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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홍기석입니다.

사희곡 (捨姬曲 : 버린 여인의 노래)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현대판타지

홍기석
작품등록일 :
2019.05.13 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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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19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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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3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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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뱀의 세상 8

DUMMY

8


“아니면 이 나라에선? 언제 살다 죽었는지 모를 정도로 지나간 생명일 뿐이야. 그런데 자신의 목숨을 건다? 부질없는 짓이지.”


저주에는 반드시 대가가 필요했다. 혜연이 그렇게 막강한 힘을 함부로 남용하지 못한 까닭이었다. 자잘한 운명과 생명을 제물로 바쳤다가 정작 사용해야 할 시점에 무엇도 남지 않는다면 큰일이지 않은가.


그래서 혜연은 알아서 참는 일에 익숙했다. 못마땅한 얼굴은 되도록 멀리했고, 그러한 노력에도 미처 풀지 못한 분노와 외로움은 말동무를 늘리는 형태로 극복했다.


생각지 못한 진실에 지민은 입술을 물었다. 그렇게 참고 참았다가 마침내 겨우 발산한 분노였다. 그것이 불발된 사실을 듣는다면, 그녀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오랜만에 다시 찾아간 그때처럼 믿고 싶지 않은 현실 앞에서 주변이 떠나가라 소리를 질렀을 것이었다. 저절로 머릿속에 그려질 만큼 귀왕의 말에는 조금도 반박할 구석이 없었다.


어떻게 자신의 목숨 하나로 모든 개체들을 불행하게 만들겠는가. 그 마음이 절실한들, 만만하게 인정을 베풀지 않는 신 앞에서는 친히 저울로 측정할 사연조차 되지 못했다.


동기로서 하나만 소원했다. 아직도 구천을 떠도는 중인지, 진즉에 하늘로 승천했을지 모르는 그녀가 계속 진실을 몰랐으면 했다.


그러면 최소한 그 영혼은 위로받을 테니까. 마지막 순간만은 정말 통쾌했다고, 그렇게 웃으면서 지내도록. 그조차 사양할 정도로 이 세상이 모질다고 생각하기 싫었다.


“나 하나만 죽도록 미워했다면 됐을 텐데. 그럼 정말 그 저택에서 죽었을지도 몰라.”


사희는 씁쓸하게 웃었다. 지나치게 원망한 마음이 만든 비극이었다. 그래서 결정적인 순간 확실한 대상을 정하지 못한 것이었다.


하지만 지민은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래도 사전에 막을 가능성이 있지 않았나. 위로의 말을 보태어 계속 부여잡는 행위가 더 이기적이라고 판단했나. 희망 고문처럼 말이었다.


그렇다면 어째서 가족으로 들였나. 애초에 다시 태어나게 하지 않았다면 이런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 역시 혜연 자신의 선택이었다. 이제까지 어머니의 강요에 의해 권속이 된 사례는 존재하지 않았다. 어떻게든 모순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자신의 모습이 지민은 슬슬 꼴사나웠다.


“그러니까 안심해. 이 말이 더 반갑지?”


게다가 자신은 상대의 말에 위안도 느꼈다. 모두에게 예견된 줄 알았던 불행이 사실은 허상이다. 안심되는 정도가 아니라 심지어 기쁘기까지 했다. 아무도 없는 장소였다면 그대로 쾌재를 불렀을 것이었다. 억울하게 죽은 동기의 사정은 잠시 잊고서.


이제 눈앞의 상대를 원망하지 않기로 했다. 처음부터 자격도 없었다. 똑같은 방관자가 아니던가. 상대에게만 책임을 묻는 행위는 비겁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진실을 알기 전처럼 그녀를 대하기는 힘들었다.


“죄송해요. 감사의 인사는··· 못하겠어요.”

“이해해. 다른 애들이라면 펄쩍 뛰었을걸.”

“어머니나 저나··· 언젠가 벌받을 거예요.”

“하하! 과연······.”


마치 직접 마주한 것처럼 반응하는 태도에 지민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하지만 곧이어 넘어갔다. 인간 이하의 짓거리를 하면서도 멀쩡히 사는 생명이 이미 넘치는 사회였다. 오귀라고 기준이 달리 적용되겠는가.


거룩한 존재 앞에서는 한낱 인간이나 오귀 모두가 똑같은 위치거늘, 유일신의 존재를 완전히 믿지 않지만 있다는 가정하에 내린 결론이었다. 그래서 상대도 그런 분위기로 반응하지 않았겠는가.


착하게 지내면 손해인 세상이었다. 따라서 오늘을 계기로 자신의 삶이 크게 달라지지 않겠다. 혜연의 죽음이 무지막지한 충격을 안겼으나, 생각해 보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직접 관계되었다는 이유 탓이었다.


그녀에 대한 자신의 책임은 어느 정도일까, 마지막으로 남긴 저주로 인해 망가질 삶은 어떠할까. 이렇게 이기적으로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하늘은 그저 잠잠했다.


결국 끝까지 자신만 생각한 자의 승리였다. 쉽게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체면을 챙기는 이들은 쉽사리 도달하지 못했다.


“속은 시원하네요. 처음으로 진짜 어머니와 이야기하는 기분이 들었어요.”

“너라서 그래. 다른 애들은··· 상상만 해도 벌써 시끄럽다.”


지민은 은근슬쩍 탄식했다. 어째서 호억과 수호에 대해서 가장 먼저 캐묻지 않았을까. 귀왕의 조치로 인하여 현재 위기에 봉착한 둘이었다. 심지어 그녀가 실망감을 느꼈을 법한 행동 양상까지 보였다.


과거의 주박에서 아직 나오지 못한 나머지 꾸준히 똑같은 실수만 반복하는데, 아마도 둘에게는 다른 누구보다 더 강한 전환점이 기다릴지 몰랐다. 귀왕을 구속한 장본인도 그들이지 않은가. 충격적인 반전에 그들은 과연 어떻게 반응할까.


“그 둘은··· 어떻게 하실 거예요?”

“글쎄, 행동하기 나름이겠지.”


아쉽게도 구체적인 계획은 들을 수 없었다. 사실 작정하면 충분히 알 만한 부분이었다. 보다 더한 발언들이 이미 오가지 않았는가. 굳이 숨길 이유가 없었다.


도중에 비밀이 새어 나간들 이미 자신들의 뜻대로 움직이는 둘을 막을 방법도 없었다. 망설이는 이는 질문자 자신이었다. 혜연이 끝내 이루지 못한 복수만큼이나 그 형태가 끔찍할까, 차라리 모르는 것이 약이겠다고 판단했다.


어차피 사전에 안다고 한들 그들의 문제에 직접적으로 개입할 생각도 없었다. 그러니 그들의 앞날은 변함없을 것이었다. 지금의 선택에 대한 가책은 가지지 않아도 되었다.


“궁금하다. 다시 일어설 수 있을지.”


하지만 심히 잔혹한 그녀의 태도에는 조금 반발하고 싶었다. 지나치게 그녀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빈말이라도 그녀를 사뭇 긴장시킬 만한 흐름을 만들고 싶었다.


같은 잘못을 깨닫고 애써 괜찮은 척했지만, 그런 뒤끝이 완전하게 가실 리가 있겠는가. 자식으로서 던지는 소심한 복수였다.


“제가 방해하면요?”

“오늘 일로 내가 싫어져서?”

“뭐··· 솔직히 그런 이유겠죠.”


갑작스레 내뱉은 말이라, 그럴싸한 이유를 준비하지 못했다. 솔직히 사실이지 않은가. 대단한 이유를 내세운들, 그녀를 상대로는 가증스럽게 보일 뿐이었다. 목적은 순전히 긴장감 조성이었다. 이유가 무엇이든 지금 상황에서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빈약한 준비 탓이었을까. 이번에도 흔들리는 기색이 전무했다. 별안간 찾아온 위기 앞에서 굳게 버티는 자세도 아니었다. 애초부터 이 엄포를 믿지 않는 분위기였다.


“절대 안 그럴걸.”

“어떻게 장담하세요?”

“너도 그 둘이 보기 싫었잖아.”


너무나도 정곡이라서 할 말을 잃을 뻔했다. 혹시 코로키아에 도청기가 있나. 자식들의 구체적인 관계를 알지 않고서야, 불가능에 가까운 파악이었다. 종종 저택을 방문하는 이들에게 듣는 말로도 정말 가능한 일인가.


속에서 살짝 서운한 감정까지 일고 있었다. 기껏 야심차게 도전한 거짓말이었다. 나름 보람은 느끼도록 속는 척은 하기를 바랐다. 다음부터 꿈꾸지 못하게 할 요량으로 보인 반응이라면 성공했다.


“노코멘트 할게요.”


의미 없는 투정이지만 지민은 일단 던졌다. 그녀가 말한 대로 행동할 가능성이 높지만 미래는 모르는 것이었다. 당장은 이러해도, 예측 불가한 상황에 따라서 자신이 어떻게 달라질지 몰랐다.


그녀는 이내 자리를 뜨기 위해서 물러섰다. 귀왕의 목적을 알았으니 여기서 더 무엇을 하겠는가. 이제까지 그랬던 것처럼 자신만 살길을 찾거나, 소용돌이 한복판에 방치된 이들을 딱한 마음으로 볼 뿐이었다.


귀왕은 다분히 만족한 얼굴로 웃고 있었다. 떠나기 전까지 심술을 부리는 자식이 앞에 있는데도 이렇게 미소를 지을 수가 있다니, 참 알다가도 모를 속이었다.


그녀의 말대로 이번 일이 자식에게 실망한 감정에서 비롯되었을까. 처음에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훈계하는 부모가 어디에 있겠는가. 오히려 자식들의 고통을 대신하지 못해서 흘리는 눈물이 더 많았다.


그래서 변명일 것이라고 단정했다. 눈앞의 권속이 오만하게 행동하지 않도록, 사전에 기선을 제압했다고.


그런데 막상 헤어질 때가 되어서야 서서히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는 그녀가 어째서 자식의 눈치를 보는가.


그랬다면 서울 광장 소동 자체가 이상했다. 그렇게 권속들이 신경 쓰였다면, 그곳에서 멋대로 행동한 일도 없어야 하지 않겠는가. 모두와 상의하지 않고 저질렀던 일인 만큼, 즉시 돌아올 대가가 만만하지 않을 테니까.


애초부터 상상하기 힘들었다. 듣는 상대가 어떻게 생각하든, 솔직한 마음을 거침없이 말하는 그녀였다. 그런데 누군가의 앞에서 별스럽게 조심한다? 고개가 알아서 좌우로 흔들릴 만큼 썩 유쾌하지도 않았다.


마음껏 행동하는 그녀 때문에 한참 고충을 겪으면서도 정작 약한 모습은 보기 싫었다. 오귀로서 긍지 때문일까, 왕이라면 강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탓일까. 이유는 모르겠다.


하지만 우선할 사항은 현재였다. 낙오되지 않기 위해서 분주히 움직여도 모자랄 판에, 괜한 잡념으로 기운을 소모할 수는 없었다.


“잘 지내고. 언제든 찾아와, 환영할게.”

“기분 좋은 용건이 아닐 텐데요.”


귀왕은 대답도 없이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때문에 순순히 등을 돌리던 권속의 마음만 찝찝해졌다.


비슷한 사태가 아직 남아 있다는 반증일까. 그렇다면 구체적인 경위가 어떠할까. 막상 중요한 점을 다 파악하지 못했다는 생각에 지민의 마음속에는 후회가 일었다.


절컥.


하지만 그것은 곧 다른 국면을 맞닥뜨렸다. 그렇기 때문에 문을 닫고도 자리에서 바로 떠나지 못한 것이었다.


지민은 스스로 해답에 닿을 기회를 접었다. 단지 민감한 정보 노출을 걱정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일찍 깨달은들 무엇이 달라지나. 서울 광장 소동부터 충무로 살인 사건까지, 무엇 하나도 개인의 선에서 해결할 성질이 아니었다.


즉시 어머니의 손을 잡고 장소를 이동할까, 불미한 사고가 터지지 않도록 미리 곤지암 시설을 망가뜨릴까. 심지어 검경의 수사에 개입할 만한 사회적 지위도 가지지 못했다.


결국 혼자만 알아서는 쉽사리 바꾸지 못할 현실이었다. 그렇다고 모든 이에게 자신만 알아챈 진실을 전달할까. 성격상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나서기 싫었다. 이기적인 성질이 도무지 달라지지 않았다. 사실대로 전하여 적절한 대처를 이끄는 일은 당연히 보람차겠지만, 그러면 자신은 아는 자로서 책임을 다해야 했다.


잠시만 상상해도 골치가 아팠다. 벌써부터 연희와 호억의 음성이 귓가에 닿는 듯했다. 일이 잘 해결되어도 본전인 상황에서 굳이 고생을 자초하는 까닭이 무엇인가. 다수를 위한 희생은 자신이 가장 꺼리는 이유였다.


사랑도 받은 사람이 진정 누린다고 말했다. 희생과 헌신도 마찬가지였다. 언제 사회와 조직이 자신을 위해서 움직였는가. 고마운 경험이 한 번이나 있었다면 자신도 이렇게 모진 성격으로 자라지 않았을 터였다.


당연하게 요구되는 책임과 희생들, 그것이 싫어서 거듭난 생이었다. 최소한의 의무도 외면했다며 비난해도 괜찮았다. 이제껏 잘 산 모습이 그것에 대한 강력한 변명이었다.


이대로가 편했다. 때문에 세상이 멸망해도 위기감이 엄습하지 않았다. 최소한 자신의 피로 쌓아올린 결과물은 보지 않을 테니까. 순교자라고 찬양을 받으며, 초라하게 죽는 인생보다 나았다. 차라리 더불어 멸하리라. 엉뚱한 이들이 덕을 보는 결과는 싫으니까.


게다가 그것이 더 납득하기 쉽지 않겠는가. 불의를 외면한 죄에 대한 벌이라고 여기면, 완전히 망가진 현실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머니. 어쩌면 이번 계획··· 소용없을지도 몰라요.”


하물며 수호와 호억이라고 다를까. 갑자기 그러한 생각으로 연결되었다. 이 마당에도 좀처럼 변하지 못하는 자신이었다. 귀왕이 바라는 결과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이 한 번으로 둘을 완전히 개조하기 어려웠다.


지금까지 그녀에 대한 충성심을 접지 않은 둘이었다. 갑자기 매몰차게 대해도 변하지 않을 심성인데, 어떻게 단번에 바뀌겠는가. 오히려 그 방법에 대한 궁금증이 증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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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5 산 밖에 난 범 2 20.11.06 27 0 12쪽
324 산 밖에 난 범 1 20.11.03 24 0 14쪽
323 새벽달 보려고 10 20.11.03 24 0 12쪽
322 새벽달 보려고 9 20.10.30 23 0 13쪽
321 새벽달 보려고 8 20.10.30 24 0 13쪽
320 새벽달 보려고 7 20.10.27 28 0 13쪽
319 새벽달 보려고 6 20.10.27 26 0 13쪽
318 새벽달 보려고 5 20.10.23 24 0 13쪽
317 새벽달 보려고 4 20.10.23 22 0 15쪽
316 새벽달 보려고 3 20.10.20 21 0 15쪽
315 새벽달 보려고 2 20.10.20 22 0 14쪽
314 새벽달 보려고 1 20.10.16 27 0 14쪽
313 뱀의 세상 9 20.10.16 34 0 13쪽
» 뱀의 세상 8 20.10.13 38 0 12쪽
311 뱀의 세상 7 +1 20.10.13 29 1 13쪽
310 뱀의 세상 6 20.10.09 29 0 13쪽
309 뱀의 세상 5 20.10.09 29 0 14쪽
308 뱀의 세상 4 20.10.06 28 0 13쪽
307 뱀의 세상 3 +1 20.10.06 35 1 13쪽
306 뱀의 세상 2 20.10.02 41 0 13쪽
305 뱀의 세상 1 20.10.02 33 0 14쪽
304 비렁뱅이 맞돈 9 20.09.29 30 0 14쪽
303 비렁뱅이 맞돈 8 +1 20.09.29 33 1 16쪽
302 비렁뱅이 맞돈 7 20.09.25 31 0 14쪽
301 비렁뱅이 맞돈 6 20.09.25 32 0 14쪽
300 비렁뱅이 맞돈 5 +1 20.09.22 33 1 15쪽
299 비렁뱅이 맞돈 4 20.09.22 31 0 13쪽
298 비렁뱅이 맞돈 3 +1 20.09.18 35 1 12쪽
297 비렁뱅이 맞돈 2 20.09.18 44 0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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