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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KKA
작품등록일 :
2019.07.10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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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03 2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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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265화

DUMMY

아무래도 오늘 아침에 운을 많이 써버린 모양이군.


천 지부장이 속으로 뇌까린 말이었다. 그의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은, 수색대형으로 산개되어 산기슭으로 돌입하는 올라오는 분대 규모의 헌병 병력이었다.


군경 충돌을 유도하고 정찰기까지 따돌리는 데 성공했을 때는 모든 게 다 잘 풀릴 줄 알았다. 이제 목적지인 원미산까지 가서 우거진 숲 속으로 들어가 정찰기의 눈을 피해 옥룡회와의 합류지점까지 도달하면 무사히 인천까지 갈 꿈에 부풀어 있었다. 저만치 보이는 산과 지도상의 현재 위치를 대조해 보니 원미산이 가까워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조금만 더 간다면 제일 위험한 단계가 끝날 것이었다.


그런데 30분도 더 전, 그 멋진 계획에 심각한 이상이 발생했다. 먼지를 흩뿌리며 밭을 가로질러 깔린 신작로를 달리던 트럭이 난데없이 꽝 소리를 내며 굉음과 함께 확 기울어진 것이었다.


“꺄악!”


새된 비명이 짐칸을 울렸다.주리는 정우 품에 돌진하듯 엎어져 버렸다. 정우를 비롯한 형제들도 이 갑작스러운 사태에 죄다 구르고 엎어지고 난리가 났다. 정좌한 채로 앉아 있는 천 지부장만이 정중동의 자세를 지켰다.


“다들 괜찮느냐?”


“아으······. 괜찮습니다.”


말은 괜찮다고 했지만 푹신함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트럭 집칸 곳곳에 부딪친 게 괜찮을 리가 없었다. 정우는나머지 자기 품에 안긴 주리의 심장이 너무 놀란 나머지 쾅쾅 뛰는 걸 느끼며 어디 다치지 않았는지부터 확인했다. 다행스럽게도 주리가 넘어지며 그의 품속에 달려들었기에 몸에 이상은 없어 보였지만, 트럭은 오른쪽 앞으로 거의 40도 이상 기울어져 있었다.


“앞에 무슨 일이냐?”


천 지부장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울렸다. 운전이 계속 잘 되고 있었는데 대체 무슨 난리란 말인가? 그런데 운전석에서는 “저 망할 자식들이!”라고 분노에 떨리는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재호의 목소리였다.


정우는 재호가 뭘 보고 저렇게 화를 내는지 보려 방수포를 걷어 바깥을 보았다.

“와! 걸렸다!”


허름한 차림을 한 사내아이 몇 명이 환호작약하면서 밭을 가로질러 뛰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고개를 돌렸을 때, 이 아이들이 무슨 짓을 했는지 보고 말았다.


트럭 왼쪽 바퀴가 땅 속으로 움푹 들어가 있었다. 바퀴가 땅에 파놓은 구덩이 속에서 거슬리는 소리를 내며 헛돌았다. 바퀴가 빠진 구덩이가에 거적이 솓아오른게 보였다. 저 동네 꼬마들이 장난을 치려고 길에 구멍을 파 놓고 위를 거적으로 덮어서 지나가던 차량을 함정에 빠트리려 한 것이다. 그리고 한인애국단의 트럭은 그 함정에 보기좋게 걸려버리고 말았다.


정우는 그걸 보고 탄식을 터트리고 말았으며, 주리는 참지 못하고 울상을 지으며 “뭐에요, 이게!”라고 칭얼거리고 말았다.


“저, 저 망할 새끼들 봐라!”


이 상황에 형제들 중 눈이 뒤집히지 않은 사람은 정우 밖에는 없었다. 기가 막히고 혈압이 치솟는다. 적과 목숨이 오가는 총격전을 벌이고 교묘한 계략으로 빠져나와 이제 합류지점으로 별 탈 없이 향하고 있을거라 생각했는데, 적 헌병이나 경찰의 함정도 아닌, 그저 동네 애들의 장난에 걸리고 말다니! 적군이라면 저 분노를 치솟게 하는 등덜미에 대고 가차없이 쏘겠지만, 동포의 어린아이들을 상대로 그럴 수도 없지 않은가.


천 지부장은 이게 다 애들 장난이었다는 보고를 받자, 얼굴이 극도로 일그러졌다. 제자들이 두려움을 느낄 정도로.


“빠져나올 수 있겠느냐?”


지부장이 목소리만은 침착함을 유지한 채 묻지만, 대답은 비관적이었다.


“계속 헛돌기만 합니다! 계속하면 될 것도 같지만, 그러려면 너무 오래 걸립니다!”


“하, 씨!”


그 말에 곳곳에서 욕지기가 터져 나온다. 정우는 몰려오는 답답함에 입술을 꼭 깨물었다. 저 꼬마들은 알기나 할까? 그저 재밌으려고 친 지극히 철없는 장난이, 그들의 해방과 미래를 위해 싸우는 사람들을 위험한 지경에 몰아넣었음을.


“방법이 없다.”


천 지부장이 일어서서 자기 짐을 챙긴다.


“도보로 원미산까지 갈 수밖에.”


“여기서 말입니까?”


민호가 푸념했지만, 역시 뾰족한 수는 없었다. 트럭 바퀴가 구덩이에서 빠지는 걸 기다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결국 다들 극히 어두운 표정으로 톰슨 기관단총의 탄창을 분리해 총몸과 탄창을 베낭 속에 넣고, 중기관총 탄약을 탄약통 안에 집어넣어 대석의 짐 속에 넣고 민호의 루이스 기관단총 원형탄창은 나눠서 싵는 등 내릴 준비를 해야 하였다 .트럭이 기울어진 상태라 몸의 무게중심이 쏠린 상태에서 묵직한 짐들을 옮기려니 불편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렇게 짐을 다 싸서야 트럭 짐칸을 내려올 수 있었다. 정우 손을 잡고 조심스럽게 내려온 주리는 볼썽사납게 기울어진 트럭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다 잘될 것만 같았는데 고작 애들의 철없는 장난으로 이렇게 되어버렸다. 화나고 억울해서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가자. 어차피 산은 지척이다.”


천 지부장이 그러며 선두에 나섰다. 다행이 그들의 복장은 순사 제복이고 손에는 순사들에게서 강탈한 아리사카 소총이 들려 있다. 어디 전술훈련이라도 가는 순사들의 모습이라 쉽게 의심을 사진 않을 터였다.


그렇게 그들은 걷고 또 걸어야 했다. 손에는 결코 가볍지 않은 아리사카 소총을 잡고 허리에는 순사들의 브라우닝 권총을 찬 데다가 등에 짊어진 짐 속에는 톰슨 기관단총과 마우저 권총에 루이스 경기관총 탄창, 그리고 야전삽에 물을 가득 채운 수통까지 들어 있다.


산기슭까지 트럭이 도착하면 순사들의 무기는 버리고 갈 것이었지만, 길 한복판에서 어디 훈련장으로 들어가 며칠간 숙영할 것처럼 보이는 짐을 싣고 가는 순사들이 손에 총 한자루 없다는 건 지극히 수상해 보일 일이었다. 어쩔 수 없이 손에 총을 잡거나 총끈을 어깨에 매고 앞으로 걸어갈 수 밖에 없었다.


모두 어깨에 무거운 짐이 짙눌리면서도, 헌병 병력이 어디서 튀어나오진 않을까 긴장하며 걸어야 했다. 그저 머리를 비우고 걷기만 하는 것보다 짐의 무게감이 더욱 느껴졌다.


이러한 행군에 익숙치 않은 주리는 이를 악물었다. 어깨에 배낭 끈이 파고드는 고통이 전해지고 발바닥에는 벌써 물집이 잡혔는지 쓰라린 느낌이 들었다. 처음에는 들만 하다고 생각했던 아리사카 소총이 시간이 갈수록 체력이 조금씩 빠져나가며 그 무게감이 계속 더해지고 있었다.


정우는 주리가 이런 일에 익숙치 않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서, 옆에서 같이 걸으며 계속 걱정하는 낯빛을 보였다. 그러나 그때마다 주리는 올라가지 않는 입꼬리를 억지로 올리면서 “에이. 전 괜찮다니까요.”라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굴었다. 주리가 우는 소리 한번, 투정부리는 소리 한번이라도 했다가는 그런 말을 한 스스로를 용서하지 않을 것을 아는 정우는 그 대답에 말 없이 미소로 답해주었지만, 걱정되는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이미 짐의 무게감이 느껴지는 상황에서도, 주리가 그 섬세한 손으로 꼭 잡고 있는 소총을 자신이 들어주고팠다. 그러나 주리가 절대 그걸 허용할 리가 없으니 그저 애타는 마음을 담아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나 주리는 땀이 비오듯 쏟아지는 가운데서도 이를 악물고 또 악물어야 했다. 마침내 산기슭에 도착해 산행을 시작한지 10여분 쯤 되었을 때, 어깨가 끊어질 듯 아파오기 시작했다. 잠깐잠깐 따가웠던 발은 정말로 물집이 잡혔는지 불타는 듯 쓰라렸다. 목구멍에서 뜨거운 호흡이 가쁘게 올라왔다. 조금만 천천히 가자고 말하고 싶었지만, 힘들지도 않은 듯 성큼성큼 산을 타는 남자들에게 그러면 행군 속도에 발목을 잡을까봐 그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말하기라도 했다가 천 지부장이 한심하다는 듯이 차가운 눈으로 쳐다보기라도 한다면, 앨리스처럼 작아져 쥐구멍을 찾아 들어가고 싶다는 욕구가 간절해질 것 같았다. 그럴 바에야 어깨가 절단나더라도 참겠다는 주리였다.


그러나 순간 표정을 관리하지 못하고 힘든 기색을 숨기지 못한 주리를 본 정우는, 계속 참고 행군할 수 만은 없다고 판단했다. 마침 그들은 비교적 경사가 완만한 지대에 들어온 차였다.


“잠깐 휴식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합류지점까지 가다가 우발사태가 발생할 때를 대비해 체력을 아껴두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천 지부장은 그 제안이 합리적이라고 판단한 것 같았다.


“좋다. 잠깐 휴식한다. 마침 은폐하기도 좋군.”


총기로 무장한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게도, 그 일대는 장관이었다. 철이 지나 시들기 전 절정으로 만개한 진달래꽃이 산자락을 뒤덮고 있었다. 잠깐 스쳐지나간 봄바람에 진달래들이 춤추며 꽃밭이 일렁이는 듯 하였다. 이런 상황이 아니었다면 이 정취에 흠뻑 젖어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들은 진달래꽃을 즐길 여유가 없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이 꽃밭은 엄폐하기에 좋은 장소로 우선 고려되었다. 여기에 큼지막한 바위 몇 개가 놓여있던 차였다. 주리는 땅바닥에 드러눕고 싶다는 충동을 이기려 애를 쓰면서 무거운 짐을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바위에 기대어 거칠어진 숨을 들이쉬었다.


“물 마셔두는게 좋아.”


옆에 앉은 정우가 정우가 자기 배낭에서 수통을 꺼낸다. 주리는 침울한 얼굴이 되어 입술을 삐죽인다.


“나 때문에 그런 거죠?”


정우가 왜 지금 쉬자고 했는지 눈치 못챌 리가 없는 주리였다. 자신의 자존심을 해치지 않으면서 휴식시간을 가지게 한 정우가 고마웠지만, 그만큼 자기가 그의 발목을 잡는 것 같아서 미안하고 또 미안했다.


정우는 가만히 고개를 젓는다.


“다들 휴식이 필요했어. 지금 충분히 잘 하고 있으니까, 그런 생각 말고.”


주리는 더 잘하고 싶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그럼 정우가 더 마음을 쓸까봐 그러질 못하였다.


한편 천 지부장은 짐을 내려놓자마자 체력이 바로 회복이라도 되었는지 금세 일어났다.


“난 잠시 망을 보고 오겠다. 예감이 좋지 않아.”


“예? 괜찮으십니까?”


제자들은 팔팔한 젊은이인 자신들도 체력소모를 느끼던 차에 그래도 나이가 40이 넘은 천 지부장이 5분 남짓 쉬고 돌아다니겠다니 놀라 만류하려 한다. 그러나 천 지부장은 “쉬고들 있어라.”라는 말을 남기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빠르게 멀어져갔다.


“어떻게 사부님은 나이 먹으셔도 저리 막강하시냐?”


“나이를 먹으실 수록 더해지시는 것 같은데?”


이런 말들이 두런두런 오갈 때, 민호가 너스레를 떤다.


“이러다가 나중에 더 나이 드셔도 회춘하시고 신선술 같은 거 익히셔서 우화등선하시는 거 아냐?”


그 말에 픽픽 웃음이 터졌다. 그러나 제자들이 휴식 중 잠깐의 여유 동안 환담을 하고 있을 때, 천 지부장은 다급해졌다. 그들이 올라온 방향에서 혹시 적의 추격이 따라붙지 않았나 하는 우려로 왔던 길을 되돌아보아 갔는데, 불길한 예감이 맞았던 것이다. 완전군장을 한 헌병 병력이 저 멀리에서 보였다.


“전원 주목!”


저만치에서 헌병 분대의 지휘관인 자가 호령한다.


“불령선인들이 순사제복 복장을 하고 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수색 중 순사 복장을 한 자를 보면 신원 확인할 필요 없이 교전에 들어간다! 알겠나?”


천 지부장은 잠깐 그들을 무섭게 노려본 뒤, 적군의 시야 밖을 빠르게 벗어났다. 아무래도 적은 그들에게 잠깐 쉴 여유조차 주지 않을 모양이었다. 이렇게 빠르게 추격해온 것을 보아, 아무래도 적 중에 그들의 행동을 추리해 낼 능력이 있는 자가 있는 모양이었다. 정찰기의 관측장비를 피할 수 있는 산중으로 이동하리란 것을 예상한 자가.


아침의 행운과 대비되는 악운이었지만, 천 지부장은 조급해하지 않았다.


진달래꽃이 산자락에 만개한 지금, 저들보다 고지에서 은폐된 화망을 구축하게 하여 그 안으로 머리를 집어넣게 만들면 되니까.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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