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역 잃어버리다.
'어둡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의식이 돌아온 뒤 감각을 하나둘 회복되기 시작했다.
“스승.. 대체 왜 유연은 안 일어나는 거야!”
어딘가 익숙하고, 어린아이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연화인가?'
“나중에, 유연이 일어나면 한 번에 알려줄 것이니라.”
'이 목소리는 아발론인가?'
얼핏 듣기엔 차가운 목소리지만, 자상한 말투는 아발론의 것이었다.
하루가 지나고
하루가 지났다.
이제 촉각들이 돌아오기 시작했고
그렇게 일주일이 지났을 때,
나는 눈을 뜰 수 있게 되었다.
잠시 후 이연화가 방에 들어와, 내가 눈을 뜨고 있는 것을 보고
온전히 회복조차 못한 몸에 달려와, 나는 또 다른 생명의 위협을 느껴야 했다.
또다시 일주일이 지나고
나는 가볍게 걷는 것까지 할 수 있게 되었다.
“아발론! 이제 알려줘”
나의 초재생 랭크는 S급 팔이 잘려 나가도 하루면 회복할 수 있는 스킬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에 회복하는데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린 것은 이해할 수 없다.
“유연, 잘 들어라 결론부터 말하자면 너의 '격'이 갑작스럽게 얻어서 그런 것이다.”
“격?”
“'격'이란 너의 역사가, 이야기가 힘을 가져서 너를 돕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아니, 좀 쉽게 말해봐”
“쉽게 말해서, 네가 한 일들에 힘이 생겨서 너를 돕는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럼 내 이야기에 갑자기 힘이 생겨서 부상을 당한 거라고?”
“원래 '격'이란 것은 쉽게 생기는 것이 아니다. 혼자서 격을 얻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지”
“그럼 그 격이란 건 얼마나 좋은 건데”
“격을 깨닫지 못한 존재는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격을 얻은 존재를 이길 수 없다.
극적으로 말하면, 격을 모르는 S급 헌터는 격을 걷은 F급 헌터조차 이길 수 없는 것이다.”
순간 모드레드가 내 공격을 모두 잡아낸 것이 기억났다.
“아발론, 만약 모드레드가 격을 얻었을 수 있어?”
잠깐 아발론이 고민하다가 내게 말했다.
“원래 격이란 것은 너처럼 스스로 깨닫고 얻는 경우가 드물다.”
“그럼?”
“보통 상위의 존재가 자신의 격의 일부분을 주는 것으로 격을 얻고 그 존재의 권속이 되는 것이다.”
“모드레드가 격을 얻었다면, 무언가 흑막이 있다는거내..?”
“우선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맞다.”
격에 대하여 생각을 정리하자 무언가 이상한 점이 눈에 밟혔다.
지금 내가 있는 방은 아스토리아가 지내라고 준 방이었고, 이곳은 아직도 로그리왕국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너희는 왜 여기 있어?”
아발론과 이연화는 나를 보며 웃었다.
“네가 없는 5일 동안 우리는 세계이동의 흔적을 찾았다. 다행히 우리가 아는 좌표라서 이동하기 수월했지!”
응응하며 뒤에 있는 이연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동하느라 마력 고갈이 심하긴 하지만 좀 있으면 다 회복할 수 있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아발론의 상태가 생각보다 안 좋아 보였다.
항상 윤기가 넘치며 흩날리던 머리카락은 푸석푸석해 졌으며
항상 옅은 분홍색으로 생기가 넘치던 얼굴은 시체처럼 차가워져 있었다.
괜찮다고 하기엔 너무 아파 보였다.
“아발론, 괜찮은 거 맞아?”
나는 손을 들어 아발론의 뺨에 가져갔다.
마치 얼음을 만지듯, 차가운 뺨에 난 다시 한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음?
갑자기 아발론의 뺨이 아니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다.
오.. 좀 따뜻해졌어
똑똑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리고, 아스트리아가 방으로 들어왔다.
“아···. 아.. 죄···. 죄송합니다아...”
잠시 방으로 들어왔었던 아스트리아가 다시 방을 나갔다.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 - - - - - - - - - -
아발론이 방을 나가고 얼마 뒤 방으로 아스토리아가 들어왔다.
“죄···. 죄송합니다. 아발론 님의 부군에게 검을 겨누다니.”
아스트리아는 지금 내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때를 이야기 하는 것 같다.
“아닙니다.. 부군이라뇨 아발론은 저의 스승이 맞습니다.”
“그···. 그럼 스승이랑 그런 파렴치한”
아무래도 오해를 푸는데 꽤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다.
- - - - - - -
한달뒤
손가락 하나도 움직이기 힘들었던 한달전과 비교해서 내 상태는 눈에 띄게 호전되어 있었다.
뛰는 건 힘들지만 걷는 것은 무리 없이 할 수 있었고 마나도 어느 정도 순환시킬 수 있었다
모든 것이 좋은 상황은 아니었다.
지금 백고은의 상태가 상상 이상으로 안 좋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처음 2주 동안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다가 갑작스럽게 사라졌다.
아스토리아가 병력을 동원해 수색하고 있지만, 아직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어디 간 거야...”
[ 퀘스트 성공 ]
[ 성장 버프를 사용하시겠습니까? ]
[ Y/N ]
나 혼자 사용하면 너무 아깝기 때문에 백고은을 찾으면 사용하고 싶었다.
한 달이라는 시간 동안 아발론은 거의 다 회복했고
아스트리아와 퍼시발, 가웨인은 모드레드와 아스트리아 사이에서 저울질하였던 기사들을 처리하는 것에 바빴다.
“한가하다.”
지금 내가 움직이지 못하는 건 육체적 문제가 아닌 영혼의 문제이기 때문에
재활 훈련 같은 것도 필요 없다고 한다.
움직일 필요도, 움직일 마음도 안드는 상태가 지금의 내 상태이다.
사실 회귀 이후 단 한 번도 이렇게 쉬지 못했던 것 같다.
“나는 이제 뭘 해야 하지?”
근본적인 생각이 들었다.
회귀 이후 내 목표는 형들을 살리고 영웅으로서 살아가는 것이다.
형들을 살린 지금 영웅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우선, 헌터 등록부터
지금 나는 아카데미 학생이다.
아카데미 학생들은 2학년을 마칠 때 처음 헌터 심사를 받는데,
그때까지 기다리기엔 너무 오랜 시간이 흘러버린다.
'신분을 숨겨야겠지...'
회귀 전 세상의 모든 헌터에게 쫓길 때, 나는 편안하게 서울의 거리를 지나다닐 수 있었던 이유인 한 아이템이 곧 세상에 나온다.
아마 1달 이곳으로 치면 1년이니까.
'약 8달 남았다.'
8달 정도가 지나면, 지구로 돌아가야 한다.
“그럼 지금 목표는 백고은을 찾는 게 먼저겠다.”
지금 아발론도 수색에 참여했다고 하니 조금만 기다리면 될 것이다.
그때는 몰랐다. 나의 안일한 생각이 문제를 심각하게 만들었다는 것을
- - - - - - - - -
'힘을 원하느냐'
'강한 힘을 원하느냐'
아무것도 없는 칠흑의 공간 속에서 알 수 없는 목소리가 나를 괴롭혔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이 싫으냐'
'너도 그처럼 밝게 빛나고 싶으냐'
알 수 없는 목소리는 계속 나를 괴롭혔다.
그렇게 눈을 떴을 때
또다시 아무것도 하지 못했음을, 또다시 구해졌음을 알 수밖에 없었다.
잠시 들리지 않던 목소리가 다시금 들리기 시작했다.
'또다시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것이냐.'
'또다시 구해지는 공주님이 될 것이냐'
그 목소리는 내 가슴의 비수를 꽂았다.
죄책감, 무기력함, 질투심 여러 가지 감정이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눈물이 떨어졌다.
흐르는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강해지고 싶었고 누구보다 노력했다.
하지만 나와 그의 차이는 더욱 벌어졌고, 이제 그의 등조차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생각하니 이미 메마른 나의 마음은 버틸 수 없었다.
가뭄에 마른 땅처럼 내 마음은 갈라지기 시작했고
그사이를 어떠한 목소리가 채우기 시작했다.
'내가 너에게 힘을 주겠다.'
'나를 따라와라'
'그보다 강해질 수 있게 힘을 주겠다.'
평소라면 절대 듣지 않을 그 목소리가
너무나도 달콤하게 들렸다.
평소라면 손을 내밀지 않을 상황이
너무나도 달콤했다.
내가 그 존재의 손을 잡았을 땐 이미 늦음을 알 수 있었다.
내가 그 손을 잡았을 땐 이미 돌이킬 수 없음을...
누군가 말했다.
“악마의 유혹은 더없이 달콤하기에, 그 유혹에 빠져드는것이다.”
Comment '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