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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활극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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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KKA
작품등록일 :
2019.07.10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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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15 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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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01 2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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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쪽

250화

DUMMY

아오야기 중위가 절규하던 그 시간, 나카하라 경무국장은 사무실에 돌아오자마자 긴급보고를 받았다.


“허, 참!”


보고를 받은 국장의 첫 반응이었다. 종로경찰서에서 긴급히 제출되어 경기도경찰부를 통해 전달된 보고는 기가 막혔다.


오늘 오전 10시경, 탈쓴 불령선인 강도들의 아지트로 추정되는 영등포의 한 폐공장에서 수색이 있었다. 종로경찰서에서 밀정으로 기용한 고등보통학교 선생이 제공한 정보에 의거한 수사였다. 종로서 고등계 1, 2, 3과가 제1과장 와카마쓰 경부의 지휘 아래 투입되었고 시흥경찰서 소속 경력이 인근에 깔리며 검문검색을 실시하였다. 제2, 3과가 그 폐공장 외곽지역을 수색할 동안, 제1과는 폐공장으로 진입, 적극적인 수색을 실시하였다.


일은 오전 12시에 터졌다. 공장건물 외곽의 버려진 근로자 숙사를 수색하던 제2과 형사들이 갑작스럽게 들린 폭발음에 숙사를 뛰쳐나왔다. 형사들은 공장건물 뒷편에서 연기가 솟구쳐오르는 걸 보고 달려가, 건물의 제일 뒷부분에서 폭발이 발생했음을 확인하고 공장 안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원래 공장장 사무실이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곳에서 종로경찰서 제1과 소속 형사들이 널브러져 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 광경은 피가 낭자한 광경을 광기어린 화가가 묘사한 우키요에의 한 장면처럼 그로테스크하기 이를 데 없었다. 폭발의 충격에 파열된 건물벽과 육체, 찢기운 살점에서 흘러나와 바닥을 적신 피, 공포와 고통이 복합되어 일그러지고 갑작스럽게 덮친 화염에 시꺼멓게 그을린 얼굴. 그리고 화장장에서 맡을 수 있는 인체의 살점과 지방이 타는 냄새. 이들의 옷에서 여전히 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형사들은 급하게 불을 껐으나 이미 1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절명한 터였다. 제1과장 와카마쓰 코스케 경부, 소속 노무라 기이치로 순사부장, 오오이시 타로 순사, 윤지호 순사가 무참한 꼴이 되어 숨을 거둔 것이 확인되었다. 유일한 생존자인 마쓰우라 신노스케 순사는 하복부에 파편상을 당해 깊은 상처를 입어 응급지혈한 후 빨리 구급차를 불러야 했다. 이들 중에 오재두 경부보가 없는 까닭은, 그가 어제부터 실종상태였기 때문이었다.


형사들은 폭발원점인 공장장 사무실의 불을 끄고, 바닥 이곳저곳에 부서진 채로 굴러다니는 나무 의자들과 문 바로 앞에서 가장 새까맣게 타오른 바닥을 미루어 볼 때 문을 거세게 열면 쌓아놓은 의자들이 무너지며 맨 위에 올린 충격신관으로 작동하는 폭탄이 바닥에 부딛치며 폭발했다고 추정하였다.


종로경찰서장 혼마 시게노부 경시정은 시신 수습 후 유가족들에게 연락할 것이며 자세한 경위는 수사결과가 들어오는 대로 보고하겠다고 하며 보고서를 끝마쳤다.


국장은 그제야 천남건 지부장에게 부하로 추정되는 탈쓴 자가 와서 러시아어로 추정되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보고한 게 이것이었음을 알았다. 천남건은 그들을 추적해 오던 종로서 고등계 형사들을 일거에 제거할 계략을 꾸며놓았던 것이다. 자신을 러시아요릿집 체호프에 앉혀 놓은 채. 그 선생의 제보는 미끼에 불과했다. 아마도 어떤 경로를 통해서 선생이 밀정인 걸 알고 포섭을 하거나 아니면 엉뚱한 정보를 흘렸을 것이다. 히로요시를 통해 알았을지도 모르겠다. 평소에 순사들과 자주 어울려 다녔으니.


“순직 보상은 규정대로 처리하시오. 내가 직접 식장에 가서 유가족들을 위로하리다.”


국장은 입에서 씁쓸함을 느꼈다. 조카가 불령선인들에게 정보를 흘려서 그 형사들이 불귀의 객이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그 유가족들을 대하기가 정말이지 껄끄러울 것 같았다.


한 번에 경찰 4명이 사망하고 1명은 중상을 입었다. 원한을 산 순사가 살해당하는 사건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불령선인이 파놓은 교묘한 함정에 걸려 부서 하나가 무참히 박살나고 만 사태는 찾아보기 극히 힘들었다. 경찰이라는 동료의식에 따라 복수하겠다는 순사들이 한둘이 아닐 것이다. 국장 본인도 조선 경찰의 총책임자로서 이런 사태에 심란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생각을 하는 통해 보고가 추가로 들어왔다. 혼마 서장은 불령선인들의 아지트 위치와 상하이 가정부에서 파견된 인사와 회견한다는 정보를 보고한 XX고등보통학교 교사 주이한이 의도적으로 잘못된 정보를 제보했을 가능성이 있다며, 이 선생을 잡아다가 취조해 진상을 규명하겠다고 보고했다.


국장은 아무 소용 없는 일이라고 느꼈다. 천남건은 교활하고 물샐틈 없는 자다. 역정보 공작에 써먹었던 밀정을, 그것도 이미 신분이 노출되어서 체포가 확실한 밀정을 그대로 내버려 둘 사람이 아니었다. 지금쯤이면 제거당했을 것이 분명하였다. 어떤 수단이던 간에. 머지않아 그 선생의 시신이 한강에서 떠오를 것이니 강변을 수색하라고 지시해야 할까?


나카하라 가즈오는 그러다가 한 가지 기묘한 점을 느꼈다. 평소라면 경찰들이 불령선인을 수색하다 희생되었다는 보고를 들으면 바로 성을 내고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해서라도 이놈들을 붙잡으라고 성화였을 것이다. 본인이 직접 나서서 현장에 출동해 사태를 확인하고 수사를 진두지휘하며 천남건을 잡으려고 발로 뛰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럴 생각이 나지 않았다. 천남건에게 당했다는 화도 나지 않았다. 그저 경찰이 다섯이나, 아니 아마도 오재두 경부보까지 합친다면 여섯이 희생되었다는 보고에 유가족들에 대한 위로를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가 먼저 떠오를 뿐이었다. 나카하라 국장 본인이 생각해도 참으로 기가 막혔지만, 그는 자신이 그 불령선인이었더라도 그런 식으로 일했을 거라고 느꼈던 것이다.


하루 아침에, 히로요시와 거의 비슷한 나이에 모든 것을 잃어버린 청년이 그 자리에 있었다. 그것도 폐하의 황군이 저지른 짓에. 그도 만주에서 그런 일이 있었다고 얼핏 듣긴 했지만, 비적 소탕의 일환이거나 혹은 몇몇 장교의 오판으로 저질러진 일이라고만 생각하고 더 신경쓰지 않았었다. 그런데 그렇다 치더라도, 그 아비규환에서 살아남은 사람에게, 그럼에도 일본인에 대한 적대감을 내비치지 않는 젊은이에게 왜 그런 짓을 하고 있냐고 힐난할 자격이 자신에게 있단 말인가?


그때 그의 고뇌를 깨버린 한 통의 전화가 울렸다.


-실례하겠습니다, 국장님. 사이온지 긴모치 공작각하께서 지금 통화를 원하고 계십니다.


사이온지 긴모치 공작이 무슨 일로? 그 나이든 원로대신과는 카라스마 준이치로 백작 수사 건으로 악연이 있다. 또 자신에게 이 수사에서 외압이라도 넣으려고 하는 건가?


일단 통화해 보고 알 일이었다.


“사이온지 공작님이? 연결해 주게.”


잠시 후, 사이온지 공작의 목소리가 수화기를 통해 들렸다.


-국장! 오오오, 국장!


나카하라 국장은 수화기 속 노인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음을 알아챘다. 무엇인가에 분노한 노인이 바들바들 떨며 내는 소리였다.


“예, 총독부 경무국장입니다. 무슨 일로 통화를 요청하셨습니까?”


-국장! 아이고! 내······. 내 머리가 터져서 죽을 것 같소! 아이고! 이······. 이 망할 노옴!


사이온지 공작은 숨을 헐떡대며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말을 늘어놓았다. 공작은 무슨 일인지 심하게 흥분상태에 빠진 것 같았다.


“공작님. 일단 진정하여 주십시오. 무슨 말씀을 하시고 싶으십니까?”


-국장! 국장! 그놈! 그 망할 놈! 카라스마 준이치로 그 망할 놈 말이오!


나카하라 국장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카라스마 준이치로, 그 눈이 맑은 젊은이의 뒷배 노릇을 해 주던 사이온지 공작이 무슨 이유로 그를 망할 놈이라고 호칭하는 건가?


“우리가 수사중인 그 화족 말씀이십니까? 무슨 일이십니까!”


그때 국장은 사이온지 공작의 말에 놀라고 말았다.


-그······. 그 망할 놈은 사기꾼이오! 불령선인 놈들 가정부 소속이란 말이오!


“예? 그건 어떻게 아셨습니까?”


-그놈이······! 그놈이······! 내게 편지를 보냈단 말이오! 그 망할 놈이! 그 사기꾼 간첩 놈이! 아이고, 내 머리야! 아이고!


사이온지 공작이 팔순이 넘은 노구의 몸에 심각한 건강이상을 일으킬 것이 뻔할 정도로 분노를 터트리는 일은 이날 아침에 일어났다.


육해군간에 심각한 갈등을 일으킬 수 있는 해군 건함예산 횡령사건 때문에 오늘도 비공개 어전회의가 열린다. 아라키 육군대신과 오스미 해군대신은 사건을 덮는다는 천황의 성단에 머리를 조아렸지만, 해결방식에 대해서 여전히 으르렁거리고 있다. 서둘러 해결하지 않으면 나라의 장래에 좋을 게 하나도 없었다. 회의는 오후에 열릴 예정이라 오전 내 처리할 업무를 보고 있는데, 집사가 편지 한 통을 들고왔다. 카라스마 준이치로 백작의 편지였다.


그런데 편지 내용이 이상했다.


-친애하는 사이온지 공작님. 이 편지는 아마 소생이 마지막으로 보내는 편지가 될 것입니다. 그 휘황찬란한 보석을 바친 대가로 분에 넘치는 총애를 받았으니, 그래도 앞으로 공작님을 뵐 일은 없을 거라고 전하는 게 예의범절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글월 올리는 바 입니다.


본론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지난 7년간 전 공작님을 속여 왔습니다. 저는 양부님의 양자로서 합법적인 작위계승자는 맞지만, 그 이외의 사항은 모두 거짓입니다. 제 본명이 쿠니모토 마사토모라고 말씀드린 적 있는데, 그럴 리는 없습니다. 전 조선인의 피가 흐르고, 조선인 친부모님을 두었으며, 우리의 정부인 대한민국 정부에서 일하는 조선 사람이니까요.


공작님께서는 저와 처음 대한 자리에서 저녁식사를 대접해 주실 때 말씀하셨습니다. 제 양부님께서 시대에 맞지 않는 인물이었다고요. 어차피 누군가에게 먹힐 조선을 일본제국이 차지했다고 해서 문제될 것이 없는데, 그런 일에 화를 내고 폐하와 이토 공작, 야마가타 공작과 공작님 자신을 비난한 건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었다고 말입니다. 조선 병합을 위해 사용했던 여러 속임수들로 조선 왕실과 조선인들을 기만한 것 가지고 비판받았다는 게 이해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죠. 다른 열강들도 다 그런 걸 하고 있는데, 지금 같은 시대에 그런 것에 속는 자들이 멍청한 거라고 하시며 한바탕 웃음을 터트리셨죠.


그 말씀, 여기서 역으로 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공작님은 물론 메이지의 격동기를 헤쳐오시고 원로대신으로서의 경륜과 관록이 있으신 분이시지만, 제가 기대했던 것 만큼은 아니었다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그 보석이 워낙 찬란하여 저 조차도 마음을 빼앗기지 않을까 두렵긴 했었지만, 그거 하나 보여드렸다고 제 양부님께서 공작님과 관계회복을 생각하셨다는 말을 어떻게 그리 덥석 믿으셨단 말입니까? 원로대신의 관록조차도 보석의 광채 앞에서 흐려진다는 것을 봤을 때, 얼마나 폭소를 터트리고 싶었던지요?


애석하게도 공작님이란 거물을 꾀어냈음에도, 이번 수사방해와 또 일전 보석 값을 그래도 쳐주시겠다며 제법 용돈 많이 쥐어주신 것 이외에는 못한 게 아쉽군요. 그 귀한 걸 바친 것 치고는 너무 얻은 게 없다는 기분입니다. 하지만 공작님 역할은 딱 거기까지였습니다. 너무 공작님께 매달리다가는 언젠가 의심을 살 것이 뻔했으니까요. 주신 용돈은 우리 정부 자금으로 잘 썼습니다.


그 동안의 사례에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앞으로 또 뵐 일은 없겠지만요. 공작님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바 입니다. 이 편지를 보신다 하더라도 말이죠.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이만 총총.


추신: 보내주신다던 나루호도 류이치 변호사님께 죄송하다는 말씀 전해 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변호사 수임료는 꼭 지급해 주시길 바랍니다.


추신 2: 양부님께서 돌아가시기 전 공작님께 남긴 편지를 동봉합니다. -


카라스마 세이지 백작이 남긴 편지는 이리하였다.


-사이온지 긴모치 씨에게


이 편지를 보낼 시점이면 내 호적상 아들이, 실질적으로는 손자아이가 보낸 편지를 받았을 것이오. 그쪽과는 인연이 있어서 그래도 내가 묻히기 전에 편지 한통은 보내는 게 맞다고 생각했소.


나는 의사로서 하면 안될 생각을 여러 번 했소. 그쪽의 복막염으로 번질 뻔한 맹장을 적출하여 말끔히 낫게 해 주었을 때로 돌아간다면, 수술을 거부하는게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 말이오. 조만간 목숨이 다할 지금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소.


내가 그대에게 보낸 후회의 편지와 사과의 편지는 모두 거짓이었소. 그저 그래도 본토의 화족 사회와 최소한의 끈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보냈을 뿐. 그 편지의 일점일획에는 모두 진심이라고는 하나도 없었소.


일본을 떠나기 전 그대에게 보낸 말을 다시 돌려 드리지. 무쓰히토 씨와 당신네들은 모두 떼강도 집단에 동양평화의 파괴자요. 도요토미가 일으킨 비극을 수습하고 다시금 우호관계를 수백년 간 맺어온 신의를 모조리 쓰레기통에 처박아 버리고, 두 민족 사이에 메우기 극도로 힘들은 증오의 골짜기를 파 놓았소. 그것이 국익을 위해서 그런 거였다고? 웃기는 소리 집어치우시오.


서양 열강들처럼 근대국가가 되었다고 자처하면서도 과학적으로 말도 안되는 만세일계 따위나 주워섬기는 나라가, 중국과 조선에는 원래부터 있었던 농민이 지을 농작물을 고를 자유, 다른 곳으로 이주할 자유, 농공상간 직업선택의 자유도 없었던 나라가, 그걸 없애버렸다고 대단한 개혁인 것처럼 떠들어댄 나라가, 근대화 비용을 마련한답시고 이미 도쿠가와의 치세에서 고통받아온 농민들을 극도로 쥐어짜고 못 참고 봉기를 일으키면 마을 자체를 삭제해 왔던 나라가, 동양문명의 최말단에 서서 그 찌꺼기나 겨우 주워먹는 신세인데도 자기가 우월하다고 착각해온 나라가, 이미 수백년 전부터 그렇지 아니하였던 조선을 집어삼키고 자기가 대단한 것처럼 뻣대고 있소. 머리에 관을 쓴 원숭이란 딱 그 꼴을 말하는 것이오.


그리고 그런 나라를 만든 책임은 당신 같은 자들에게 있소.


자신들의 선택이 현실적이었다고, 그때는 다른 열강들도 다 그랬다고 면피하려 들지 마시오. 가장 현실적이었다고 자부하던 결정이, 가장 비현실적인 결과로 돌아오고, 가장 비현실적이라고 지탄받던 결정이, 가장 현실적인 결정으로 돌아오는 게 세상일이오. 일본은 한 명도 아닌 2천여만 이상의 원한을 사버리고, 차지한 것을 지키기 위해 더 많은 원한을 사게 될 것이오. 그 원한의 피바다에 잠기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다가 피바다의 수위만 올리겠지. 나는 그 날을 보지 못하겠지만, 내 뜻을 이은 자들이 그날을 언젠가 보고 말 것이오.


강도의 세상이 붕괴되고, 강도에게 빼앗긴 자들이 빼앗긴 것을 찾을 때, 나는 내 아이들에게서 그 소식을 듣고 편히 눈을 감을 수 있을 것이오. 그러니 공작께서는 그때를 볼 수 있도록, 무병장수하길 내 간절히 바라겠소이다.-


사이온지 긴모치가 그 편지를 다 읽고 무병장수할 마음이 들 리는 없었을 것이 뻔하였다. 공작은 위험할 정도로 치솟는 혈압 속에서 숨을 헐떡이고, 책상 위에 있는 모든 것들을 다 뒤엎어 버리고는 노성을 질러대다가 목 뒤가 극도로 찌릿해지는 감각에 안락의자에 앉아서 한동안 부들부들 떨기만 했었다.


그러다가 겨우겨우 건강이 너무 좋지 않아서 어전회의에 불참하겠으니 불충함을 용서해 달라는 통한의 말을 집사를 통해 천황에게 전달하고, 나카하라 경무국장에게 전화한 것이었다.


-이······. 이 두 놈은 날 가지고 놀았소! 그 무덤 속에 들어간 의사놈이 날! 이놈들을, 아니 그 놈을 잡아주시오! 카라스마 준이치로란 놈을 잡아달란 말이오! 그놈을 잡아 내 자택으로 보내시오! 내 놈을 산채로 회를 떠버리고 말겠소!


“공작님. 일단 진정해 주십시오.”


국장은 사이온지 공작의 노호성에 귀가 아플 지경이었다. 사실 국장은 한 마디 비꼬는 말을 하고 싶었다. 그때는 카라스마 백작이 자기 사람이니 수사하지 말라고 했던 분이, 지금 와서 잡아달라고 성화인게 우습지 않냐고 말이다. 그러나 그런 말을 했다가는 더 시끄러운 소리만 잔뜩 달려들게 뻔하여서 차마 말할 수는 없었다.


“공작님의 상황 충분히 이해하겠습니다. 카라스마 준이치로 백작의 죄목에 사기죄를 하나 더 추가해야겠군요. 지금 조선 전체에 수배를 하려는 참이니 더 기다리시면 좋은 소식이 올 것입니다.”


-알겠소! 알겠소, 국장! 내 국장을 겁박한 건 이 자리에서 사과하겠소! 그러니 그놈을! 그 망할 놈을 반드시 잡아 주시오!


“알겠습니다. 염려 마시고. 수사에 진척이 있으면 말씀 드리겠습니다. 그럼······.”


국장은 그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 끊고 나니 참 희한하다고 생각했다. 그 젊은이가 보낸 편지에 사이온지 공작이 펄펄 뛰었다는 것이, 이상하게 속시원한 기분이 드는 것이었다.


한편 경무국장이 이미 처리되었을 거라고 짐작한 주이한 선생은, 몸에 바위가 묶여 한강물 속으로 가라앉고 있지는 아니하였다. 오히려 그는 기대감에 가득차서, 이전 의열단원이라 자처한 사람들이 납치해 왔던 그 어두컴컴한 방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그들이 하란 대로 했다. 그들이 알려준 주소에서 상하이 임시정부와 “탈쓴 강도”들이 만난다고 엿들었다는 제보를 했다. 최대한 자세하게 꾸며서. 경찰들이 이 계책에 속은 건지는 그도 모르겠으나, 일이 성공하면 예전에 그를 납치해 왔었던 그 아나키스트 백인과 흑인을 보내주겠다고 했다.


그리고 그들은 정말로 왔다. 여전히 무시무시하게 생긴 범죄형의 얼굴들이었지만, 그는 이제 앞으로 의열단에서 아나키즘 운동을 같이 하게 될 동지들이라고 생각해 여러 차례 말을 걸었었다. 그러나 험상궂은 백인은 아무 말이 없고, 흑인은 으르렁대며 “셧 더 뻑 업.” 한 마디로 으름장을 놓아 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이들은 그를 차에 태우고 헝겊으로 눈을 가렸다. 의열단에 가입하러 가는 건데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냐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이들에게 기밀유지가 최선이다 보니 이럴 것이라고 스스로 납득하였다.


눈이 가려진 채로 차에서 내려져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채 얼마간 걷다 보니, 저번에 그를 데려왔던 그 방 안에 있었다. 몇번 더 드나들게 될 방이라고 생각하니 익숙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로부터 잠시 후, 문이 열렸다. 기억하는 얼굴들이 들어왔다.


“야, 이거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얼굴에 곰보자국 있는 의열단원이 싱글벙글 웃는다.


“수고는 무슨요. 그런데 잘 된 겁니까?”


“아, 물론이죠. 그 왜놈들은 우리의 폭탄에 죄다 날아가 버렸습니다. 다 주 동지의 공입니다!”


주 선생은 그 말에 긴장이 다 풀리고 웃음지었다. 자신을 괴롭혀대던 그 형사놈들을 더 이상 보지 않아도 된다. 그 망할 자식들, 잘 죽었다!


“자, 이제 잘 해주셨으니 그 공을 높이 사는 관계로, 이제 이 문서에 서명해 주셔야겠습니다.”


신경질적으로 보이는 단원이 방의 불을 키고, 한 구석의 간이 책상을 가져왔다. 그 위에 서류 하나가 놓이고, 주 선생의 손에 펜 하낙 쥐어진다.


그런데 주 선생은 그 서류를 보고 당황했다.


“이···... . 이건 어느나라 말입니까?”


“아, 그거 러시아어입니다. 이건 소련공산당 입당신청서에요.”


“예? 예?”


주 선생은 왜 자기가 소련공산당에 가입해야 하는지 몰라 어안이 벙벙한다.


“아, 우리가 공산당에 가입해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약산 의백께서는 제작년부터 코민테른과의 연대를 강화하셨거든요. 그래서 북경에 코민테른의 지원 아래 레닌주의 학교를 세우시고 조선혁명을 위한 혁명투사들을 양성하고 계십니다. 아무래도 소련만큼 우리 혁명운동을 도와주는 나라도 없으니까 말이죠. 그러다 보니 우리 의열단원은 기본적으로 소련공산당 당원이 되어야 합니다.”


“아, 그렇군요. 필요한 절차로군요.”


주 선생은 의열단원들이 그렇다고 하니 납득하고 그 서류에 서명했다. 곰보자국 있는 단원은 기분 좋게 웃음지으며 서류를 거둬갔다.


“입단선서 서명은 잠시 후에 있을 예정입니다. 그걸 맡은 친구가 곧 올 건데, 잠깐 기다려주세요.”


의열단원들은 그렇게 말하고 방을 나갔다. 주 선생은 왜 이 자리에서 입단선서에 서명하지 않는지 의아해했다. 소련공산당 입당신청서와 동시에 하면 되는게 아니었나?


그런데 10여분 후, 문이 열렸다. 방 안으로 들어온 자를 본 순간, 주 선생은 그 자리에 입을 딱 벌렸다.


“오랜만입니다. 마지막으로 뵌지 한달 쯤 되었죠?”


말투는 퍽 예의범절을 지켰지만, 목소리에서 주변을 얼어붙게 할 듯한 차가움이 느껴졌다.


“저와 나눌 말씀이 꽤 많을 걸로 아는데, 한번 해 보시길 바랍니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오궁섭 보성전문학교 조교수, 그러니까 정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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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0화 +8 21.01.01 330 12 21쪽
249 249화 +12 20.12.30 340 9 21쪽
248 248화 +12 20.12.28 296 13 20쪽
247 247화 +4 20.12.26 336 12 19쪽
246 246화 +6 20.12.23 323 11 17쪽
245 245화 +8 20.12.21 313 11 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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