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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스퍼 님의 서재입니다.

변수의 굴레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SF

세스퍼
그림/삽화
발아현미우유
작품등록일 :
2014.08.20 17:22
최근연재일 :
2020.08.11 17:50
연재수 :
389 회
조회수 :
447,999
추천수 :
12,219
글자수 :
3,143,319

작성
20.07.28 18:11
조회
60
추천
2
글자
10쪽

(35막) 성급한 각성 (5)

DUMMY

“후우, 씨발.”


제복도 벗어던졌고, 계급장과 휘장이 거추장스럽게 짤랑거리던 근위대 조끼와 벨트도 관물대에 처박아뒀다. 대신 언제 세탁한 건지 알 수 없는 청색 셔츠와 반바지를 입고서 에두가 당도한 곳은 다름 아닌 외성의 허름한 술집. 입맛을 따랐더라면 이런 곳이 아닌 ‘은벽의 낭만’을 찾아갔을 테지만, 워낙 그곳에서 거하게 깽판을 쳐 얼굴이 알려졌다는 게 문제였다.


“아, 왔네.”


물론 에두의 성격상 근무지를 이탈하면서까지 술을 마시고 싶었다면 얼굴이 알려지든 말든 상관하지 않았을 테지만, 첫째로, 탈영한 것은 그의 의지가 아니었으며, 두 번째로, ‘이 만남’에 있어 진짜 얼굴이 알려지면 안 되는 인물은 따로 있었기 때문이다.


“.......”


인사를 받으며 맞은편에 앉긴 했지만, 에두는 쉽사리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초면은 아니다. 게다가 계급이나 신분에 대한 예의라고는 태생부터 갖고 있지 않았던 에두였기에 평소의 그였다면 면전에 쌍욕을 박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성격파탄에 개차반인 그일지라도, 아이를 안고 있는 어머니 앞에서 육두문자를 남발할 정도로 개념을 상실한 것은 아니었다.

물론, 어머니에게 안겨 있는 아이가 이 나라의 왕자이며, 그 아이를 안고 있는 게 공화국의 왕비이자 ‘나이트 마제스티’였다는 사실도 조금은 그의 태도에 영향을 주었을지도 모르지만.


“잘 빠져나왔어?”


“.......예에, 뭐어.”

지나가 희미하게 웃으며 맥주잔을 내밀었고, 에두는 단숨에 절반을 비워낸다. 그러나 이어지는 개운함의 탄식은 없었다.

“그러니까, 나한테 정확히 뭘 하라는 거요?”


“적었던 내용 그대로야, 어려울 건 없어. 그냥 이번 오스타이나 탈환 작전에 몰래 잠입해서 안팎으로 정보를 모아주면 돼.”


“뭐, 우리편까지 몰래 정탐하라고?”


“아니아니, 몰래는 아니야. 일단 벤, 검성한테는 따로 말해둘 거니까. 단지, 그쪽이 뭔가 숨기는 낌새가 있다면 그걸 좀 눈치껏 알아보라는 뜻이지.”


곧바로 비워지는 맥주잔. 쌉싸한 맥주의 뒷맛 위로 에두의 시선이 더욱 날카로워진다.


“.......그걸 굳이 나한테 시키는 이유는?”


“알다시피, 네가 사병훈련소에 잠입했던 사건 이후로 북부군과 우리 사이가 조금 껄끄러워졌잖아. 계속 중앙이 지방군에게 휘둘린다는 식으로 대외에 비춰지면 곤란하니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고. 근데 그렇다고 우리가 검성에게 악감정이 있는 건 아니거든.”


“그래서?”


“예전처럼 대놓고 파견은 못 보내니까, 네가 대신 우리 남편과 검성 사이를 잇는 전령 역할이 되어줬으면 해서.”


“하, 전령 따까리를 하되, 의심이 가면 뒷조사도 해달라? 근데 아직 그걸 왜 굳이 나한테 시켰냐에 대한 대답은 듣지 못했는데.”


“아, 그거야-”

비릿한 웃음.

에두는 ‘그 미친년’ 이후 처음으로, 온몸에 오한이 스미는 감각을 느낄 수 있었다.

“네가 근무지 이탈로 근신 중이라고 하면, 다들 아무런 의심 안 할테니까?”


“.......”

반박할 순 없었다.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애초에 검성인지 개시낀지가 날 멋대로 가져다 쓴 것 때문에 일이 커져서 개판이 났는데, 그거 때문에 저쪽이랑 말이 안 통하면 안 되니까 내가 사고 쳐서 짱박힌 것처럼 위장하고 저쪽으로 가서 똥꼬나 좀 핥아주면서 이상한 거 있으면 보고해라, 이거 아뇨?”


“뭐, 그런셈이지.”


“내가 뭐하러 그딴 귀찮은 짓을 할 거라 생각하지?”


“아, 하기 싫어?”


“아우웅.”


엄마가 웃자, 아이도 따라 웃는다.

그리고 에두는 확신했다. 눈앞의 이 인간은 어차피 이대로 가면 에두라는 폭탄이 견디지 못하고 폭발했을 거라는 사실을 꿰뚫고 있었던 거다. 그리고 그녀의 말대로, 기껏 근위기사 차출을 금지해놓은 왕실의 권위가 흔들리지 않으면서 동시에 몰래 교두보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인원은 극히 일부밖에 없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역할을 수행하기 위한 ‘변명’을 만들 수 있는 인원은 오직 하나뿐이라는 소리다.


“하, 그럴 리가. 계속 여기서 좆뺑이만 치다간 내가 먼저 미쳐버릴 걸?”


“그럴 줄 알았어.”

가벼운 미소와 함께 다시금 채워지는 맥주잔. 근위대가 왕비 앞에서 근무 중 음주라는 상황은 둘째 치더라도, 이 지옥과도 같은 무료함을 벗어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에두에게는 천상의 짜릿함이나 마찬가지였다.

“아, 근데, 아까 말한 거 말고 추가적인 임무가 하나 더 있는데. 최우선은 아니고, 가능하면 해둬야 할 임무야.”


“무슨 임무?”


입술을 맥주거품으로 적신 채 눈썹을 치켜드는 에두. 여전히 느슨한 표정의 지나였기에 에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왕비는 살포시 아들의 귀를 막는다.





“암살.”




=====




“검성님.”


“으응?”


“도착했습니다.”


“아아, 벌써? 빠르네.”


간이침대에서 쪽잠을 청하던 벤이 부스스 일어난다. 덥수룩한 먹색 머리를 벅벅 긁으며 주위를 둘러보는 그에게 보르케는 익숙한 몸짓으로 대신 바닥에 널브러진 목발을 찾아주었고, 벤은 짤막하게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이쪽으로 모실까요?”


“응? 아, 응. 크리스는 전선에?”


“예. ‘미소’께서도 함께 가셨습니다.”


“알았어.”


벤은 기지개를 켜지 않는다. 무릎을 타고 천천히 올라오는, 바늘로 찌르는 듯 괴랄한 통증이 찌뿌둥한 몸을 대신 일깨워주었기 때문이다. 조금만 방심하여 마력을 순환시키지 않으면 곧바로 극악의 통증을 불러일으키는, 지긋지긋한 동반자.

끊어진 장기와 박살난 뼈를 이어붙이는데 전문인 군의관 전투마법사들조차 절단을 권유했을 정도로 처참했던 부상이었으나, 오만의 대가로 감내하겠다며 절단을 거부하고 고통을 안고 가기로 한 벤이었다. 물론 다리를 잘라낸다는 것 자체가 두렵거나 거부감이 들었던 건 아니었다. 그러나 ‘오만에 대한 자책’이라는 현자스러운 변명이 아닌, 그가 이 고통과 불편함을 끌어안고 있는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고통을 상쇄하기 위해, 깨어있는 동안은 반강제로 유지해야하는 마력의 순환.

전투마법사들이 받는 가장 기초적이면서도 중요한 훈련 중의 하나가 바로 이 마력순환법이다. 위급한 상황에 닥치면 언제라도 마법을 영창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일련의 전투준비태세이자 마력의 농도와 총량을 유지, 개선시키기 위해 필요한 단련법. 기사들이 영력을 과하게 소모하지 않으면서 훈련을 이어가면 영력의 지구력이나, 한번에 발산할 수 있는 영력의 총량이 점차 늘어가는 것과 비슷한 이치였다.

하지만 본인에게 적절한 ‘마력순환’의 정도나 시간을 알아내기란 여간 까다로운 일이 아니었다. 우선 지속적인 마력순환이라는 행위 자체가 부여하는 육체적, 정신적 피로감이 상당했으며, 기사의 영력과는 달리 큰 전장에 투입되지 않는 한 자신의 마력농도와 총량의 성장 정도를 파악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벤은 자신의 무릎과 자신이 처해있는 상황을 이용하기로 다짐했다. 고통스러웠고, 피곤했으며, 짜증이 났지만, 그는 묵묵히 목발을 짚고 돌아다니며 남들 모르게 ‘훈련’하고, 또 ‘훈련’했다. 피폐해져 가는 정신과 육체는 그의 집중력을 흔들었고 성격을 날카롭게 다듬었지만, 그는 아무에게도 자신의 상태를 말하지 않았다. 지휘 천막을 비집고 들어오는 바닷빛 눈동자의 소녀에게도.


“아, 자고 있었어?”


“방금 깼어. 오느라 고생.”


“.......너 언제 씻었어?”


노골적으로 표정을 일그러트리는 고도. 그녀의 말이 어색함을 상쇄하기 위한 게 아닌 진심이라는 사실을 잘 알기에, 벤은 희미하게 웃음을 머금는다.


“상황은 대충 알지?”


“어.”


“몇 명정도 준비됐어?”


“보급병 빼고 100명.”


“100.......”


간이 침대에 걸터 앉은 채로 무릎 위의 목발을 만지작거리는 벤. 그 오묘한 표정을 향해 고도가 입을 연다.


“부족해?”


“응? 아니, 아니. 충분해. 어차피 정식 출정도 아니고, 비공식 보여주기니까.”


“.......”

보여주기.

‘그’의 말이 맞았다.

고도가 잊고 있던 사실을 깨달은 순간이기도 했다.

“아, 맞다. 데커드 드리브달. 그 인간도 같이 왔어.”


“.......”

마치 아무일도 아니라는 듯, 너무 대수롭지 않게 내뱉은 고도의 말을 이해하기까지 벤은 한참을 멍하니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아야 했다.

“잠깐, 뭐라고?”


“그 포로 있잖아. 데커드 드리브달. 그 인간이랑 같이 왔다고.”


“아니,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포로를 여기 데려왔다고?”


“응. 뭐 문제될 거라도 있어?”


“지금 그걸 말이라고-”


허무한 역정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벤이 순간 멈칫한다. 그의 먹색 시선이 천천히 왼쪽 무릎을 향해 내려갔고, 그는 고도가 의문의 목소리를 낼 때까지 멍하니 그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왜 그래?”


“.......아냐.”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목발을 짚는 벤.

“뭐, 네가 괜찮다고 생각해서 데려왔을 테니까. 문제 일으키진 않겠지?”


“어. 그냥 심심하다고 하도 난리를 쳐서 데리고 나온 거야. 도망갈 생각이었으면 진작 도망갔겠지.”


“.......뭐, 하긴. 자기 죽이겠다고 암살자까지 보낸 나라에 남은 충성심이 있다면 이상하겠지. 그래도 일단 눈에 띄게 돌아다니진 않도록 관리 좀 해줘. 특히 브린타이나 쪽 사람들한테.”


“내가 무슨 보모도 아니고.”


“네가 데려왔으니 네가 책임져야지.”


티격태격하며 천막을 나서는 벤과 고도. 그리고 강렬한 햇빛과 함께 익숙한 목소리가 둘을 반긴다.


“아, 안녕하세요? 전 데커드 드리브달이라고 합니다. 시간이 되신다면 어디 시원한 곳에서 차나 한잔하시겠습니까?”


손으로 새어나오는 웃음을 가리는 고도. 깊은 한숨과 함께 이마를 짚는 벤.

그리고 브린타이나의 여왕 론크리스는, 갑자기 나타나 자신에게 수작을 걸고 있는 남자와 둘을 번갈아 바라보며 미간을 구겼다.


작가의말

부족한 글을 봐주시는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어색한 문장이나 문맥, 오타가 있다면 지적 부탁드려요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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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8 (35막) 성급한 각성 (6) +1 20.08.03 74 2 11쪽
» (35막) 성급한 각성 (5) 20.07.28 61 2 10쪽
386 (35막) 성급한 각성 (4) 20.07.22 63 1 12쪽
385 (35막) 성급한 각성 (3) 20.07.16 62 3 12쪽
384 (35막) 성급한 각성 (2) 20.07.10 64 4 12쪽
383 (35막) 성급한 각성 (1) 20.07.05 70 3 12쪽
382 (막간) 조련 +2 20.07.01 76 3 11쪽
381 (34막) 너는 만용을 부렸다 (11) +1 20.06.27 73 2 12쪽
380 (34막) 너는 만용을 부렸다 (10) +1 20.06.25 69 2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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