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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KKA
작품등록일 :
2019.07.10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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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15 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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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30 2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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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쪽

249화

DUMMY

기타무라 소좌를 집무실로 부른 조선헌병사령관 이와타 소장은 상당히 곤란하단 눈치였다.


“소좌. 귀관의 부하들이 검문검색과 수색에 열심을 다해 임하는 건 아네만······”


그러며 콧수염을 거세게 비틀었다.


“그렇다고 해서 외교적 문제가 일어날 일을 굳이 만들 필요는 없지 않는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벌써 영국 영사관, 프랑스 영사관, 벨기에 영사관에서 항의가 들어왔네. 외무국에서 전하기를 다른 영사관들도 항의할 거 같다고 하고 있어. 계속 이렇게 되면 곤란하네. 우리 제국의 위신이 엉뚱한 쪽에서 흔들릴 수 있단 말일세.”


그 녀석들이 일을 거칠게 했나보군. 기타무라 소좌가 눈살을 찌푸렸다. 소좌는 정동을 오가는 어떤 차량이라도 봐주지 말고 철저히 검문하라고 명령했다. 설령 그게 외교관 차량이라 할 지라도 봐주지 말라는 게 그의 지시였다.


“각하. 우려하시는 바는 알겠습니다. 하지만 외교관 같이 건드리기 힘든 신분으로 위장하고 공작을 벌이는 게 세상 모든 첩자의 주된 수법입니다. 어제 놈들이 우리의 포위망을 뚫고 혼마치에서 빠져나간 것도 분명 소련 영사관 차량을 탔거나, 아니면 소련 영사관 차량으로 위장한 차량에 탑승하였기 때문일 겁니다. 여기에 우리 애들이 외교관을 가장한 자들을 분간하지 못하여 일어난 것이 유력하다고 생각합니다. 불령선인들이 지금이라도 정동을 빠져나가지 못하거나, 아니면 정동으로 새로 들어올 때 잡기 위해서라도 철저한 검문을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헌병사령관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귀관의 판단은 십분 이해가 가네. 하지만 이 문제가 총독부 외무국을 넘어서서 타국 외무성과 우리 외무성 간의 문제까지 번지면 우리만 곤란해지네. 불령선인들이 설령 정말로 외교관 차량이라도 타고 도망가 봤자 이 좁은 반도에서 도망갈 데가 어디 있겠는가? 소련 총영사관 감시만 철저히 하고 그런 정도의 검문검색은 자제하도록 하게. 이건 명령일세.”


각하께서도 이건 책임지기 싫어 하시는군. 기타무라 소좌는 적잖이 언짢음을 느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납득하였다. 아무리 헌병소좌의 위세가 막강하더라도 외교적 문제를 일으킨 뒤 책임질 수 있는 권한과 능력이 그에게는 없었다.


“알겠습니다, 각하. 즉시 지시를 수정하겠습니다.”


“좋네. 아, 그리고. 관동군헌병대 쪽에서 앞으로 한 30분 후면 수사관들이 도착할 걸세. 거기서 그 불쌍한 친구들 신병인도를 요청해 왔어. 그 친구들 조사는 관동군에게 맡기고, 귀관은 그 불령선인들 수사에 집중하는 게 좋겠네.”


“예? 벌써 말씀이십니까?”


기타무라는 이 지시 또한 적잖이 언짢았다. 아오야기 놈과 그놈 동기들을 계속 가지고 놀 작정이었는데 변죽만 울리고 끝내버린 꼴이었다.


“어차피 그 친구들 조사는 관동군 쪽에서 수사관 오면 인계하기로 되어 있잖나. 인수인계할 준비 하고 그놈들 체포에 진력해 주게.”


아쉽다는 입맛이 입 속에 감돌았지만, 명령은 명령이고 또 규정은 규정이었다.


“알겠습니다, 각하. 실례 많았습니다.”


기타무라 소좌는 경례를 붙이고 집무실을 나갔다. 밖에서 대기중이었던 호리 대위가 그를 호종한다.


“영 재미없게 되었어. 검문검색 완화하고 아오야기 놈은 관동군헌병대에 넘기라 하시는군. 규정상 어쩔 수 없긴 하지만. 넌 바로 애들에게 연락해서 외교관 차량은 대충 하라고 전해. 난 관동군헌병대에서 사람 올때까지 기다렸다가 인계해 주고 종로서로 가야겠다. 짭새놈들 수사해 온거 다 가져와야지.”


“알겠습니다. 종로서에 공문 보내놓겠습니다.”


“그럴려고? 뭐 그러고 싶으면 그러던가. 짭새들에게 그러는 건 귀찮은데, 하고 싶다면 말릴 생각은 없어.”


기타무라 소좌는 그러며 입맛을 쩝쩝 다신다.


“아까워. 아오야기 놈과 더 놀아주고 싶었는데 말이야. 관동군 놈들, 지들 위신 달린 일이라고 참 빨리도 온다.”


그러며 휴게실로 가서 담배를 한대 빼자, 호리 대위가 숙련된 자세로 담배에 불을 붙여준다. 군더더기 없는 그 자세에 기타무라는 씩 웃으며 만족감을 표하고는, 호리 대위 입에 물린 담배에 자신도 불을 붙여준다. 사람 괴롭히길 좋아하는 기타무라에게도 확실히 호리 대위는 재미는 영 없지만 말 잘듣고 눈치도 있는 기대 이상의 부관이었다.


“너 줄 잘 탄 줄 알아, 임마. 네 덕에 난 편해서 죽겠다.”


“감사합니다, 소좌님.”


기타무라 소좌는 나름의 덕담을 주며 담배를 피우다가, 그 악마적인 웃음을 짓는다.


“그런데 말이야. 아오야기 놈 아버지, 요즘 상태가 좀 이상하다지?”


“아오야기 레이지로 원(元) 중장 말씀이십니까? 주요인사 시찰편람에 의하면 그렇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잘 되었네.”


소좌는 낄낄 웃으며, 앞으로 얼마 남지 않은 시간 동안 이 재수없는 후배 놈을 얼마나 더 괴롭혀줄지 최적의 방법을 찾아내는 데 성공하였다.


그 시간, 아오야기 중위는 거의 울부짖다시피 절규하고 있었다. 그의 친구들과 헌병대 조사관, 기타무라 소좌나 모리 대위, 또는 자른 조사관이 타자기로 쓴 1차 심문조서를 보며 그는 자기 눈을 파내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여러 번 느꼈다.


심문조서 속 후지무라 중위는 조사관에게 끔찍하기 짝이 없는 말들을 전하고 있었다.


문: 귀관은 어째서 불령선인들이 현금수송 건을 사전에 파악했다고 생각했나?


답: 우리가 대화를 나눈 조선요릿집 외에 정보가 새어나갈 만할 곳이 없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네 명은 임무를 지시받은 이후 거의 같이 다녔고 단독행동을 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문: 귀관이 증언한 옥면옥이란 조선요릿집과 불령선인들의 연관성이 있는가?


답: 그 요릿집은 아오야기 테츠오 중위의 약혼녀인 한주리 양이 예약한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한주리 양은 일전에 신경쓰이는 행동을 하여 본관의 의심이 향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문: 신경쓰이는 행동은 무엇인가?


답: 한주리 양은 카라스마 준이치로 백작이라는 화족과 밀통하고 있었습니다. 본관은 둘의 관계를 의심하여 흥신소를 통해 둘의 밀회 현장을 찍은 사진을 입수했습니다.


문: 그것이 이 사건과 관계가 있는가?



답: 처음 의심했을 때는 저도 그 연결고리를 찾지 못하였습니다. 하지만 정보누수가 옥면옥에서 있었다는 확신 때문에 계속 한주리 양을 추적했습니다. 확실한 연결고리는 한주리 양의 친척인 종로경찰서 소속 형사 오재두 경부보와 접촉했을 때 알았습니다.


문: 오재두 경부보에게 무슨 말을 들었는가?


답: 한주리 양이 지난 12월부터 행동이 수상해졌다고 들었습니다. 부유층 자제가 사상범이 되는 전조를 보였다고 말입니다.


문: 그래서 용의자를 어떻게 추적했나?


답: 오재두 경부보의 뒤를 밟았습니다. 자기 친척을 바로 찾아 추궁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오재두 경부보를 추적하니 혼마치에 도착했습니다.


문: 한주리 양을 그때 찾았나?


답: 그렇습니다. 그 여자는 불륜 상대였던 카라스마 준이치로 백작과 같이 있었습니다. 백작은 조선옷 차림이었습니다.


문: 그들과 싸움을 벌였나?


답: 그렇습니다. 우에스기 중위, 쿠스노기 중위, 미나모토 중위가 제압당한 후 제가 백작을 상대했습니다.


문: 총상은 그때 입은 것인가?


답: 그렇습니다. 백작을 제압하려던 와중, 한주리 양이 제게 발포했습니다.


아오야기 중위는 이게 거짓말이길 빌었다. 이 심문조서 자체가 기타무라 소좌가 일부러 그를 괴롭히기 위해 꾸며낸 거라고 절실히 믿고 싶었다. 그러나 꾸며냈다기에는 너무 정교했고, 너무 사실적이었으며, 다른 친구들의 증언도 일치하고 있었다.


문: 용의자와 조우한 뒤 어째서 제압당했는가?


답: 그 여자가 제게 정신없이 말을 걸어 잠깐 혼란스러웠었습니다. 카라스마 백작이 그 틈을 타 제 뒤통수를 내려친 것 같았습니다.


우에스기 중위의 증언이었다.


문: 우에스기 사부로 중위가 용의자 한주리에게 직접 제압당하는 것을 봤는가?


답: 제가 그 백작과 칼을 겨루고 있을 때, 그 여자가 일어나려던 우에스기 중위의 뒷통수에 돌을 잡아 휘둘렀습니다. 우에스기 중위는 그걸 맞고 다시 쓰러져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쿠스노기 중위의 증언이었다.


문: 한주리가 카라스마 백작의 체포를 방해했는가?


답:. 쿠스노기 중위와 백작이 싸움을 벌일 때, 저는 쿠스노기 중위를 지원하려고 나서려 했습니다. 그러자 그 여자가 제 앞을 막아서고 쿠스노기 중위가 제압당할 때까지 놓아 주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 여자를 밀치고 달려들었으나 그자에게 제압당했습니다.


미나모토 중위의 증언이었다.


이럴 리가 없다. 이럴 리가 없다며 부정하려 해도, 타자기로 적힌 동료들의 증언이 아오야기 중위의 가슴을 잔인하게 파고들었다. 이런 걸 꾸며서 쓸 수는 없다. 기타무라 소좌가 아무리 사람 괴롭히길 좋아하는 자라도 이런 걸 쓰기 위해 두뇌와 시간을 낭비했을까?


중위는 연거푸 책상을 내리쳤다. 내가 배신당했단 말인가? 완벽히 배신당하고 있었단 말인가? 당돌한 면이 있지만 그 착한 아가씨에게 처음부터 끝까지 이용당했단 말인가? 내게 사죄의 뜻을 밝히며 눈물을 보인 것은 전부 위장된 것이었단 말이던가! 조선신궁에서 보여준 웃음은 다 거짓이었단 말인가!


아오야기 중위는 그제야 기억해 낸다. 처음 만날 때부터 약혼식날까지 내비치던 그 혼이 빠져나간 듯한 멍한 얼굴을. 자신의 구애를 받아들였다기에 기뻐한 나머지, 그 표정이 보여주는 신호를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자포자기한 눈, 수업과 훈련 모두를 따라가지 못해 제적 위기에 처한 동기 생도가 보였던 것과 같은 그 눈을 신경쓰지 않고 있었다. 세계최종전쟁과 일천사해개귀묘법, 그리고 팔굉일우의 시대에 대해 열성적으로 말할 때, 솟아오르는 모멸감을 애써 예의바르게 숨기려고 한 그 태도를 신경쓰지 않고 있었다.남산신궁에서 같이 산보할 때, 집요하게 군사기밀에 대해 물어보려던 이유를 그저 쓰려는 소설의 리얼리티를 위한 것인줄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천하에 둘도 없는 바보였구나, 나란 놈은! 사랑받지도 못하고 있는데 사랑받았다고 착각하고 있었구나! 처음부터 끝까지 기만만 당하고 있었구나!


“으아! 으아! 으아아!”


중위는 들끓는 역겨움 때문에 바닥에 토악질을 할 뻔하였다. 분노가 극에 치솟다 보니 신경계가 마비되는 느낌이었다. 책상을 뒤엎으며 성질을 부리고 악을 쓰고 싶었지만, 애석하게도 그 책상은 붙박이었다.


조사실 문이 열린 건 그때였다. 헌병군조 하나가 들어와 경례를 붙인다.


“실례하겠습니다, 중위님. 중위님께 전화가 걸려와 있습니다.”


“뭐······? 내게······?”


아오야기 중위가 숨을 헐떡이며 그 군조를 바라보았다. 군조는 말투는 예를 갖추었지만 엄연히 상급자인 중위를 퍽 우스꽝스럽다는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렇습니다. 우리 대장님께서 특별히 통화를 허락하셨습니다. 받으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중위는 뇌가 타올라 마비될 것 같은 분노 속에서도 이성을 작동시켰다. 통화라니? 조사 중인 이 시점에? 누가 전화했기에? 이시와라 중좌님인가? 아니면 사령부의 다른 분이신가?


“전화한 사람은 누구인가?”


“그건 본관도 모릅니다. 전 단지 대장님의 지시를 전했을 뿐입니다. 저를 따라 오시면 됩니다.”


중위는 악을 쓰고 분노를 발산하느라 힘이 다 빠진 몸을 억지로 끌고 군조를 따라갔다. 군조가 안내한 곳은 헌병대 근무실이었다. 헌병대 행정계원들과 군속들이 서류작업을 하고 이곳저곳에 전화하는 곳. 그들은 사무실에 들어온 중위를 힐끗 쳐다보고 자기 일에 집중할 뿐이다.


전화가 걸려온 곳은 군조의 자리인 것 같았다. 그 자리에 수화기 하나가 원래 있어야 할 자리에서 나와 있었다.


“받아 보시지 말입니다.”


군조가 수화기를 잡아 아오야기 중위에게 넘겨주었다. 태도가 꽤나 건들거렸으나, 중위는 신경쓸 겨를도 없이 수화기를 잡았다.


“여보세요?”


그 순간, 수화기 너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테츠오! 이 한심한 놈!


중위는 하마터면 수화기를 떨어트릴 뻔했다. 그 목소리는, 아버지 아오야기 레이지로 퇴역중장의 노성이 아닌가!


-네 사관학교 선배라는 헌병대 장교에게 다 들었다! 이 멍청한 놈아! 사령부에서 하달한 임무를 완전히 실패했다며? 네 녀석이 중대한 과실을 저질러 사령부에 엄청난 민폐를 끼쳤다며?


아오야기 중위는 정신이 멍해져서 입에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어떻게 아버지가 이 일을 알고 있는가? 어떻게 아버지가 나의 불명예를 알고 있는가?


그 답은 바로 나왔다. 수화기를 쥔 손이 으스러져라 힘이 들어갔다. 기타무라 선배구나! 기타무라 선배가 의도적으로 이 일을 아버지에게 알렸구나! 헌병장교인 그에게 퇴역장군의 연락처 정도 파악하는 건 일도 아니었을 터이니!


-난 네녀석이 큰 공을 세우고 천재 군략가 이시와라 중좌의 막하에서 일한다기에 안심하고 있었는데, 이런 말도 안되는 사고를 쳐? 이놈아! 이게 무슨 망신이냐! 그러고도 네가 내 아들이라 할 수 있느냔 말이다! 이 아비 얼굴에 똥칠을 할 셈이냐!


부친이 내뱉는 노호성에, 아오야기 중위는 이를 악물었다. 아버지는 그를 평생의 자랑거리로 생각하고 살았다. 그가 원하는 대로 사관학교에 들어가고 차석으로 졸업했으며 만주에서 전공까지 세웠다. 그런데 그런 아들이 실망을 끼친 이상, 그 분노가 얼마나 크겠는가? 이를 얼마나 불명예스럽게 여기겠는가?


“죄송······. 합니다······.”


아오야기 중위의 입에서 떨리며 더듬대는 목소리가 나온다.


“제가······. 제가 모든 걸 망쳐버렸습니다. 아버지에게 누를 끼치고······. 모두에게 민폐를 끼쳤습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중위의 등이 떨려왔다. 이는 아버지와 동료들에 대한 사과인 동시에, 뭔가를 갈구하는 태도였다. 아버지가 그런 사람이 아닌 줄 알지만, 그래도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자신이 용서를 빌고 나서면 무언가 위로의 말이 전해지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없지 않았다. 그만큼 그는 한 구석에 몰려 있었다.


그런 뜻이 수화기 너머 시모노세키에 있는 노장군에게는 전달된 것처럼 보였다.


“비록 수치스러운 일을 저질렀지만, 불명예는 씼으면 되는 것이다!”


중위는 이때 작게나마 안도를 느꼈다. 어제부터 워낙 시달려 온지라 그 정도의 말로도 바닥을 뚫고 떨어진 기운에 약간이나마 북돋음이 느껴졌다. 아버지의 목소리에 노기가 가셨다. 노쇠한 목소리였지만, 목소리에는 기이한 강건함이 실리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중위는 다음 말에,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중좌! 당장 저 고지를 점령하지 못한 것은 귀관의 불명예다! 옛날 같았으면 할복으로 사죄해야 할 지극한 불명예다!”


“예?”


중좌라니? 그의 계급은 중위다. 지금 아오야기 퇴역중장은 누구에게 말하는 거인가?


-그 정도 손실에 겁에 질려 임무를 방기하고 후퇴했단 말인가? 한심한 겁쟁이 같으니라고! 로스케놈들의 포화가 그리 겁난단 말인가? 귀관의 행동은 우리 연대 전체의 불명예다! 지원이 부족해서라는 변명 따윈 집어치워라! 고지가 바로 저긴데 왜 점령을 못하나! 당장 귀관의 대대를 1540시까지 공격개시선에 집결시켜라! 총공세다! 총공세! 우리 연대 전체가 돌격전을 시작하는 거다!


중위는 아무 말도 못하고, 아버지가 아무렇게나 떠들어대는 말을 그대로 듣고만 있었다. 머리가 멍했다. 아버지는 무슨 말을 하는 건가? 로스케가 여기서 왜 나오는가? 대대를 공격개시선에 집결시키라는 건 무슨 말을 하는 건가?


-물질만능주의에 가득 찬 로스케는 겁쟁이에 불과하다! 우리의 야마토정신을 이길 수 없다! 놈들의 기관총이 아무리 강하다 한들 하나된 돌격 앞에서는 고양이 앞의 쥐새끼일 뿐! 명예심과 감투정신을 발휘해라! 설령 적의 포화에 쓰러진다 해도, 부스러지는 옥처럼, 흩날리는 벚꽃처럼 그 이름을 아름답게 날릴 것이니! 명예보다 목숨을 택한다면 제국군인이 아니다!


중위는 퇴역장군이 퍼붓는 소리에 더더욱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러나 이 기이한 소리 속에서도 하나만은 귀에서 명확히 울렸다. 명예보다 목숨을 택하면 제국군인이 아니라고.


이때 수화기 너머에서 다른 익숙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통화는 제가 맡겠습니다. 그걸 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그 침착한 목소리는 집사 다나베 니에몬의 것이었다. 그러나 노장군은 지금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전혀 모르는 듯, 집사에게 쩌렁쩌렁 명령을 한다.


-다나베 병조장! 자넨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겐가! 자네에게 본부중대의 전투지속가능 여부를 확인하라고 하지 않았었나! 근데 뭘 어물쩡거리고 있는 겐가!


선대부터 아오야기 가문을 모셔온 다나베 집사는 일로전쟁 당시 병조장 계급으로 아오야기 레이지로 대좌가 지휘하는 연대의 최고참 하사관이었다. 노장군은 이미 전쟁이 끝난지 30년이 가까워지는 지금에 자기 집사를 당시의 계급으로 부르는 것이었다.


놀랍게도 다나베 집사 또한 자신이 만주의 전장에 있는 것처럼 말한다.


-본부중대는 지금 돌격준비를 마쳤습니다. 지시하신 대로 공격개시선에 집결할 예정이니 심려치 마십시오. 이제 전방지휘소로 가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 그렇지! 좋네, 다나베 군! 로스케놈들에게 야마토정신이 뭔지 보여주세! 놈들은 우리 돌격에 정신차리지 못할 걸세!


-필경 그럴 것입니다, 연대장님. 돌격 전 남은 잡무는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그러니 안심하시고 가소서.


-훌륭하네! 자네는 항상 믿음직해! 전방지휘소에서 기다리겠네!


이 한바탕의 일로전쟁 재현극을 들은 아오야기 중위는 뭐가 어찌된 일인지 몰라 떨리는 손으로 수화기만 잡고 있었다. 왜 27년 전의 전장이 수화기 너머에서 계속 진행되고 있는 건가?


그 살 떨리는 의문은 다나베 집사의 입으로 밝혀졌다.


-도련님. 정말로 죄송합니다. 요즘 들어 주인님께서는 일생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순간이었던 203고지에 있던 때로 자주 돌아가십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그때의 병조장으로 돌아가서 있지도 않은 대대에 명령을 내리는 일을 도와드리고 있습니다. 그러길 몇 차례 하면 다시 지금으로 돌아오시던데, 오늘은 더욱 심한 것 같습니다.


“아······. 아······.”


중위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오려 하였으나, 목구멍이 잠겼는지 애타는 신음만 내뿜어질 뿐이었다.


-도련님께서 어떤 곤경에 처하셨는진 모르겠사오나, 이것이 도련님의 탓이 아님을 이 늙은이는 굳게 믿고 있습니다. 주인님께서 어떻게든 화를 누그러트리도록 성심을 다할 것이니 도련님께서는 부디 심려치 마시고······.


딸깍. 아오야기 중위는 더 통화를 들을 수가 없었다. 그는 그 자리에서 머리를 감싸쥐고 울부짖었다. 내 잘못이다! 내가 다 망쳐놓았다! 내가 아버지의 정신까지 더 흐릿하게 만들어 버리고 말았다! 이 무슨 불명예냐! 이 무슨 불효더냐!


어깨에 누군가의 손이 닿은 건 그때였다.


“중위. 우리와 함께 가야겠네.”


눈물이 흐르는 고개를 들어보자, 익숙한 얼굴이 있었다. 사령부에서 근무하며 몇번 마주쳤던 관동군헌병사령부 소속 대위였다. 그 옆에 역시 안면이 있는 헌병사령부의 군조 한 명과 병사 몇이 보인다.


“이런 자리로 만나서 유감이네만, 조사할 게 많네. 일어나게.”


대위의 얼굴은 지극히 굳어 있었다. 딱히 경멸감도, 동정심도, 여타의 감정도 섞이지 않은 차가운 눈이었다. 이때 머리를 뜨겁게 만드는 목소리 하나가 귀에 들어왔다.


“조사할게 많은 건 무슨. 어차피 다 정해진 대로 되지 않겠나?”


아오야기 중위의 눈에, 히죽히죽 웃고 있는 기타무라 소좌가 들어왔다. 중위는 더 참지 못했다.


“내게 왜 이러시는 겁니까! 왜! 대체 왜!”


중위의 고함이 사무실을 쩌렁쩌렁 울렸다. 그 소리가 워낙 거세서 행정계원들과 군속들이 일제히 동작을 멈춘다.


기타무라 소좌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아오야기 중위를 향해 다가왔다. 둘 간의 긴장상태에, 관동군 소속 헌병들은 혹시 모를 사태라도 대비하려는지 그의 양 팔을 붙잡았다. 소좌는 눈물 고인 눈으로 자신을 죽일 듯이 노려보는 중위에게 얼굴을 가까이 들이민다. 그의 입이 양 옆으로 쭉 벌어지며 이를 다 드러냈다.


“재밌잖아.”


그 직후 사무실은 두 가지 소음이 불협화음을 일으키며 진동했다. 짐승같이 울부짖는 아오야기 중위의 고함과, 이에 질세라 자지러지게 터져나오는 기타무라 소좌의 광소(狂笑)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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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4 254화 +6 21.01.09 349 9 12쪽
253 253화 +8 21.01.08 362 9 16쪽
252 252화 +8 21.01.05 319 9 15쪽
251 251화 +6 21.01.03 331 9 17쪽
250 250화 +8 21.01.01 330 12 21쪽
» 249화 +12 20.12.30 341 9 21쪽
248 248화 +12 20.12.28 296 13 20쪽
247 247화 +4 20.12.26 336 12 19쪽
246 246화 +6 20.12.23 323 11 17쪽
245 245화 +8 20.12.21 313 11 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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