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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활극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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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KKA
작품등록일 :
2019.07.10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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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15 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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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3.28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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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쪽

274화

DUMMY

천장절을 기념한다고 거리 곳곳에서 흩날리는 일장기도, 그리고 그 일장기에 짙눌린 느낌으로 주눅들어 돌아다니다 신문팔이 소년이 뿌려대는 충격적인 호외보도에 들끓는 사람들도, 자동차 뒷좌석에서 숨 막히는 긴장감 속에 넥타이 끈을 풀은 한 참의에게는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인생 최악의 악몽이라고 느끼는 시간을 보내는데 쇼와 천황의 생신이, 그리고 그 기념식장에서 폭발한 폭탄 이야기가 그에게 중요할 리가 없었다.


기타무라 소좌가 비웃음과 함께 딸이 자신을 속이는 데 동참했다고 명백히 알려준 후 헌병대 담벼락에 앉아 멍하니 있었던 그는, 축 늘어진 다리에 억지로 힘을 주어 회사로 돌아갔다. 눈은 빛이 사라져 공허했고 얼굴은 바보처럼 헤 벌려진 채였다. 어떻게 회사로 돌아갔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돌아오자마자 마주친 건 이사들의 서슬퍼런 눈빛이었다.


“이사회에서 우린 사장님의 해임건의안을 제출할 겁니다.”


상무이사 한 명이 대표격으로 으르렁대며 말했다. 주주들 중 누군가가 “주총 최초로 만장일치 결정이 나오겠군.”이라는 말을 내뱉었다. 그 말에 멍했던 정신에 불이 들어왔다.


“내가 세운 회사에서······ 날 쫓아보내겠다는 거요?”


“말은 똑바로 하시죠. 사장님만 세우셨습니까? 우리 모두 그때 있었지.”


전무이사 한 명이 낮은 목소리로 으르렁댔다. 한 참의는 그 말을 애써 무시하고, 갑작스럽게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자신이 세운 회사에서, 수도 없는 굴욕과 인고를 감내하고 마침내 번듯하게 세운 자신의 회사에서 쫓겨나게 생겼다. 방직업계에서 내노라 하는 자리에 오르고 탁월한 투자감각으로 회사 자본을 불리고 또 불린 게 바로 나 한덕만이 아닌가? 그런 나를 사기 한번 당했기소로니 이렇게 몰아세우고 쫓아내려 하는가?


그렇게 생각하니 이사들도 흠칫 놀랄 정도의 오기가 발산되었다.


“아직······ 아직 기회가 있소! 회사 자산에 큰 손실을 입긴 했소. 하지만 메꿀 수 있는 손실입니다! 아직 긴급히 자금을 끌어올 수 있는 곳이 여러 군데 있어요! 공장들도 돌아가고 거래처들과 관계도 유지되고 있고요! 회사 신용도도 여전히 높고! 내가 경성에 있는 은행장들과 다 아는 사이란 거 아시지 않습니까!”


한 참의의 힘이 다 빠진 얼굴에서 갑자기 혈색이 돌고 목소리가 열기를 띠니, 이사들은 그 기세에 다소 눌린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한 명이 언성을 높여 지적한다.


“이미 지금 주식취인소에서 우리 회사 주식 떨어져만 가고 있습니다! 방금 전까지 여기 있던 주주들 다 주식 팔아버렸고요! 그런 마당에 대체 어디서 투자를 하고 어디서 융자를 해 준다는 겁니까?”


그 말에 한 참의는 눈을 치켜뜬다.


“그럼 이사님이 대표이사 하시고 회사 살릴 수 있습니까?”


그 순간 그 이사의 말이 막혔다. 다른 이사들도 섣불리 입을 열지 못한다. 이들은 한 참의를 사장 자리에서 끌어내릴 생각만 했지, 그 뒤 어떻게 회사를 이끌어 갈지는 아직 논의해 보지 못한 것이었다. 더군다나 하루 아침에 22만원이란 거금을 상하이 가정부에서 파견된 불령한 자들에게 바쳤다는 소문이 주식시장을 휩쓸었고 사장이 헌병대의 조사를 받은 이상 이 회사의 존립 자체가 위태로울 것이 뻔하였다. 침몰해 가는 배의 선장을 맡고 싶은 사람은 그 누구도 없었다.


“내가 세운 회사입니다! 살려도 내가 살리고 죽여도 내가 죽여요! 아직 시간이 있습니다! 대출이던 융자건 투자건 끌어올 시간이요! 그 동안에 내 모가지 치고 싶으시면 그리 해 보시던가요!”


한 참의가 이렇게 오기를 부리자 이사들도 한발 물러가는 눈치였다.


“좋습니다. 일은 사장님이 벌이셨으니, 수습도 사장님이 하시는 게 이치에 맞겠죠.”


상무이사가 뺨에 흐르는 땀을 훔치며 한 말이었다.


“하지만, 정말로 수습할 수 없을 지경까지 간다면, 그때 책임은 온전히 사장님이 지셔야 할 겁니다.”


이사들은 그 말을 끝으로 각기 자기 사무실로 돌아가거나 다른 곳으로 발길을 돌렸다. 한 참의는 직원들에게 빠르게 지시를 내렸다. 거래하고 있는 모든 은행들에 긴급 융자 신청을 하라고. 은행 문 닫기 전에 빨리빨리 움직이라고 말이다. 본인 또한 지시만 하고 있지 않았다. 그는 쉴새 없이 전화를 걸어 댔다. 친분을 맺어 둔 은행장들, 총독부 식산국의 관리들, 중추원 참의들, 내지의 거래처 사장들 등등. 한 참의는 그가 이제까지 금칠해 놓은 모든 사람들에게 일제히 도움을 요청하기 시작했다. 그렇지 않더라도 그들과의 우호적 관계를 확인하고 싶었다.


통화에 임하는 한 참의의 목소리는 대단히 싹싹하고 부드러웠다. 아까 전까지 헌병대 조사실에서 모욕적인 대우를 받고 또 딸아이가 자신을 사기의 올가미로 집어넣는 데 끼어들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전달받은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았다.


전반적으로 상황은 나쁘지 않아 보였다. 전화통화는 늘 그랬듯이 우호적이고 부드러운 분위기에서 진행되었다. 융자나 대출의 확대를 부탁하거나 투자를 요청하는 부탁에, 그들은 참의님 덕을 많이 봤는데 긍정적으로 검토하는 게 당연하다, 다른 사람들과 검토해 본 후에 좋은 답변을 해 줄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등의 대답을 하여 한 참의를 안심시켰다. 일본 다이이치(第一) 은행의 경성지점장은 내일이면 천장절 휴일인데 그때 한번 만나서 더 자세한 사안을 논의해 보자고까지 하였다.


이렇게라도 쉴새 없이 바쁘게 움직이니, 사기를 당했다는 것도, 주리의 배신도 모두 생각할 새가 없었다. 아니, 생각하고 싶지 않기에 바쁠 수 밖에 없던 것이었다.


그러나 늦은 시간에 퇴근하며 뒷좌석이 가만히 앉자, 집에 쌓아놓은 3만원 가량의 현금까지 쓰자고 생각한 뒤에 계속 담아두었던 분노가 가슴 속에서 올라왔다.


“불효막심한 것!”


한 참의가 갑자기 빽 소리를 지르니 운전기사가 자기 보고 하는 말인줄 알고 당황하여 어쩔 줄 몰라했지만 그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뭔가를 후려치고 싶어져서 손에 주먹이 줘지고 팔에 힘이 들어갔다. 혈압은 위험수위까지 오르고 숨이 헐떡여서 넥타이를 풀어헤쳐 버렸다. 가쁜 숨이 그의 투실한 입술에서 토해내졌다.


어떻게,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금이야 옥이야 하고 키웠는데 네가 어떻게! 대체 언제부터였냐? 언제부터 이 애비 망신시키고 뒷통수 칠 궁리를 하고 있었던 게냐! 그렇게 착하고 말 잘듣던 네가 언제부터! 그 망할 놈, 그 가짜 백작 놈이 널 꼬드긴 거였더냐? 그놈의 반반한 얼굴에 속아 애비 재산 울궈내려고 수작을 부렸던 게냐! 내 딸이 되어서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단 말이냐! 어떻게!


한 참의는 주리가 눈 앞에 있었다면 이와 같은 말을 퍼부어주고 싶어서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이가 부득부득 갈리고 팔이 마구 휘둘러지며 좌석 시트를 때렸다. 사당 부지에 주재소를 건설하겠으니 사업자금 지원을 약속하고 토지 소유주인 아버지 한 진사에게 땅을 팔라고 설득해 달라는 청주경찰서의 부탁에 나서서 아버지에게 만세운동 하던 자들은 폭도에 불과했으며 독립이란 건 허황된 헛소리에 불과하다고 말하자마자 머리에 벼루를 맞았을 때보다 더한 분노가 그의 몸과 마음 양쪽을 뒤덮고 있었다.


집에 들어갔을 때, 그는 순간 그 자리에 붙박혀 등이 부들부들 떨림을 느꼈다.


“아이고! 부처님! 부처님!”


부인 성 여사가 거실의 내불단 앞에서 무릎꿇고 거의 곡을 하면서 기도하고 있었다. 집의 하녀들은 바쁘게 움직이다가 그가 온 것을 보고 인사를 꾸벅 드렸다. 집안은 실로 난장판이었다. 가재도구와 집기가 집안 곳곳에 어지럽게 쓰러지고 풀어해쳐 있고, 방바닥에 시꺼먼 군홧발 자국이 도장찍혀 있었다. 고용인들은 엉망진창이 된 집안구석을 쓸고 닦고 제자리에 돌려놓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불단 앞에서 곡하던 성 여사는 남편이 온 걸 보자마자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아이고!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 난데없이 헌병들이 들이닥치더니 집을 엉망으로 만들었소! 신발도 안벗고 들어와서 이곳저곳 뒤집고 어지럽히고 난리를 쳤는데, 글쎄 우리 애 때문이라는 거에요! 우리 애가 글쎄 군사기밀을 팔았으니 뭐니 하는 거에요! 대체 우리 애가 뭔 잘못을 저질렀다는 거에요? 우리 착한 주리가 뭘?”


성 여사가 그러더니 바닥에 쓰러지다시피 하며 “아이고! 아이고!”하고 소리높여 곡을 했다. 한 참의는 입을 열려 했다. 다 사기당했다고. 가짜 백작과 가짜 상무에게 속았다고. 그리고 주리는 그 망할 것들에게 넘어가 집안 망치는 일에 가담했다고.


그러나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것을 입에 담으려, 아내에게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해주려 생각하는 것 자체가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내겐 자식 없어.”


이 넋 나간 듯한 말에, 성 여사는 울다 말고 “예?”하고 남편을 쳐다본다.


“내겐 자식 없다고! 딸자식 없다고! 알아 들어?”


한 참의는 이렇게 고함을 치더니, 자기 서재로 휙 들어가 문을 쾅 닫아버리고 말았다. 그는 서재를 치우던 하인을 내보낸 채, 아직 정리가 다 되지 않아 엉망인 방 안에서 안락의자에 앉았다. 재차 터져나오는 아내의 곡 소리를 들으며 부들거리는 손에 담배를 잡았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또 흘렀다. 재떨이에는 담배꽁초가 수북하게 쌓이고, 한 참의의 머리에는 눈이라도 내린 듯 흰 기운이 돌았다. 시뻘개진 얼굴과 대조적이었다. 핏발 선 눈으로 수도 없이 담배를 핀 후, 그는 새벽이 밝아옴을 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침식사자리는 횡했다. 주리가 자리에 있을 리가 없었고, 성 여사는 밤새 통곡하다 지쳐 쓰러지듯 잠들었다고 식모가 말했다. 쌀밥이 입에서 까끌까끌하게만 느껴져서 몇 술 뜨지 못하고 역정을 내며 일어서고 말았다.


한 참의는 그래도 세면과 양치는 착실히 하고 면도도 확실히 하며 머리도 여러 차례 다듬었다. 다이이치 은행 경성지점장의 사택에서 만나기로 한 약속에 집중해야 했다. 전신이 떨려오는 충격을 잊으려면, 일에 몰두하는 것 외에 생각나는 게 없었다. 꽤 오래 전에 거금을 주고 사들인 백자 하나가 들린 상자를 조심스레 손에 든 채 차에 올랐다.


지점장의 사택은 남산 인근의 일본인 부촌에 있었다. 여러 차례 방문한 곳이라 익숙한 널따란 일본식 저택이었다. 모래로 섬세하게 재현된 바다의 물결과 이끼와 기암괴석으로 만들어진 축소된 섬을 정원으로 꾸민 모습이 인상적이라 일본의 미의식은 과연 대단하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곳이었다. 그러나 그 때 과장된 표현을 구사하여 웃는 낯으로 지점장을 높이던 한 참의는 이제 정원의 아름다움을 감상할 여유라고는 없었다.


교토 출신인 하카마에 하오리 차림의 지점장은 친절한 미소를 띄고 그를 맞이하였다. 정원이 훤하게 보이는 응접실로 안내되어 손수 끓였다는 말차를 받은 한 참의는 바싹 말라온 입을 그걸로 조심스레 축인다. 예전이라면 말차의 향에 별의별 미사여구를 붙이며 일본의 다도야말로 고즈넉함의 표본이라고 아부에 가까운 말들을 했겠지만, 지금 그의 코에는 그 향긋함이 들어오지 않는다.


“그래서, 참의님께서는 더 큰 규모의 융자를 바라신다고요?”


지점장이 한 참의가 바친 백자를 기분 좋게 만지작거리다가 본격적인 사업 얘기로 들어간다.


“그렇습니다. 지금보다 더 큰 사업확장을 할 예정입니다. 만주국 건국으로 면화 수출시장이 더 크게 열렸으니, 공장 하나를 더 세울 계획입니다.”


이는 사기를 당하기 전부터 어렴풋하게 계획해온 것이었으나, 만주 석유개발 계획에 집착하며 한동안 구체회시키지 못하던 것이었다. 그러나 당장 자금융통이 필요해진 한 참의로써는 밤새 생각해낸 정도의 계획안만이라도 어떻게든 융자 확대의 명분으로 삼아야 했다.


한 참의는 사업확대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예상이익과 상환계획에 대해 열띄게 설명하였다. 지금 다이이치 은행에서 차용한 융자액도 매달 이자를 꼬박꼬박 갚고 있으며 원금상환도 적잖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강조하면서 그의 방직회사가 대단히 모범적인 대차대조표를 자랑해 왔다는 것, 대공황의 위기 속에서도 사업을 유지하며 오히려 크게 확대해 왔다는 것을 주지시키려 노력하였다.


지점장은 미소를 지은 채 “그렇죠. 그렇죠.”, “그 말이 맞습니다.”등으로 맞장구를 치는 추임새들을 넣으며 한 참의의 기운을 조금씩 북돋아주고 있었다.


“그런 관계로, 지점장님께서 우리 회사에 대한 추가 융자를 결정해주신다면 정말 감사드리겠습니다.”


한 참의는 그러며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지점장은 예전부터 잘 알던 사람이다. 여러 차례 개인적 만남을 통해 융자를 허가해 준 사람이었다. 선물까지 바쳐가며 이렇게까지 부탁하는데 긍정적인 답변이 있을 게 분명하다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지점장은 바로 확답을 주지 않았다. 대신 그의 입에서 다른 말이 나온다.


“차 한잔 더 하시겠습니까?”


그러고 보니 한 참의는 열띄게 말하느라 연신 차를 홀짝이고 있었다.


“예.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런데 한 참의는 순간 지점장의 눈썹이 씰룩거린 것을 보았다. 설마 부정적인 신호인가? 하지만 입술에는 여전히 미소를 머금은 걸 보고 안심하였다. 지점장은 하녀를 시켜서 차를 한잔 더 내오게 하고는 말을 시작한다.


“참의님. 사업확대에 대한 계획안은 훌륭하고 대단히 유망하다고 생각합니다. 조선은 물론이고 제국 전체를 통틀어 이 정도의 사업을 할 수 있는 분은 참의님 이외에는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역시 긍정적인 답변이 나오겠구나. 참의는 혹여 면전에서 거절이라도 당할까봐 두려워했던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지며 안도의 한숨을 쉬려는 걸 참았다.


그런데 그 뒤에 나온 말은 전혀 뜻밖이었다.


“하지만 이런 정도의 융자안은 일개 지점장인 제가 결정해서 융자를 해 드릴 수 있다고 확답을 드릴 사안은 아닌 것 같습니다.”


한 참의는 그 말에 얼굴이 굳어졌다.


“예? 하지만 이전 융자안은 지점장님이 결정하신 게 아니었습니까?”


“그때도 내지의 본점과 논의를 해서 결정한 것이었죠. 물론 참의님 회사가 융자를 상환할 능력이 충분하다고 보고하여 결정된 것이긴 하지만, 그래도 저는 어디까지나 지점장입니다. 본점의 감독과 지시를 받는 입장이죠. 제 독단만으로 될 수 있는 사업은 없습니다.”


“그건 그렇습니다만······.”


엄연히 지점장인 사람이 본점의 허가도 없이 거액의 융자를 함부로 결정할 수 없다는 말은 틀린 말이라고 할 수 없었다. 그래도 이상했다. 예전 융자를 부탁하러 왔을 때는 그 자리에서 “지점장인 제가 본점에 보고만 잘 하면 아무 문제 없이 허가될 겁니다.”라고 시원스래 말하지 않았던가?

“물론 참의님의 계획이 훌륭한 만큼 본점에서도 긍정적인 답변을 해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저도 본점의 결정을 따라야 하는 입장이니까요.”


그 말에 한 참의의 마음에 불안감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혹여 이 사람은 본점의 핑계를 대고 융자를 거절하겠다는 뜻을 완곡하게 밝히고 있는 게 아닌가?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말이 빨라졌다.


“그래도 부탁을 드리겠습니다! 본점에 제 계획을 잘 말씀해 주셔서 융자를 받아내 주신다면 정말 그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한 참의가 그러며 다시 고개를 숙인다.


“자. 자. 일어나세요. 참의님 같은 분이 고개를 숙이시니 제가 다 송구스럽습니다.”


지점장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한 참의를 달랜다.


“상황이 절박한 듯 하신데 마음 급하게 먹지 마시고, 정원을 감상하며 좀 진정하시죠. 제 집 정원이 고즈넉함의 미가 가득하다고 칭찬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마침 좋은 차도 있고요.”


“예. 예. 감사합니다.”


한 참의는 바로 고개를 들고 떨리는 손으로 차를 홀짝인다. 그래도 이미 급해진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지점장님이 이전에 융자를 받아내신 것처럼, 이번에도 아무 문제 없이 처리가 가능하겠죠?”


“본점의 의향에 달린 것이긴 합니다만, 전반적으로는 그랬죠.”


“확실히 그런 것이죠? 그렇겠죠?”


“ 본점에도 융자 및 이자의 상환내역이 매달 전달되고 있고, 또 신용도도 높으시니 부정적인 결정은 나오지 않겠죠.”


“그렇다면 정말 다행입니다. 아무쪼록 지점장님께서 손을 써 주신다면, 그 은혜 각골난망이겠습니다.”


“예. 예. 말씀 감사합니다.”


한 참의는 그래도 조금함이 가시지 않는다. 지점장은 계속 확답을 피하고 있었다. 그저 “본사의 의향”을 은근히 강조하는 동시에 간접적인 완곡어법을 쓰며 융자가 가능하다 불가능하다는 확정된 표현의 말을 피하고 있었다.


이때 지점장이 내내 계속되던 불안감을 다소 해소시킬 말을 한다.


“그렇다면 우선 본사에 제가 보낼 융자 보고서를 지금 작성한 뒤 초안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잠깐 기다리실 수 있으신가요?”


“아, 예! 예! 물론이지요!”

한 참의의 얼굴에 화색이 돈다. 비록 표현만 계속 완곡어법을 썼을 뿐, 지점장이 정말로 힘을 쓸게 분명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기다리시는 동안 오차즈케(お茶漬け)라도 내올까요? 점심나절에 가까워지는 지금이라면 적잖이 시장하실 겁니다.”


“예, 감사합니다! 세심한 배려 정말 훌륭하십니다!”


지점장을 극구 칭찬하던 한 참의는, 그때 기시감을 느꼈다. 지점장의 눈썹이 다시 씰룩거렸던 것이다. 차 한잔 더 하겠냐는 물음에 그러겠다고 답했을 때처럼.


“알겠습니다. 그럼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초안을 작성해서 보여 드리겠습니다.”


지점장이 그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내실로 들어간 후 10여분 후, 오른쪽 방문이 열리며 하녀가 오차즈케와 도자기로 만든 넓은 일본식 숫가락을 들고 와서 탁상 위에 올려주었다.


전날 저녁은 물론이고 아침도 제대로 먹지 않은 한 참의는 마음이 풀어짐과 동시에 가쓰오부시 국물 냄새에 시장기를 느끼며 한 그릇을 떠서 입에 넣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한 참의는 갑자기 속삭이는 목소리를 들었다. 여자들이 일본말로 속삭이는 목소리였다. 둘러보니 오차즈케를 들고 온 하녀가 문을 닫고 나갔는데, 그 문이 살짝 열려 있는 게 보였다. 그 틈을 통해 목소리가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얘. 정말 저 사람 지금 정말로 오차즈케 먹고 있는 거니?”


“그렇다니깐. 참 뻔뻔하기도 하지.”


한 참의는 그 말에 숟가락을 떨어뜨릴 뻔했다.


“주인어른께서 차 한잔 더 하겠냐고 하니 진짜 넙죽 받아먹더니, 이번엔 오차즈케까지 먹는다니?”


“누가 아니래. 진짜 눈치가 없는 건가? 차 한잔 더 하겠냐고 물어보면 민폐 끼치고 있다는 걸 알았어야 하는거 아냐?”


잔뜩 긴장해 그 자리에 굳어진 한 참의에게, 순간 분노해 노성을 지를 소리가 흘러들어온다.


“이애. 그거야 당연한 거 아니니? 저 사람 요보잖아. 요보니까 눈치도 없고 예의범절도 없는게 당연한 거 아니겠어?”


“맞다! 맞다! 요보가 아니고서야 저럴 수 없지!”


그러며 하녀들은 깔깔깔 웃기 시작하였다. 흡사 응접실 안의 한 참의가 들으라는 것처럼.


한 참의는 그제야 생각났다. 다른 교토 출신 거래처 임원과의 술자리에서 나온 소리였다.


“흔히들 우리 일본 사람이 대단히 말 할때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고 돌려 말한다고들 하죠. 하지만 저 같은 교토 사람에 비하면 도쿄나 오사카 사람은 대단히 직선적인 겁니다. 교토에서 별로 마주 대하고 싶지 않은 손님이 찾아오면 예의상 차를 내오기는 하는데, 차 한잔 다 비우면 한잔 더 할거냐고 물어보죠. 여기서 한잔 더 하겠다고 하면 정말 눈치도 예의도 없는 사람 되는 겁니다. 그 한잔 더 받겠다는 건 상대에게 차를 더 끓이고 내오게 하는 민폐를 끼친다는 거라고요! 더 심한건 오차즈케를 내올지 물어보는 겁니다. 오차즈케 만드는 데 차 끓이는 것보다 손이 더 많이 가니 정말 상대가 민폐라는 것과 똑같은 말이거든요! 솔직히 제가 우리 고향의 이런 풍습에 답답함을 많이 느꼈는데, 조선에는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자기 하고 싶은 말을 직설적으로 말하는 풍습이 있어서 아주 속이 시원합니다!”


그 말에 한 참의는 당시 “상대를 상처주지 않고 돌려보내는 것이야말로 정말 훌륭한 마음자세죠!”라며 그러한 교토식 예의범절을 칭찬했었다. 그러나 그 칭찬은 교토 출신인 상대에게 아부하려는 마음에서 온 동시에, 설마 자신이 그런 일을 당하는 입장이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해서 나온 것이기도 하였다.


한 참의는 그제야 깨달았다. 이 지점장은 그에게 융자를 줄 생각이 하나도 없음을. 차 한잔을 더 권하고 오차즈케까지 권한 건 그가 여기 온 것 자체가 민폐이니 빨리 돌아가라는 것임을!


망할 놈의 자식! 안 된다면 안 된다고 말할 것이지 사람을 이런 식으로 비참하게 만들어? 이런 식으로 사람을 눈치없고 민폐나 끼치는 작자로 만들어?


한 참의의 이마빡에 힘줄이 솟는다. 등줄기가 굴욕감에 부들부들 떨려온다. 교토 출신이 보여준 교토식 예의범절을 전혀 떠올리지 못한 채 눈치 없이 차 더 마시겠다고 하고 오차즈케도 먹겠다고 한 자신이 통탄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가 얼굴이 붉어진 채로 부들거린 그때, 지점장이 문을 열고 들어와 부드럽게 묻는다.


“오차즈케는 마음에 드셨습니까? 간은 좀 어떻습니까?”


한 참의는 오차즈케 그릇을 지점장의 면상에 던지코픈 심정이었으나, 용케도 참아낸다.


“지점장님의 성의에 감사드릴 뿐입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아무래도 이미 다이이치 은행에 적지 않은 융자액이 있는데, 융자를 또 늘린다는 것은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허어. 벌써 마음을 바꾸셨단 말입니까? 방금 초안을 다 썼는데요?”


“민폐 끼쳐드려 정말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제가 생각이 짧았던 것 같습니다.”


한 참의는 그러며 자리에서 일어나 “실례 많았습니다.”라고 꾸벅 인사하고는 발걸음을 돌리려 했다. 이를 꽉 깨문 채.


“나중에 필요한 일 있으시면 다시 찾아와 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그렇지 않더라도 단지 정원이라도 감상하러 오셔도 언제든지 환영입니다.”


지점장의 그 태도에, 한 참의는 결국 못 참고 한 마디 하고 말았다.


“그때는 차 한잔을 더 부탁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한 참의는 빠르게 응접실을 벗어나 신발을 신고는 지점장의 저택을 나가버리고야 말았다.


한 참의는 자기 차에 오르고는 머리를 감싸쥐었다. 지점장이 전날 자택에서 만나자고 제안한 때에는 정말로 융자를 긍정적으로 검토했었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전화통화 뿐만 아니라 자기 집에서 만나자고 할 이유가 없었을 터였다. 밤새 기류가 변했다. 어째서 변했는지 지점장의 머릿속을 들여다보지 못하여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이미 짐작은 가고 있었다.


주식취인소에 퍼진 소문, 그가 상하이 가정부에 거액을 냈다는 소문, 그리고 뒤이은 회사 주가의 대폭락. 지점장은 그것을 알기 전에 만나자는 약속을 잡은 것이었다. 그러나 약속을 잡고 나서야 그 정보를 입수하자 분명 고민에 빠졌을 것이다. 이미 약속은 잡혔다. 융자 문제를 긍정적으로 논의하자고까지 말했다. 갑자기 약속을 취소하겠다고 하면 폐가 될 게 아닌가?


그래서 이 교토 출신의 지점장은 자기 고향의 방식대로 대응했다. 완곡하게, 상대가 바로 알지 못하게, 융자를 거절하겠다는 뜻을 밝히는 것이었다. 예의를 지키는 부드러운 신사의 모습을 하면서. 상대에게 폐를 끼치지 않을 방법을 취하면서.


그러나 한 참의가 교토식 예법을 기억하지 못해 차를 더 권했을 때 자리에서 물러나지 않고 한잔 더 받은 데다가 오차즈케까지 먹겠다고 하자, 아마도 그는 이 조선인이 정말 자신의 뜻을 모르는 한심한 자라고 여겼을 것이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하녀들에게 지시했을 것이다. 응접실 문을 살짝 연 뒤에, 그가 얼마나 민폐를 끼치고 있는지 말하라고. 그가 얼마나 눈치 없는 인간인지 말하라고 말이다.


어리석구나, 한덕만아! 이러니까 사기나 당했지! 이러니까 만주에서 석유개발 한다는 사탕발림에 넘어가기나 했지!


한 참의는 머리를 반쯤 쥐어뜯으며 흐느꼈다. 조선을 물론이고 내지를 넘어 세계적인 재벌이 될 것이라는 기대에 부푼 때가 며칠 전이었는데, 어쩌다가 내가 이 지경으로 떨어졌단 말인가! 약속까지 잡은 지점장까지 저렇게 나오는데, 다른 은행들은 어떻게 나올 것인가? 전화 통화로는 다 문제 없다, 결과가 긍정적일 것이라고 말들은 했지만, 이게 그저 일본식 완곡어법으로 말한 것일 수도 있지 않은가!


“저, 사장님?”


한 참의가 수십분 째 말이 없자, 운전기사가 고개를 뒤로 돌린다.


“집으로 모실까요?”


집? 한 참의는 고개를 저었다. 여전히 침대 위에 엎드려 울고 있을 성 여사를 보기 싫었고, 딸의 남아있는 흔적을 보기도 싫었다.


“회사로 가세.”


오늘은 휴일이라 회사에 아마 당직근무자 몇 명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겠지만, 그래도 사장실이 집보다는 나았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사무실로 올라왔을 때, 직원 한 명이 말한다.


“손님분께서 지금 찾아와 계십니다.”


“손님? 오늘?”


한 참의는 어지러운 머릿속에서도 오늘 회사에서 만나자고 약속한 사람은 없다고 기억했다.


“누군데 들여보냈나?”


그 물음에 직원이 술술 답한다.


“일본 스님이시던데요. 묘엔이라고 하면 사장님께서 아신다고······.”


“뭐? 누.······ 누구라고?”


한 참의의 쌍심지에 불이 붙는다. 이 모든게 그 중을 만나면서 시작되었다! 군산에서 만났을 때부터, 미두에 투자하면 큰 손해를 볼 것이라고 예견했던 그 때부터! 그자를 영험한 고승이라고 믿으면서 가짜 백작과 가짜 사장을 소개받은 게 아니던가!


“그······. 그 사람 지금 어딨나?”


“사장실에 있습니다.”


한 참의는 그러자 직원을 밀치다시피 하고 사장실로 달려가 문을 확 열어젖혔다. 그리고 보았다. 그 승려가 석장을 짚고 일어나 합장하는 것을.


“아미타불. 참의님. 그간 격조하셨습니다.”


그 노승의 얼굴을 본 순간, 한 참의가 노성을 내질렀다.


“이 땡중놈아!”


그의 양손이 묘엔 스님의 멱살을 꽉 움켜잡으려 달려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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