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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스퍼 님의 서재입니다.

변수의 굴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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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스퍼
그림/삽화
발아현미우유
작품등록일 :
2014.08.20 17:22
최근연재일 :
2020.08.11 17:50
연재수 :
389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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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3,143,319

작성
19.09.25 2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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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글자
10쪽

(34막) 너는 만용을 부렸다 (8)

DUMMY

마른 가지들과 죽은 흙의 칙칙함이 어지럽게 섞여 있는 언덕과 비탈길. 그 모든 죽음의 풍경을 밋밋한 먹색의 시선으로 내려다보고 있던 쥬넨의 곁으로 먹색 제복의 여인이 다가온다.


“훌륭한 성과입니다, 장군. 이로써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주도권을 놓지 않고 작전에 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고맙군, 위즈 소령. 하지만 아직 부족해.”


입으로만 답을 했을 뿐, 쥬넨의 눈동자는 여전히 전장을 향해 있었다. 이에 위즈는 얼굴에서 미소를 지우고, 대신 의구심을 머금은 채로 상관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부족하다니, 그 말씀은?”


“베르달엔 ‘광기의 꽃잎’이 있다. 그녀가 작정하고 후위로 넘어온다면 이 이상 거세게 따라붙기는 어렵겠지. 하지만 여기서 물러나서는 안 돼. 군을 나눠 우회시켜서라도 최대한 베르달군에게 피해를 입혀야 한다.”


“이미 1진은 궤멸적인 피해를 입었고, 2진도 1진의 후퇴를 돕느라 발이 묶인 상태입니다. 굳이 여기서 모험을 하면서까지 추가로 무리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저들은 카나반의 최정예다. 아무리 숲을 벗어났다 하더라도, ‘늑대’를 풀어주면 어느새 뒤를 덮쳐와 이쪽의 발목을 물어버리겠지. 어설픈 공세는 저들의 투지만 불태워줄 뿐이야. 기세가 좋을 때 최대한 찍어눌러놔야 후한이 없는 법이다.”


“하지만, 지금 여기서 군을 나눠 적의 경로를 틀어막으면 전면전으로 전환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물론 수적으로 열세인 것은 아니지만, 기습 성공과 지형이라는 전략적 이점을 버리면서까지 교전을 확대하는 게 과연 옳은 일인지.......”


마침내 쥬넨이 위즈를 돌아본다. 작전보좌관으로서 자신의 곁에 배정된 이 여기사의 진정한 임무가 무엇인지, 불현듯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자네의 의심과 책무를 이해해, 소령. 자신의 삼촌과 싸워야 하는 적국 출신의 장군이라니, 나라도 신뢰를 주기 어려웠겠지.”


“아니, 아닙니다. 그런 건-”


“어디서 굴러먹다 온 건지 모를 촌놈이 군단장님의 눈에 들어 다른 훌륭한 제국기사들을 제치고 장군이 됐다? 내가 네 위치였다면 검을 뽑고 항의했을 거다. 전통이 무시당하고, 지금껏 네가 이뤄왔던 모든 게 부정당하는 느낌이었겠지.

하지만 그런 나이기에 가질 수 있는 시야가 있고, 사고가 있는 법이다.

베이어 경이 나에게 바라는 건 훌륭한 혈통을 지닌 기사로서의 모습도 아니고, 검성을 위협하는 무력도, 위업도 아니야. 그분께선 내가 할 수 있는 게 무엇인지 정확히 알기에 나에게 3만의 병사를 선뜻 내어주신 거다. 그리고 나는 그 3만의 병사 중에서 절반을 저 베르달군을 막기 위해 직접 데리고 나왔지. 이게 무슨 뜻인지 알겠나?”


“.......”


“나에게 내려온 믿음의 절반을 희생해서라도 베르달군을 확실히 묶어두는 게, 이번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한 필수조건이라고 판단한 거다.”


“.......”


“카나반에서 베르달군이 가지고 있는 의미는 단순히 실전으로 다져진 최정예라는 표면적 정의를 점차 넘어서고 있다. 이제 그들은 우리와 국경을 맞대고 있으면서도 서쪽의 팔루뎀, 동쪽의 마즈다힐 사이에서 군세의 균형을 맞추는 임무를 지니고 있어. 우리가 오스타이나를 넘어 팔루뎀까지 진격하기 위해선 베르달에게 뒤통수를 내줘야 하고, 마찬가지로 마즈다힐을 먼저 수복하기 원했다면 베르달과의 공동전선을 감수해야 했겠지.”


“......소수의 병력으로 오스타이나와 마즈다힐을 묶은 뒤, 그 균형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베르달을 무력화시킨다-. 이로써 군단장님의 본대는 아무런 걱정 없이 어디로든 투입될 수 있겠군요.”

쥬넨은 이에 대답하지 않고 전장을 향한 눈동자만을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아마도 지금 그의 머릿속은 바로 옆에 있는 부관의 의문이나 반응보다는, 앞으로 이어질 전황과 그에 대한 전술만이 뒤엉켜 휘몰아치고 있겠지.

그럼에도, 위즈는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장군. 만약 이대로 시간이 지나면 본국과 군단 내부의 인원들은 또다시 장군을 헐뜯을 겁니다. 결과적으로는 오스타이나군도, 마즈다힐군도, 그리고 베르달군도 확실히 격퇴하지 못한 셈이니까요. 그렇지 않아도 장군께서 그 직함을 얻으신 것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


“위즈 소령, 너는 자신에게 득이 되는 명령만을 가려 받을 건가?”


“.......아닙니다.”


“나도 마찬가지다. 그들의 평가, 그들의 의견 따윈 나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어. 나는 군인으로서, 나를 향한 신뢰에 신뢰로 보답하고, 보답받으면 그뿐이야.”


“.......”


“더 궁금한 거 있나?”


“없습니다.”


“그럼 1연대와 2연대장에게 연락해서 군을 분할, 적의 퇴로를 끊고 교전하도록 전달해.”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경례와 함께 그대로 비탈길을 내려가려던 위즈였지만,

쥬넨의 마지막 목소리가 그녀의 발걸음을 붙들고 만다.



“광기의 꽃잎이 나타나면 보고해라. 내가 직접 상대하겠다.”




=====




“대장! 2진이 제국놈들과 교전 중이래!”


전신이 피투성이인 부하의 외침에, ‘늑대’ 크라트는 미간을 구기며 군마의 고삐를 잡아당겼다.


“.......2진이? 본토로 이어지는 길목에 있지 않았나?”

용사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크라트는 이미 머릿속으로 답을 내놓은 상태였다.

“거긴 숲이 있다. 매복은 아니겠지. 그렇다면 일부가 1진의 꼬리를 물고 늘어진 사이 나머지가 군을 나눠 퇴로를 막아보겠다는 이야기인데.”


“그럼 숫자도 얼마 안 될 텐데, 그냥 돌파해버리죠?”


“.......”


여러 부대가 한 부대의 적을 상대로 퇴로를 끊고 포위섬멸을 하기 위해서는, 당연하게도 그 각 부대의 전투력이 적에게 압도되어서는 안 되는 법이다. 잘못하다간 돌파를 허용함은 물론이고 각개격파의 위험까지 있기 때문인데, 바로 이 부분이 크라트가 쉽사리 적의 의도를 간파해내고 있지 못하고 있는 이유였다.

기습을 허용하고, 1진이 패퇴해야 하는 피해를 입긴 했지만, 상황이 대강 정리되면서 크라트는 올리와 듀라 정찰조의 활약으로 인해 대강 적의 규모를 파악할 수 있었다.

그리고 확인된 적의 숫자는 이쪽과 비슷하거나 조금 웃도는 수준. 즉, 군을 나누면서까지 포위섬멸전을 펼칠 정도의 전력은 안 된다는 뜻이다. 병력의 추가적인 투입도 없는 상태에서 이런 움직임이라니, 크라트로서는 조카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한참이나 말 위에서 침묵을 씹을 수밖에 없었다.


“그냥 말머리를 돌려서 정면돌파를 해버리면 어때?”

가만히 아버지의 반응을 기다리던 올리가 결국 참지 못하고 앞으로 나섰다.

“지금 놈들은 우리가 1진 때문에 전전긍긍하고 있을 거라 생각하고 저러는 거잖아. 그냥 빠르게 1진을 재정비하고 2진과 합류, 뒤로 물러날 거 없이 그대로 앞에 있는 놈들을 돌파해버리자구.”


“.......”

아군이 정보전에서 앞서고 있다는 확신이 있다면 올리의 전략이 가장 이상적일 터.

하지만 아직도 크라트의 뇌리에는 위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던 조카의 마른 눈빛이 싸늘하게 박혀있었다.

“.......아니, 돌파하지 않는다.”


“그럼 2진으로-”


“후퇴도 하지 않는다.”


모두의 시선이 크라트에게 집중된다. 물론, 모두가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뭔 소리야, 아버지, 아니, 대장. 그럼 뭐하자고? 그냥 눌러 앉자고?”


“그래.”


“.......으응?”


경악하는 딸의 표정을 뒤로하고 크게 주변을 둘러보는 ‘늑대’.


“소모전은 하지 않는다. 이곳에 간이병동과 진지를 구축하고, 부상자들을 이쪽으로 후송한다. 올리, 너는 엘라 대신에 후방으로 가서 병사들을 이끌고 이곳으로 오도록. 교전은 최대한 피한다. 아무리 전력을 압도한다고 해도 절대로 시간을 끌지 마. 알겠나?”


“아니, 알긴 알겠는데, 여기서 주저앉으면 이도 저도 아니게 되잖아? 오스타이나는? 마즈다힐은 어쩌고?”


“놈들의 목적은 오스타이나나 마즈다힐의 우선적인 점령이 아니야. 어떻게 해서든 이쪽과 마즈다힐의 전력을 소모 시키고 발을 묶어두려는 거다. 심지어 누가 봐도 지는 싸움을 하면서까지 말이야.”


“하지만 이대로 포위당한 채로 앉아있다가 적의 증원군이라도 오면-”


“아니, 적의 본대는 우릴 노리지 않는다. 우리를 괴롭히고 있는 놈들은 절대로 주력이 아니니까.”


무엇이 그를 이리도 확신하게 만들었을까.


“........그럼 놈들이 버리는 패라는 말이야?”


“글쎄. 지금 흘러가고 있는 상황을 커다란 전황판으로 본다면, 우리가 상대하고 있는 적은 그 부대 자체가 거대한 모루라고 볼 수 있겠지.”


“모루?”


딸의 되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며 뛰어내리듯 말에서 내려 착지하는 크라트. 그의 푸른 시선은 주변 지형을 넘어서고 있었다.


“뒤에서 거대한 망치가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도 알지 못한 채 악랄하게 따라붙는 모루에만 신경을 쓰다가는 우리 쪽의 망치가 두드릴 곳이 사라지게 된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할 건 끈질기게 버티되, 소모되지 않는 거야.”


“통신도 먹통인데 뭘 어떻게 하려고? 그렇다고 전쟁이 끝날 때까지 여기 숨어있을 수만은 없잖아?”


“당연하지. 그러니까 우린 그들을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된다.”


“기다리다니? 그들? 누구?”


한껏 일그러지는 올리의 표정에 비해,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아버리는 크라트의 얼굴은 가볍기 그지없었다.





“놈들의 의도를 뒤흔들어줄, 작은 ‘변수’말이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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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2 (막간) 조련 +2 20.07.01 86 3 11쪽
381 (34막) 너는 만용을 부렸다 (11) +1 20.06.27 83 2 12쪽
380 (34막) 너는 만용을 부렸다 (10) +1 20.06.25 79 2 12쪽
379 (34막) 너는 만용을 부렸다 (9) +4 20.06.22 150 4 16쪽
» (34막) 너는 만용을 부렸다 (8) +4 19.09.25 135 5 10쪽
377 (34막) 너는 만용을 부렸다 (7) +2 19.09.20 203 4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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