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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홍기석입니다.

사희곡 (捨姬曲 : 버린 여인의 노래)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현대판타지

홍기석
작품등록일 :
2019.05.13 19:38
최근연재일 :
2021.02.19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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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70,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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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30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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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쪽

새벽달 보려고 9

DUMMY

9


“하지만 이건 아니야. 네가 괜찮다고 해도, 더는 내 양심이 그렇게 못해.”


첫 만남에서 다급하게 이름을 내뱉었을 때, 사실은 당황스러웠다. 하필이면 그 이름을 말하다니, 특히나 비근하지 않은 이름이라 언젠가 이쪽의 정체를 의심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도현의 반응이 의외였다. 동요하는 기색이 조금도 없었다. 아무래도 조용하게 손녀를 키운 조부모의 영향이 컸을 터였다. 부모의 일을 잠시도 입에 올리지 않았거나, 거짓으로 속여 완전히 다른 역사로 전했을 가능성이었다.


그렇다고 이제 곧 사춘기를 겪을 소녀에게 당시의 사건을 그대로 설명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아직 조부모의 지배 아래에 있었다. 앞으로 진학할 학교의 등록금을 낼 사람도 오로지 그들이었고, 마땅한 자리에 취직할 때까지 기댈 만한 가족도 오직 둘뿐이었다.


이제껏 진실을 숨긴 이유로 그들과 사이가 멀어지기라도 하면, 정하 때와 마찬가지로 그녀의 인생에 적잖이 거센 바람이 불지도 몰랐다.


그래서 그녀가 보다 안정적인 위치에 오를 때까지 비밀을 지키기로 결심했다. 그렇게 회피했던 시간이 벌써 이십 년 이상이었다. 이제는 그런 변명도 통할 시기가 아니었다.


“그러니까 여기서 끝내. 나가서 너를 제일 잘 알아줄 사람을 만나. 분명히 있을 거야. 나와 다르게 너를 진정으로 위할 사람이.”


찬용은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러한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설령 존재하더라도 자신이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었다. 아직도 과거에 발목이 잡혀 있으니까.


어떤 날은 한창 행복에 빠지게 만들면서도, 어느 날은 손으로 직접 머리를 뒤집어엎고 싶을 만큼 상당히 괴로운 기억도 동반했다. 가만히 시간을 보낸다고 해서 해소될 만한 성질이 아니었다. 기어이 벗어나도 진정한 행복이 기다린다는 보장은 없었다.


그녀가 아니면 자신이 지금 세상에 존재할 이유가 무엇인가. 그렇게 간단한 질문에도 쉽사리 대답하기 힘들었다.


“더는 날··· 죄인으로 만들지 마.”


답답한 마음에 도현은 확실히 못을 박았다. 평소 거리낌 없이 떠들어대던 성격에 굳이 침묵하는 이유는 뻔했다. 상대방의 제안이 탐탁지 않기 때문이겠다.


그렇다면 대체 언제까지 이 생활을 계속할 참인가. 지금까지 찬용이 보였던 태도라면 그녀 자신이 죽을 때까지도 가능할 것처럼 느껴졌다.


사실 이쪽만 끝까지 무시하면 아무 문제가 없을지도 몰랐다. 다 부질없는 짓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감히 누구를 탓하겠나. 자신은 분명히 떠날 기회를 마련해 주었고, 그것을 보란 듯이 외면한 이는 본인이었다.


하지만 책임이 전혀 없는 입장이라고 해도, 무조건 받기만 하는 관계는 역시 불편했다. 그렇다고 때마다 그에게 갚고 싶지 않았다. 바라지도 않았던 배려 때문에 도리어 빚만 늘어났다.


결국은 그의 한결같은 사랑이 서로를 계속 불편하게 만들고 있었다. 차라리 이유라도 확실히 안다면 이 정도로 거북하지 않겠다. 젊은 육신조차 바라지 않고 지금껏 주변을 맴도는 모습이 그저 신기했다.


처음에는 그저 질이 나쁜 동네 양아치라고 생각했다. 어린 학생에게 접근해서 환심을 사고 원하는 목적을 달성하는 즉시 아무런 인연도 아니었던 것처럼 버리듯이.


그래서 한동안은 그를 멀리하기 위해 갖은 잔머리도 굴렸다. 그러다가 우연히 상대의 정체를 알아차려 버렸고, 지금까지 포기한 채로 살아온 것이었다.


경찰과 주변 사람 모두가 어떻게 믿겠는가. 설령 믿어도 그만한 존재를 물리칠 완력과 기술조차 없었다. 상대가 접근하는 방식도 강력하게 한몫했다. 그가 정말로 위험하게 느껴졌다면, 당연히 바로 알렸을 것이었다. 뜬구름 잡는 소리 취급을 받더라도 목숨은 부지해야 하니까.


그는 절대로 뒤에서 등장하는 법이 없었다. 늘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천천히 걸어왔고, 사람들이 제법 있는 장소에서 주로 모습을 드러냈다. 오죽하면 어느 날은 친구들에게 사촌이라고 둘러댔어야 했다.


와중에 그에게 사심을 가진 친구도 생겼다. 그래서 졸업하고 만남이 뜸할 때까지 내내 성가셨다. 물론 무덤까지 지킬 비밀이었다.


“하, 하하··· 그랬어?”


그녀의 진심을 낱낱이 확인한 찬용은 겨우 안심했다. 에둘러서 말했지만 그녀의 뜻은 하나였다. 자꾸만 받아서 미안하다는 인사, 아무래도 호텔의 일이 마음에 걸린 듯했다.


상대가 이렇게 노력했음에도, 그녀 자신은 아직도 변함이 없으니까. 이번에는 확실히 이 인연을 끝내야 되겠다고 정한 것이었다. 그것이 꼭 생전의 정하와 엇비슷해 보였다.


“통했네! 그렇지 않아도 그럴 생각이었어.”


그런 마음이면 괜찮았다. 혹시라도 미움을 사지 않았을까 걱정했는데, 이런 이별이면 흔쾌히 감내할 수 있었다.


너무나도 다른 성격 때문에 날마다 잡음이 끊이지 않았던 일상이었다. 그러다 사건을 위해서 조력하는 때가 오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서로 등을 맡겼다.


이제 모든 것들을 추억의 한편으로 정리할 시기였다. 미련이 생기거나 그녀에게 강한 걸림돌로 작용하기 전에 얼른 떠나야 했다. 그녀도 원하는 만큼 지금보다 좋은 시기가 없을지 몰랐다. 멋대로 시작했던 인연이니, 끝은 그녀가 원하는 대로 정해야 마땅했다.


“이번 일로 많이 지치기도 했고··· 너에게도 시기상 이 편이 낫지 않을까 싶어서.”


도현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상대가 너무 순순하게 받아들이는 탓이었다. 보통 때라면 거리도 벌리기 싫어서 안달할 텐데, 마치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듯이 흐뭇하게 웃는 미소가 기이했다. 이쯤에서 헤어지면 어쩐지 다시는 만나지 못할 것 같았다.


하지만 어렵게 내린 결정을 돌이키고 싶지 않았다. 나름 특별한 관계라고 생각했지만, 도무지 사람 대 사람으로서는 좋아할 수가 없었다. 서로가 사이좋게 양호한 기억만을 가지고 있을 때 떨어져야 그나마 안전했다. 여기서 더 나가면 틀림없이 누가 지나치는 바람에 끝이 좋지 않을 것이었다.


“대신 부탁이 있어. 그것으로 빚을 갚으면 안 될까?”


어째 수월하게 넘어가나 했더니, 청산하지 못했던 과제가 있었다. 겸허하게 듣겠다는 취지로 도현은 그를 바라보았다. 집무실에 또 다시 진지한 기류가 흘렀다.


사실 그녀도 이렇게 정리하는 편이 나았다. 이대로 인연을 정리하면 아무것도 해 주지 못했다는 괜한 씁쓸함만 남았다. 무엇이든 마땅히 돌려줄 대가가 있다면 주고 싶었다.


그래야 앞으로 그를 떠올릴 때 꺼림칙하지 않을 것이었다. 하지만 생뚱맞은 요구라면 물론 그대로 들어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이상한 말 하면, 바로 끝이야.”


빈틈이 없는 반응에 그는 머리를 긁적였다. 다소 낯간지러운 분위기가 될 만한 부탁인 탓이었다. 그녀가 현재의 수순을 그르치지 않도록 만들기 위해서 미리 하는 약조였다.


정도를 지키지 않고 못 견디는 성향이니까, 때로는 현실과 타협해야 한다는 점을 이번 기회에 가르치고 싶었다. 어른으로서 그리 떳떳하지 못해도 자신이 그녀에게 전할 수 있는 유일한 교훈이었다.


“딱 한 번만 거짓말을 좀 해 줘. 나 은근히 소심해서 관심이 무섭거든. 그것만 해 주면 미련 없이 사라질게.”


도현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토록 미심쩍게 부탁할 줄이야. 아무래도 찬용과는 끝까지 어긋난 감정을 유지하고 말겠다. 걱정했던 부분이 아니라 다행이지만, 자신이 굉장히 꺼리는 채무임에는 변함이 없었다.


빈틈없이 진실해야 할 수사 과정에 거짓이 되는 내용을 포함시키는 일이었다. 아무리 오랜 도움을 받은 상대의 부탁이라고 해도, 지금 자신이 뒤집는 조직과 어디가 다른가. 할 말이 많았지만 일단 그에게는 자제했다.


설득해도 어차피 쉽게 통하지 않을 터였다. 우선 조용히 생각할 시간을 가지고 싶었다. 이 일이 아니더라도 혼자서 고민할 과제가 산더미였다.


반면에 찬용은 꽤 만족한 빛으로 물러났다. 평소의 그녀였다면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다짜고짜 반박했을 텐데, 함께했던 시간이 그만큼 무의미하지 않았던 듯했다.


그녀의 신념과 이 현실이 강하게 부딪치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렸다. 이제 작별이라는 각오로 점점 멀어지는데, 어쩐지 아쉽지가 않았다. 언젠가 마음대로 행동할 스스로를 잘 알기 때문일까.


그래도 다시는 그녀를 따라가지 못할 텐데, 현실을 제대로 느끼기 전까지 그 그리움을 함부로 가늠하지 못할 것 같았다.


“잘 지내. 늘 응원할 테니까.”


그가 곧바로 모습을 감추었다. 그래서일까, 덕분에 이쪽은 마지막 인사를 잔뜩 찌푸린 얼굴로 마무리하고 말았다.


도현은 아연한 표정으로 방금 전까지 그가 있었던 허공을 바라보았다. 이별하는 때도 비겁하게 행동하는 그였다. 겉으로 태연한 척 연기했지만 내심 지금 상황을 견디기가 벅찼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진정 끝을 통보하는 상대와 대화를 제대로 마무리하지 않은 채 스스로가 편할 때 물러섰다. 순조롭게 끝나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다만 여전히 마음에 걸리는 반응이 있었다. 떠나기 직전에 그가 했던 말들은 이성으로 연모하는 이에게 할 만한 성질이 아니었다. 웃어른이 아직 미숙한 청년에게 할 법했다.


물론 찬용과 자신 사이에는 어마한 세월의 차이가 존재했다. 난생처음 만났을 때부터 한참 젊은 청년의 외형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나이가 정확하게 몇인지도 잘 알지 못했다.


내리사랑을 느끼는 경우가 흔한가. 핏줄이 아니고서야 쉽지 않은 감정이었다. 와중에 불길한 예감이 뇌리를 스쳤다. 자동적으로 손과 발까지 싸늘해지고 있었다.


자신이 지금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실상을 고스란히 체감하고 싶지가 않았다. 그리고 절대 아니라며 부정했다. 닮은 구석이라고 조금도 없는 성격과 이목구비였다. 아무리 사랑에 눈이 멀었어도 모친이 그런 사람과 어울렸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눈동자는 자연히 그를 쫓고 있었다. 혹시 예전처럼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쪽을 지켜보고 있지는 않을까, 부지런히 흔적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정말 자신을 떠난 듯했다. 어디에도 기척이 없었고, 모두 장난이라며 다시 등장하는 일도 끝내 벌어지지 않았다.


어째서 지금까지 그 정체를 묻지 않았을까. 애당초 현실성이 없는 그 존재 탓이었을까. 그런 생물이 자신의 주변에서 생겼을 줄은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 본인도 잠깐이나마 내색한 적이 없었다. 입만 열면 내뱉었던 말들이 모조리 이쪽을 향한 애정 공세뿐이었다.


‘왜요? 왜 저는 안 되는데요!’


생전 외조부의 조치도 이해되었다. 순수한 호기심에 물어도 바로 얼굴을 찌푸릴 만큼 옛 이야기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렇게 아꼈던 막내딸이 고작 그런 사내와 놀아나서 신세를 망치다니, 그래서 유난히 홀로 남은 손녀에게 그토록 엄하게 굴었나. 어렸을 때는 그저 손녀가 미워서 그런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생각하니 나쁜 친구들과 어울리지 않게 신중했던 것이었다.


그로 인한 불만을 종종 찬용에게 말하고는 했는데, 슬슬 얼굴이 화끈해질 지경이었다. 그래서 그 이름과 얼굴을 모르게 만들었나. 아이의 기억 속에 아주 잠시라도 아버지로 머무르지 못하게.


행여나 미처 치우지 못한 유품에서 단서를 발견할까, 집안 곳곳에서 어머니의 흔적이 드러날 때마다 모두가 바로 그것을 뺏거나 쓰레기통에 버렸다.


자연히 그들이 궁금할 시기가 와도 다르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이야기만 꺼내도 잔뜩 성이 난 얼굴로 손녀를 죄인처럼 다그쳤다.


비슷한 일상이 반복되니, 나중에는 자연히 포기하게 되었다. 얼마나 크게 잘못했기에 이토록 집안에서 냉대를 받고 있는 것일까.


가능한 정보력을 모두 동원해서 그 진실에 다가가고 싶었지만, 기술이 발달하지 못한 때라 학생 신분으로 명백히 한계가 있었다.


정작 번듯한 자리에 올라서는 잊고 말았다. 책상에 가득 쌓인 문서들을 발견할 때마다 그런 생각이 자연스레 뒤로 밀리게 되었다. 굳이 들척거리고 싶지도 않았다. 어른들의 말이 전부 바르지는 않지만 모두가 그렇게 숨기는 데는 틀림없이 까닭이 있을 터였다.


“아니야. 아직 아무것도······.”


도현은 최대한 이성적으로 생각했다. 조금 전에 스친 예감들은 혼자 짐작한 것이었다. 본인에게 아직 어떤 이야기도 듣지 못했고, 진실을 입증할 만한 객관적인 증거도 전혀 없었다.


이제부터 조사하면 되지 않겠는가. 어차피 검찰 내부에서 제대로 미운털이 박힌 터라, 당분간은 일선에서 줄곧 밀린 상태일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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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5 산 밖에 난 범 2 20.11.06 26 0 12쪽
324 산 밖에 난 범 1 20.11.03 24 0 14쪽
323 새벽달 보려고 10 20.11.03 24 0 12쪽
» 새벽달 보려고 9 20.10.30 23 0 13쪽
321 새벽달 보려고 8 20.10.30 23 0 13쪽
320 새벽달 보려고 7 20.10.27 28 0 13쪽
319 새벽달 보려고 6 20.10.27 26 0 13쪽
318 새벽달 보려고 5 20.10.23 24 0 13쪽
317 새벽달 보려고 4 20.10.23 22 0 15쪽
316 새벽달 보려고 3 20.10.20 21 0 15쪽
315 새벽달 보려고 2 20.10.20 22 0 14쪽
314 새벽달 보려고 1 20.10.16 27 0 14쪽
313 뱀의 세상 9 20.10.16 34 0 13쪽
312 뱀의 세상 8 20.10.13 37 0 12쪽
311 뱀의 세상 7 +1 20.10.13 29 1 13쪽
310 뱀의 세상 6 20.10.09 29 0 13쪽
309 뱀의 세상 5 20.10.09 29 0 14쪽
308 뱀의 세상 4 20.10.06 28 0 13쪽
307 뱀의 세상 3 +1 20.10.06 35 1 13쪽
306 뱀의 세상 2 20.10.02 41 0 13쪽
305 뱀의 세상 1 20.10.02 33 0 14쪽
304 비렁뱅이 맞돈 9 20.09.29 30 0 14쪽
303 비렁뱅이 맞돈 8 +1 20.09.29 33 1 16쪽
302 비렁뱅이 맞돈 7 20.09.25 31 0 14쪽
301 비렁뱅이 맞돈 6 20.09.25 32 0 14쪽
300 비렁뱅이 맞돈 5 +1 20.09.22 32 1 15쪽
299 비렁뱅이 맞돈 4 20.09.22 31 0 13쪽
298 비렁뱅이 맞돈 3 +1 20.09.18 34 1 12쪽
297 비렁뱅이 맞돈 2 20.09.18 44 0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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