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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뇽하세용

앞점멸 소녀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퓨전

윤코
그림/삽화
세씨
작품등록일 :
2020.05.11 12:39
최근연재일 :
2021.10.12 16:08
연재수 :
230 회
조회수 :
139,257
추천수 :
9,715
글자수 :
1,573,623

작성
20.05.15 12:04
조회
1,876
추천
137
글자
11쪽

미소짓다

DUMMY

“모두 묶여라!”


론멕이 주문을 외우자, 지평선호의 축축한 갑판 위에서 무엇인가 돋아나기 시작했다.


마치 죽기 싫다고 발악이라도 하려는 듯, 갑판에서 돋아난 굵은 황토색의 나무뿌리가 배 위를 순식간에 뒤덮었다.


“크허악!”

“컥··· 크헥!”


해적들이 미처 칼을 뽑아들기도 전에, 나무뿌리는 그들의 발목으로 다가가 해적들의 전신을 휘감아 옥죄었다.


바다의 도적들이 하늘로 솓구치는 동안, 배 위에서는 단말마의 비명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지평선호가 퍼져나가는 뿌리를 이겨내지 못하고 그만 휘청거리며 신음하기 시작했다. 육중한 마찰음을 내던 무역선은 바다 위에서 미친 듯이 흔들렸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수평선 위에는 기괴하게 뒤틀린 나무 한 그루가 우뚝 솟아나 있었다.


“이건···”


한 선원이 나무에 주렁주렁 매달린, 열매인지 해적인지 모를 덩어리를 넋을 놓고 올려다보며 말했다.


“마법···?”


그가 내뱉은 단어 한 마디가 절망에 침묵하던 선원들의 마음에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해적 선장의 검이 경쾌한 소리를 내며 갑판 위로 떨어졌다. 선원들은 그 소리에 놀라 화들짝 몸을 웅크렸고, 선장실의 문을 등지고 서 있던 론멕을 마치 유령을 본 듯 한 표정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론멕은 기괴하게 뒤틀린 갑판 위의 나무를 쳐다보며 위니에게 말했다.


‘이건··· 정말 굉장해요.’

[그치?]


콧대를 세운 엘프가 팔짱을 낀 채 말했다.


[말했잖아. 네 생각보다 훨씬 더 대단하다고.]

‘놀라워요. 이런 건 정말 처음 봐요. 이게 마..."


순간, 론멕은 힘없이 갑판 위에 주저앉으며 쉴 새 없이 헛구역질을 해대기 시작했다.


“우웩! 으··· 으허엑!”


마치 감옥에서 빠져 나온 순간의 그것처럼, 론멕은 세상이 빙글빙글 돌아가는 것을 느끼며 끔찍한 어지러움에 몸부림쳤다.


수평선에 몸을 반쯤 맡긴 붉은 색 태양은 머지않아 그녀를 중심으로 정신없이 공전하기 시작했다.


“어지··· 어지러워요··· 머리가···”

[마나를 다 써서 그래. 걱정하지 마. 시간이 조금 지나면 괜찮아질 테니까.]

“정신이··· 이러면 안 되는 데···”


하늘색의 엘프는 고개를 숙인 채 신음하던 론멕의 앞으로 미끄러지듯 날아들며 말했다.


[차라리 한 숨 푹 자는게 나을 거야.]

“안 돼요. 당신을 어떻게 믿고···”


채 말을 잇지 못한 론멕은 그만 갑판에 머리를 박고 쓰러졌다. 그런 그녀의 귀에는 점점 멀어지는 듯 한 위니의 속삭임이 들려왔다.


[걱정하지 마. 여기서부턴 내가 맡을 테니까.]



= = = = =



선원들은 얼어붙은 채 론멕을 바라보며 웅성이기 시작했다.


“마녀다···”

“수녀가··· 어떻게 마법을··· 으허억!”


순간, 밧줄에 묶여 옹기종기 모여 앉은 선원들은 공포에 질려 몸을 비틀기 시작했다.


꾀죄죄한 수녀복을 입은 적발의 수녀가 갑자기 갑판 위로 쓰러졌다. 그녀는 연신 헛구역질을 하더니, 이내 실성한 듯 혼잣말을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저 마녀가 우리도 죽이려고 한다!”

“으아··· 으아아아악!”


비명을 지르던 선원들은 갑판 위에서 몸부림치는 수녀에게서 도망치기 위해 필사적으로 몸을 꿈틀거렸다.


지평선호에 우뚝 서 있는 뒤틀린 나무와 그것에 대롱대롱 매달린 해적들, 그리고 그 밑에서 꼴사납게 몸부림치는 선원들과 귀신 들린 듯 머리를 갑판에 박은 수녀는 바다 위에 한 데 모여 전례없는 아비규환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적발의 수녀는 언제 그랬냐는 듯 벌떡 일어나 큰 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조용!!!”


그녀의 외침에 선원들은 일제히 얼어붙었다. 그런 그들을 한심하기 짝이 없다는 듯 내려다보며, 적발의 수녀는 말했다.


“걱정하지 마. 아무도 안 죽일 테니까. 나는 선택적 비살생주의자거든.”


미소지은 채 안경을 벗은 그녀는, 이내 그것을 주머니에 깊숙이 찔러넣었다. 텅 빈 하늘색 눈동자를 번뜩이던 수녀가 손가락으로 나무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 해적들도 죽은게 아니야. 그냥 묶어둔 거지.”


그 말에 선원들은 모두가 그녀의 손가락을 따라 나무 위를 쳐다보았다.


뿌리에 온 몸이 휘감긴 그들은 나무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 눈을 크게 뜨고는 눈알을 이리저리 굴릴 뿐이었다.


수녀는 그 모습을 보며 살짝 눈웃음을 지었다. 론멕이 잠든 사이에, 그녀의 몸을 차지한 위니는 빨간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말했다.


“상황이 생각보다 복잡해졌으니, 너희가 해야 할 일을 정리해 줄게.”


적발의 수녀는 눈을 날카롭게 치켜올리며 말을 이었다.


“내 말대로··· 해 줄거지?”



= = = = =



밤하늘을 수놓은 별들이 서로의 빛을 견주고 있었다.


잔잔한 밤바다 위에 출렁이는 해적선에서, 누군가의 기쁨에 겨운 비명 소리가 울려퍼졌다.


“이거지! 바로 이거지!!!”


위니는 드넓은 그물침대 위에서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갖가지 과일들을 양 볼에 가득 우겨넣던 수녀는 그녀의 옆에서 천천히 부채를 흔들던 해적에게 말했다.


“이거 말고 다른 건 없냐?”


식은 땀을 흘리던 해적이 어쩔 줄을 몰라하며 말했다.


“저··· 남부 루블란의 특산품인 두리안은 어떻습니까?”

“···네가 아주 불타고 싶지?”


그물침대 위에서 다리를 꼰 채, 사과를 한 입 베어문 위니가 해적에게 말했다.


“됐고, 너네 선장이나 잠깐 데려와 봐.”


다급히 고개를 숙인 해적이 부리나케 해적선의 선장실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허름한 잠옷 차림의 해적 선장이 비뚤어진 모자를 고쳐쓰며 위니를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차렷 자세로 그물침대 옆에 선 그는 갈라지는 목소리로 위니에게 말했다.


“부··· 부르셨나이까 마법사님··· 헤헤···”


적발의 수녀는 밤하늘에 수놓인 별을 세며 말했다.


“어, 왔니? 내가 궁금한게 하나 있는데 말이야, 유베르논 해역은 경비가 삼엄하다고 정평이 나있지 않나? 너희 대체 어떻게 여기까지 들어온 거야? 세상이 달라진 거야 뭐야?”


해적 선장은 검은 수염을 배배 꼬며 말했다.


“그게 말입니다요. 저희는 사실 북쪽에 위치한 외딴 섬을 향하고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유베르논에 도착했지 뭡니까?”


그 말에, 벌떡 일어난 위니가 그에게 되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더 자세히 말해봐.”


모자 속에 손을 넣어 머리를 긁은 해적 선장이 말했다.


“그게···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분명 나침반이 가리킨 방향으로 항해 중이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성국의 해안에 와 있었지요."

"..."

"왠일로 유베르논의 군함이 안 보이길래 성국에 무슨 일이라도 난 줄 알고··· 눈앞에 보인 마법사님의 배를···”

“불가능해. 너흰 해적이잖아. 항해술 하면 유베르논의 항해사도 혀를 내두를··· 뭐 그런 거 아니었어?”


해적 선장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그의 금 이빨에 반사된 별빛이 밤하늘 밑에서 반짝였다.


“아이구, 제가 이런 말 하긴 뭣 하지만, 항해술엔 우리를 따라올 자가 없지요. 크하핫!”


호탕하게 웃던 해적 선장은 이윽고 입을 틀어막은 채 위니를 빤히 쳐다보았다.


당황한 그의 모습에는 관심 조차 두지 않은 채, 적발의 수녀는 그녀의 텅 빈 눈동자로 수평선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당연하게 북쪽으로 가고 있던 걸···”


순간, 위니의 뇌리에 지평선호 위에서 그녀가 론멕에게 했던 이야기가 스쳐 지나갔다.


[당연한 것을··· 당연한 듯이 무시하는 자가 있다면···]


눈을 게슴츠레 뜬 위니가 나지막이 말했다.


“설마··· 설마··· 그년이···”

“예? 잘 못 들었습니다 마법사님?”


그물침대를 박차고 일어난 하늘빛 눈의 수녀가 입을 열었다.


“아무 것도 아니야.”


허리에 손을 얹은 채 밤하늘을 바라보던 위니는, 이내 바다 위에 떠오른 달을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미친 음유시인 하나가 아직도 살아있을 뿐이지."



= = = = =



고개를 털어낸 론멕이 슬며시 눈을 떠올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눈에는 그 무엇도 보이지 않았다.


“여긴···”


흐릿한 기억의 단편에서, 수녀는 이곳에서 있었던 일들을 하나하나 떠올리기 시작했다.


“소용돌이에 휘말렸던 곳··· 땅이 꺼지듯 밑으로 끌어내려졌던 곳···"


칠흑 같은 어둠으로 가득 찬 공간. 그녀는 언젠가 이 곳에 와본적이 있었던 게 분명했다.


깜짝 놀란 그녀는 주춤주춤 뒷걸음질치다가, 이내 무엇인가를 깨닫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젠 없네?”


전과는 다르게 놀랍도록 평온한 텅 빈 공간 속에서, 론멕은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곳에는 여전히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것이 대체 어찌 된 영문인 지, 머리를 긁적이며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녀는 머지않아 정처없이 앞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암흑 속을 진전하던 수녀는 다리가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 그렇게 멈춰선 론멕은, 이내 종아리를 두드리며 입을 열었다.


“그래··· 정신을 잃었었지···”


아직도 어지러움의 여운이 가시지 않은 듯,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론멕이 생각에 잠겼다.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잘 때마다 여기에 오는 건가? 아니면 위니에게 몸을 완전히 빼앗긴 건가? 설마···’


끝이 보이지 않는 암흑 속에서, 끊임없이 머리를 굴리던 론멕은


이내 소스라치며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보통 이야기는 도입부가 중요하다잖아요?>


갸냘픈 목소리가 텅 빈 공간 속에서 울려퍼졌다. 침을 꿀꺽 삼킨 론멕은 이윽고 슬며시 고개를 돌렸다.


그런 수녀의 눈에 비친 것은 그녀에게 등돌린 채 서 있는, 잠옷을 입은 한 여자아이였다.


발목까지 내려오는 풍성한 금발의 여자아이는 그녀가 들고 있던 책의 페이지를 넘기며 말을 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단두대형을 받은 기분이 어떠신가요?>


알 수 없는 공포에 사로잡힌 론멕은 그저 소녀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책장을 넘기는 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린 론멕은 그제서야 입을 열었다.


"넌... 누구니?"

-텁


두터운 책을 덮는 소리가 텅 빈 공간 속에서 울려퍼졌다. 의문의 소녀는 여전히 론멕에게서 등을 돌린 채 갸냘픈 목소리로 말했다.


<말해준다 해도 어차피 기억하지 못할 거에요. 그래도 걱정하지 말아요.>


금발의 소녀는 커다란 책을 품에 껴안고는 말을 이었다.


<우린, 곧 다시 만나게 될 테니까.>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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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지평선호 +12 20.05.14 2,123 126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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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목걸이의 목소리 +19 20.05.11 4,011 182 9쪽
1 이야기책. 그리고 론멕 +29 20.05.11 8,122 291 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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