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PKKA 님의 서재입니다.

경성활극록

웹소설 > 일반연재 > 대체역사, 로맨스

PKKA
작품등록일 :
2019.07.10 16:41
최근연재일 :
2023.08.15 19:04
연재수 :
332 회
조회수 :
107,952
추천수 :
3,801
글자수 :
2,778,318

작성
20.12.26 17:48
조회
337
추천
12
글자
19쪽

247화

DUMMY

바로 어제, 주리는 깜짝 놀랬었다.


“저도 들어가라구요?”


“그렇다.”


천 지부장은 명백히 지시했다.


“정우가 들어간 다음에 조금 있다가 네가 들어가거라.”


“에······ 괜찮을까요?”


주리는 당황스러워서 이사람 저사람 눈치를 본다. 범죄자라면 누구든 사정 봐주지 않고 체포하는 조선총독부 경무국장을 흔들어 놓는 대단한 자리에 같이 하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저, 저는 아직 말솜씨도 그리 좋지 못하고, 그런 큰 자리에 있기에는······”


정우가 그 말에 피식 웃었다. 오재두 경부보와 우에스기 중위를 상대로 현란한 말을 마구 쏟아부어서 정신 못차리게 한 장본인이 이런 자신없어 보이는 말이라니.


“넌 가끔 스스로를 너무 과소평가한다니까.”


“어음······ 그런 건가요?”


주리는 수줍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소진장의같은 변설가처럼 국장을 설득하라는 게 아니다. 그건 나도 못한다.”


천 지부장이 딱딱하게 말했다.


“단지 솔직히 말하기만 하면 된다. 네가 어떤 계기로 독립운동을 할 마음을 품었는지, 어떤 계기로 우리와 함께 있게 되었는지 보고 느낀대로 말해주기만 하면 된다. 구태여 뭔가 꾸밀 필요도 없고 기교를 부릴 필요도 없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어······. 정말인가요?”


“그렇다. 그거면 된다. 너도 히로요시 군에게서 들어 알겠지만, 국장의 슬하에는 딸만 셋이다. 네가 그 자리에 있다면 그 강건한 국장이라도 거친 말을 하거나 우릴 매도하기에 망설임이 생기겠지. 그 정도만 해도 충분히 제 역할을 하는 게다.”


그 말에도 걱정스러워하는 주리에게 천 지부장이 또 군사적인 비유를 한다.


“난 충격집단이고, 너희는 기동집단이다. 내가 국장이라는 준비된 진지에 돌파구를 형성할지는 미지수지만, 돌파구가 반쯤 형성되도 기동집단이 투입되면 효과가 충분히 있는 게다. 그러니 마음 놓거라.”


그래도 못내 걱정되는 주리였다. 말 잘못했다가 일을 망치진 않을까 정우 옆에 누워서 이리 뒤척이고 저리 뒤척였었다. 요행이 “다 잘될 거야.”라고 부드러운 숨결과 함께 속삭여준 정우 덕에 푹 잘 수는 있었다.


그래도 주리는 문을 살짝 열고 얼굴을 빼꼼 내민 뒤에야 조심조심 들어왔다. 나카하라 경무국장은 처음 보는 사람인데다가 극도로 엄격한 사람임을 알아 무슨 사천왕전의 사천왕 처럼 무섭고 부리부리하게 생긴 사람이라고 상상하였던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나카하라 국장은 사천왕이나 오니처럼 생기지는 않았다. 얼굴에 강건한 기세가 드러나면서도 그저 생각치도 못한 일에 충격을 받은 중년 아저씨로 보였다.


주리는 조금 어색해 보이는 미소를 띄며 정중히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히로쨩 오라버니 백부님이시죠? 인사드립니다. 한주리라고 합니다.”


제19사단 헌병대가 저지른 학살극의 피해자를 보고 충격에 빠져 있던 나카하라 국장인지라, 얼떨떨한 표정으로 주리를 본다. 이 강도단에 여학생도 있었는가? 보아하니 귀한 집의 여식인 듯 한데 어째서 이 자리에 있는가? 그리고 또 얼굴을 숨기지 않고 내 앞에 나타난 이유는 무엇인가?


그 와중에 한주리라는 이름이 기억났다.


“학생은 중추원 참의 한덕만 씨의 자제가 아닌가?”


“어, 알고 계시네요?”


“예전에 청첩장을 받은 기억이 있네. 보아하니 학생도 저 젊은이와 함께 다니나 보군.”


중추원 참의의 여식이, 그것도 그저 해맑고 순수해 보이는 여학생이 불령선인들과 한패라니. 자신이 분쇄한 여러 좌경조직에 지도층 자제들이 섞여 있는 것을 한두번 본게 아니었지만, 영 친숙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렇습니다.”


주리의 목소리가 당당해졌다.


“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일원입니다.”


여느 때의 나카하라 국장이라면 이런 위험한 짓은 당장 그만 두고 부모님 품으로 돌아가라고 한바탕 설교를 했을 것이었다. 참한 여학생이 왜 그런 일에 끼어드냐고 말이다. 그러나 저 눈 앞의 카라스마 준이치로 백작이 어째서 불령선인의 길로 접어들었는지 알고 전율한 이상, 그런 말을 쉽사리 꺼낼 수가 없었다. 게다가 잡아 가둔 사상범들처럼 반항적이고 적대적인 눈빛으로 노려보지 않고, 그저 친한 사람의 가까운 친척을 예의범절을 갖추고 다소곳하게 대하는 여학생에게 험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던 와중에, 주리의 말에서 한 가지 신경쓰이는 점을 입에 담는다.


“잠깐. 히로쨩이라고? 히로요시가 그렇게 불리는가?”


“아, 맞아요. 우린 다 히로요시 씨를 히로쨩이라고 부른답니다. 그런데 우리 오빠는 고지식해서 쨩이라고는 안불러요.”


그러며 주리는 정우를 장난스러운 눈길로 바라보는 것이었다. 나카하라 국장은 저 번듯한 청년이 입에서 사람을 ~쨩이라고 친근하게 부르는 건 상상할 수 없었기에 그럴 것이라고 느끼긴 하였다.


“히로요시와 친한 사이인가?”


“우리 모두가 다 친하답니다. 히로쨩 오라버니에게 도움 받은게 한두개가 아니거든요.”


그 말에 국장은 잠깐 침묵하더니, “그러한가.”하고 한숨쉬듯이 내뱉었다. 국장은 히로요시를 자신이 맡이 기르서면서부터, 조카가 친한 친구들과 같이 놀았다거나 친구들을 집에 데려와 소개시켜준 적이 거의 없었음을 새삼 기억해 냈다. 지금의 히로요시와 이와 같이 깊은 교분을 쌓은 자들이 하필 불령선인이란 점에서 잠깐 심화가 치밀어오르기도 하였다. 하지만 히로요시가 그들 안에서 중요한 사람으로 여겨진다는 것이, 괴이할 정도로 마음이 놓였다.


이때 국장은, 주리를 처음 보면서부터 느낀 의문을 입에 담았다.


“학생은 왜 여기 있는 겐가? 내가 아는 한, 이런 일은 학생이 할 일이 아닐세. 많은 사람들을 걱정시키고 폐를 끼치는 일에 가담해야 할 이유가 있는가?”


그렇게 묻는 국장의 목소리에는 적잖이 힘이 빠져 있었다. 주리가 범죄단체에 가담한 것에서는 분노나 적대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안타까움을 느꼈다. 사회주의나 무정부주의 단체 소속 여학생 범죄자를 체포한 적은 많았다. 하나같이 눈을 앙칼지게 뜨고 그를 노려보며 “국가의 개.”, “반동의 주구.”등의 험한 말들을 쏘아붙였었다. 그런데 이 여학생은, 아마 연인으로 추정되는 저 젊은이처럼 그저 부드럽고 예의바르게 그를 대하고 있었다. 그 태도가 화를 낼 동기를 사그라들게 하고 있다.


“음. 좀 옛날 이야기일려나요. 생각해보니 그렇게 옛날은 아니네요. 6개월도 안된 이야기이니.”


주리는 그렇게 운을 떼고, 그때 겪은 일을 술술 풀어놓았다. 결핵 때문에 아버지의 고향집에 요양을 갔다가, 고모의 손에 이끌려 아버지 땅의 소작농들이 얼마나 처절하게 살고 있는지, 아버지 공장의 또래 여공들이 얼마나 비참하게 살고 있는지 다 보았노라고. 그 이전까지 그저 생각없이 하루하루를 즐기며 살던 자신의 행복이 누군가의 행복과 미래를 빼앗아가며 생긴 것을 안 이후 사는 것 자체가 죄악처럼 느껴졌었다고 말이다.


“막 집에 돌아왔을 때가 가장 힘들었었어요 어떠한 맛난 음식도 모두 역겹게 느껴져서 입에 들어가자마자 토해내고, 침대 위에 편히 누워있는 것 자체가 용서받지 못할 일 같아서 일부러 불편하게 잤고요. 제가 괴로운 것은 그 사람들의 괴로움에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에 짓눌려 매일같이 울었었어요. 여기에 더하여 아버지의 치부를 정면으로 말하고 비판한다는 것은 또 불효 같아서 그러지도 못하고요. 몸도 마음도 그때 망가지지 않은 게 어찌보면 기적이겠네요.”


그렇게 말하는 주리의 입에는 씁쓸한 웃음이 감돌고 있었다. 나카하라 국장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여러 좌익사범들의 진술서와 조사보고서에서 그러한 동기로 사상범이 되는 사례를 한 두번 본게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건 학생 잘못이 아니었어. 학생이 부모를 택하여 태어난 것도 아니지 않았는가.”


“그렇게 살다가 너무 괴로워서 그렇게 생각한 적도 있었어요. 다른 애들도 다 그렇게 사는데, 왜 나 혼자만 괴로워하고 그래야 하냐고 말이죠. 그런데, 그걸 생각하는 것 자체가 대단히 비겁한 것처럼 느껴졌어요. 제 자신의 문제에서 눈을 돌리고 외면하려 하는 게 잘못된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문제를 직시하기만 했을 뿐 무엇을 해야할지 도무지 생각이 안 나더라고요. 그저 하는 건 자학하면서 스스로를 갉아먹는 것 뿐이어서, 괴로움의 미궁으로 스스로를 내던진 격이었는데······.”


주리는 그러다가 애정 가득한 눈길로 정우를 쳐다보았다. 어느 새인가 주리의 손이 정우의 손 위에 올라가 있었다.


“그러다가 오빠를 만난 거죠.”


씁쓸함이 감돌던 주리의 얼굴이 즐거움으로 환하게 밝아졌다. 정우는 그때를 돌이켜 보며, 주리가 죄책감의 근원을 밝힌 편지에 열정에 불타올라 주리를 맑고 깨끗한 사람이라고 시직한 편지를 밤새도록 썼던 기억을 떠올렸다.


힘들었던 기억을 비교적 무덤덤하게 말하던 주리였지만, 갑자기 목소리에 생기가 돌면서 조잘조잘 떠들었다. 어떤 과정으로 정우가 자신을 구원하여주었는지, 무엇을 해야 할지 알려주었다고 말이다. 비록 정우가 애정 이외의 목적으로 접근하였다 하더라도 아무 상관 없다고 강조하면서.


주리의 그러한 태도에 나카하라 국장은 더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부모 재산으로 행복하게만 살아가다가 그 재산이 어떻게 생겼는지 목도하고 사는 것 자체를 죄악이라고 생각해 괴로움에 허덕이다가 불령한 범죄를 저지르는 것을 구원으로 받아들인 아가씨에게, 그것은 범죄행위에 불과하며 결코 해서는 안되는 일이라고 할 수가 없었다.


국장은 문득 시집간 딸들이 생각났다. 아버지는 경찰이지만 다행이도 어두운 세계와 연관되지 않은 채 무난히 자라 다 좋은 혼처에 시집을 보냈다. 그런데 만약 자신이 여러 동기들이 그리하였듯이 뒷돈과 부정한 행위로 부를 축적했고, 이를 감추기 위해 끔찍한 짓까지 했다고 가정해 보자. 딸이 그것을 알았다고 생각했을 때, 그 아이들은 어떻게 반응하였을까?


하지만 그럼에도 안타까운 마음에 다시 입을 열었다.


“지금 하고 있는 일 외에는 방법이 없었는가?”


그래도 그렇지 시집간 딸들보다 훨씬 어린 여학생이 건장한 사내인 위험인물들과 같이 어울려 다니며 심각한 위법행위들을 저지르는데 일조했다는 것은, 오랫동안 경찰로 살아온 그로서는 짚고 넘어가지 아니할 수 없었다.


“법의 테두리 내에서도 죄책감을 덜 수 있는 일은 많았을 걸세. 꼭 그런 일을 하면서 자기 자신과 학생 부모님에게 폐를 끼쳐야 했는가?”


“법의 테두리 내라고요?”


순간, 주리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잠깐이나마 날카로움이 서렸다.


“일본제국이 우리를 지배하려고 만든 법 안에서 활동하라고요? 그래서 남는 게 뭐가 있죠? 치안유지법과 보안법 안에서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죠? 헌병대와 고등계 형사들이 이거 불온하다 저거 불온하다 하고 트집잡으며 사람 잡아가둘 궁리만 하는데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죠? 일본 국적을 포기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법의 테두리 내에서요?”


“주변에 폐를 끼치지 않을 수 있지 않는가. 자선사업이나 농촌활동 등으로······.”


국장의 말에 주리는 단호히 말한다.


“폐는 일본이 먼저 끼쳤다고 생각합니다. 국장님께서는 일본이 조선을 지배하는 내에서도 조선민족을 위한 길이 있다고 생각하시더라도, 그런 지배가 계속되는 한 문제는 해결될 수 없어요. 그저 도피에 불과한 거여요. 지금 이시와라 간지 같은 자들은 오족협화를 내세우며 우리 동포들을 그 말도 안되는 세계최종전쟁에 동원할 생각이에요. 왜 우리 동포들이 일본의 전쟁에 휘말리고 피흘려야 하죠? 일본 사람으로 태어난 것도 아닌데 일본의 전쟁에 나서야 하는 거죠? 왜 우리가 그런 전쟁따위 하고 싶지 않은데 그래야 하는 거죠? 일본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어서가 아닌가요?”


국장이 그 지적에 할 말을 잃은 그때, 조용히 주리가 대화를 주도하도록 물러나 있었던 정우가 입을 열었다.


“일본의 지배 내에서도 행복을 추구하고 민족의 삶을 개선시킬 수 있다는 사람들이 적지 않음을 압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일본은 어떠한 개선도 이루어주지 않았죠. 영국이 아일랜드에 그랬던 것처럼 조선을 일본제국의 일부로 간주하면서도 조선인의 대표를 뽑아 중의원에 진출할 수 있는 권리를 주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영국이 인도에 그랬던 것처럼 자치를 주지도 않았고요. 정치에 참여하기에는 어리석고, 자치를 하기에는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이유로요. 최소한 고려시대 이후 이 나라에서 통일된 국가를 운영해 온지 1,000여년이 가까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른바 ‘근대국가’를 운영할 능력이 없다는 이유로 다른 곳에서 당연시되는 것조차 주지 않았습니다. 실력이 없으면, 힘이 없으면 먹히는 게 당연하다면서요. 우리가 이것을 합당한 조치라고 납득하는 것을 기대하는게, 다소 과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으셨습니까?”


국장은 지극히 굳어진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범죄자의 논리에 흔들리지 않는 것은 그의 오랜 철칙이었다. 그러나 이미 그의 철칙이 심하게 흔들려 버리고 말았다. 정우가 말한 “힘이 없으면 먹히는 게 당연”은 야쿠자들이 평범히 살고 있던 사람들을 괴롭히면서 하는 소리가 아니었던가? 그런 말을 하며 자신이 자연스러운 법칙을 실현하고 있다며 의기양양하게 굴던 야쿠자 조장을 거두절미하고 유치장에 집어넣고 기소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했었다.


그런데 이제야 깨닫고 만 것이다. 지금의 일본제국이 그 야쿠자 조장과 똑같은 논리를 구사하고 있었다는 것을. 마적단을 통해 저 청년의 마을을 초토화시킨 헌병대위도 그렇게 생각했을까?


“나는······. 한평생 세상을 합법과 불법으로 판단해 왔네.”


국장의 무거운 목소리가 울려퍼진다.


“법의 성격이 어찌되었건, 불법을 저지른 자에게 법의 심판이 있도록 하는 게 세상을 위한 길이라 믿었네. 여러 범죄조직들이 내 손에 소탕되었고, 그때마다 그들에게 시달리던 이들이 환호하고 기뻐하는 것이 내 즐거움이었네. 그래서 법이 어떤 방향으로 나가는지는 내가 생각할 바가 아니라고 보았네만······. 그래서 그런지 지금, 꽤······”


그는 다시 한숨쉬듯 내뱉었다.


“머리가 아프다네.”


이때 정우는 국장을 위로하듯 말했다.


“국장님께서 잘못된 일을 하셨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국장님께도 지키고자 하는 가치가 있으시죠. 그것에 대해서 저 같은 나이 어리고 경험 없는 사람이 함부로 말할 수는 없습니다. 오늘 말씀을 드린 것은, 그저 인사를 올리려다가 질문을 하셨기에 대답을 드린 것이라고 생각해 주시면 되겠습니다. 국장님께 우리는 범죄자고,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할 존재라고 계속 생각하셔도 그걸 그릇되었다고 보지 않습니다.”


국장은 더더욱 무거워진 마음으로 정우를 쳐다본다. 이 젊은이는 자신들의 동기가 이렇게 정당하니 잡으려 들지 말라고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을 체포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을 수는 없지 않은가!


“그 화술은 천남건 씨에게 배운 건가?”


“아니요. 딱히 말하는 기교 같은걸 배우진 않았습니다. 그저 생각한 대로, 느낀 대로 말씀드렸을 뿐입니다.”


국장은 그 말에 침묵으로 답하였다. 이때 주리가 끼어든다.


“저······ 시간 괜찮으신가요? 벌써 1시간 넘게 지난 것 같네요.”


국장은 그제야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규정된 점심시간에서 10여분은 지나 있었다. 계속 더 있다가는 이쪽이건 저쪽이건 곤란해질 터였다.


“고맙네, 학생. 나는 이만 가 봐야겠어.”


국장은 봉투 속의 레코드를 챙기고 일어났다. 국장은 나가기 전에 정우를 쳐다보았다. 무슨 말을 하려고 망설이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자네에게 일어났던 일은, 정말 미안하게 생각하네.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었어.”


진심 섞인 그 사과에, 정우는 미소로 답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라고 말하는 주리에게, 국장은 묵묵히 고개만 끄덕이고 방을 나섰다. 그러자마자 익숙한 목소리가 옆에서 들렸다.


“말씀은 잘 나눴소?”


바로 옆의 식탁에 앉아 러시아어로 쓰인 책 한권을 읽고 있는 천남건이었다. 국장은 천 지부장의 얼굴을 보자마자 힘이 다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참으로 교활하시군, 천남건 씨. 이런 식으로 날 흔들 거라고는 생각치도 못했소.”


“국장은 교묘한 함정으로 우리 동지 둘을 체포하고 총독 암살을 저지한 사람이오. 이 정도는 해야 우리가 생존할 수 있지 않겠소?”


나카하라 경무국장은 대꾸하지 않고 체호프를 나서 버렸다. 길 잃은 미아가 된 기분으로.


한편 주리는 긴장이 다 풀려서 식탁 위에 상체를 수그러트고는 얼굴을 식탁보에 파묻고는 다리를 흔들거리고 있다.


“경찰 두목이라기에 무슨 무서운 사람인줄 알았더니 그냥 말 통하는 것 같은 아저씨였네요. 난 무슨 포청천처럼 무슨 죄, 무슨 죄를 범했으니 작두형에 처하겠다고 할 줄 알았지 뭐예요.”


주리는 그렇게 종알대다가, 얼굴에 걱정을 띄운다.


“그래도 자기 원칙에 따라 우리 체포하려 들진 않겠죠?”


“그러고 싶으면 그럴 수 밖에 없겠지. 우리가 히로 백부님에게 체포하지 말라고 말 한적도 없었잖니.”


“그래도요. 그러지 않겠다고 확언을 받아내는게 더 좋지 않았을까요?”


“그렇게 할 사람은 아니었지. 오히려 오늘 우리가 한 것만 해도 큰 성과야. 대화가 가능하고 이해할 수 있는 존재로 서로를 마주본 이상, 상대에게 가혹한 결정을 내릴 수 없는 게 사람 마음이니까. 이만하면 된 거야.”


“그럴려나요?”


정우는 나카하라 국장이 정말 그럴지 궁금해하는 주리에게 답은 아니해 주고 “수고 많았어.”하며 고개를 수그려 뺨에 입을 맞춰 주었다. 주리는 이제 전혀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기분이 좋아 히히 웃는데, 그 순간에 방에 노크 없이 들어오는 사람이 있었다. 민호였다.


“여, 또 애정행각 중이시구먼.”


주리는 수그린 상체를 펴지도 않고 “보기 싫으면 오라버니도 상하이 가면 연인 만들라니까요.”라고 놀리려 든다. 민호는 “허이고.”하고 피식 웃더니 정우에게 시선을 돌린다.


“여튼 지금 가봐야겠어. 계획대로 벨릭 씨와 프랭크가 그 선생을 데려왔거든.”


“아, 그래?”


정우의 표정이 그 말에 빠르게 굳어졌다. 주리도 그 말을 듣자마자 웃던 낯을 지우고 몸을 일으켰다.


“너하고 국장 나리가 여기 있는 동안 다른 애들이 계획대로 진행했어. 이제 네가 가서 그놈 하고 면담 좀 해야지.”


“그래야겠네.”


정우는 바로 의자에서 일어났다. 공복감이 느껴졌지만 그건 나중의 문제였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4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경성활극록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274 274화 +12 21.03.28 366 10 26쪽
273 273화 +12 21.03.20 325 7 17쪽
272 272화 +6 21.03.13 340 8 17쪽
271 271화 +4 21.03.11 314 9 13쪽
270 270화 +12 21.02.15 319 9 13쪽
269 269화 +4 21.02.12 320 10 16쪽
268 268화 +6 21.02.11 379 7 13쪽
267 267화 +16 21.02.07 339 11 14쪽
266 266화 +4 21.02.06 307 11 13쪽
265 265화 +8 21.02.03 325 8 12쪽
264 264화 +12 21.01.31 399 9 16쪽
263 263화 +10 21.01.29 314 9 17쪽
262 262화 +6 21.01.26 376 8 13쪽
261 261화 +8 21.01.24 359 9 13쪽
260 260화 +12 21.01.23 357 8 15쪽
259 259화 +6 21.01.21 325 8 12쪽
258 258화 +10 21.01.18 381 9 13쪽
257 257화 +6 21.01.16 373 11 14쪽
256 256화 +8 21.01.14 329 11 13쪽
255 255화 +6 21.01.12 348 9 24쪽
254 254화 +6 21.01.09 349 9 12쪽
253 253화 +8 21.01.08 362 9 16쪽
252 252화 +8 21.01.05 319 9 15쪽
251 251화 +6 21.01.03 332 9 17쪽
250 250화 +8 21.01.01 330 12 21쪽
249 249화 +12 20.12.30 341 9 21쪽
248 248화 +12 20.12.28 296 13 20쪽
» 247화 +4 20.12.26 338 12 19쪽
246 246화 +6 20.12.23 324 11 17쪽
245 245화 +8 20.12.21 314 11 22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