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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KKA
작품등록일 :
2019.07.10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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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15 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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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28 2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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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쪽

248화

DUMMY

아오야기 테츠오 중위는 오랜 시간 동안 방치되어 있었다. 눈이 가려진 그는 시간이 얼마나 흐르는지도 모르는 채 끝도 없는 암담한 심정에 빠져들었다.


임무는 완전히 실패했다. 그 엄청난 액수의 금액이 불령선인들의 손에 들어가고야 말았다. 자신과 친구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 불령선인들에게 놀아나면서 기록적인 임무실패를 가져오고야 말았다. 이 무슨 불명예인가! 이 무슨 수치인가! 에도 시대였다면 필히 할복으로 사죄하지 않으면 평생을 비웃음거리로 살아야 할 운명이었을 터였다. 그런 수준의 실패를 초래하고 말았다.


실패의 충격보다 더 암담한 것은, 자신을 잡은 그 가짜 헌병대좌의 논리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 자는 물었다. 세계최종전쟁 후 구미인들이 마음 속으로 굴복할 것 같냐고. 현인신이신 폐하께서 덕을 베풀더라도 묘법연화경으로 하나가 된 세상을 받아들일 수 있을 거냐고 말이다. 그러나 중위는 대답하지 못하였다. 전혀 생각해보지 않은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시와라 간지 중좌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국주회에 입회할 때부터, 그는 니치렌 대성인의 가르침이 세상 모든 종교와 사상을 아무것도 아닌 걸로 만들 거라고 확신해 왔다. 세상에서 다툼을 만드는 사상과 종교의 차이는 대성인의 유일한 가르침 앞에서 힘을 잃고 사멸할 것이라고 의심치 않아 왔다.


그런데 필연적인 세계최종전쟁 이후 정말 그렇게 될 수 있을까? 그는 만주사변에서 선봉에 나섰던 기억에서 새삼 잊고 있었던 기억이 지금 떠오르고 말았다. 마침내 동북군벌의 본거지 봉천성에 그의 중대가 보무당당히 입성할 때였다. 성문을 통해 입성하던 그 순간, “구이쯔 놈들아! 내 남편 살려내라!”라는 원한에 가득 찬 목소리가 들렸다. 봉두난발을 한 채 더러워진 옷차림을 한 중국 여인 한 명이 행군대열에 마구잡이로 달려드는 게 보였다. 신경이 곤두선 부하 병사들은 이 여인을 붙잡고 구타한 뒤 헌병대에 인계하려고 했으나, 중위는 차마 그러질 못했다. 전혀 씻지 않아 때가 잔뜩 껴 꼬질꼬질한 얼굴에 누가봐도 정상이 아닌 눈으로 입에 거품을 무는, 아마 군벌군대 군인의 아내였을 이 여인이 이렇게 된 것은 결국 그들의 책임이라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중위는 그때도 생각했다. 장쉐량 군벌의 통치에 비할바가 못되는 왕도낙토가 만주에 건설되고, 일천사해개귀묘법의 시대가 되어 모든 이가 니치렌 대성인과 묘법연화경에 귀의한다면, 저 여인의 원한과 고통도 정토의 복락으로 끝나게 되리라고. 만세일계로 내려오는 천황가의 깊은 덕이 이 사변으로 목숨을 잃고 소중한 것을 잃은 모든 자들을 품을 거라고 말이다.


그런데 그 불령선인 두목에게 호통을 들었을 때, 그의 공고한 믿음 속에서 의심의 싹이 싹텄다. 일천사해개귀묘법과 세계최종전쟁이 동시에 일어날 수 있는 건가? 니치렌 대성인의 가르침은 메이지 유신 이전까지 일본 밖으로 퍼지지 못하였음은 그도 모르는 바가 아니다. 수천년 동안 대성인을 모르고 살아온 자들이, 전쟁에서 졌으니 대성인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라 하면 정말 받아들일 수는 있을까? 당장 일본에서도 국주회를 비롯한 일련종의 가르침은 널리 퍼져 있지만, 그렇다고 일본인들이 모두 일련종을 믿는 것도 아니지 않는가? 일본도 그럴진대 일본 밖의 세계는 어떻겠는가?


쉴 새 없이 솟아오르는 회의와 의심 속에서, 중위는 시간의 흐름도 느끼지 못한 채 계속 앉아만 있었다.


그를 발견한 사람은 어둑해질 무렵에 인적 드문 곳을 순찰하려고 이 근방에서 돌아다니던 주재소 순사였다. 순사는 그를 보자마자 놀라서 달려갔다. 눈이 가려진 채, 양 팔과 양 다리가 결박당한 채 꿇어앉은 모양시를 보니 필경 노상강도나 기타 범죄를 당한 사람임이 틀림 없어 보였다. 순사는 신속히 그의 결박을 풀어주었다.


“대체 누구시오? 강도를 당한 거요?”


순사가 캐물었지만 중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 꼴이 된 채 군의 기밀 임무를 수행하는 장교라고 밝히기에는 너무나도 수치스러웠다. 그런 속사정을 알 리 없는 순사는 답답해하다가, 결국 화를 내며 강제로 몸수색을 개시했다. 그러다가 그의 주머니 속에서 관동군 참모부 작전과 소속 장교임을 증명하는 서류를 보고 크게 놀랐다.


“장교 나리가 대체 여기서 뭐하는 겁니까?”


순사가 캐물었지만 역시 중위는 침묵했다. 순사는 어쩔 수 없이 그를 주재소로 데려갔다. 주재소장은 사지가 결박되고 눈이 가려진 채 발견된 이 머리 짧게 깎은 양복장이가 관동군의 장교라는 사실을 알고 놀라 이곳저곳에 전화를 걸어대었다. 30여분 쯤 계속 통화가 오고갔을까, 주재소장이 긴 통화를 끝내고 아오야기 중위를 보았다.


“거기 장교 나리. 내일 아침 중에 헌병대에서 그쪽을 호송해 갈 거라고 하오. 여기 숙직실에서 머물러 주셔야겠소. 다른 데 가면 우리가 곤란하오.”


보아하니 임무실패의 책임을 헌병대에서 추궁당할게 분명해 보였다. 중위는 더더욱 생기가 없어진 몸을 억지로 끌고 숙직실에서 밤을 샜다. 머릿속이 오만가지 생각으로 가득하여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일천사해개귀묘법의 시대에 정말 모두가 행복할 것인가? 정말로 썩어빠진 예토가 아름다운 정토로 바뀐다 해도, 니치렌의 가르침을 아예 모르던 자들이 그걸 쉽사리 받아들일까? 그 원한으로 제정신이 아니게 된 중국 여인이 니치렌의 가르침 아래 제정신으로 돌아올까? 이러한 상념들이 끊임없이 중위의 머릿속에서 날뛰어대며 잠을 이루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 8시, 중위는 주재소에 도착한 헌병대 소속 자동차에 실려 경성으로 압송되었다. 그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고, 그를 도망치지 못하게 하려는 듯 양 옆에 탄 헌병대원들도 굳은 표정을 한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심문보다는 압송만 맡은 것 같았다.


3시간이 걸려서 조선헌병사령부 청사에 도착했을 때, 그는 조사실로 안내받았다. 사관학교 시절에 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얼굴이 그를 맞이했다.


“나는 제6헌병대 부관인 호리 대위다. 헌병대장님의 본격적인 심문 전 귀관에게 물어볼 것이 몇 가지 있다.”


어두컴컴한 조사실에서 전등에 무뚝뚝한 얼굴이 비친 호리 대위는 인간적인 면모가 도무지 느껴지지 않는 사람이었다. 말하는 기계가 있다면 그와 같을 것이었다.


“귀관은 해군 주계과 장교가 빼돌린 해군 예산을 관동군 봉천특무기관 본부로 이송하는 임무를 받았다. 맞는가?”


그러나 아오야기 중위는 대답하지 않았다. 비록 세계최종전쟁이란 웅대한 전망에 의심이 싹트긴 했지만, 여전히 그는 지시를 내린 이시와라 간지 중좌와 그와 얽힌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


“어째서 대답하지 않는가?”


중위는 계속 입을 굳게 다문 채 침묵을 유지했다.


“묵비권 행사라도 하겠다는 건가? 현명한 행동은 아니다. 귀관이 수사에 협조하지 않으면 불리한 상황에 처하게 될 수 있음을 모르는가?”


호리 대위가 딱딱하게 말했지만 역시 돌아오는 것은 침묵이었다.


“본관을 곤란하게 하지 말라. 귀관이 입을 다물더라도 해결되는 것은 없다. 우리는 이미 필요한 정보를 확보했다. 귀관이 비협조적으로 나오면 오직 불이익만 얻을 것이다. 그러니······.”


그때 조사실 문이 벌컥 열렸다. 고개를 돌려본 순간, 아오야기 중위의 얼굴이 무섭도록 일그러졌다. 이 순간 가장 보기 싫은 사람이 서류봉투 하나를 들고 그 자리에 들어오고 있었다.


“안녕, 아오야기?”


기타무라 소좌의 입이 양 옆으로 쭉 찢어지며 기분 좋은 미소를 보였다. 새로운 먹잇감이 도마 위에 올라오자, 어떻게 요리할지 상상하며 흐뭇해하는 모습이었다.


호리 대위가 경례하며 일어날 때, 그는 가까이 다가가 그의 타자기를 보았다. 소좌는 양식에 딱 맞추어 쓴 심문조서와 질문내용들을 보고 혀를 끌끌 찼다.


“임마. 뭣하러 쓸데없이 성실하게 그래? 해 봤자 별 의미 없는 거 너도 알잖아?”


“죄송합니다. 그러나 규정상 조서는 남겨야 합니다.”


“야. 그냥 대충 써내. 최종검토하고 수정은 내가 할 거니깐. 윗분들 어떻게 만족할지 시나리오 좀 써서 거기 좀 맞춰봐라.”


호리 대위는 이 괴상한 지시에 이의 하나 제기하지 않고 타자기만 챙긴 채 경례하고 방을 나갔다.


기타무라 소좌는 둘만 남게 되자, 서류봉투를 책상 위에 던져놓고는 특유의 혀를 낼름거리는 버릇을 유감없이 선보이며 실실 웃는다.


“이거이거이거, 어쩌다가 여기까지 오셨나? 응? 천하의 아오야기 테츠오가 말이야. 맨날 뻣대고 재수없게 굴던 놈이, 만주에서 공 좀 세웠다고 어깨 뻣뻣하게 세우던 놈이 여기서 뭘 하고 있냔 말이야. 엉?”


아오야기 중위는 또 다시 대답하지 않았다. 기타무라 소좌는 그 태도에 낄낄 웃음을 터트린다.


“야, 이 등신새꺄. 그렇게 띠껍게 굴어 봤자 좋을 거 하나도 없어. 너 인생 망한 것도 아직 모르나 본데, 그냥 네가 뭔 짓거리를 저질렀는지 심문이고 뭐고 할 필요도 없으니 이 선배가 네가 얼마나 병신되었는지 친절하게 얘기해 주마. 알았냐?”


중위의 굳게 닫힌 입은 열릴 줄 몰랐다. 이 일에 연관된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면 안된다는 생각뿐만은 아니었다. 저 사람 괴롭히기를 인생의 낙으로 삼는 기타무라 헤이스케에게 어떠한 즐길거리도 주고 싶지 않았다.


아오야기는 사관생도 시절부터 기타무라의 음험함과 악마적일 정도의 가학성을 질리도록 봐 왔다. 그가 1학년, 기타무라가 3학년이었을 시절, 기타무라는 이미 생도들 사이에 악명높은 자였다. 그는 후배들에게 교육 명목으로 손지껌을 하고도 몸에 상처 하나 입히지 않는 기묘한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사실 그의 손은 그렇게 맵지는 않았고 , 엉덩이로 내리쳐지는 마대자루는 버틸 만 했다. 그는 상위권의 성적에도 불구하고 육체적으로 강하지는 못했다. 체력은 평균에 못미쳤으며 사격실력은 심각한 수준이었다.


문제는 혀였다. 자신을 좋게 보지 않는 4학년 선배 한 명을 교활한 이간질을 통해 학년 내에서 고립시켜 자살로 몰아넣었다는 소문을 입교한 직후부터 들었다. 그는 교관들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후배들을 입으로 괴롭히길 즐겼다. 선배라는 권위뿐만이 아니었다. 상대의 약점을 파악헤 집요하게 놀려대고, 괴로운 기억을 끄집어내고, 도무지 어디서 배운지 알 수 없는 끔찍한 욕설과 음담패설로 후배들이 급기야 눈물을 터트리고 마는 데에는 타고난 재능을 가진 것 같았다.


아오야기 생도와 그의 친구들은 기타무라 선배를 그래서 질시했다. 그들은 하극상이라는 백안시를 무릅쓰고 기타무라 선배의 행동이 잘못되었으며, 그들이 그런 식의 모욕을 들을 이유가 없다고 항의했었다. 기타무라는 면전에서 코웃음을 친 후, 직접 나서지 않았다. 아오야기 테츠오의 아버지가 일로전쟁에서 활약한 아오야기 레이지로 퇴역중장으로 사관학교장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임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자기가 잘못했다며 물러나지 않았다. 그는 교활한 입을 놀려 다른 동기들을 움직이거나, 아니면 후배들 사이에 괴란쩍은 소문을 퍼트리며 그들을 타겟으로 삼았다.


그럼에도 아오야기는 버텼다. 시간이 그의 편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기타무라의 교활한 간계와 혀놀림으로 말미암은 각종 더러운 일들은, 결국 다 지나갈 것이라며 버텼다. 그는 졸업할 자고, 그들은 더 남을 자들이었으니.


그러나 끔찍하게도, 그 기타무라 소좌는 악몽처럼 그의 앞에 나타나 있다.


“네가 물개놈들에게서 빼돌린 예산 옮기는 거, 물개 해군성은 이미 다 파악하고 있었어, 새꺄. 열이 뻗쳐서 육군성에 욕을 한바가지로 박았을 거라고. 육군성하고 참모본부하고 관동군 쪽 높으신 분들이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할 것 같냐? 이 사태로 다치기 싫은 사람이 한둘이겠냐? 딱 감 오지 않냐? 네 안 돌아가는 대갈통으로 한번 생각해 봐.”


해군성이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는 말에도, 아오야기는 꿈쩍하지 않았다. 그는 해군에서 건함예산이 횡령당한 사태를 이미 파악했음을 모르고 있었기에, 기타무라가 그를 괴롭히기 위해 지어낸 말이라고 납득하였다.


“야, 진짜 대가리 안 돌아가는 새끼네, 이거? 답답해서 그냥 말해준다, 병신아. 니들 어제부로 병신됐어. 관동군사령부 나리들은 책임 안지려 해. 니들이 돈냄새에 환장해서 건함예산 빼돌린 놈들과 짜고 그거 니들 돈으로 만들려다가 걸렸다는 시나리오를 원한다고. 그래서 나도 열심히 수사할 생각 없고. 대충 그분들 원하는 대로 조서 꾸며서 제출하기만 하면, 니 면상 볼 일도 없어. 이게 무슨 말인지 알아 쳐듣기나 하냐?”


중위는 역시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기타무라 소좌의 역겨운 얼굴을 보기 싫어서, 나무 책상의 나뭇결에 시선을 붙박아 두었을 뿐이다.


“와, 이 새끼 끝까지 말 안하겠다 이거지? 그럼 내가 입 열게 해 줄게.”


기타무라 소좌는 후배의 계속된 무반응에도 지치지 않았다. 그는 가장 즐거운 정보를, 아오야기 중위가 그의 앞에서 날뛰게 만들 정보를 이제야 풀어놓기 시작하였다.


“너희들, 그러니까 너하고 후지무라, 쿠스노기, 우에스기는 4월 21일 저녁에 조선요릿집 옥면옥에서 만났다. 작전주임 이시와라 간지 중좌 나리의 비밀 지시를 듣기 위해서였지. 내 말이 틀리냐?”


그 순간, 아오야기의 눈이 흔들렸다. 어떻게 기타무라 소좌가 그 일을 알고 있는가? 그들 중 누가 먼저 증언했단 말인가?


“뭐, 틀렸다고 해도 별 의미 없으니 그냥 입 쳐닫고 듣고 있어도 상관은 없어. 그곳에서 중좌 나리는 4월 26일에 그 돈들을 봉천특무기관 본부로 옮기라고 했고. 니들은 그 지시에 따라서 경성에서 죽치고 앉아 있다가 26일 아침에 돈을 받아 열차에 탔지. 그런데 어떻게 된 건지 불령선인 놈들이 그 돈을 노리고 열차에 타고 있었어. 게다가 철도헌병 분견대를 죄다 무력화시키는 사전준비까지 철저하게 마쳤고. 여기서 뭔 결론이 나오겠냐?”


그때 중위는, 저절로 몸이 떨리는 걸 느꼈다. 그 말이 의미하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체 어떻게 그 시간에, 그 열차에 불령선인 강도들이 타고 있었단 말인가? 그리고 그들이 돈을 운송하고 있음은 또 어떻게 알았단 말인가?


“네놈 머리로 이 정도는 생각할 수 있겠지? 어디에선가 정보가 누출된거야. 니들은 아무도 안듣는 곳에서 기밀대화를 나누고 있었다고 생각한 모양인데, 그건 니들 착각이고. 어디서 정보가 새나갔을 것 같냐? 니들 여관방이었겠냐? 아니지, 아니야. 니들은 등신이긴 한데, 그런 정보를 흘리고 다닐 수준의 등신이 아닌 건 나도 알아. 그럼 한 군데밖에 없지. 바로 그 요릿집이야!”


기타무라의 눈이 흥분으로 가득찼다. 아오야기 중위가 당황하고 충격받은 모습이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다.


“그럼 딱 답 나온다. 넌 누군가에게, 너와 달리 경성 사정을 잘 아는 사람에게 이시와라 중좌 나리를 대접할 요릿집 하나 추천해 달라고 했지. 네가 받드는 상관에게 누를 끼칠 수는 없으니. 그런데 그 누군가가 괜히 그 요릿집으로 예약했겠냐? 그저 중좌 나리를 대접하기에 좋은 요릿집이라고 예약했겠냐?”


그 순간, 아오야기 중위가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그의 눈이 기타무라 소좌를 정면으로 노려보았다.


“지금 한주리 양이 그랬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 순간, 기타무라 소좌가 참았던 웃음을 한꺼번에 터트렸다.


“푸하하하하! 이런 호구새끼를 봤나! 이 새끼 내가 그 요보년 이름 한 번도 안꺼냈는데 벌써부터 발끈하는거 보소? 야, 그년이 참 남자 흥분하게 하는 재주 있나보다! 으하하하하!”


“제 약혼녀를 모독하지 마십시오! 아무리 선배님이라 해도!”


아오야기 중위는 상대가 두 계급이나 높은 소좌임을 일순간 망각하고 달려들 뻔하였다. 그러나 소좌는 마구 터트린 웃음을 겨우겨우 주체하며 안경 너머로 조롱의 안광을 발한다.


“야, 이 등신아! 넌 그 요보년이 정숙하고 나긋나긋한 야마토 나데시코인줄 아는 모양인데, 넌 그년에게 호구 잡혀도 단단히 잡힌거야! 이제 말해 줄까?”


그 말 직후, 기타무라 소좌는 마른 입술에 혀를 낼름거리며 침을 묻혔다.


“그년은 불령선인 놈들과 한패였다고! 그 요릿집을 소개한 건 그놈들의 녹음장비가 설치된 곳이 거기라서 그랬던 거고! 이제 상황파악이 좀 되냐?”


그러나 중위는 얼굴이 시뻘개져서 선배의 말을 듣지 않는다.


“왜 주리 양을 여기 끌어들입니까! 모독을 하려면 저에게만 하면 될 것이지 왜 주리 양을 여기다 끌어들이냐고요! 대체 이러시는 이유가 뭡니까! 왜 다른 사람들을 괴롭히지 못해 안달이십니까!”


그 반응에 기타무라는 또 다시 크게 웃음을 터트린다.


“와하하하하! 와, 이 새끼 코 꿰여도 단단히 꿰였구나! 현실을 알려줘도 부정하려고 하네? 야. 그냥 더 말해주마! 네 그 요보 약혼녀는 말이지, 푸하하하하! 이미 딴 남자와 놀아난 년이라고! 근데 아직도 그년을 믿고 있어? 아이고, 배야! 으하하하하!”


기타무라 소좌는 숫제 책상을 꽝꽝 내리치며 폭소를 한다. 소좌는 겨우겨우 흥분해 달려들 기세를 참고 있는 중위에게, 들고 있던 서류봉투를 들이민다.


“못 믿겠으면 한번 읽어봐, 병신아. 후지무라하고 걔네들이 오늘 오전에 뭔 일을 당했는지 싹 다 진술한 거야. 우린 이 증언 토대로 그년 수배때리고 붙잡아서 돈 다 토해내게 할 거고.”


아오야기 중위는 소좌가 내민 서류봉투에 손을 대지 않는다. 그저 부들부들 떨며 소좌를 노려볼 뿐이다.


“이 새끼 눈 부라리는 거 보소?”


기타무라 소좌가 이제 얼굴에서 웃음기를 싹 지운다.


“그렇게 눈깔 쳐뜨면 뭐 어쩔건데, 새꺄! 내가 꼭 상급자로서 명령을 내려야 말귀 처알아듣냐? 내가 지금 이거 너에게 소리내서 읽으라는 거냐? 꺼내서 읽어! 이건 명령이다!”


소좌는 서류봉투에서 서류뭉치를 꺼내 아오야기에게 들이밀었다. 중위는 이때 스스로에게 놀랐다. 군인으로서 상급자의 지시에 복종하라는 훈련받고 학습받은 대로 서류를 자동반사적으로 잡아버린 것이었다. 명령이란 두 글자는 참으로 마법과 같은 말이 되어 버렸다.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조사실 문이 벌컥 열렸다. 호리 대위가 뚜벅뚜벅 들어와 경례를 붙인다. 소좌는 부관이 갑자기 들어와 방해하니 역정을 낸다.


“뭐야? 넌 눈치도 없냐? 한참 재밌으려고 하는데!”


소좌의 고함에도 대위는 그 무뚝뚝한 얼굴에 표정변화 하나도 없이 보고한다.


“죄송합니다, 소좌님. 사령관 각하께서 부르셨습니다.”


“뭐? 지금? 왜?”


“아무래도 검문검색에서 문제가 생긴 것 같습니다. 우리 애들이 총독부에서 문제삼을 만할 일을 한 것 같습니다.”


“아, 씨. 각하께서 김새게 만드시네.”


기타무라 소좌는 아쉬워 죽겠다는 듯 입맛을 쩝쩝 다시고 일어났다. 소좌는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는 아오야기를 보고 이죽거린다.


“난 네가 이거 읽고 바닥을 굴러다니는 꼴 보고 싶었는데. 아쉽게도 그건 못보겠네. 나 없는 동안 한번 읽어 봐. 그리고 그 다음에 정말 절실하게 하고 싶은게 생길 건데, 그럼 내가 친절하게 도와 줄게. 알았냐?”


소좌는 그 말을 끝으로 아오야기의 어깨를 툭툭 치고는 나가 버렸다. 혼자 남겨진 중위는 책상을 거세게 내리쳤다. 쾅 하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그러나 분노보다도 더 끔찍한 것은, 그가 그 서류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10여분 쯤 후, 조사실 바깥으로 “으아아아아!”하는 절규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곳에서 고문당한 수많은 사람들도, 이와 같이 처절한 절규를 뿜어내진 못했을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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