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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길동 님의 서재입니다.

죽은 줄 알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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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길동
작품등록일 :
2023.06.10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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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01 0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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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951,721

작성
23.08.21 0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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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여우의 숲 (12)

DUMMY

63화


기겁을 한 여우 놈이 도망치려 했지만, 안타깝게도 너무 늦어 버렸다.

만면에 해맑은 웃음을 띤 하지운이 놈의 허리를 끌어안고, 백 허그를 해 버렸다.

그 여우 놈도 자신의 삶의 마지막이 이토록 비참하고 고통스러울 줄은 상상조차 못했을 것이다.


족장님의 손부채질을 받으며 여우머리들과의 ‘나 잡아 봐라’ 놀이가 시작되었다.


족장님 다음가는 탁월한 전사가 하지운의 갑작스런 포옹에 운명하면서, 여우머리들의 사기가 많이 꺾여 있었다.

그런 마당에 하지운의 징그러운 스킨십이 작렬했다.

자신들에게도 닥쳐올지 모를 끔찍한 미래를 상상하며, 용맹한 전사들이 가슴으로 울었다.


이 마을에서 암컷과 새끼들을 호위하기 위해, 따라갔던 수컷이 열다섯 마리였다.

거기에 족장의 친위대라 할 수 있는 전사 열 마리가 합세해, 족장을 제외한 총 스물다섯 마리의 여우머리 전사가 하지운을 둘러싸고 있었다.


그중 일곱 마리가 이리저리하다가 죽어 버렸다.

남은 열여덟 마리의 여우머리들이 죽상이 되어 있었다.


족장님을 홀로 두고 도망치는 것은, 일단 그들의 선택지에 없다.

그런데 그것 빼고는 자신들이 살아남을 그 어떤 묘책도 떠오르지가 않았다.


한 놈이 빠져나가 다른 족장 놈을 모셔 올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럴 시간이면 누가 죽든 열두 번은 죽고 일이 다 끝났을 시간이다.

족장 놈마다 차지하고 있는 영역이 그렇게 좁지가 않다.


결국 열여덟 마리가 생각해 낼 수 있는 유일한 전략은, 자신들을 미끼로, 족장님보다 침략자를 먼저 지치게 만드는 것뿐이었다.

최선을 다해 침략자 놈의 공격을 요리조리 피하면서, 놈을 최대한 많이 움직이도록 만드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어 보였다.

침략자 놈의 전신에서 날카로운 가시밖에 안 보인다.

놈이 이런 괴상한 형상으로 변이하고 나서는, 사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 따위는 애초에 없었다.


하지운의 눈에 열여덟 마리의 의식의 흐름이, 머리 뚜껑을 열고 들여다본 것처럼, 여실히 드러나 보였다.

비웃음이 절로 질질 새어 나왔다.


“십팔 놈들아! 어디 능력껏 도망 다녀 봐라!”


우렁찬 조롱과 함께 하지운이 땅을 박찼다.

그의 정면에 서 있던 여우머리가 침착하게 우측으로 몸을 날렸다.

하지운의 움직임을 몇 번 보다 보니, 그가 오른손잡이라는 것을 눈치 챌 수 있었던 여우머리였다.

하지운의 눈을 직시하면서, 그의 좌측으로 움직인 것은 칭찬할 만한 반응이었다.

하지만 여우머리들이 그새 잊고 있었던 것이 있었다.


“받아라! 쇠말뚝!”


침략자 놈이 어떤 꼬라지를 하고 있든, 결국 놈은 도구를 쓰는 인간이라는 것이다.

여우머리의 머리통에 놈의 팔뚝만 한 쇠말뚝이 뚫고 지나갔다.


드레이시 가문의 가전무공이 다시 등장했다.

위드링튼의 로저가 대충 들고 휘둘렀던 쇠붙이가 대를 이으면서 가문을 상징하는 심벌이 되어 있었다.


실제로 드레이시 가문의 문장에도 쇠말뚝 달린 사슬이 그려져 있다.

원래의 문장에는 검은 바탕에 용의 머리를 달고 있는 황금색 사자가 그려져 있었다.

그런데 가주들이 대를 이어서 쇠말뚝을 들고 설쳐 대니, 언젠가부터 말뚝 달린 사슬이 가문의 상징처럼 여겨지게 되었다.


그리고 전전대 백작은 아예 쇠말뚝을 문장에 그려 넣도록 하였다.

용머리 사자의 발밑에 엑스 자 모양으로 말뚝이 달린 사슬 두 개가 그려져 있는데, 그 집구석 인간들은 그게 어지간히도 마음에 들었는지, 디자인을 바꾸려는 시도 한 번 없이 잘만 사용해 왔다.


검술이 장인의 경지에 이른 로저였지만, 막상 들고 다니면서 휘둘러 댄 것은 주로 망치였다.

그리고 그다음으로 많이 들고 설쳤던 것이 말뚝 달린 사슬이었다.


이유는 손맛이 좋아서이다.

씨도둑은 못한다고, 그 집안 가주들이 대부분 시원하게 때려 부수는 것을 선호해 왔던 것이다.


여우머리들이 피구라도 하자는 듯이 살살거리며 도망 다니니, 하지운으로서는 화끈한 시각적 효과가 필요해 보였다.

놈들의 마음에 깊은 울림을 주어, 회피 동작이 재기 발랄하지 못하도록 만들려는 것이었다.

로저가 잘하던 짓 중에서도, 시각적으로 가장 삭막한 것 중 하나가 바로 이 짓이다.


“정말 즐겁다! 어릴 때도 못해 본 놀이를 너희들이랑 해 보는구나! 받아라, 멍멍아!”


갯과 동물과 처음으로 원 없이 놀아 보는 하지운이었다.

어릴 적부터 몸이 약한 데다가, 남들과 어딘가 다른 듯한 자신을 감추려고만 하다 보니, 친구라고 할 만한 인간이 없었다.

친구가 없다 보니 어릴 적 추억이라고 할 만한 것도 당연히 없었다.

심지어 알레르기 때문에 동물도 키우지 못했다.

기억하면 할수록 암울하기만 한 하지운의 어린 시절이었다.


자신을 피해 나무를 밟고 머리 위로 스쳐 지나가는, 여우머리의 오른 다리에 사슬을 던져 감았다.

사슬이 제대로 감긴 것을 보자마자, 신나게 잡아당겼다.

발버둥을 치면서 질질 끌려온, 털이 보드라운 여우를 꼭 안아 줬다.


“아오, 귀여운 멍멍이!”


귀여운 여우가 금세 시뻘건 벌집이 되었다.


어릴 적 동심으로 돌아간 하지운 덕에 여우머리들이 느끼는 공포심이 배가 되었다.

긴장이 지나치면 몸이 무거워지고 금세 지치게 된다.

살 확률보다 죽을 확률이 훨씬 높은 상황에서, 동족들이 지나치게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이하고 있다.


그 와중에 대적 중인 침략자 놈의 정신 상태도 극도로 온전치 않아 보인다.

여우머리들로서는 미칠 지경이었다.

미친놈이 흉기를 휘두르는데, 도망도 못 치고 있는 것이다.

여우들의 몸과 마음이 고달프기 짝이 없었다.


‘지운아! 지속 시간 삼십 초 남았어! 쓰던 거 버리고 새걸로 갈아야 해!’

‘오케! 고마워!’


승아 덕에 상태창 띄우고, 타이머 확인할 필요가 없다.

또 다른 여우 놈의 목에 사슬을 감은 하지운이 놈을 잡아당겨 자신의 뒤편으로 날려 버렸다.


하지운의 등에다 대고, 온 면상을 일그러뜨린 채, 바람의 칼날을 날리던 족장님의 눈앞에 갑자기 여우머리 한 마리가 날아들었다.

충성스러운 수하의 몸을 난도질할 수 없었던 족장님이 급히 마법을 거두고 놈을 안아서 받아 줬다.

그 잠깐 동안 하지운은 사용 중이던 가시들을 사방으로 날리고, 새로운 가시들을 올려 세웠다.


갑자기 숲이 쥐 죽은 듯이 고요해졌다.

격하게 시끄럽던 곳이 한 순간에 정적만이 남게 되었다.


족장님이 자신의 품 안에서 피를 게워 내며 죽어 가는 수하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자꾸 미끄러져 내려가는 수하를 조심히 안아서 바닥에 눕혀 주었다.

그러던 중에 수하의 등을 보니, 수십 자루의 꼬챙이가 틀어박혀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수하들이 전부 꼬챙이를 몸에 꽂은 채 바닥에 처박혀 있다.

서 있는 존재가 자신과 침략자 놈 단 둘뿐이다.


백 년을 넘게 숲의 한편에서 왕 노릇을 해 오면서, 오늘 같은 날이 올 줄은 몰랐다.

여우머리 족장이 하지운을 응시하며, 주먹을 꽉 쥐었다.

금세 손가락 사이로 피가 흘러나와, 뚝뚝 떨어졌다.

그리고 얼마 안 가 바닥에 작은 웅덩이를 만들었다.


물론 족장 놈은 제 손에서 피가 나는지도 모르고 있다.

이렇게 무기력할 수가 없다.

수하들이 스물이 넘게 죽어 나갈 동안 침략자 놈의 껍데기도 뚫지 못했다.


족장 놈은 인간을 처음 상대하는 것이 아니다.

얼마 전에도 다른 족장들과, 떼를 지어 들어온 놈들을 고양이가 쥐를 가지고 놀 듯이 농락하면서 몰살시킨 적이 있다.

그중에 몇 놈을 살려 두고 발가벗긴 채 실컷 가지고 놀았다.


개중에 가장 화려한 껍데기를 걸친 놈들과 암컷 몇 놈을 살려 두고 온갖 장난을 다 쳐 봤는데, 며칠 안 가서 정신을 놓으려고 하였다.

미쳐 버리면 재미가 없어서 숲 밖에다 풀어 주었다.


살려서 돌려보내야 인간 놈들에게 경고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울면서 도망치는 놈들이 암수 할 것 없이 똥오줌을 갈기면서, 저희들이 싼 것을 밟고 자빠지는 짓을 반복하고 있었다.


숲속에서 풀어 줬으면, 살아서 나가지도 못하고 죽었을 것 같았다.

돼지머리 같은 하찮은 것들을 만나도, 위험해 보일 정도로 정신이 무너져 있었다.

거의 미치기 직전까지 망가뜨린 여우들이었다.


몇 년 전에는 신기하게 불을 쓰는 인간 놈도 만났었다.

자신의 수하들을 상대로 깽판을 치고 있다기에, 다른 족장들과 합심해서 놈을 마중 나갔었다.

가는 도중에 물 마법을 쓰는 친구도 당연히 불러냈다.


여러 족장들과 한달음에 달려 나가 신기한 놈을 관찰하니, 신기한 놈이 낯짝이 허예져 미친 듯이 달아났다.

제 수하들을 그대로 두고 제 놈만 정신없이 도주하는데, 늙은 놈이 그렇게 재빠를 수가 없었다.

뻘쭘하게 남은, 그 늙고 신기한 놈의, 수하들만 여우들의 비참한 장난감이 되어 버렸다.


그동안 인간들이 숲의 가장자리에서 까부는 것은 일상적인 일이라 그러려니 했다.

이 광대한 숲 전체를 몇 되지도 않는 족장들이 전부 지켜 주고 다닐 수는 없는 일이다.


그래도 겁 없이 숲 깊숙이 들어오는 것들은 몇 놈이 되었든 전부 찢어발겨 줬다.

그리고 그중 몇 놈은 잡아 와서, 교육용으로든 놀이용으로든, 알아서 써먹으라고 각 마을마다 분배해서 나눠 줬다.

족장 놈에게 인간이란 딱 그 정도의 생물체였다.


꼭두새벽부터 이상한 인간 한 놈이 도마뱀들의 영역으로 우회해서 들어와 설치고 있다기에, 부하들과 가벼운 마음으로 달려왔다.

얼른 죽여 버리고 돌아가서, 설친 잠을 마저 자려는 생각뿐이었다.


꼴랑 한 놈을 죽이러 오는 마당에, 다른 족장들을 불러 모을 생각은 당연히 안 했다.


족장 놈은 ‘죽음이 이렇게 갑자기 닥쳐올 줄은 몰랐다.’는 생각을 하면서, 양손에 마력을 모았다.

죽을 때 죽더라도, 바닥에 뒹굴고 있는 수하들 보기에, 부끄럽지는 않게 죽고 싶은 족장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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