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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스퍼 님의 서재입니다.

변수의 굴레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SF

세스퍼
그림/삽화
발아현미우유
작품등록일 :
2014.08.20 17:22
최근연재일 :
2020.08.11 17:50
연재수 :
389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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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7,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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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19
글자수 :
3,143,319

작성
19.09.15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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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
추천
4
글자
11쪽

(34막) 너는 만용을 부렸다 (6)

DUMMY

“계속 이 속도를 유지하면 낙오자가 생기기 시작할 거야, 대장.”


올리가 자신의 아버지를 향해 ‘대장’이란 호칭을 썼다는 건, 이들이 상하관계, 즉, 명령권자와 부관의 관계가 필요한 군사작전을 수행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베르달의 ‘늑대’ 크라트는 부관이자 딸인 올리의 의견에도 불구하고 말의 고삐를 늦출 생각이 없었다.


“놈들의 의도는 확실하다. ‘붉은 장미’의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어느 경로가 가장 취약한지, 오랫동안 정보를 모으고 있던 거겠지. 어쩌면, 최근 국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왕과 검성의 알력을 눈치챈 걸 수도 있고.”


“하지만, 지금 당장 중앙군과 통합군은 별 상관이 없잖아?”


“지금 당장에야 그렇지. 그러나 이번 전쟁이 국경 수준에서 끝날 거라 생각했다면 너무 무른 거다, 올리.”


말을 마치며 크라트는 뒤로 이어진 비탈길을 슬쩍 돌아본다. 베르달에서 오스타이나로 향하는 서북부의 모든 지형이 이보다 더하면 더했지, 모자라지는 않은 험준함을 자랑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택한 행군방식이었다. 수송 트럭의 도움을 받지 못한 채로 숲을 빠져나온 지 벌써 수 시간. 카나반에서 가장 강인하다고 알려진 베르달군이었지만, 숲의 가호에서 벗어나 줄곧 이런 속도의 행군을 강행했으니 슬슬 용사들의 얼굴에도 피로감이 번지는 중이었다.


“마즈다힐군은 이대로 2군단의 심장부를 찌를 텐데, 어째 우리만 중간에 껴서 재미없는 역할에 걸린 거 같네.”


“거꾸로 말하면 우리의 움직임이 오스타이나와 마즈다힐 둘 모두에게 가장 중요하다는 뜻이겠지.”


“애초에 난 그 할라시드 애송이를 도와주러 간다는 거 자체가 맘에 안 들지만.”


“.......”

오스타이나 영주, 할라시드 가문과의 오랜 ‘역사’를 알고 있는 베르달인이라면 모두가 올리처럼 생각하고 있을 터. 그랬기에 크라트는 딸의 투덜거림을 만류하거나 반박하지 않고 화제를 돌려야 했다.

“검성이 그쪽에 있다니 큰 걱정은 안 해도 되겠지. 15분 휴식한다.”


“15분 휴식!”


“15분 휴식한다!”


자신의 명령이 뒤로 전파되는 사이, 크라트는 말에서 내리려던 올리의 어깨를 잡았다.


“넌 듀라와 함께 주변 정찰.”


“으엑, 사타구니가 저리는데 좀 쉬면 안 돼?”


“편하게 말 타고 왔으면서 무슨 소릴 하는 거냐.”


“알았습니다요.”


애초에 아버지가 어리광이 통할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결국 올리는 짧은 신음과 함께 군마에서 내려야 했다.


아버지와 딸이 동시에 고개를 돌린 것은 바로 그 직후였다.




“적이다! 전투준비!”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본능적으로 전개된 영력. 크라트는 덕분에 쏟아지는 총탄과 화살을 빗겨낼 수 있었지만, 대신 희생양이 된 군마는 거친 비명을 내지르며 비탈길 아래로 무너져야 했다.


“매복이다! 기사들은 측면으로! 방어태세를 갖춰!”


비탈길의 고지 쪽, 마른 나뭇가지들 사이로 얼핏 보이는 먹색의 물결이 크라트의 눈동자에 들어온다. 단순히 아군의 진군을 늦추기 위한 견제라고 하기에는 그 물결의 범위나 농도가 범상치 않음을 그는 단숨에 알 수 있었다.


“방패 들고 이동해라! 진형은 상관하지 말고 모여! 곧 놈들이-”

비릿한 냄새.

줄곧 숲속에서 생활해온 크라트였기에 더욱 그에게 이질적인 냄새.

그는 곧바로 그 역한 불길함의 근원을 찾아 아래를 내려다보았고, 어느새 자신을 포함한 병사들의 발을 적시고 있는 그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기름?”

총알과 화살이 빗발치는 와중, 위에서부터 흘러내리고 있는 이 존재를 눈치챈 이들은 소수에 불과했다. 즉, 이어진 크라트의 비명과도 같은 외침은 결국 아무런 소용이 없었던 것이다.

“모두 벗어나! 기름이다! 화공이야!”


위에서 일렁이던 검은 물결 속에서 붉은 구름이 화악-하며 번진다. 육중한 화염은 촉촉하게 기름을 머금은 죽은 나무들의 잔해와 나뭇가지를 따라 삽시간에 베르달군을 덮쳐왔고, 검은 물결에만 대비하고 있던 숲의 용사들은 예상치 못한 붉은 물결에 당황하여 곳곳에서 무너지고 있었다.


“.......”


영력의 전개와 무기를 휘두르는 것으로 어떻게든 화마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사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이런 식의 공격에 익숙하지 않은 용사들은 고스란히 붉은 물결의 먹잇감이 될 수밖에 없다. 측면으로 이동한 기사들이 애를 써주고는 있지만, 애초에 행군 중이던 대열 자체가 길게 늘어서 있었기 때문에 모든 곳을 엄호해주기란 불가능이었다.

불에 타며 비명을 내지르는 병사들, 동요하는 방어선 사이로 계속 쏟아지는 총탄과 화살, 그리고 화염마법들.


그야말로 절정의 혼돈 속에서, 크라트는 만약 자신이 적의 지휘관이었다면 택했을 선택의 순간을 맞이하고 있었다.


“온다!”


불길이 잦아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쏟아져 내려오는 먹색의 물결. 어느새 나타난 비탈길 아래의 매복군도 동시에 함성을 내지른다. 포위 공격에 대비하기는커녕 전열조차 재정비하지 못한 베르달군으로서는 절체절명의 순간이었지만,


“불붙은 갑옷은 버려! 기사들은 전방에만 신경 써! 사수들은 무조건 아래 놈들만 노리고! 위로는 쏴봤자 효과가 없어!”


양발에 화상을 입고 어깨에 화살이 박힌 와중에도 쉴 새 없이 전열을 돌아다니며 명령을 내리는 올리. 그리고 그에 호응하여 신속한 움직임으로 부상자들을 가운데로 옮기고 방어선을 재구축하는 베르달 용사들의 모습은 왜 이들이 카나반 최정예라 불리는지 알려주고 있었다.


“-!”


불길보다 더욱 거센 먹색의 물결이 용사들을 덮쳤고, 방패 너머로 느껴지는 이 압박감을 견디기 위해 몇몇 용사들은 이가 부러져야 했다. 불길이 살을 태운 역겨운 냄새를 뒤덮기 위해 곳곳에서 피가 솟구쳤고, 그 피보라를 내뿜는 기사 중엔 크라트의 시린 눈동자도 있었다.


“뒤쪽 상황은?”


후방에서 다가온 듀라를 돌아보지도 않고서 질문을 내뱉는 ‘늑대’. 듀라는 그를 도와 어느 제국군의 미간에 검을 꽂아놓으며 대답했다.


“엘라론님이 합류하시면서 대충 막아내고는 있지만, 마찬가지로 병사들의 피해가 막심해요.”


“후퇴는 없다. 여기서 이대로 놈들을 격멸한다.”


“네, 그렇게 말씀하실 거라 하더군요.”


이런 지옥도의 한복판에서도 짧게나마 미소를 머금을 수 있는 건 역시 ‘광기의 꽃잎’이라는 존재 덕분이겠지. 크라트는 누가 볼 새라 빠르게 미소를 지우고, 압박해오는 적의 정확한 규모를 알아보기 위해 시선을 들어 올린다.


그리고 그는,

어지러운 먹색 물결의 끝자락에서,

익숙하면서도 이질적인 하나의 얼굴과 시선을 찾아낼 수 있었다.


좀처럼 감정을 내보이지 않기로 유명한 ‘늑대’였지만,

저 얼굴과 눈을 마주친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도 격렬하게 표정을 일그러트릴 수밖에 없었다.



“.......쥬넨?”




=====




“빈집털이라고는 해도 최소한의 방어병력은 남겨놨을 줄 알았더니.”


언제나 그래왔듯,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듯한 ‘철심장’ 어윈의 목소리. 그는 지금이라도 적이 나타나 주길 바라는 듯 자신의 거대한 철퇴 ‘아몬둔’을 이리저리 휘두르고 있었지만, 국경을 넘고 수많은 벌목장을 거치며 전초기지까지 둘러보면서도 그는 제국군의 그림자조차 찾을 수가 없었다.


“이상하네요. 마즈다힐 접경지역을 아예 포기할 게 아니라면 이렇게까지 전선을 비울 이유가 없을 텐데.”


그리고 군마를 탄 채 어윈과 함께하고 있는 마즈다힐의 영주이자 방위군 사령관, 줄리아. 하지만 이 막중한 직책과는 달리, 그녀는 아직 말을 타는 것조차 익숙하지 못해 이리저리 불안하게 흔들리는 중이었다.


“흥, 우리를 얕본 거지. 설마 이 정도로 빠르게 움직이리라곤 예상하지 못한 거야.”


“.......글쎄요.”


“척후를 보내볼까? 아니, 보내볼까요?”


“아뇨, 이대로 속도를 붙이죠.”


속도를 붙인다-는 말은 곧 이대로 행군을 속행한다는 의미. 이에 몇몇 부관과 병사들이 본능적으로 한숨을 내쉬려 했지만, 진짜로 한숨을 내뱉었다가는 지금 앞에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철심장’의 호통이 대지를 울릴 거란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애써 참을 수밖에 없었다.


“베이어놈이 꽤나 급했던 모양인데, 본부 대신에 야전사령부를 세워놓고 그렇게 애들을 굴렸다더만. 그래놓고 기껏 정한 목표가 오스타이나라니, 제 무덤 파는 꼴 아닌가?”


“분명 공격하기 까다로운 지형인 건 맞지만, 성공한 전례도 있고 정치적으로도 민감하게 얽힌 곳이니까요. 그 빈틈을 찌르려는 의도였겠죠.”


“흥, 본진이 점령당하면 빈틈이고 뭐고 무슨 소용이야. 설령 오스타이나를 점령한다고 해도 거기 갇히는 순간 빠져나오는 건 배로 더 힘들텐데.”


들썩이는 아몬둔과 이어지는 푸념.

그러나 줄리아의 군마는 걸음을 잇지 못한다.


“.......빠져나오는 건.......?”


“응? 아니, 뭐 그렇지 않나, 아니, 않습니까. 듣자 하니 베르달도 곧바로 놈들의 뒤통수를 치기 위해 움직였다고 하던데, 이런 속도면 아무리 빠르게 오스타이나를 먹는다고 해도 곧장 역으로 포위당해서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될 텐데.”


“.......”


“곧바로 팔루뎀까지 진격해서 먹는다면 모를까, 정면맞대결도 아니고 속도전에서 3군을 상대하겠다니, 흥.”


“.......야전사령부......., 오스타이나.......”




“적입니다!”


어느 기사의 외침에 어수선해지는 행렬. 어윈은 ‘마침내’라며 웃으며 아몬둔을 치켜들고서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듯 걸음을 내딛었지만, 그런 그의 흥분은 줄리아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의해 가로막히고 만다.


“.......어윈, 적의 숫자는요?”


“응? 뭐어, 국경수비대 수준인데? 천 마리 정도?”


“저들은 우릴 막기 위해 온 게 아닙니다.”


“으으음?”


“돌아가는 우리의 발목을 잡기 위해 준비된 자들이죠.”


커다란 눈동자 하나로 줄리아를 돌아보는 철심장.


“뭔 소리야? 돌아가다니?”


“2군단의 목표는 오스타이나가 아닙니다. 팔루뎀은 더더욱 아니고요. 이곳 국경의 주둔군도 동원되거나 사라진 게 아니에요. 우리의 움직임을 피해 우회해서 퇴로를 차단할 셈이죠.”


“우회? 어디로?”


거칠게 솟아오르는 함성.

마즈다힐의 병사들은 압도적인 군세를 향해 도전하는 적을 보며 코웃음을 쳤지만,

줄리아의 표정은 마치 패장의 그것과 마찬가지였다.




“이스누시아입니다.”


작가의말

짧은 연휴였네요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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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4 (35막) 성급한 각성 (2) 20.07.10 63 4 12쪽
383 (35막) 성급한 각성 (1) 20.07.05 70 3 12쪽
382 (막간) 조련 +2 20.07.01 75 3 11쪽
381 (34막) 너는 만용을 부렸다 (11) +1 20.06.27 73 2 12쪽
380 (34막) 너는 만용을 부렸다 (10) +1 20.06.25 68 2 12쪽
379 (34막) 너는 만용을 부렸다 (9) +4 20.06.22 136 4 16쪽
378 (34막) 너는 만용을 부렸다 (8) +4 19.09.25 123 5 10쪽
377 (34막) 너는 만용을 부렸다 (7) +2 19.09.20 195 4 15쪽
» (34막) 너는 만용을 부렸다 (6) 19.09.15 90 4 11쪽
375 (34막) 너는 만용을 부렸다 (5) +2 19.09.09 99 4 10쪽
374 (34막) 너는 만용을 부렸다 (4) 19.09.04 106 2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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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1 (34막) 너는 만용을 부렸다 (1) +2 19.08.18 173 3 12쪽
370 (막간) 저 너머 +2 19.08.13 101 4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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