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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스퍼 님의 서재입니다.

변수의 굴레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SF

세스퍼
그림/삽화
발아현미우유
작품등록일 :
2014.08.20 17:22
최근연재일 :
2020.08.11 17:50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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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07 2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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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글자
19쪽

(33막) 겨울이 끝나도 봄은 오지 않는다 (11)

DUMMY

추위를 거의 느끼지 못하는 겨울의 민족인 니에브인들.

그들에게 ‘눈’이란 존재는 태양빛보다 익숙하면서도 비처럼 귀찮은 존재였다. 한 달이 넘도록 세상의 모든 걸 뒤덮을 기세로 쏟아지다가도, 어느새 햇볕이 쨍쨍한 여름 날씨로 뒤바뀌더니 몇 주간 눈송이 하나 보이지 않기 일쑤인 플로닉스의 은총 아래에선, 눈이란 그야말로 변덕의 산물.

적어도 니에브에서의 ‘눈’은 구름의 모양, 바람의 세기 따위로 예측할 수 있는 ‘현상’이 아니었다.


“.......뭐라고?”


신경 쓰지 않았다. 아니, 신경 쓸 이유가 없는 대상이었다.

니에브에서 눈이 내린다-, 버닝프로스트에 눈이 내린다-.

도대체 이 이야기에 신경을 쓸 니에브인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랬기에, 칠드는 지금 갑자기 나타난 이 드루이드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우리에겐 더 이상 낭만도, 죄악도 없는 게 이 눈이라는 거지만, 아직도 누군가에겐 유일한 의사소통의 수단으로 남아있다는 뜻이야. 어떻게 하면 대공을 조질 수 있을까-, 그 걱정만 하던 당신에겐 들리지 않을 목소리였겠지만.”


“.......”


“사실 생각해보면 되게 간단하고 상식적인 문제거든.”

한 발자국, 하늘하늘하게 대영주의 앞으로 다가서는 진.

“식량은 사라졌고, 대공은 도시를 버리고 본궁에서 농성. 이제 유일한 구원자라고는 무슨 생각인지 알 수가 없는 제국뿐. 버닝프로스트를 점거하고 대공의 수급을 들고서 그들을 맞이하는 게 당신으로서는 가장 이상적인 흐름이었겠지만, 조급한 나머지 당신은 실수를 해버렸어.”


“.......영주들의 충성심 따윈 가변적인 것이다. 어차피 그들은 또 상황이 바뀌면-”


“아아~ 물론, 영주들도 영주들이지만. 그 전에 말이야, 영감탱은 아주 치명적인 걸 놓쳤다니까. 당신이 반란군이기에 앞서 니에브 사람이었기 때문에 할 수밖에 없었던 실수.”


“.......?”


소녀, 아니, 여인에 가까운 먹색의 눈동자가, 마치 칠드의 어리둥절한 얼굴을 삼킬 기세로 그림자를 드리운다.


“우리의 변덕쟁이님께선, 아펜타우스의 피냄새를 끔찍이도 싫어한다는 걸 말이야.”


“.......뭣?”


아펜타우스.

피의 악마.

제국의 악마.


자신이,

눈의 민족이기에 할 수밖에 없었던 실수.


“.......설마......”


깨달음의 끝에서 노인의 얼굴에 경악이 번지고, 드루이드의 입가엔 미소가 꽃핀다.


“맞아. 당신이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제국군은 폭설 때문에 국경에서 발이 묶인 상태야.”


“.......”


“식량이 불탄 시점에서 당신들은 이미 진 거지. 아니, 애초에 이길 수 없는 싸움을 시작했달까.”


“.......”


“내가 발빠르게 움직인 덕분에 납치당한 영주들의 군대가 이미 진군 중. 제국군은 제시간에 올 수 없어. 당신이 이 이상으로 대공을 협박하고 붙잡은 영주들의 목을 친다고 해도, 얻을 수 있는 건 반역의 깊이뿐이지.”


“.......”


거센 눈폭풍.

천막은 금방이라도 찢어질 것처럼 흔들리고, 바람을 타고 침투한 눈송이들이 시야를 어지럽게 뒤흔든다. 이미 바깥은 바로 눈앞도 분간할 수 없을 정도의 거센 혼란이 하얗게 밤하늘을 물들이고 있었다.


“대, 대영주님! 놈들입니다! 본궁에서 적들이 쏟아져나옵니다!”


다급한 목소리와 함께 눈에 젖은 얼굴의 전령이 간신히 천막으로 기어들어온다. 하지만 그녀는 곧 천막 내부의 기묘한 분위기에 말을 삼켰고, 자신의 보고에도 아무런 반응이 없는 칠드의 얼굴을 보고는 명령을 요구할 그 어떤 첨언도 뱉을 수가 없었다.


“나는....... 그럼 나는 도대체 뭘 한 건가? 생존을 위해서, 좀 더 나은 미래를 위해서 모든 것을 걸었지만, 결국 이토록 허무하게 끝나버리는 건가? 나의 이야기가, 80년을 투쟁해온 나의 역사가....... 이렇게 허망하게 무너져도 되는 건가?”


인간의 역사, 세계, 정치.

이런 것들에는 크게 관심을 갖지 않도록 요구되는 ‘드루이드’라는 존재였지만, 진은 순간 스쳐가는 노인의 표정으로부터 어렵지 않게 그의 ‘시간’을 읽어낼 수 있었다.


“역사? 당신이 한 짓은 스스로의 80년 역사와 선대 대공과의 약속을 어기고 투정을 부린 것에 지나지 않아. 당신이 대의라고 부르짖는 그 일을 위한 방법이 정말로 이거 하나밖에 없었을까? 당신 개인의, 당신의 영지를 위한 사심이 전혀 없었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결국 영감탱, 당신의 그릇은 그 정도뿐이었다는 거야.”

드루이드의 눈빛은 경멸을 넘어 인격살인을 위한 칼을 품는다.

“겨울로 폐쇄된 세상. 이 좁고 하얀 세상 속에서 80년을 비루한 환상 속에서 자위해왔지. 무슨 대단한 일이라도 해왔던 것 마냥, 무슨 위대한 업적이라도 이뤘던 것 마냥. 당신 같은 사람들은 ‘오열’이 왜 여왕을 향해 창을 들었는지, 왜 자신의 이름을 오명으로 남겼는지 절대로 이해하지 못할 거야.

우리가 200년 전, 비굴하게 생존해서 변덕쟁이의 능욕 아래 몸을 숨기고 허세를 떨어온 동안 그들은 투쟁을 해왔어. 서로가 서로에게 살아남기 위해서 투쟁을 해왔고, 스스로 바뀌기 위해 투쟁을 해왔어. 그리고 이제 그들은 하나의 거대한 생존에 합의를 했고, 함께 투쟁을 준비 중이야. 대공은 기꺼이 이런 흐름에 동참하기로 한 거고. 그런데 당신은, 당신들은, 당장 눈앞의 불이익과 누려왔던 안락함이 위협받는다는 이유로 같잖은 음모를 꾸미고 등을 돌렸어.”


두터운 눈의 장막을 뚫고 묘한 함성소리가 서서히 진동을 울리기 시작한다.


“영주님, 적습입니다!”


새로운 전령의 등장.


“영주님, 명령을!”


“.......”


그러나 노인의 목소리는 없었고, 그의 시선 또한 부하들을 향해 있지 않았다. 드루이드를 이에 무언가를 더 쏘아붙이려 했지만, 권성의 떨리는 손이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기 때문에, 짧은 한숨과 함께 입을 열어야 했다.


“이런 당신에게도 아직 선택권은 있어. 내 말을 믿지 않고, 귀와 눈을 막은 채 부하들과 동료 영주들을 사라질 역사의 구렁텅이로 내몰 수도 있겠지. 아니면, 적어도 책임자로서, 속죄의 짐을 안고 사라질 수 있는, 최소한의 자비를 구할 수도 있어.”


“.......자결이라도 하라는 거냐.”


남아있는 비장함을 쥐어짠 칠드였지만, 돌아오는 건 얕은 비웃음 뿐이었다.


“자살? 그건 도망치는 거에 지나지 않아. 당신이 적어도 기사라면, 영주라면, 양쪽 모두에게 책임은 질 수 있어야 하잖아.”


“나는......, 옳은 일을 하려던 것뿐이다.”


“누구나 그래. 하지만 최선의 의도가 있다고는 해도, 결국 그 의도를 최선의 결과로 만드느냐, 최악의 재앙으로 만드느냐는 개인의 의지에만 달린 게 아니니까.”


“.......하지만......., 하지만 나는 아직-”


“영주님!”

또다시, 새로운 전령의 얼굴.

그의 존재는 천막 안, 그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했지만,

그가 가져온 목소리에는 모두가 시선을 모을 수밖에 없었다.

“제, 제국군입니다! 제국군이 왔습니다!”


“뭣?!”


동시에 경악하는 칠드와 진. 하지만 그 농도는 진의 얼굴에 더욱 짙게 떠올라있었다.


“아냐......, 그럴 리 없어. 말도 안 돼. 직접 확인했다고. 그들은-”


“며, 몇 명이냐! 몇 명이나 왔냐? 연대급은 되겠지? 군단 직속이냐?”


역사의 끝.

삶의 심연까지 떨어졌던 대영주의 얼굴은, 거대하게 다가온 희망으로 인해 회춘이라도 한 듯 해맑게 바뀌어있었다.


“그, 그게.......”


그러나 이어진 전령의 보고는,


대영주와 드루이드,

둘 모두에게 똑같은 반응을 가져다준다.



“.......세 명입니다.”




=====




“젠장, 아무것도 안 보이네!”


어느 병사의 목에서 검을 뽑아내며 로빈이 투덜거리자, 눈폭풍 너머 어디선가 지나의 비웃음이 들려온다.


“오히려 잘 됐지. 우리 같은 기사가 수작질 놓기엔 최적의 환경 아냐?”


“수작질이라니......, 품위 있게 ‘교란’ 정도로 해두시죠, 나이트 마제스티.”


“교란치고는 너무 화려하잖아.”


지나의 말처럼, 지금 그들을 포함한 기사들이 펼치고 있는 ‘학살극’은 교란이라고 치부하기엔 너무 본격적이었다. 원래는 홀덴과 질렌스키가 권성의 소재를 파악할 수 있도록 ‘소란만 피우기로’ 되어있었지만, 이상하게 헐거워져 있는 포위망과, 지휘체계가 전무하다싶을 정도로 무방비한 반란군의 반응에 이대로 공세로 전환하자는 지나의 의견을 채택, 그리고 지금 상황에 이른 것이다.


“그나저나 무슨 일이지? 병사와 장교들만 소리를 지르고 있고, 체계가 전혀 안 잡혀있는데?”


“적들?”


“응.”


로빈의 의심에 지나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시가전에 이런 날씨. 함정을 판 것 같지는 않고, 적 수뇌부에 뭔가 일이 있었다거나?”


“아무튼 너무 깊게 들어가지는 마.”


“어머, 걱정해 주는 거야, 남편님?”


“응, 내 걱정.”


아마 바로 옆에 있었다면 딱밤을 맞았겠지.

라는 생각을 하며 로빈이 히죽- 웃는 순간.


“.......로빈.”


“응.”


눈발을 헤치며 지나가 로빈의 곁으로 다가선다.


“후퇴하는 건가?”


“아니, 외곽의 병사들은 움직이지 않았어.”


“그럼 왜 갑자기 다들 물러나는 건-”


말을 마치기도 전에 입술을 멈추고,

지나는 빌린 검을 대신하여 자신의 흑도, 오미누스 움브라를 뽑아 든다. 로빈 또한 지나만큼은 아니었지만, 분명히 정면에서 다가오는 이질감을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누구지? 대영주?”


“.......아냐, 이 느낌은-”




“검을 거두어주십시오, 카나반의 왕비님. 붉은 나무의 기사.”


마치 흩날리던 눈과 거센 바람이 증발한 것처럼,

매력적인 목소리가 선명하게 로빈과 지나의 귓가를 파고든다. 로빈은 목소리가 주는, 이상할 정도로 편안한 느낌에 의아함을 느낀 반면, 지나는 묘한 기시감에 미간을 구겨야 했다.


“.......누구냐?”


적의, 그 자체인 지나의 목소리.

서로의 얼굴도 바라보지 못했지만 이 적의만큼은 확실히 닿았는지, 돌아오는 남자의 목소리엔 얕은 웃음이 섞여 있었다.


“이런, 실례했습니다. 초면이었군요. 말로만 듣던 유명인사를 갑자기 만나게 되면, 마치 오래 알고 지난 사람처럼 반갑게 느껴지곤 하잖습니까. 부디 이해해주시길.”

마침내 눈의 그림자를 뚫고, 장신의 사내가 모습을 드러낸다.

이런 바람과 눈폭풍 속에서도 용케 정돈됨을 유지하고 있는 장발. 그 먹색만큼이나 밤하늘을 품고 있는 불길한 눈동자. 사방으로 번져있는 눈 그 자체를 투영하듯 창백한 피부에, 단단해 보이기는 하나 건장하다고는 볼 수 없는 여리한 체격.

그 외견과, 이어지는 그의 자기소개를 통해,

지나는 마침내 자신을 괴롭히고 있던 기시감의 정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반갑습니다. 제 이름은 미하일 폰 인피에르노. 위대한 제국의 위대한 검성을 아버지로 두고 있는 기사입니다.”


“.......”


“예전에 제 미숙한 동생놈이 신세를 졌다지요? 형제들의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할 장남으로서, 대신 사과를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사과는 받아드리죠. 그나저나 병사들도 없이, 수행원 둘만 데리고 오신 거 같은데, 괜찮으시려나?”


로빈은 놀랐다. 태연한 지나의 목소리 때문이 아니었다. 그녀가 검을 도로 집어넣었기 때문이었다.


“아, 예. 그렇게 됐습니다. 눈이 너무 많이 내리고 그칠 생각을 안 해서, 병사들을 움직일 수가 없더군요. 하지만 뭐, 애초에 병사들은 필요하지 않았으니, 일단 제가 먼저 와서 대공께 인사라도 드릴까 했는데.......”

스윽-, 느긋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는 미하일.

“뭔가 소란스러운 것 같군요. 때가 안 좋았나요?”


“농담하는 거야? 당신이 보낸 전문 때문에 이 사단이 난 거잖아?”


“예?”

미소는 유지하고 있었지만, 미하일의 얼굴엔 진심 어린 당혹감이 떠올라있었다.

“제가 무슨.......? 전 그냥 니에브의 영주들과 대공께 협조를 구하려고 했을 뿐입니다만.”


“병사들을 이끌고 북으로 가겠다? 그 ‘협조’ 요청을 니에브가 순순히 받아들일 거라 생각하셨나?”


“.......흐음, 그렇군요. 제 판단이 나빴네요. 전달력이 좋지 않았어요. 이곳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아서 오해를 불러일으켰군요. 사과드립니다, 대공.”

미하일의 마지막 목소리는 어느새 뒤에서 나타난 홀덴을 향해 있었다.

“하지만 믿어주세요. 절대로 반란을 종용하거나 니에브 내부에 공작을 벌이려는 의도는 없었습니다.”


“.......그럼 병사들을 이끌고 북으로 통하는 길을 내어달라는 요구에 무슨 의도가 있었는지 물어봐도 될까.”


차분한 대공의 목소리. 하지만 혀끝에 스민 것은 분명한 분노. 미하일이 그걸 알아채지 못했을 리 없다. 그럼에도,

그는 미소를 지었다.


“송구스럽습니다만, 그건 지금으로선 말씀드리기가 곤란하군요. 제 형제들은 물론, 아버님께도 비밀로 해둬야 할 사항인지라.”


“.......우검성에게도?”


지나는 의심하고, 홀덴은 불편하다.

미하일은 이런 이들을 향해 농도가 짙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제국에서 기사로 태어난 자로서, 그것도 검성의 장남으로 태어난 사람에게는 사실 고를 수 있는 미래가 많지 않죠. 그 사실에 불만은 없습니다. 시대는 더욱더 강한 검을 원하고, 저는 그 시대의 갈증을 해소시켜줄 수 있는 능력이 있으니까요. 하지만 ‘검’만으로는 완벽한 세상을 만들 수 없다는 걸 누구보다도 제국이 가장 잘 알고 있습니다. 200년 전에도 그러했고, 폐하께서 침묵하고 계시는 지금도 그러하죠. 그래서 저는 조금 더 멀리 있지만, 훨씬 거대한 미래를 그리기로 했습니다.”


“.......”


“하핫, 지금 이런 상황에서 아무리 말로 설명을 드려봤자 소용이 없겠죠. 이해해달라고는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대공, 비록 제가 큰 폐를 끼쳐드리긴 했으나, 염치없이 부탁 하나만 드려도 되겠습니까?”


“.......북으로 가는 거 말인가?”


“예.”


악의라고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순수한 웃음과 표정.

그 ‘선의’를 향해 대공은 이렇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만약 내가 거부한다면?”


“어쩔 수 없지요. 대신 제 ‘요구’로 인해 큰 소란이 일어났으니, 소정의 위약금은 지불하고 물러나겠습니다.”


여전히, 그 창백한 얼굴에선 위선의 티끌조차 보이지 않는다.


“.......알겠소. 통과를 허락하지.”


“감사합니다!”

우렁찬 인사와 함께 미하일은 허리를 굽혔다. 그리고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수행원들이 기다리는 곳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그럼, 이만. 약속한 보상금은 제가 군단에 복귀하는 대로 신속히 지급하도록 하겠습니다.”


“.......”

기다렸다는 듯 눈폭풍 너머로 모습을 감추는 미하일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홀덴. 바람 소리가 거세지자, 그는 곁에 있던 질렌스키를 향해 고개를 돌린다.

“질렌스키.”


“예, 감시하라는 거죠?”


“부탁해.”


마찬가지로 눈폭풍 속으로 몸이 삼켜지는 거한의 사내.

남은 것은 눈이 쌓이는 소리와,

싸늘하게 식은 기사들의 몸뚱이들이었다.


“홀덴.”

그리고 질렌스키가 사라진 자리를 대신하여 젊은 드루이드가 모습을 드러낸다.

“영주들이 기다리고 있어.”


“......진,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뭘?”


“정작 모든 사건의 원흉은 이걸 사소한 오해였다고 말했어. 그럼 난 이 ‘사소한 오해’ 정도로 나를 등진 이들을 어떻게 처벌해야 하지? 그들의 목을 베고 본궁 꼭대기에 효수해야 하나? 아니면 이 웃지 못할 오해를 들먹이며 그들을 용서해야 하나?”


“그들 모두를 용서할 필요는 없어.”

진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원인이야 어찌되었든 피해자는 분명히 존재하고, 가해자는 더더욱 분명하니까. 그냥 ‘오해’ 정도로 넘어가기엔 피를 너무 많이 흘렸어.”


“.......”


“.......당신의 친구, 론크리스는 ‘오열’의 희생을 망설임 없이 받아들이고, 빠르게 흡수했고, 거리낌 없이 이용했어. 그들에 비하면, 사리분별 못하고 징징대던 노인네 한 명의 목 정도는 싸게 먹히는 거야.”


“.......”


홀덴은 목소리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눈폭풍 속으로 사라지는 그림자로, 대신 대답을 내어놓는다.


젊은 드루이드,

진은,

이에 만속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를 뒤따르려고 했다.


“한 가지 물어봐도 될까.”


지나의 목소리가, 그녀의 뒤통수에 꽂히기 전까지는.


“.......뭔데?”


“지금 도시 외곽으로 몰려드는 영주들의 병사, 네가 미리 규합해놓았다며?”


“그런데?”


“등장한 시기도 더할 나위 없이 완벽했고 말이야.”


“.......”


“.......제국 검성의 아들, 저 미하일이라는 남자는 이 모든 게 ‘오해’였다고 말했어. 자신의 표현이 서툴렀다고. 하지만, 내가 볼 땐 그 내용이 서툴렀다기보다는, 그 전문이 도착한 ‘시기’가 수상하단 말이지.”


“.......”


팔짱을 낀 채, 조용히 먹색 눈으로 지나를 바라보는 드루이드.


“어째서 미하일의 전문은, 마치 밀서처럼 ‘불만이 있는 영주들’에게 먼저 전달이 되고, 정작 제일 중요한 대공에게는 가장 마지막에 전달이 됐을까?”


“.......”


“만약 그 ‘격차’가 없었다면, 그리고 그 전문이 공식적인 ‘공문’으로서 제대로 전달이 되었다면, 홀덴이 먼저 이 사실을 알고 대족장회의에 앞서 의제로 내놓았다면, 영주들이 과연 이를 숨기며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을까?”


“.......”


“어쩌면, 대제국동맹이 본격적으로 완성되기 전에, 브린타이나나 카나반처럼 내부단속을 먼저 확실하게 해둘 필요성을 느낀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이 모든 걸 유발한 게 아닐까?”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


아무것도 담지 않은 표정.

이질적이지만,

동시에 로빈이나 지나에게는 너무도 익숙한 저 얼굴.




전혀 어색하지 않다.



익숙한 얼굴이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냐.”


지나의 말에, 드루이드는 짧은 코웃음을 치며 뒤돌아갔고, 그때까지 숨을 죽이며 눈폭풍 속에 동화되었던 거대한 짐승도 자리에서 일어나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지나, 지금 네 말은-”


“아니.”

마침내 검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던 지나의 손이 허리 아래로 추락한다.

“우린 아무것도 모르는 거야.”


그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지금 이 땅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

할 수 없는 것은 무엇인지.



로빈은 잘 알고 있었다.



이 땅에 눈이 그친다 해도,

봄이 올 수는 없을 거란 사실을,

붉은 나무는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작가의말

부족한 글을 봐주시는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어색한 문장이나 문맥, 오타가 있다면 지적 부탁드려요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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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2 (33막) 겨울이 끝나도 봄은 오지 않는다 (4) 19.06.16 131 1 12쪽
361 (33막) 겨울이 끝나도 봄은 오지 않는다 (3) +2 19.06.09 122 4 11쪽
360 (33막) 겨울이 끝나도 봄은 오지 않는다 (2) +1 19.06.02 165 4 15쪽
359 (33막) 겨울이 끝나도 봄은 오지 않는다 (1) 19.05.26 154 3 17쪽
358 (막간) 만년설을 녹이는 방법 19.05.18 161 4 14쪽
357 (32막) 갈림길 (10) +3 19.05.12 139 5 15쪽
356 (32막) 갈림길 (9) +2 19.05.07 168 7 15쪽
355 연재 관련 +5 18.11.28 317 7 1쪽
354 (32막) 갈림길 (8) +2 18.11.20 285 5 13쪽
353 (32막) 갈림길 (7) +2 18.11.15 187 4 11쪽
352 (32막) 갈림길 (6) 18.11.10 180 6 14쪽
351 (32막) 갈림길 (5) 18.11.05 192 6 12쪽
350 (32막) 갈림길 (4) +1 18.10.31 227 7 12쪽
349 (32막) 갈림길 (3) 18.10.26 202 5 11쪽
348 (32막) 갈림길 (2) 18.10.21 204 6 14쪽
347 (32막) 갈림길 (1) +1 18.10.16 232 6 13쪽
346 (막간) 자격 18.10.11 213 5 13쪽
345 (31막) 방관의 의도 (11) 18.10.06 205 8 15쪽
344 (31막) 방관의 의도 (10) +1 18.10.01 231 6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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