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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길동 님의 서재입니다.

죽은 줄 알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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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길동
작품등록일 :
2023.06.10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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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05 0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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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쪽

여우의 숲 (3)

DUMMY

54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별이 한가득 쏟아져 내릴 것 같은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검은 장막에 셀 수도 없이 많은 밝은 점들을 찍어 놓은 것 같았다.

멍하니 보고 있으니, 뭔가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에 머리가 몽롱해지는 하지운이었다.


머리가 어지러워 하늘을 보았더니, 더 멍해지는 기분이 들어 도로 고개를 숙였다.

하지운의 시야에 돼지머리 괴물이 땅바닥에 드러누운 채로 다시 등장했다.


“이 새끼는 도대체 뭐지? 기면증인가? 그런데 왜 숨도 안 쉬어? 수면 무호흡증도 있는 건가? 왜 똥을 싸던 상태로 자빠져 자는 거지? 혹시... 몰카 같은 건가?”


너무도 기묘한 상황에 갈피를 잡을 수 없었던 하지운은 결국 썸녀에게 다시 조언을 구했다.


‘승아야, 혹시 무슨 상황인지 알아? 이거 무슨 돌발 이벤트 같은 거야?’

‘아니... 전혀 모르겠는데... 그리고 우리 부서 이상한 곳 아냐. 무슨 이벤트를 이렇게 더럽게 만들어.’

‘아! 승아야 오해하지 마. 나 정말 그런 뜻으로 물은 건 아냐. 너무 당황스러워서... 혹시 무슨 의도된 미션 같은 것이 있나 하고 물어본 거야.’

‘이건... 진짜 모르겠는데. 근데 얘 죽은 거야. 자는 거 아냐. 죽은 거 확실해. 영혼이 소멸되는 걸 다 봤거든.’

‘아, 진짜! 죽은 거구나... 지병이 있었던 건가? 그런데 다 싸지도 않고, 갑자기 가는 수도 있구나.’

‘뭐, 그럴 수도 있지. 심장 질환 같은 경우 화장실에서 갑자기 발생할 수도 있잖아. 그런 경우 아닐까?’

‘생각해 보니 무섭네... 급사 같은 경우 말야. 뭐 하던 중에 발생할 지 알 수가 없잖아.’

‘하긴... 넌 수시로 야동을...’

‘다시 시작하는 거야? 오늘은 그만 놀릴 생각이었는데... 밤새 하자는 거야?’

‘아니! 내가 괜한 말을 했네... 나 먼저 잘게. 너도 볼 일 보고 일찍 자. 하루 내내 노를 저었잖아. 좀 쉬어야지.’

‘응, 잘 자.’


승아의 전투 의지를 단숨에 꺾어 버린 후, 다시 발 앞의 돼지머리 시신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너무도 안타까운 죽음에 저절로 새어 나오는 한숨을 길게 내뱉으며, 돼지머리의 극락왕생을 빌었다.

제법 성의 있는 조문을 다 마치고 나서야, 하지운은 천천히 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왠지 삶이라는 것이 너무도 덧없다는 생각에 뭣 같은 냄새에도 불구하고, 차마 자리를 뜰 수가 없었던 것이다.


“돼지 새끼가... 잡식성이라서 그런가? 똥내가... 지독하네. 오늘 저녁은 물만 먹고 말아야겠다.”


솔직히 하지운은 이 곳에서 돼지머리를 만날 거라는 생각을 손톱만큼도 하지 않았다.

당연히 여우머리 괴물들의 영역일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제대로 싸울 준비를 하고 기다린 거였다.


‘잘 뒈지지도 않는 도마뱀들이 수시로 기어 나오는 곳이라, 여우 놈들이 짜증 나서 비워 둔 건가? 근데... 여우가 파충류를 먹나? 먹잇감이 아니라면... 굳이 근처에 자리 잡을 가치를 못 느끼긴 했겠지.’


자신이 싼 것 위에 대자로 누워 있는 돼지를 돌아보며, 하지운은 생각을 이어 갔다.


‘그 자리에 돼지 새끼들이 슬금슬금 기어들어 왔다면 말이 되긴 하지. 여우들 입장에야 진짜 맛 좋은 사냥감들이 제 발로 기어들어오는 것이니, 못 본 척했을 것이고.’


추론을 끝마쳐 가던 중 하지운의 감각에 또 다른 움직임이 관측되었다.

이번에도 돼지인 것 같다.


‘쓸모없는 것들이 계속 튀어나오네. 흡수할 가치도 없는... 능력이나 주는 것들이.’


정말 괴이하게도 방금 죽은 돼지머리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하지운의 상태창에 메시지가 떴다.

그것 때문에 더 혼란스러웠던 것이다.


「능력 ‘번식력’을 강탈하셨습니다. 흡수하셔서 사용하시겠습니까?」


‘내 손으로 직접 죽여야 능력이 발동되는 거 아니었어? 옆에서 임종을 지키기만 해도 강탈이 되는 거였어? 진짜 알 수가 없네...’


승아가 들을까 봐 흡수할 가치도 없다고 했다.

이건 아무리 승아라도 농담으로 받아들이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진심으로 그녀를 기분 나쁘게 만들 생각은 추호도 없는 하지운이었다.


‘바로 삭제할까... 그런데... 이 능력이 이렇게 엄청났다니... 미친 능력인데...’


‘번식력’의 능력 정보를 읽고 하지운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불임 환자도 정자왕... 난자왕으로 만들어 준다... 살아생전 발기 부전과 폐경이 오지 않는다... 경험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흡수하는 즉시 능력이 완벽하게 적용된다...’


이곳이 살벌한 전쟁터만 아니라면, 하지운은 인류가 꿈꾸던 최상의 능력 중 하나를 얻은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끔찍한 곳에서, 전투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능력을 위해, 남은 열여덟 개의 자리 중 하나를 내줄 수는 없다.

눈물을 머금고 삭제를 누르려는 순간, 다급한 승아의 외침이 있었다.


‘잠깐만 지운아! 그거 지우지 말고... 그냥 둬 봐... 혹시 모르잖아...’

‘승아 너도 그렇게 생각하는구나! 역시 사려 깊어, 넌. 내가 너무 생각이 짧지?’

‘아니야... 아직 젊으니까...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도 있어...’

‘맞아! 언제까지고 젊은 건 아닌데. 언젠가는 나이를 먹고, 고민할 나이가 올 텐데... 너랑 상의도 없이, 중요한 결정을 성급하게 할 뻔했어. 이건 내가 너무 경솔했어. 깊이 반성할게!’

‘지운이 네가 그렇게 말해 주니, 나도 정말 기뻐. 앞으로는 중요한 결정은 같이 상의해서 하자. 우린 남들보다 살날이 좀 길잖아. 서로 배려하고 존중하는 마음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 같아.’

‘내 생각도 그래! 그럼 이 능력은 상태창에 보류 상태로 둘게. 승아 네가 아니었으면 정말 큰 실수할 뻔했어. 네가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뭘... 나 그럼 다시 자러 갈게.’

‘응! 좋은 꿈 꿔.’


이성이랑 스킨십 한 번 못해 본 것들이 욕심만 그득했다.

죽어서도 탐욕을 버리지 못한 둘이었다.


승아 또한 자신과 같은 마음이라는 생각에, 하지운의 입가에 따뜻한 미소가 머금어졌다.

승아와의 오붓한 대화를 떠올리며 여운에 잠겨 있던 하지운 앞에 돼지머리 두 마리가 나타났다.


그 둘은 하지운이 근처에서 빤히 보고 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고, 성급한 짓을 저질렀다.

주변을 살피는 수고조차 보이지 않고, 다짜고짜 딥 키스를 시전한 것이다.

한 마리가 암컷이었던 모양이다.


‘살다 살다 돼지가 키스하는 걸 보다니... 속이 뒤집힐 것 같다. 이것들이 날 굶기려고 작정했구나.’


극도의 분노를 느낀 하지운이 어슬렁거리며 그들 앞으로 나섰다.

옆에서 들리는 발자국 소리에 화들짝 놀란 커플이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이곳에서 출몰하는 두발짐승 중에 자신들이 제압할 수 있는 종자는 없다.

극도의 공포가 엄습하는 상황에, 돼지 커플은 서로 꼭 끌어안은 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이 둘은 그저 스릴을 즐기는 커플이었다.

요 근래 도마뱀들이 조용해진 것에 고무된 남녀가 포식자들의 영역에서 스릴 넘치는 육체관계를 도모한 것이다.


사실 오늘이 이곳에서 관계를 가진 지 열흘째 되는 날이다.

매일 밤 이곳에서 상상도 해 본 적 없는 엄청난 전율을 느끼고 있었다.

그 쾌감에 중독된 커플은 하루도 관계를 거를 수가 없었고, 결국 흉신악살 같은 놈을 만나 비극적인 결말을 맞게 되었다.


이 와중에도 꼭 끌어안고 금슬을 자랑하는 돼지들을 보며, 하지운의 분노 게이지가 슬슬 상승했다.


“나도 승아랑 아직 못해 본 걸... 이 돼지 새끼들이... 연인이 함께하는 여행이니 가는 길이 외롭진 않겠구나. 당장 보내 줄 테니, 내세에서도 아름다운 사랑 변치 마라.”


양 손등에 가시를 하나씩 세웠다.

둘의 머리통에 하나씩 꽂아 줄 생각이었다.


거구의 인간처럼 생긴 악귀가 손등에 돋아난 가시들을 떼어서 양손에 잡고, 눈에 거슬릴 정도로 불량하게 걸어오고 있다.

하지만 이 섬뜩한 광경을 보지 않았더라도, 놈의 몸에서 점점 거세게 흘러나오는 살기만으로 커플은 죽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착 달라붙어 있던 남녀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똥을 지리기 시작했다.

누구보다도 그들의 심정을 잘 헤아려 줄 수 있던 하지운이지만, 구토가 치미는 것만은 어쩔 수가 없었다.


“내일 아침도 굶겠다! 이틀간 단식을 선언한다!”


승아가 만들어 준 맛있는 식사를 내일까지 거른다는 생각에, 하지운의 인내심이 바닥까지 고갈되었다.

살기가 폭죽 터지듯 터져 나왔다.


그 순간 자빠져 있던 돼지 두 마리가 제 놈들 가슴을 세차게 움켜쥐었다.

격렬하게 몸부림치며 가슴을 쥐어뜯는데, 생살이 뜯겨 나가고 피가 뿜어져 나왔다.

그러다 언제 난리를 쳤냐는 듯 금세 조용해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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