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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홍기석입니다.

사희곡 (捨姬曲 : 버린 여인의 노래)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현대판타지

홍기석
작품등록일 :
2019.05.13 19:38
최근연재일 :
2021.02.19 06:00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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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70,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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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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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산 밖에 난 범 2

DUMMY

2


1543년 1월.


“꺄악!”


새해를 맞이한 기쁨도 잠시 별안간 화마가 동궁을 뒤덮었다. 나인들은 세자빈과 함께 하나둘 바깥으로 뛰쳐나왔다. 안을 지키던 내관들도 마찬가지였다. 모두가 속히 몸을 피하기 바빴다.


하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그럼에도 세자의 모습이 발견되지 않았다. 뒤늦게 알아차린 신하들은 아연실색했다. 커다란 물동이 몇 개로는 어림없을 만큼 규모가 큰 화재였다. 이대로 안에서 꼼짝 못한다면 그 마지막이 불 보듯 훤했다.


“저하! 어디 계십니까!!”

“세자 저하!!!”


먼저 탈출한 자들에게 가능한 일은 목청껏 소리를 지르는 일뿐이었다. 밤늦은 시간에 갑작스럽게 일어난 화재였다. 깊숙이 잠든 나머지, 여태까지 상황을 인지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뜨거운 불길로 인해 유일한 출구도 막히기 전에 어떠한 방법을 써서든 빨리 깨어나게 만들어야 했다. 용기를 발휘해 들어가려는 자도 있었지만 그 시도를 비웃듯 지붕에서 시커먼 잔해들이 떨어졌다.


우지끈!


애절한 음성들이 그의 귓가에 닿고 있었다. 처음부터 그는 깊이 숙면하고 있지 않았다. 편안한 잠은 아직도 그에게 먼 이야기였다.


좀처럼 잠들지 못하는 육신을 달래기 위해 세자가 선택한 방법은 독서였다. 평소처럼 오늘도 호롱불 하나에 의지하여 책을 읽고 있었다. 그러다 난데없는 사고를 맞이하고 말았다.


그럼에도 그는 돌처럼 가만히 앉아 있었다. 차디찬 날씨에 일어난, 원인마저 불분명한 화재였다. 어째서 늦은 시간에 일어났을까, 동궁이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조금만 생각해도 예사롭지 않은 사고임을 금방 알 수 있었다.


세자는 겸허하게 눈꺼풀을 내렸다. 특정한 누군가의 의지가 반영된 결과라면, 자신은 이 화염에서 어떠한 태도를 취해야 좋을까. 그 고민들이 지금까지 그의 육신을 단단히 붙들었다.


그 사이에 화염의 크기도 불어나고 있었다. 덕분에 온몸이 뜨끈했다. 머지않아 곳곳에 번져서 나중에는 이 몸까지 삼킬 것이었다.


당연히 무서웠다. 어떤 생물도 두려워하는 물질이 아니던가. 피부에 닿자마자 끔찍한 형태로 태우리라고 생각하니, 당장 밖으로 도망치고도 싶었다.


하지만 그 길로 목숨줄을 부지한들 무엇이 달라지겠나. 기다리는 풍경은 멀쩡히 살아 돌아온 저를 보는 중전의 매서운 눈이었다.


이 자리에서 생을 마감하면 적어도 그녀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만개할 터였다. 왕실의 유일한 적통인 동생은 곧 세자로 책봉되고, 더 이상 조정에는 관련 사안으로 피바람이 불지 않겠다.


이 목숨 하나로 대(代)마다 반복되던 악순환을 완전히 없애는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가슴 위까지 차오른 공포가 차츰 옅어졌다. 무의미한 희생이 아니었다. 모두를 위하는 방법이라고, 그는 굳게 믿었다.


“저하!! 어째서 아직 계십니까!!!”


그런데 나이 지긋한 내관이 별안간 안으로 들어왔다. 지금까지 이쪽의 행방을 찾았던 모양이었다. 그런 목적이 아니라면 이제는 숨쉬기조차 힘든 공간에 여태 남았을 리가 없었다.


어린 시절부터 그를 보필한 김 내관이었다. 왕실의 어른들보다 더 많은 시간을 함께한 만큼 때때로 아비처럼 생각하며 기댄 적도 빈번했다. 죽음을 각오한 당사자조차 겨우 견디는데 아직 탈출하지 않았다니, 세자의 마음은 당연히 편하지 않았다.


“나가거라.”

“어찌 그러한단 말입니까?! 저하께서 여기 계시겠다면, 소신(小臣) 역시 그리하겠사옵니다!”

“필요 없다! 어서 나가래도!”


그는 처음으로 단호하게 소리쳤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앉은 자리에서 꿈쩍하지 않을 신하의 성정을 누구보다 잘 아는 탓이었다.


그러나 부질없는 엄포였다. 뜨겁다 못해서 눈부신 불이 옆까지 도달했음에도, 내관은 조금도 움찔거리는 기색이 없었다. 때문에 세자의 마음은 더욱 착잡해졌다.


무고한 죽음부터 막을까, 아니면 후손들을 위해서 사이좋게 죽을까, 지금의 망설임이 뒤늦게 살고 싶은 욕망에서 오지 않았을까. 조금 전까지 말끔하게 정리된 줄만 알았던 결심이 갑자기 흔들리고 있었다.


“소신은 생각이 미천하여··· 저하의 의중을 헤아리지 못하겠사옵니다!”


의지를 굽히지 않는 내관도 답답한 마음은 똑같았다. 세자는 분명히 망설이고 있었다.


하지만 살고자 하는 두려움이 만든 결과가 아니었다. 자신으로 인하여 엉뚱한 사람이 죽을지 모른다는 책임에 가까웠다. 비난을 받아 마땅한 감정은 아니지만 역시 걱정이 앞섰다.


이리 유약한 심성으로 장차 맞닥뜨릴 여러 난관들을 어떻게 극복하는가. 이대로 두면 이 위기에서 벗어나더라도, 언젠가 비슷한 고비를 고면하지 못할 것이었다.


“어마마마께서 내 죽음을 원하신다. 따르는 것이 진정한 효가 아니겠느냐.”


딱하고 진중한 고백이었다. 내관은 고개를 들었다. 드디어 어울리지 않게 고집부리는 연유를 알았으니, 이제는 설득할 순서이기 때문이었다.


까닭은 예상한 그대로였다. 어린 시절부터 상당한 시간을 함께했던 그녀였다. 서서히 달라진 태도가 갑갑하겠지만, 완전히 이해 못하지도 않겠다. 그렇게 따뜻했던 추억이 여전히 머릿속에 남은 모양이었다. 그래서 쉬이 미련을 버리지 못하겠다.


상대의 마음은 이미 한참 전에 변모했거늘, 어른에 의해 좌우되는 아이의 마음이 바로 이러할까. 생전 처음으로 왕후가 미워졌다. 어떻게 이토록 상처를 주지 못해 안달인가. 아무리 이 나라를 평정하는 권세가 눈앞에 있더라도, 항상 그들을 배려하려 노력하는 자식에게 이럴 수 없었다.


물론 세자 본인도 지양해야 하는 태도였다. 이 나라의 종사가 달렸으니 멋대로 결정할 목숨이 아니었다. 다소 비겁해 보이더라도 끝까지 지키고자 하는 의지가 있어야 했다. 그 부재로 흔들릴 왕실의 공기와 백성들을 생각한다면, 오래 고민할 문제도 아니었다.


“내관과 상관없는 일이다. 내 걱정은 말고, 늦기 전에 서둘러 나가거라.”


마음 같아서는 강제로 끌어서 함께 나가고 싶었지만, 본인의 뜻이 완강하면 소용없는 짓이었다. 쇠한 몸으로 청년과 힘겨루기를 해 보았자 이기지도 못할 뿐더러 언제든지 목숨을 내놓을 준비가 된 왕세자에게 같은 일이 또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었다.


어떻게든 이 결심을 바로잡을 만한 계기가 필요했다. 내관은 이내 정중히 이야기했다. 매캐한 연기 때문에 이제는 목청을 높이기 힘들었지만, 그녀만 생각했던 나머지 정작 다른 이들에게 소홀한 본인의 모습을 필히 돌이키기를 바랐다.


“그럼 전하께서는 어찌하셔야 합니까?”


그제야 세자는 머리라도 맞은 것처럼 멍한 표정을 지었다. 어째서 지금까지 떠올리지 못했을까. 어미와 이복동생의 처지는 이리 걱정하면서, 정작 다른 사람들은 배려하지 않았다.


내관의 말이 맞았다. 그토록 애지중지하던 자식과 헤어질 아비에게 이 무슨 불효인가, 졸지에 지아비를 잃은 부인은 장차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들의 괴로움에 대해서는 조금도 헤아리지 않은 채 여태까지 자신을 꺼리는 이들만 우려하고 있었다.


“부디 널리 보시옵소서. 저하의 그 경솔이 끝내 많은 이들을 슬프게 할 것이옵니다.”


실례도 엄청난 실례였다. 세자는 땀범벅이 된 내관을 바라보았다. 고통스러울 때마다 언제나 어미 대신 자신을 안던 사람이었다. 누구보다 온화하고도 단단했다. 그 기개는 비교적 마른 체격과 상관없었다.


그런데 그가 더는 참기 어려웠는지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좀처럼 강해지지 못하는 세자를 향한 한탄이든 함께 세상을 떠나야 한다는 두려움이든, 이유는 중하지 않았다. 요는 그렇게 만든 사람이 바로 자신이라는 점이었다.


보다 약한 자들을 돌보아도 부족할 마당에 도리어 민폐만 끼쳤다. 세자는 아랫입술을 물었다. 그리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타닥, 타닥.


불꽃이 이미 사방을 휘감았을 정도로 다소 늦은 시점이었지만, 쉬이 포기하지 않겠다. 모처럼 다잡은 마음이었다. 여기서 헛되이 사라지면, 이제까지 버텼던 충신의 노고가 너무 아까웠다.


“백돌아! 백돌아!”


비로소 귓가에 애달픈 왕의 음성이 닿았다. 어째서 지금껏 들리지 않았을까. 무너지고 타는 소리에 일부 가려졌다고 해도 존재가 지워질 소음은 아니었다.


“백돌아!!”


이렇게 선명한 목소리도 줄곧 눈치를 채지 못했다니, 사람의 마음에서 비롯되는 힘이 실로 얼마나 강한지 알려 주는 대목이었다.


다시금 결심했다. 희생하지 않고도 모두가 행복할 방법은 어딘가에 필시 있을 터였다. 처음부터 바보 같은 생각이었다. 누군가의 죽음에서 진정한 행복과 평안을 찾는 일이 말이나 되는가. 천인공노할 죄인이 대상이 아닌 이상 절대로 그럴 리가 없었다.


세자는 여전히 무릎을 꿇고 있는 내관에게 다가갔다. 더 지체했다가는 기어이 화마에 휩쓸려 둘이 사이좋게 생을 마감할 터였다. 이제야 마음을 바로잡았다. 뜻을 펼치지도 못한 채 여기서 죽으면 너무 아쉬웠다.


“내가 잠시 어리석은 생각을 하였다.”


내관은 아직도 어안이 벙벙했다. 직전과는 눈에 띄게 달라진 세자의 행동 때문이었다.


“나가자.”


그리고 이내 붉어진 눈가 주변에서 환희가 번지기 시작했다. 마주한 얼굴색만 보아도 확신이 가능했다. 그동안 어리석게 가졌던 생각에서 세자가 드디어 탈피했다.


이곳에서 무사히 나간다면, 이제는 불안한 일상에 노심초사하지 않아도 되었다. 자기 자신을 책망하는 소리도 이제 그만할 테고, 대신 건설적으로 고민하는 모습을 더 많이 보이겠다.


장성한 자식을 맞닥뜨리는 아버지가 된 것 같아서 가슴이 울컥했다. 눈물이 돌았지만 당장은 아쉽게 감상을 누릴 여유가 없었다.


내관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적잖은 시간 동안 매캐한 연기를 흡입하는 바람에 몸이 따르지 않았지만 얼른 탈출하기 위해 더 필사적으로 움직였다.


세자의 생존을 위해서였다. 도중에 기운을 잃고 쓰러진다면, 틀림없이 발목을 붙잡을 테니까. 도움이 시급한 사람을 내팽개치고 홀로 떠나는 선택지가 몹시 어려운 이였다.


“아이고! 아이고···! 백돌아!”


거센 불길에서 벗어난 직후 맞이한 아비의 눈빛이, 시간이 지나서도 흐려지지 않았다. 그런 얼굴에 더한 슬픔을 안기려고 했다니, 자식으로서 정말 못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저 꼭 부둥켜안은 채로 사죄를 반복하는 정도 외에는 특별히 참회할 방법이 없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아니다, 되었어. 이렇게 무사하니 되었다.”


하지만 아비에게 그 반성은 그다지 의미가 없었다. 무엇보다 살아서 나오지 않았는가. 안에서 어떠한 생각을 했든 이보다 확실한 반성의 선물은 없었다.


혹시라도 이 나라를 이끌어야 하는 육신이 상하지 않았을까. 한동안은 의관들이 계속 세자의 침소를 방문했다. 때마다 건재함을 증명하기 위해 세자는 심히 노력해야 했다. 누구를 나무랄 일이 아니었다. 잠깐이나마 모질게 결심한 그 자신이 자초한 결과였다.


한편 조정에서는 이 화재의 배후가 중전일 것이라는 소문이 생기기 시작했다. 명확한 증좌는 없지만 평소 세자와 거리를 두었던 만큼 정황상 가장 유력한 용의자는 맞았다. 달리 혐의를 의심할 만한 후보조차 없었다.


하지만 세자는 문제의 사안에 대해 함구를 요청했다. 의심할 만한 증거가 발견된다면 모르겠으나, 더는 심증으로 억울한 사람이 생기면 안 된다는 주장이었다.


진즉에 경험하지 않았는가. 그러니 다시는 똑같은 비극을 반복하지 않겠다. 이번에는 그 때 다짐했던 마음을 끝까지 관철하겠다.


어쩌면 그녀의 생에 최대 위기였을 터였다. 그것을 무사히 극복한 덕분일까. 중전에게 의미심장한 반응이 없었다. 심지어 전보다 태도도 훨씬 부드러웠다.


아주 사소한 변화였으나, 그에게는 굉장한 희망이었다. 위기가 기회라고 하지 않는가. 이번 사태로 그녀가 그동안 깨닫지 못했던 자식의 진심을 확인했을지 몰랐다.


그렇다면 언젠가 서로 웃는 낯으로 말하는 날이 도래하지 않을까. 갑작스럽게 변하지 못하더라도, 이 흐름이라면 생전에 충분히 기대할 법했다. 종국에는 스스로를 조르는 밧줄로 돌아올 줄 모르고 세자는 흐뭇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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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희곡 (捨姬曲 : 버린 여인의 노래)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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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6 산 밖에 난 범 3 20.11.06 22 0 14쪽
» 산 밖에 난 범 2 20.11.06 25 0 12쪽
324 산 밖에 난 범 1 20.11.03 23 0 14쪽
323 새벽달 보려고 10 20.11.03 23 0 12쪽
322 새벽달 보려고 9 20.10.30 22 0 13쪽
321 새벽달 보려고 8 20.10.30 23 0 13쪽
320 새벽달 보려고 7 20.10.27 25 0 13쪽
319 새벽달 보려고 6 20.10.27 26 0 13쪽
318 새벽달 보려고 5 20.10.23 24 0 13쪽
317 새벽달 보려고 4 20.10.23 22 0 15쪽
316 새벽달 보려고 3 20.10.20 21 0 15쪽
315 새벽달 보려고 2 20.10.20 22 0 14쪽
314 새벽달 보려고 1 20.10.16 25 0 14쪽
313 뱀의 세상 9 20.10.16 33 0 13쪽
312 뱀의 세상 8 20.10.13 37 0 12쪽
311 뱀의 세상 7 +1 20.10.13 29 1 13쪽
310 뱀의 세상 6 20.10.09 29 0 13쪽
309 뱀의 세상 5 20.10.09 28 0 14쪽
308 뱀의 세상 4 20.10.06 28 0 13쪽
307 뱀의 세상 3 +1 20.10.06 35 1 13쪽
306 뱀의 세상 2 20.10.02 40 0 13쪽
305 뱀의 세상 1 20.10.02 33 0 14쪽
304 비렁뱅이 맞돈 9 20.09.29 30 0 14쪽
303 비렁뱅이 맞돈 8 +1 20.09.29 32 1 16쪽
302 비렁뱅이 맞돈 7 20.09.25 31 0 14쪽
301 비렁뱅이 맞돈 6 20.09.25 32 0 14쪽
300 비렁뱅이 맞돈 5 +1 20.09.22 32 1 15쪽
299 비렁뱅이 맞돈 4 20.09.22 30 0 13쪽
298 비렁뱅이 맞돈 3 +1 20.09.18 34 1 12쪽
297 비렁뱅이 맞돈 2 20.09.18 44 0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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