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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활극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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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KKA
작품등록일 :
2019.07.10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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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15 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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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12 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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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쪽

255화

DUMMY

모든 탈출준비가 마무리된 이후는 시간이 남았다. 4년 동안 생활한 경성에서 보내는 마지막 시간이었다. 만약 철수 지시가 내려진다면 마지막 밤은 모두 모여 크게 취하며 보내자고 한 적이 있었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럴 날이 아니었다.


천 지부장과 제자들이 지난 4년 동안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하며 시간을 보내는 동안, 주리는 소련 총영사관 건물 종탑에 올랐다.


창문에 가까이 가진 못했다. 천 지부장은 분명 헌병이 종탑도 망원경으로 관측하고 있을 거라며 올라갈 때는 주의하라고 당부했다. 그래서 비교적 떨어진 위치에 서서 창 밖을 보았다.


총영사관 종탑에 올라보니 저물어가는 석양 속에서 덕수궁이 펼쳐져 있었다. 해질녘 황혼 속에서 비춰진 덕수궁의 전경은, 우리 식과 서양 식이 혼재된 전각들이 이곳저곳 빈틈 속에서 덩그러니 놓여있는 광경은 어딘가 말할 수 없는 감회를 일으켰다.


그 광경을 보며 우두커니 서 있는 동안, 어느새인가 정우가 뒤에 다가왔다.


“뭐 하니?”


연인이 옆에 선 걸 보고 주리가 배시시 웃었다.


“그냥요. 이제 마지막이니까, 저곳을 눈에 담아두고 싶었어요.”


주리는 앞으로 여기 돌아오긴 힘들 것임을 한다. 해방이 언제 올지 모른다. 그 전까지 자신은 관동군의 자금을 훔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한 위험한 불령선인으로 낙인찍혀 전국에 수배가 걸려 있을 것이다. 그래서 떠나기 전, 비록 정동이 그렇게까지 자주 다니던 거리는 아니었어도, 경성에서 맞이하는 마지막 어둠이 깔리기 전 보고 싶었다.


“한때 저 옆의 돌담길을 걸었던 적이 있어요.”


주리가 손가락으로 덕수궁을 가리켰다.


“정동에서 서양인이 운영하는 양과자집을 향해 친구들과 어울려 가면서요. 덕수궁이 어떤 장소였고 어떤 의미를 가진지 하나도 모른 채로요. 그저 돌담 너머로 보이는, 하얀색 대리석으로 지은 웅장한 건물, 그리고 주홍색 벽돌로 쌓은 2층짜리 건물에는 누가 살고 있을지 궁금해서 들어가 보고 싶다는 생각만 해봤어요.”

당시를 생각하던 주리의 눈이 감회에 젖어든다. 그 때는 정말 아무 걱정이 없던 때였다. 그저 친구들과 어울리며 좋아하는 옷을 고르고 다방이나 양과자점에서 수다떨며 멋진 남자와 자유연애를 즐기는 것을 꿈꾸던 나날. 하루하루가 즐겁고 명랑하기만 했다.


그러며 입술에 씁쓸한 웃음이 감돈다.


“이제는 저기서, 정확히는 주홍색 건물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 알지만요.”


주홍색 건물, 그러니까 덕수궁 중명전에서 대한제국의 외교권 박탈이 있었음을 주리는 이제 안다. 이완용과 송병준을 비롯한 친일 대신들이 태황제의 저항도 무시하고 이토 히로부미의 주도아래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일본제국에 넘기고 통감부를 설치한다는 조약을 멋대로 체결했다. 적의 통치가 저기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런 것도 모르고 그저 즐거웠던 시절의 내가 얼마나 부끄러웠던지요. 옛날에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재주가 있다면, 그때에 내게 정신 차리라고 뺨이라도 한대 올려칠 생각도 한거 있죠.”


주리는 그러며 또 엉뚱한 생각을 했다고 쿡쿡 웃는다. 정우는 그런 주리의 손을 따뜻하게 잡았다. 뒷 창문으로 비치는 황혼빛에 비친 주리는 그저 불면 날아갈 것 같은, 얼마 후면 법적으로 성인이 되는 갸냘픈 여자애였다.


지금 같은 시대가 아니었으면, 그런 걸로 괴로워할 필요가 없는 아이였다. 잔혹한 현실을 알아버리고 자신이 그 업보 속에 있다며 자학과 죄악감 속에 허덕이지 않을 수 있던 아이였다. 총독부의 지배가 이 땅을 억누르고 있지 않았다면, 분명 자발적으로 목숨이 위험한 일에 끼어들지 않고 그저 양지에서 살아갈 수 있던 사람이 주리였다.


이제 주리는 완전히 음지의 세계로, 자신이본디 있었던 상하이의 뒷골목으로 들어간다. 배신과 음모, 염탐과 첩보, 그리고 총탄이 난무하는 세계로. 심지가 굳은 주리라도 그런 익숙하지 않은 세계에서 몸과 마음 양쪽에서 지침을 느끼지 않으면 이상할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주리를 이 길로 끌어들인 자신이 미안하면서도, 그걸 입에 담았다가는 주리가 분명 “뭣하러 그런 생각을 해요! 내가 선택한 길인데!”라며 삐져 입을 삐죽 내밀까봐 입 밖에 내지는 않는다.


대신 다른 말을 입에 담는다.


“분명 마지막은 아닐거야.”


정우가 단호하게 말했다.


“우리는 언젠가 여기 돌아올 거야. 모든 것이 다 달라졌을 때. 모든 잘못된 게 다 바로잡혔을 때. 이 땅에서 총독부의 권세가 종국을 맞이했을 때. 우리가 그토록 바라던 그때에 말이야.”


주리는 그 말에 눈이 다시 뜨인 느낌이었다. 그날이 언제 올지는 모른다. 10년이 지나고 20년이 지난 이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국 돌아올 곳이었다. 설령 몸뚱아리가 사라져도 혼백만이라도.


“그럼 약속해요.”


주리가 그러며 정우의 몸에 기댄다.


“반드시 둘이서 다시 돌아오자고요. 반드시 우리 둘이서. 혼자만 돌아오기 없기에요.”


정우는 “그래. 당연히······.”라고 말한 뒤에 말을 잇지 못했다. 주리가 열리던 그의 입술에 기습적으로 달려든 것이다. 정우는 사양하지 않고 주리의 열정 가득한 키스를 받아주었다. 마침 황혼녘에 비친 주리의 얼굴을 보며, 그러한 충동을 느끼지 아니했던 것도 아니었으니.


둘이 내려왔을 때는 이제 작별을 고해야 할 사람들이 전하는 말이 도착해 있었다. 천 지부장은 대백루에서 여기로 오기 전, 최필성 사장에게 긴급 연락을 취했었다. 그들은 내일이나 내일모레에 경성을 떠날 것이고 만약 연락할 일이 있다면 정동의 러시아요릿집 체호프로 전화하거나 사람을 보내라고 말이다. 최 사장은 채 작별인사를 할 시간도 없을 정도로 상황이 다급함을 알고는 그러겠다고 하였다.


히로요시에게도 마찬가지였다. 히로요시는 마지막 작별을 하고 싶다고 연락해 왔지만, 정동 일대에 헌병의 경계가 삼엄한 것을 고려한 천 지부장은 정동 근처에 나타나지 말라고 당부했다. 히로요시는 매우 애석해하였고, 대백루를 통해 편지 한 통을 보냈다.


최 사장이 체호프로 사람을 시켜 보낸 편지는 이리하였다.


친애하는 천남건 지부장님.

정우 군과 민호 군이 오밤중에 내 집에 찾아온 날 이후는 내 평생 가장 보람 있는 일이었습니다. 한평생 번쩍이는 돈에 눈이 멀어서 눈뜬 장님으로 살아왔던 내게, 그리고 지난날에 생각이라고는 재물 쌓을 생각밖에 안했던 내게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도울 수 있던 기회는 정말 하늘이 내려 일생일대의 기회였습니다.


비록 지부장님께서 지적하셨듯이, 이 최필성이는 어디까지나 장사꾼입니다. 어느 정도는 해방 후 총독부에 줄을 댔던 제가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도록 보험을 들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고, 또 임시정부 분들이 이 나라의 정부가 될 날이 왔을 때 덕을 좀 보고 싶다는 생각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임시정부를 돕겠다고 나선 것은 결코 아닙니다.


제 아들아이와 딸아이가 6년 전에 융희황제 안산일에 있었던 만세운동에 참여하고 내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제가 부끄럽다고요. 왜 왜놈들에게 굽신거리면서까지 그렇게 사냐고요. 그때 저는 노기에 휩싸여 아들아이에게 손지껌을 하고 말았지만, 이것은 아이들에게 제가 부끄러운 아버지였음을 인정한 꼴이었습니다.


이제는 가슴을 펴고 당당하게 물어볼 수 있겠지요. 내가 아직도 부끄러운 아버지냐고 말입니다. 사실 제 아이들은 그때 일을 제게 사과했지만, 그래도 한번 더 더 이상 그렇지 않다는 말을 듣고 싶군요.


여전히 총독부 고관들에게 줄을 대야만 기업운영에 차질이 없는 고약한 상황은 여전해서 정말 이 최 아무개가 세상에 당당하다고 하기는 어렵겠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제 마음은 항상 저들이 없는 조국에 있습니다. 오히려 옥룡회와 금괴거래를 할 수 있도록 주선해 주셔서 더더욱 큰 이익을 얻게 되었고 생각치도 않은 며느릿감까지 맞아들이게 되었으니, 마땅히 그 보답을 드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계속 이 최 아무개는 성의를 보일 것이고, 그 날은 총독부가 무너질 때까지 계속될 겁니다.


그리고 젊은이들.


자네들과 같이 있으면 참 즐거웠다네. 아들아이는 저 멀리 미국에 있고 딸아이도 시집가 적적하던 차에, 자네들과 같이 있으면 꼭 걔네들이 내 옆에 있는 것 같았단 말이지. 자네들 덕분에 지난 1달여간 참 재밌게 살았네. 아무래도 자네들은 내 아들 자랑, 딸 자랑도 모자라 사위 자랑에 좀 질려하는 기색이었지만, 자네들이 그러하는 것을 보는 것도 퍽 재미있었어. 자네들이 돌아오면 다시 한잔 하면 좋겠군. 그때는 내가 손자나 외손자 자랑을 할지도 모르겠네.


자네들 모두 건강하고, 무사무탈하게 돌아오길 진심으로 바라겠네. 행운이 항상 함께 하기를!


추신: 이 편지를 쓸때 딸아이에게서 전화가 왔었네. 글쎄 애를 배었다지 뭔가! 정말로 자네들 만날 때는 외손자 자랑 하게 생겼다네!-


“와, 잘됐어요!”



주리는 추신을 보고 바로 환호했다. 명수는 이에 “진짜로 돌아오면 외손자 자랑 듣게 생겼네.”라고 푸념하였고 “손자 자랑까지 들을걸.”이라며 재호도 푸념하였다. 물론 둘다 악의는 없었다.


다음은 히로요시의 편지였다.


-친애하는 지부장님.


지부장님께서 제 목에 칼을 들이대며 시험하실 때, 그때 제 목을 치지 않으셨던 것에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지부장님의 심문은 저조차도 스스로를 믿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엄연히 눈 딱감고 살면 평안한 미래가 보장된 제가,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일에 뛰어들었는지 무섭게 추궁하셨죠. 그래서 그때만큼은 스스로를 의심했었습니다. 제가 내세운 명분은 그저 말뿐이 아니었나 하고요. 지부장님께서 그때 그저 얄팍한 동정심만으로 이 일에 뛰어든 자는 백이면 백 위험한 상황이 닥치면 바로 변절해버린다고 호통하셨는데, 제가 정말 그런 의도로 한인애국단에 접근한 것이 아니었을까 했었습니다.


천만다행스럽게도 지부장님은 더 이상 의심하지시 않으시고 저를 여러분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때의 살떨리던 경험을 생각해 보면, 이제 저는 완전히 확신하고 있다고 지금 편지로라도 자신 있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대한의 독립이 바로 일본을 위한 길이오, 동아세아 전체를 위한 길이오, 그리고 수백년의 우호관계가 단 수십년 만에 끔찍하게 손상되어버린 조선인과 일본인의 사이를 다시 회복시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말입니다.


제게 그러한 일을 할 수 있게 해 주신 지부장님께, 그리고 그날 이후 제게 의심 한번 하지 않으시고 중히 써주신 지부장님께 크나큰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그리고 친애하는 형제들.


너희들과는 차마 이 편지로는 못다할 말들이 너무 많다. 그런데도 얼굴 한번 마지막으로 보지 못하고 보내려니 지극히 아쉬울 따름이다. 너희들하고 나누었던 뜨거운 말들, 그리고 일본인인 나를 스스럼없이 대해준 너희들을 난 절대 잊지 않을 것이다.


조선이 사슬에서 해방되고, 악업으로 가득한 일본제국이 그 악업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붕괴될 날에, 우리는 다시 만나리라는 걸 절대적으로 확신한다. 그러니 그 날까지 너희들 모두 무사무탈하게 돌아오기를 간절히 빈다.


앞으로도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많은 정보들을 보내주마. 그것이 내가 할 일이고, 날 형제로 받아준 너희들에게 보답하는 길이니까. 할 수 있는 한 계속 연락하마.


대한이 독립될 그날까지 기다리겠다.-


청년들의 얼굴은 침통해졌다. 히로요시하고는 얼굴을 마주대하고 작별을 고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경애하는 일본인 형제의 안위를 위해서라도, 그를 만나볼 수는 없었다.


어떤 면에서는 아이러니라 할 수 있는 건, 마지막 밤에 술잔을 기울이며 작별인사를 나누는 사람들이 공산주의자들이라는 점이었다.


“친구여, 몇년 만에 다시 만났는데, 한달도 더 못보고 헤어지는구먼.”


미하일 가레예프가 천남건의 잔에 보드카를 부어주며 한 말이었다. 과거에도 도움을 받았고, 현재에도 도움을 받은 가레예프였다. 헤어짐이 섭섭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자네가 중국 쪽으로 재배치된다면 또 만나게 될지도 모르지. 내가 여기 온 이후 자네를 만나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잖는가. 사람 일이란게 마르크스주의의 과학적인 역사발전 법칙 내에서만 일어나는 건 아니지.”


천 지부장은 그러며 보드카를 따랐다. 둘은 찌르는 듯한 맛의 보드카를 쨍 하고 마주치고 구호를 입에 담는다.


“대한독립에 승리 있으라!”


“세계혁명에 승리 있으라!”


그 말을 끝으로 보드카가 술술 넘어갔다. 키릴롭스키 요원은 “역시 천남건 씨는 탈당하지 말았어야 했소. 우리 당에 있었으면 정말 혁명투사로서 이름을 날렸을 터인데.”라고 괜스레 한마디 하며 아쉬움을 표했다. 천 지부장은 악의없는 말이 아닌 만큼 굳이 차가운 말을 해 주지는 않았다.


흑인 프랭크 클린턴은 늘 그랬듯이 작별도 툴툴거리듯이 한다.


“젠장, 이 누렁이 놈들! 본지 몇주 밖에 안됐는데 니들 본거지로 돌아가겠다 그거지? 이 깜둥이는 괜찮은 고별사는 못해주겠지만, 그래도 죽지 말라는 말은 해 주마. 안 죽어야 니들 나라 깃발이 여기 다시 서고, 백악관에 붉은 깃발이 휘날리는 것도 보지.”


“얼씨구, 이 깜씨 녀석. 정말 작별인사 못한다.”


민호가 딴죽이었다.


“그럼 나도 고별사 짤막하게 해 주마. 사람 피부색 가지고 차별하는 놈들 다 엿이나 처먹고 똥통에나 들어가라!”


그 말에 클린턴은 유쾌하게 웃고 말았다. 유고슬라비아 사람 니콜라이 벨릭도 무뚝뚝하게나마 작별을 고한다.


“나는 여기 클린턴 동지처럼 만나고 헤어질때 인사를 잘 못하는 사람이다만. 그래도 하고 싶은 말은 해 주겠네. 앞으로 어떤 어려움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자네들이 항상 성공하기를 빌겠네. 바보들의 헛소리에 속지 말고, 자네들이 정한 길을 잘 가기를 바라겠네. 세계혁명보다 대한독립의 목표가 더 쉬워 보이긴 하니, 자네들이 나보다 일찍 성공을 볼 거라고 생각하네.”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벨릭 씨.”


정우가 미소지으며 말할 때, 민호는 “인사를 못하긴 무슨. 평소보다 말수가 많아졌는데요.”라고 하니 그 벨릭이 굳은 얼굴에 어색하게나마 입꼬리를 움직이는게 보인다.


다음 날의 탈출일정 때문에 다들 술을 더 입에 담지는 못했다. 아침 6시에 모든 준비가 다 끝나 있어야 했다. 만세 소리 몇 번을 마지막으로 각자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 날 새벽 5시, 일찍 잠에 들은 모두 기상하고 준비를 마쳤다. 주리는 천 지부장이 혹시 몰라 예전에 구해놓았던 변장용 남성복을 입었다. 약간 헐렁한 느낌이 있지만 그래도 치마 입고 뛸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제 그들 앞에 놓인 건, 가장 마주대하기 싫은 작별이었다.


“이제 다들 갈 때가 되었구나.”


혜월 스님이 입을 열자, 누구도 선뜻 입을 열지 못했다. 4년 전에 견성암에 처음 올라온 이후, 스님은 그들의 조언자이자, 믿을 수 있는 어른이자, 또 다른 스승이었다. 가볍게 작별하고 트럭에 올라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스님께서는 우리에게 한없는 도움을 주셨습니다.”


천 지부장이 나서서 말한다.


“우리는, 그리고 정부 전체가 스님의 도움을 결코 잊지 않을 것입니다. 누구도 잊지 않을 것입니다.”


지부장은 그러며 손을 모아 합장했다. 더할 나위 없는 공경을 담은 자세였다.


“부디 무탈하시길 바랍니다.”


“아미타불. 아주 못보게 되는 것처럼 말씀하시면 곤란합니다.”


스님이 허허 웃는다.


“그 옛날 제가 중국에서 무뢰배 시절의 지부장님을 처음으로 만났을 때,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될 거라고 빈승이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인연이 있다고 말이지요. 지부장님께서는 한동안 잊고 계시다가 4년 전에 빈승을 보시고 크게 놀라셨습니다.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고, 헤어짐이 있으면 또 만남이 있는 법입니다. 어떤 형태로든지 말이지요.”


스님은 그러고는 청년 한명 한명을 다독이고 격려하였다.


“너희들은 손에 피를 묻혔고 앞으로도 피를 묻힐 것이다. 너희들이 그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자들이 아님은 잘 아노라. 허나 누군가가 지옥에 갈 일을 너희들이 직접 맡았는데, 어찌 시왕전의 판관들이 그것을 고려하지 아니하겠느냐? 불퇴전의 정신으로, 무소의 뿔이 나아가듯 가거라.”


한명 한명 합장하며 “건강하십시오.”, “독립하면 다시 뵙겠습니다.”등의 말로 스님에게 인사를 고한다. 스님이 정우의 앞에 왔을 때, 정우는 끓어오르는 감회를 식히려 애쓰고 있었다. 불심 깊은 정우에게, 한때 스승으로 시봉하며 출가하려 했던 혜월 스님은 각별한 존재였다.


그런 정우에게 스님은 역시 허허 웃으며 조언한다.


“고승대덕은 어디든지 있고 선지식은 어디든지 있느니라. 성도에 뜻을 둔 것이 그저 도피의식이 아니라 진심이 될 때, 모든 존재의 참생명이 부처님 생명임을 진정으로 보게 될 것이다.”


정우는 차분해지려고 노력하며 합장하였다.


스님이 마지막으로 주리 앞에 섰다. 주리는 입술을 꼭 깨물고 있었다. 입을 열면 바로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어제 밤 정우 품에서 잠들기 전부터 가장 대면하기 싫은 순간이었다. 묘엔 스님으로 변장해 마음을 맑게 해 주는 부처님 말씀을 들려주고, 마음이 최악일 때 다독여 준 스님이었다. 웃는 얼굴로 보내드리고 싶은데, 도무지 그럴 수가 없다.


“허어. 벌써 영영 못만날 사람처럼 구는구나.”


스님이 가볍게 말하지만, 주리는 역시 입을 뗄 수 없었다.


“나는 한때 정우가 너를 이 길로 이끌고 가는 것을 줄탁동시에 비유한 적이 있었느니라. 이제 너는 어미닭의 부리와 병아리의 부리가 맞닿으면서 알 밖으로 나온지 오래일지니. 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엄혹한 삶이 기다리겠지만, 그때도 항상 부처님 말씀을 잊지 말거라. 세존의 지혜광명이 항상 너의 앞길을 비출 것이니. 그리고 내 걱정도 말고 네 부모님 걱정도 말거라. 이 늙은 몸에 남은 건 세치 혀 뿐이라, 네가 한 만큼 네 부모를 제대로 된 길로 돌려놓도록 혀를 놀려 보마.”


주리는 쏟아지려는 울음을 꾹꾹 눌러참으며, 마지막 인사를 고하려 했다.


“스님······. 이제까지 정말 고마웠고요······. 호두 잘 돌봐주시고요······ 그리고 부탁드린 데로······. 아버지 어머니께······.”


그러나 결국 참을 수 없었다.


“흐윽. 으아아앙!”


저수지의 둑이 붕괴되듯 울음이 마구 터져나왔다. 그렇게 눈물을 참으려고 애썼던 것도 다 부질없게 되었다. 주리의 울음은 굳센 청년들의 마음도 자극하여, 곳곳에서 코를 훌쩍이는 소리가 들린다.


스님은 그런 주리를 꼭 안아주며 “오냐. 오냐. 그래.”라며 할아버지가 손녀를 달래듯 한다.


이별의 슬픔에 펑펑 울고 싶으면서도,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잘 아는 주리는 겨우겨우 꺽꺽대며 울움을 멈추었다.


“가자꾸나.”


천 지부장이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 주리가 훌쩍거리며 발길을 돌리기 전, 스님이 “삼천대천세계의 모든 불보살들이 그대들과 함께 하기를!”이라 선언한 때였다. 그 말에 모두들 손을 모으고 재차 합장하며 답하였다.


트럭에 오른 이후는 작별의 섭섭함은 언제 있었냐는 듯 사라졌다. 올라탄 순간 무거운 긴장감이 트럭 안을 메웠다. 정동 삼거리에서 첫 검문은 무사히 통과했지만, 시흥군 북면 물류창고 인근에 정차된 옥룡회의 트럭으로 갈아타기 전까지는 누구도 안심할 수 없었다. 정동 삼거리에서 근무서던 헌병이 검문을 시작할 때, 모두 검지손가락에 방아쇠를 걸었다.


저들이 검문하겠다고 트럭 안으로 진입하려는 그 순간, 총성이 엄청나게 울려퍼질 것이었다.


다행이도 첫 관문을 통과한 이상, 다음 간이검문소에서도 별 문제는 없었다. 정동 외곽에서 검문을 하던 헌병들은 본네트에 유니언 잭을 달고 온 이 차량이 제일 안쪽 검문을 통과해 온 이상 추가로 검문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기본적인 사항 한두가지만 물어보고 차단봉이 위로 올라갔다.


주리는 긴장감에 침을 꿀꺽꿀꺽 삼키며 손에 잡은 마우저를 만지작거렸다. 톰슨 기관단총은 다뤄본 적이 없고 또 다루기에는 너무 무겁다며 천 지부장이 주지 않았지만, 그래도 마우저라면 괜찮다고 준 것이었다. 이걸 절대 쓰지 않았으면 하며 정우를 바라보았다.


정우 또한 긴장하고 있기는 마찬가지라 주리의 긴장을 풀어주는 데는 별반 도움이 되지 않았다. 방수포에 쌓여 바깥의 상황을 알 수 없는 짐칸이었다. 어두컴컴한 공간에서 숨소리만 내고 다들 아무 말도 하지 않으니 더더욱 건드리면 폭발할 것 같은 긴장감이 팽배했다. 천 지부장의 날카로운 눈빛만이 앞을 바라보며 어둠 속에서 빛났다.


조수석에 앉은 종팔이 중요 지점을 통과할 때마다 알려주었다. 서소문길을 지났고, 염천교를 지났고, 경성역을 지났고, 용산에 진입하였다. 30분이 흐르고, 1시간이 흐르고, 2시간이 흘렀다. 긴장을 계속 유지하고 총구방향을 위로 한 채 총신을 잡은지 수 시간. 새로운 검문은 오직 그 동안 단 한 번만 받았다.


이 날은 천장절, 쇼와 천황의 생일이었다. 천장절 봉축행사를 위해 경성으로 들어가는 차량은 검문 대상이었지만, 경성을 빠져나가는 차량은 그렇게 신경쓰는 기색이 아니었다. 헌병은 여전히 그들이 소련 총영사관 안에 있다고 아는 게 틀림없었다.


숨막힐 듯한 공기 속에서, 들어오는 바깥바람이 다소 시원하게 느껴진 순간이었다.


“인도교에 진입했습니다.”


종팔이 조수석에서 말했다. 주리는 이제 긴장이 풀어지며 다시 감정이 솟아났다. 이제 한강을 넘어가고 있다. 경성을 벗어나는 것이다. 주리는 마음 속으로 작별을 고했다. 부모님에게, 옛날의 친구들에게, 그리고 이곳에 남은 모든 추억에.


트럭은 한강 인도교를 건너 시흥군에 도착한 후 얼마간 더 달렸다. 그러다가 속도가 줄어드는가 싶더니 서서히 멈춰섰다.


“도착했습니다!”


재호의 목소리였다. 트럭 뒷면에 고정시켰던 방수포를 걷어내로 내려 보니, 아침 햇살에 눈이 부셨다. 재호가 정차한 트럭 바로 옆에 익숙한 트럭이 한대 보였다. 이전에 아오야기 중위가 탄 열차를 습격할때 사용한 그 트럭이었다.


재호와 종팔이 시동거는 쇠막대기를 트럭 전면부에 끼우고 돌릴 동안, 다른 인원은 트럭 안으로 들어가 왕 채주가 약속한 맥심 기관총과 루이스 경기관총, 그리고 약속한 탄약과 탄창이 잘 있는지 확인했다. 대석이 맥심의 노리쇠를 당겨 보니 부드럽게 잘 작동했다. 기름칠까지 단단히 해서 보내준 모양이었다.


우선 누가 볼세라 기관단총의 탄창을 분리해 개인 짐꾸러미 안에 쑤셔넣고 트럭 안으로 옮긴다. 지나가는 사람이 보면 왜 이 트럭에서 저 트럭으로 짐을 옮기는지 의아해하겠지만, 창고 옆이다 보니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가는 사람들이 더 많을 것이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트럭에 시동이 걸려 나오는 엔진음과 별개의 엔진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막 짐을 다 실고 올라타려는 마당에 모두를 그 자리에서 굳어지게 만들게 하기는 충분했다.


제발 생각하는 그것만은 아니길 바랬건만, 그게 맞았다. 시꺼먼 모터사이클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황갈색 군복에 어깨에 헌병 완장을 찬 군인 둘이 운전석과 사이드카에 나눠탄 채로.


“어이, 거기!”


운전수가 초면에 반말로 소리친다.


“잠깐 검문 좀 하자!”


더 최악인 것은, 사이드카에 앉은 헌병이 그들을 향해 거치된 경기관총을 겨누고 있다는 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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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2 272화 +6 21.03.13 340 8 17쪽
271 271화 +4 21.03.11 314 9 13쪽
270 270화 +12 21.02.15 319 9 13쪽
269 269화 +4 21.02.12 320 10 16쪽
268 268화 +6 21.02.11 378 7 13쪽
267 267화 +16 21.02.07 339 11 14쪽
266 266화 +4 21.02.06 307 11 13쪽
265 265화 +8 21.02.03 325 8 12쪽
264 264화 +12 21.01.31 399 9 16쪽
263 263화 +10 21.01.29 313 9 17쪽
262 262화 +6 21.01.26 376 8 13쪽
261 261화 +8 21.01.24 358 9 13쪽
260 260화 +12 21.01.23 357 8 15쪽
259 259화 +6 21.01.21 325 8 12쪽
258 258화 +10 21.01.18 381 9 13쪽
257 257화 +6 21.01.16 373 11 14쪽
256 256화 +8 21.01.14 329 11 13쪽
» 255화 +6 21.01.12 348 9 24쪽
254 254화 +6 21.01.09 349 9 12쪽
253 253화 +8 21.01.08 362 9 16쪽
252 252화 +8 21.01.05 319 9 15쪽
251 251화 +6 21.01.03 331 9 17쪽
250 250화 +8 21.01.01 330 12 21쪽
249 249화 +12 20.12.30 340 9 21쪽
248 248화 +12 20.12.28 296 13 20쪽
247 247화 +4 20.12.26 336 12 19쪽
246 246화 +6 20.12.23 323 11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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