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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K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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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10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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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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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쪽

268화

DUMMY

아이 둘이 있는데도 한참 젊은 시절의 우아함을 잃지 않은 풍모, 그 풍모에 기품을 더했음도 유쾌하고 장난스러운 웃음을 얼굴에 띈, 광대뼈가 살짝 도드라진 그 얼굴을 주리는 잘 기억하고 있다. 미하일 가레예프를 통해 편지와 최근에 찍은 사진을 보낸 사모님, 천남건 지부장의 부인 카라스마 에이코가 아닌가!


“하이고! 4년만에 보는 마누라에게 그런 말이 잘도 나오시우?”


천 지부장이 예상치 못하게 갑자기 튀어나와 황당하다는 투로 말하자 에이코가 입술을 삐죽인다. 사모님의 등장은 전혀 예상치 못했기에 잠깐 얼이 빠졌던 형제들은 그제야 예를 갖추며 인사를 올린다.


“사모님! 별고 없으셨습니까?”


“아. 그래그래. 별고 없었지. 애들 아빠가 편지를 보내도 3, 4개월에 한번 보내줄까 말까 한거 빼면. 너희들은 보아하니 신수 훤해졌네? 특히 정우는! 요 녀석. 연애하게 되어서 아주 살판 났구나 난 네가 애들 중 가장 마지막으로 경사를 치를 줄 알았는데, 근데 어떻게 참 네가 먼저 그러게 되었다니?!”


그렇게 인사를 받아넘기고 “오호호호호!”하고 웃는 에이코였다. 형제들은 정중하게 예를 표하면서도 기쁨의 낯을 숨기지 못했다. 4년만에 보는 사모님이었다. 활달함이 넘치는 사모님은 가장 암울하고 힘든 시기에 그저 입을 여는 것 만으로도 모두의 기운을 북돋아주는 존재였다. 그런 사모님은 사모님과는 적지 않은 시간 동안 떨어져 지냈는데, 그것도 총을 들고 직접 지원에 나섰으니 기쁘지 않을 리가 없었다.


제자들과 달리 그녀의 남편 천 지부장은 몰려오는 어이없음을 참는 태세였다.


“영자! 대체 언제 온 거요? 예고도 없이 이리 갑자기 오면 어떡하오? 온다면 온다고 사전에 연락해야 하지 않소?”


“어젯밤에 왔수. 상하이에서 한번 편지 보내면 열흘 가까이 걸려 도착할까 말까 하는데 그거 기다리기 싫어서 그냥 왔수. 말 하고 오나 안 하고 오나 오는 건 똑같잖아요.”


천 지부장은 부인의 뻔뻔스러우리만치 느껴지는 당당함에 할 말을 잃은 듯 하였다. 그러나 바로 목소리를 높인다.


“어제 왔으면 전신을 보내던가! 갑자기 나타나면 어찌 하오!”


“내 생각 알잖수. 당신 놀라게 하는게 내 작은 낙인걸 어쩌겠어요?”


에이코는 그러고 “오호호호!”하고 웃는 것이었다. 흡사 콧대 높은 귀족 여성이 부채를 펼쳐들고 입을 가리며 사람 놀리듯 웃는 것 같은 이 웃음은 그녀가 화족의 딸인 것처럼 보이게 하는 유일한 요소였다. 천 지부장은 안면근육을 씰룩거리다가 차오펑과 량궈를 본다.


“자네들이 언질이라도 줬으면 좋았을 거라 생각하네.”


이에 차오펑이 옅은 웃음을 짓고 고개를 흔든다.


“여협께서 반드시 사전에 알리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장 대인께서도 이에 동의하셨습니다. 실례가 되셨다면 죄송합니다.”


차오펑도 량궈도 어쩔 수 없었다는 눈치다. 천 지부장은 의형도 분명 낄낄대며 그러자고 했을 거라고 상상하니 자기 뒷목덜미를 주무르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이때 부부간의 대화가 잠깐 끊어지자, 그 틈에 주리가 앞으로 나섰다. 주리의 눈에 기쁨의 빛이 초롱초롱 빛난다. 한 번도 얼굴을 보지 못했음에도 그 사려깊은 편지로 항상 자신의 편이라고 위로해 준, 존경스러운 사모님이 눈 앞에 있다. 그것도 총을 들고 그들을 구해주러 왔다. 사진 속으로만 봤던 그 우아하고 당당한 사모님을 뵙게 된 것이 너무 놀란 나머지 인사드릴 시기를 놓쳤지만, 이제 그럴 수 있게 되었다.


“사모님을 뵙습니다!”


주리가 허리를 숙여 꾸벅 인사를 올린다. 남편에게 뭔가 잔소리를 하려던 기세의 에이코는 주리를 보자마자 눈을 빛낸다.


“어머머머! 네가 주리니? 정말 반갑다, 얘! 정말 상상한 대로 예쁘고 귀엽게 생겼네!”


사모님은 말 그대로 뛸듯이 호들갑을 떨고 기뻐하며 주리의 손을 마주 잡았다.


“상하이 와서 보자고 편지에 썼는데 여기서 만나게 되네! 사람 일이란 참 알 수 없다니깐! 정우도 참 능력이 대단해! 이런 애를 정인으로 만들다니!”


주리는 사모님이 보자마자 칭찬을 하니 방금 전까지 삶과 죽음이 오고가는 전장에 있었던 것도 있고 얼굴에 활짝 웃음꽃을 피운다. 그 말에 정우가 쑥스러워져 헛기침을 한다. 본디 장난을 좋아하고 항상 기분이 고조된 사모님이 주리를 만난다면 괜히 부끄러워질 말이 자꾸 나올 거라 예상했는데 딱 정중하였다.


“쯧쯧쯧. 근데 이 얼굴에 무슨 일이라니. 얼굴에 피멍들었네. 총 쏘다가 그랬니?”


에이코가 혀를 차자 주리가 “예? 정말요?”하고 기겁한다. 그러고 보니 오른쪽 광대뼈 쪽 피부를 손가락으로 눌러보니 아픔이 느껴졌다. 권총 총몸에 얼굴을 밀착시키고 조준사격을 하다 반동에 계속 부딪혀서 피멍이 든 것이었다.


그러나 에이코는 혀는 그만 차고 또 신나서 떠든다.


“그래도 영광의 상처지! 흉 질 정도는 아니니까 얼굴에 달걀 좀 문지르면 하루 정도 지나서 쏙 빠질 게야!”


이때 천 지부장이 부인의 수다를 가로막는다. 옥룡회 단원들과 잠깐 대화를 나눈 후였다.


“그만 됐고. 대체 무슨 일로 온 거요? 온다는 연락도 하지 않을 정도의 은밀한 일이오?.”


남편의 추궁하는 듯한 말에 에이코는 다시 입술을 삐죽인다.


“얼씨구. 당신하고 애들 보고 싶다고 왔다 하면 왜 사적인 일로 왔냐고 잔소리할게 뻔하겠수. 나도 한가한 사람 아니에요. 이번에 온 것도 엄연히 공무를 수행하러 온 거라고요.”


“공무? 무슨 공무 말이오?”


그러나 에이코는 남편의 물음에 혀를 쏙 빼무는 게 아닌가.


“원래는 지금 말 해주려 했는데, 당신 하는 거 보니까 그럴 생각이 사라졌네요!”


“아, 이 사람이!”


천 지부장은 평소 제자들에게 보여주지 않는 반응을 내보이고 말았다. 이 기세 좋은 부인 앞에서는 그도 황당함, 어이없음, 곤란함의 감정을 담은 표정을 지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오호호호! 농담이에요, 농담. 인천 가면 내가 왜 왔는지 알 수 있을 테니깐, 우선 빨리 가기나 해요. 여기 차오 형제하고 량 형제하고 인천에서 차 몰고 왔수. 산기슭에 잘 주차해 놨으니 그곳으로 가요. 시체들 잔뜩 있는 곳에서 이런 말 하기는 좀 뭐하지 않수?”


그 말대로였다. 에이코의 등장에 당황했던 그들은, 그제야 40여 구가 넘은 일본 헌병의 시체가 풍기는 피비린내와, 치열한 전투를 상기시키는 화약냄새로 가득함을 새삼 느꼈다.


“알겠소. 거기로 갑시다.”


정우는 마침내 전투가 종료되었음을 새삼 느끼자 안도감에 힘이 빠지는 느낌이었다. 이제 정말로 끝났다. 그들이 타고 온 트럭을 추적목표로 삼았을 적 정찰기는 길 한가운데 멈춰선 트럭만 보고 맴돌고 있을 것이었다. 새로운 차량들이 이 판에 등장해 그들을 수송하는 일은 생각도 못했을 것이리라.


인천에 도착하기 전 까지는 완전히 긴장을 풀 수는 없었지만, 사실상 거의 다 왔다는 생각이 정우 뿐 아니라 다른 형제들에게도 가득 차기 시작했다.


천 지부장은 그래도 몸에 익은 경계감을 거두지 않는 동시에 부인에게 입을 연다.


“부인이 왔다면 애들은? 애들은 어떻게 하고 온 거요?”


천 지부장의 자녀인 경자와 규일은 에이코가 남편을 도우러 조선에 오지 못한 이유였다. 당시 8살, 5살에 불과한 아이들을 어머니와 떼어놓은 채 임정의 다른 어른들 집에 맡기고 가기도 힘들었다. 천 지부장은 아이들이 엄마가 필요할 나이라고 보았고, 백범 선생을 비롯한 임정 요인들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다고 애들을 데리고 들어올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이곳은 슬프게도 적지였다. 냉혹하게 판단하자면, 아이들을 보호받을 수 없는 적지 한가운데에서 기른다면 임무수행에 지극한 지장이 있을 터였다.


에이코는 요즘같은 세상에도 육아가 항상 어머니의 몫이여야 한다며 잠깐 툴툴대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애들을 두고 갈 수도, 데리고 갈 수도 없는 이상 상하이에 남는건 자신이라고 말하였다.


그런데 여기 에이코가 왔다는 건, 애들을 상하이에 두고 왔다는 건가?


“누구 집에 맡겼소? 일파 부인이나 성엄 부인?”


에이코는 임무가 있으면 애들을 임시정부 사람들 중 시간적 여유가 있는 부인네에게 맡기곤 하였다. 그 중에서도 엄항섭의 부인 연미당과 김의한의 부인 정정화에게 자주 부탁하는 편이었다. 그런데 에이코의 대답은 천 지부장의 입에서 기함을 토하게 만들기 충분하였다.


“맡기긴? 둘 다 데려왔다우.”


“뭐, 뭐요?”


청년들도 놀라서 “경자와 규일이 데려오셨어요?”라고 한 목소리로 묻는다. 천 지부장의 얼굴에 순간 피가 몰린다.


“여기가 어디라고 애들을 데려오오? 부인도 여기가 적지인걸 누구보다도 잘 알잖소!”


그러나 에이코는 한 마디도 지지 않는다.


“얼씨구. 내가 그런거 생각 안하고 애들 데려온 줄 알아요? 당신 마누라가 그런 얼빠진 사람인줄 알았단 말이우? 꼭 내가 애들 데리고 와서 폐 끼치는 것처럼 말하네? 걱정일랑 마세요. 내가 여기까지 애들 데려올까봐요? 애들은 지금 호텔에서 잘 놀고 있으니 걱정일랑 어디 갖다 버리고 오세요. 어차피 나와 애들은 내일 다시 상하이로 돌아갈 배 탈 예정이니까. 하루이틀 머문다고 헌병이 처들어와 잡아가는 건 아니잖아요?”


그렇게 말로 몰아붙인 후 “얘들아, 너희 사부님이 이렇게 꽉 막혔단다. 어째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하지를 않는다니깐.”이라며 너스레를 떨듯 푸념하는 것이었다. 정우는 이럴 때는 항상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고민할 수 밖에 없어서 지극히 곤란하다. 다른 제자들은 터져나올 것 같은 웃음을 참으려 사부의 눈치를 보며 입술을 깨물고 있다.


그러나 이 와중에 참지 못하고 “풉!” 소리를 낸 사람이 있었다. 주리였다.


주리에게는 이 광경을 보는 것 자체가 웃음샘을 지극히 자극하는 일이었다. 정우 오빠와 오라버니들은 항상 천남건 지부장에게 상관이자 사부로서 공경을 표해 왔으며, 농담을 던질 때가 있어도 기본적으로 그의 강력한 권위에 고개를 조아려 왔다. 그런데 이 사모님은, 장백대호의 부인인 이 암호랑이는 그런 기미를 하나도 보여주지 않고 살 떨리는 살기를 뿜을 줄 아는 남편을 오직 장난치고 놀리는 대상으로 삼는 것이다. 그리고 태산같은 진중함과 드높은 권위를 가진 천 지부장은, 이런 부인을 상대하며 주리의 눈에 몇 안되는 인간적인 감정들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 감정이란 게 죄다 황당함, 어이없음, 기막힘이라는게 문제였지만. 그리고 지부장이 부인 앞에서 그런 표정을 보여주는 게, 너무나도 즐겁고 또 우스워서 실수를 하고야 만 것이다.


“으악! 죄송합니다!”


자신이 못참고 터트린 웃음에 시선이 집중되자, 주리가 당황하여 허둥지둥한다. 에이코는 그 모습을 보고 혀를 차며 남편을 쳐다본다.


“쟤가 저러는 걸 보니 말 안해도 알겠수. 당신 분명 어른이랍시고 쓸데없이 무게잡고 무섭게 굴었죠? 그렇죠?”


그 말에 “난 원래 그렇잖소.”라고 딱 자르지만, 부인의 입은 멈추지 않는다.


“하여간 섬세함이라고는 쥐뿔도 없어서는! 내가 저번에 뭐랬어요? 쟤 나이때 여자애 마음이 얼마나 감수성이 풍부하다고 몇 번을 말했어요? 거기다 대고 분명 거칠게 대하면서 우리 일에서 쓸데없는 감정은 배제되어야 하느니 어쩌니 하면서 군기 잡았을게 뻔하지! 무시무시하게 정색하면서 말이오! 하지만! 내가 왔으니 앞으로는 그런 거 안통할 거라우!”


에이코가 남편에게 한마디 한마디 할 때마다 손가락이 그 박자에 맞춰 까닥거린다. 천 지부장이 뭐라 할 말을 찾지 못한 그때, 에이코가 방긋 웃으며 주리에게 시선을 돌린다.


“걱정 말거라! 저 목석같은 내 바깥양반이 뭐라 그러던간에, 이 사모님이 있는 이상 다 안통할 거란다! 천하의 장백대호를 길들일 수 있는 사람은 이 카라스마 에이코 뿐이거든! 그러니, 너는 이 사모님만 믿으면 된단다!”


그리고 으레 그 “오호호호!”하는 웃음이 다시 울린다. 제자들은 사부님과 사모님의 관계가 항상 이렇다는 것을 잘 알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들 앞에서는 절대적인 존경을 받는 사부님이 한 마디를 하면 열 마디가 돌아오는 상황을 그대로 보는 건 언제나 기분이 이상한 일이었다.


이 와중에 주리는 자기 허벅지를 힘껏 꼬집으며 터지기 직전의 웃음을 참아내는 데 성공하였다. 천 지부장이 고개를 돌리며 오른손을 이마에 가져다 대고 있던 모습을 보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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