
“예. 관청 앞에 북과 관리 한 명을 두고, 억울한 일을 당했을 경우 북을 울려 고변하는 제도지요. 청천, 포증께서도 유용하게 사용하셨다 합니다.”
“아, 그래?”
그러고 보니 TV드라마에서 본 듯도 싶다.
“아무튼 그거. 나는 그걸 최우선으로 실행했으면 좋겠어.”
“좋은 생각이십니다. 제가 먼저 생각해냈어야 했는데. 후손으로서 부끄럽군요.”
사영이 공손히 읍을 하며 신형의 말에 힘을 실어주었다. 이렇게 사영에게 칭찬을 받은 일은 손에 꼽는지라 신형은 살짝 기분이 좋아졌지만, 애써 그런 기색을 감추며 주연림과 홍화를 쳐다보았다.
“나도 좋은 생각이라 생각한다.”
“전 잘 모르겠지만, 신형 님이 좋다면 좋은 거겠죠?”
어째 홍화의 말이 불안하지만, 그래도 만장일치가 되었으니 신문고의 설치는 확실해졌다.
“얼마나 걸릴 것 같아?”
신형은 사영을 보며 물었고, 사영은 잠시 눈을 감고 이것저것 계산하더니 입을 열었다.
“이틀 정도면 준비가 될 듯싶습니다.”
여기서 나온 것들을 실행하는 것은 주로 사영이 될 수밖에 없다. 뒤치다꺼리를 넘기는 것이라고 여길 수도 있지만, 오히려 이렇게 뒷일을 도맡아서 하는 편이 훨씬 나았다. 만약 실무까지 시키게 된다면 사영은 그 혼돈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그래. 미안하지만 조금 고생해 줘.”
신형의 그 말에 사영은 말없이 재차 읍을 했다.
악의가 있거나 귀찮아서 떠넘기는 일도 아니고, 순수한 선의와 인의로 하는 일이다.
아무리 신형의 행동이 불안하고 철없어 보여도, 그 마음만큼은 사영도 이해하고 있었다. 또 그것을 실행하는 것에 자부심 또한 느끼고 있었기에, 신형의 지시는 사영에게 있어서 결코 귀찮은 일이 아니었다.
감사합니다. 즐거운 오늘과 내일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 작가의말
메리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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