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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길동 님의 서재입니다.

죽은 줄 알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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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길동
작품등록일 :
2023.06.10 19:32
최근연재일 :
2024.07.01 0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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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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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23.08.01 0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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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시련 (11)

DUMMY

51화


은빛 가시를 세운 채 다가오는 족장 놈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하지운이 갑자기 입고 있던 옷을 전부 벗어 버렸다.

크롭티, 레깅스, 부츠를 벗어 ‘수납장’에 던져 넣고, 올누드로 족장 놈 앞에 섰다.


족장 놈이 무슨 이상한 상상을 했는지, 뒤로 주춤주춤 물러서기 시작했다.


“이 새끼가... 야, 너도 팬티 벗고 돌아다니면서... 왜 내가 벗으니까 부담스러워해?”


놈이 수줍은 듯 볼을 붉히더니, 부끄러운 듯 몸을 배배 꼬기 시작했다.

하지만 하지운의 마음에는 어떤 파장도 일으키지 못했다.

그의 마음은 여전히 명경지수와 같았다.


놈이 아무리 고운 은빛 털에 귀여운 외모를 하고서 교태를 부린다 해도, 가랑이 사이에 결코 타협할 수 없는 것이 덜렁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동안 꿈틀거리던 놈이 갑자기 눈알을 희번덕대면서, 어떤 사전 경고도 없이 가시를 발사해 버렸다.

코앞에서 어떤 보호 수단도 없이 방심한 듯 보이는 하지운에게 회심의 일격을 날린 것이다.

놈의 입가에 득의양양한 비소가 퍼졌다.


그러나 놈의 입꼬리가 다 올라가기도 전에, 도로 쏜살같이 내려가 버렸다.


어느새 하지운의 온몸이 가시로 덮여져, 흡사 가시로 만든 갑옷을 걸친 듯한 모습을 하고 있어서였다.

그의 주변에는 수십 자루의 꼬챙이가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하지운의 머리통부터 발가락 끝까지, 모든 피부가 십 센티미터에서 이십 센티미터 길이 사이의 가시들로 촘촘하게 덮여져 있었다.

온몸에 있는 잔털까지 다 일으켜 세운 듯한 모습이었다.


정수리를 제외한 머리통의 털들은 일부는 위로 일부는 아래로 뻗어 있어, 텅 빈 정수리와 귀 주위 그리고 면상을 완벽하게 보호하고 있었다.


“살아 보려고 애쓰는 중에 미안하지만, 다시는 그런... 종류의 노력은 하지 마라. 지금부터 너와 해야 할 일이 정말 많은데, 다짜고짜 죽일 뻔했다. 정말 위험했어, 네 목숨이. 계획이 완전히 다 꼬일 뻔했다는 말이지.”


‘이 새끼한테 이런 기술을 주입시킨 범인이 설마 너냐?’

‘어흑... 저, 절대 나, 나흑... 아냥. 나, 난 모르느흐윽 이, 일이야으.’

‘마저 웃고, 천천히 대답해. 허파도 없는데 어떻게 바람이 든 건지...’

‘너, 너무 웃겨... 육체가 없는데... 눈물이 날 것 같아... 이, 이것도 일종의 환통인가...’

‘네가 아니면 직업이 공주였다는 너네 부서 언니들인가? 저놈한테만 한 거지? 개돼지들이나 소 같은 것들까지 저 지랄하지는 않는 거지? 족장 놈들의 고유한 특수 능력 같은 건가?’

‘모, 몰라! 정말 나는 아예 모르는 일이야. 저런 테크닉을 구사할 줄은, 나도 상상조차 못했어. 그리고 ... 말이 언니지. 조상님뻘 되는 분들에게 은밀한 취향 같은 걸 물어볼 순 없잖아. 정말 누구 취향이 반영된 건지 전혀 모르겠어. 짐작도 안 가.’

‘흐음...’

‘그리고 뭣보다 네가 옷을 다 벗어제껴서 생긴 일이잖아. 쟤도 뭔가 오해를 했나 보지.’

‘옷이 꼴랑 세 벌 남았는데, 그걸 입고 가시 능력을 쓰란 말이야? 능력 한 번 쓸 때마다 옷들이 걸레가 될 텐데!


회심의 첫 공격이 막혔다고 호저머리 족장 놈이 그새 좌절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운이 승아와 오붓한 대화의 시간을 가지는 동안에도, 놈은 쉴 틈 없이 가시를 쏴 갈기고 있었다.


하지운이 직접 복싱을 해 본 것은 아니지만, 글을 쓰기 위해 여기저기 검색하면서 주워들은 얘기들은 많다.


체육관에 나온 지 얼마 안 된 입문자들의 경우 기초만 계속 가르치면, 지겹다고 때려치우는 경우들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스파링 한번 해 보라고 링에 올려놓으면, 상대의 글러브에 안면을 몇 번 부딪힌 후, 상대방이 살짝만 움직여도 움찔거리면서 눈을 감아 버리는 애들이 종종 있다는 것이다.


이런 애들을 눈을 부릅뜨고 주먹을 보면서 피하게 만들려면, 헤드기어 씌워서 링에 계속 올리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고 한다.


지금 하지운 자신이 족장 놈을 스파링 파트너 삼아, 그 짓을 하고 있는 것이다.


열흘 동안 호저머리들을 잡아 죽이고 다니면서 여실히 느낀 점이 있다.

자신에게 약간이나마 우려될 정도의 첨단공포증이 뿌리를 박아 가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뾰족한 것을 보면 조금 움찔거리는 정도이지만, 이 동네에서는 그 작은 주춤거림조차도 죽음으로 직결될 수 있다.


자신에게는 헤드기어 역할을 대신 해 줄 ‘가시’ 능력이 있다.

그동안은 가시 능력의 지속 시간이 짧아 시도해 보지 못했지만, 이제는 가능하다.

놈을 시작으로 저 마을 안에서 숨죽이고 지켜보는 암컷들까지 다 불러내서, 꼬챙이 발사대 역할을 시킬 것이다.


굳이 ‘가시 투사’ 능력을 백 레벨까지 찍겠다고, 남아 있는 노약자들까지 싹 다 죽일 생각은 없다.

하지만 살려 주는 대가로, 자신의 심리 치료사 역할 정도는 맡길 생각이다.


뾰족한 흉기에 익숙해지겠다고 마냥 차렷 자세로 버티고만 있던 것은 아니다.


왼발을 조금 앞으로 내밀고, 안쪽으로 향하게 살짝 틀었다.

오른손은 살짝 주먹을 쥔 채로 오른뺨 옆으로 들어 올리고, 왼팔에 힘을 뺀 상태로 가볍게 앞으로 내밀었다.

엉덩이는 뒤로 빼지 않고, 허리는 펴고, 턱은 안으로 당기면서 그럴듯한 복싱 자세를 만들었다.


그 자세로 몸통에 날아오는 가시는 왼손으로 잽을 치듯이 쳐내고, 안면으로 오는 것은 오른손으로 쳐냈다.

첨단공포증 치료를 위해 만든 자리인데, 나름 운동도 되고 여러모로 득이 되는 시간이었다.


‘나도 의대 나온 건 아니라서 잘 모르겠지만, 나쁘지 않은 시도 같아. 크게 다칠 위험도 없고. 저 흉측한 꼬챙이 같은 것들에 적응도 하고. 네가 성급하게 미션 수행부터 하겠다고 달려들까 봐 걱정했는데... 역시 뭔가 계기가 있어야... 다시 전생의 신중한 모습이 나오는구나.’

‘칭찬으로 한 말이지?’

‘물론이지!’

‘여기 와서 한동안 뽕에 차서 설쳐 대는 날 보고, 되게 불안했나 봐?’

‘그걸 말이라고! 폭삭 늙는 기분이었어. 물가에 내놓은 아이를 보는 엄마의 심정이...’

‘잠깐, 얘 잔털까지 다 쓴 모양이다. 좀 있다가 얘기할까?’

‘응.’


승아와의 대화를 멈추고, 몸의 모든 털을 탈탈 털어 버린 족장 놈에게 다가갔다.


놈이 식은땀을 흘리며 목젖을 움직였다.

긴장해서 마른침을 삼키는 모양이다.

그래도 족장이라고 두 다리를 굳건히 하고, 고개를 빳빳이 들고 있었다.


가시를 도로 털로 되돌린 하지운이 수납장에서 레깅스를 꺼내 입으면서, 말을 건넸다.


“긴장할 거 없다. 당장 죽일 생각은 없으니, 마음 편하게 쉬면서 얼른 털을 재생시켜라. 네가 나와 이 짓을 하면서 정신이 며칠이나 버틸지는 모르겠지만, 나도 이 짓을 열흘 이상 할 생각은 없다. 알아들을 리는 없겠지만, 네가 많이 힘들어 할까 봐 미안해서 미리 해 주는 말이다.”


당연히 알아들을 리가 없다.

그래도 족장 놈도 눈치가 있는데, 하지운의 행동을 보고, 그의 의도를 아주 못 알아들은 것은 아니었다.


옷을 주섬주섬 입은 하지운이 적당한 바위를 찾아 걸터앉아서, 자신을 주시하고 있었다.

자신의 털이 다 빠지자마자 공격 의사가 없음을 밝히고 기다려 주는 제스처를 취하는데, 못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족장 놈도 조용히 서서 숨을 고르며 하지운을 노려봤다.

안면에 자리 잡던 두려움을 그새 결연함과 비장함으로 밀어냈다.


어차피 도망칠 수도 없다.

등 뒤에 있는 마을에는 일족의 암컷들, 새끼들 그리고 노약자들만이 남아 있다.

그들 모두 족장인 자신 외에는 더 이상 의지할 존재가 남아 있질 않았다.


숨이 붙어 있는 한 싸우는 수밖에 없다.


저들의 부모, 자식, 남편을 자신의 방패로 소모했다.

침략자의 체력을 갉아먹는 수단으로 말이다.

그래 놓고 혼자 살겠다고 달아날 정도로 쓰레기는 아니었다.


‘있잖아, 쟤들 성격을 하나하나 저렇게 설정해 놓은 거야? 일부러 폼 나게 만들어 보고 싶어서 말야.’

‘아니, 그냥 짐승들 습성 같은 걸 대부분 그대로 가져 왔을 걸. 미안해... 구현에 직접 참여한 것은 아니라서 정확하게는 몰라. 그래도 괴물들 성격이 멋있어 보여서 뭐 하게? 그 언니들 그런 것까지 신경 쓸 정도로 한가하지 않았어.’

‘그놈의 미안해... 안 미안해해도 돼. 미안이란 단어는 빼고 얘기 하자.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야. 특히 족장 놈들이 끝까지 멋있으려고 해서 말야. 종족을 가리지 않고.’


그새 털을 모두 재생시킨 족장 놈이 앞으로 나섰다.

등 뒤를 잠시 돌아보더니, 다시 하지운을 응시하면서 주먹을 꽉 쥐었다.


‘봐! 존나 멋있잖아. 저런 놈이 아까 그 짓은 왜 한 거야.’

‘그만큼 절박했겠지...’


팔 일을 더 버텼다.

더 이상은 족장 놈의 정신이 견뎌 내지 못할 것 같았다.

하지운이 보기에도, 이 이상 괴롭히면 마음이 꺾인 놈이 일족이 보는 앞에서 정신 줄을 놓고 달아나 버리는 추태를 보일 것 같았다.


깔끔하게 놈의 가슴을 뚫어 명예를 지켜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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