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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뇽하세용

앞점멸 소녀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퓨전

윤코
그림/삽화
세씨
작품등록일 :
2020.05.11 12:39
최근연재일 :
2021.10.12 16:08
연재수 :
230 회
조회수 :
139,263
추천수 :
9,715
글자수 :
1,573,623

작성
20.05.11 12:44
조회
8,122
추천
291
글자
7쪽

이야기책. 그리고 론멕

DUMMY

그는 아무것도 들을 수 없었다.

저 멀리 보이는 시뻘건 화산과

가장 가까이 있는 그의 심장이 동시에 요동쳤지만

그에겐 아무것도 들려오지 않았다.

검을 지팡이 삼아 가까스로 몸을 추스른 그는

고개를 들어 까마득한 오르막을 보았다.

먼지쌓인 고서의 귀퉁이에도

선술집의 허풍섞인 메아리에도

어렸을 적 머리맡의 동화책에도

그 어디에도

이 오르막의 끝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다.


검은 재로 가득 찬 암흑 사이에서

타오르는 산맥의 정상을 본 그는 직감했다

고목의 옹이처럼 튀어나온 동굴 속에

이 모든 울림의 원인이 도사리고 있음을


그리고··· 이것이 마지막 싸움이 되리라는 것을···


= = = = =


“수녀님!”


날카로운 목소리가 이야기를 잘랐다.


“엉? 왜?”

“졸려요! 지루해요!”


예상과는 다른 아이들의 반응에 당황한 이야기꾼은 황급히 안경을 고쳐썼다.


“이게? 말도 안돼. 여기가 가장 흥미진진한 부분인데···”

“으아아~”


아이들은 질렸다는 듯 입을 모아 한숨을 내뱉고는, 이내 하나둘씩 이불을 뒤집어썼다. 매몰찬 청중의 반응에 풀이 죽은 수녀는 할 수 없다는 듯 책을 덮으며 말했다.


“더 읽어달라고 떼를 써도 모자랄 판인데, 너흰 정말 이해할 수가 없구나.”

“괜찮아요! 우리를 반드시 재우겠다는 수녀님의 의지는 이해해요!”

“그 입 다물렴 케이시. 자, 그러면 이제 초를 끌 테니, 모두들 이불을 잘 덮도록 해요.”

“네에~ 안녕히 주무세요 수녀님~”


수녀는 조심스레 문을 닫고 나왔다.


문의 틈새로 아직 잠들지 않은 아이들의 킬킬거리는 웃음소리가 새어나왔지만, 그녀는 그저 피식 웃으며 자신의 방으로 향하는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내 참. 이게 지루하다니. 이해가 안 돼.”


불만스럽다는 듯 중얼거린 수녀는 달빛에 그녀가 아이들에게 읽어주던 책을 비춰보았다.


닳다 못해 너덜너덜해진 책의 표지에는 검은 용을 마주한 늠름한 전사가 그려져 있었고, 책의 제목 밑에는 삐뚤빼뚤한 글씨로 이름 하나가 적혀 있었다.


(용사 다리온의 모험 )

-페트나 베리미온 씀-

-론멕꺼-


수녀는 그녀가 어린시절 책에 써 놓은 자신의 이름을 아련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녀가 이 책과 함께한지도 어느덧 13년이 다 되어갔다. 이야기는 이미 모조리 외워버린지 오래였다.


몇 페이지에 무슨 얼룩이 있는지를 기억할 정도로, 오랫동안 ‘용사 다리온의 모험’ 을 간직해온 그녀는 이제 어엿한 성인이 되었지만


표지를 볼 때의 두근거림은, 일곱살 때의 그것과 다를 것이 없었다.


“···더 이해가 안 가.”


론멕은 구시렁거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낡아빠진 이야기책이 그녀의 품 속에서 바스라지는 소리를 냈다.



= = = = =



새벽의 냇가는 고요하기 마련이었지만, 오늘만큼은 달랐다.


“얍! 죽어랏! 죽어!”


짧은 적발에 안경을 쓴 수녀는 그녀의 무기로 눈 앞의 적을 응징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그런 론멕의 방망이질에, 빨랫감은 철벅거리며 애처로운 비명을 질렀다.


“드래곤이여... 형편없이 약하구나.”


드래곤과의 혼신의 사투를 벌이는 대신, 수녀는 마지막 남은 빨랫감을 곤죽으로 만들어 버린 후, 만족스럽다는 듯 일어나 기지개를 폈다.


“그래. 바로 이게...”


그런 수녀의 눈에 띈 건 빨랫감이 산더미처럼 쌓인 나무통이었다. 한 숨을 쉰 론멕이 빨래 방망이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모험이란 거지. 젠장할.”


론멕은 힘겹게 나무통을 끌어안고 성당으로 향하는 오르막을 올랐다. 빨랫감의 꽤나 벅찬 무게에, 놀란 수녀가 힘겨운 발걸음을 옮겼다.


“어엇, 어어엇!”


그녀는 그만 돌부리에 발을 걸리고 말았다.


꼭두새벽부터 빨아온 옷가지들이 흙바닥에 유린당할 것이라는 비극을 직감한 그녀는 눈을 질끈 감으며 탄식을 내뱉었다.


“신이시여!”


그녀의 기도를 들어준 것일까, 나무통은 바닥으로 나뒹구는 대신 평온한 무게중심을 되찾았다.


"아이쿠. 조심해야지.”


론멕은 나무통 옆으로 고개를 내밀어 구원자의 얼굴을 확인했다.


주름살이 가득한 얼굴에 온화한 미소를 띤 구원자는 론멕의 것과 같은 수녀복을 입고 있었다.


“원장 수녀님! 죄송해요, 큰일 날 뻔했네.”

“이렇게 빨랫감이 몰렸을 때는 여러번 나눠서 옮겨야지.”

“저도 그런 생각을 안 해본건 아니에요. 다만...”


빨래통을 고쳐잡은 론멕이 말을 이었다.


“조금 늦게 떠올린게 문제지. 수녀님은 더 안 주무세요?”

“아휴. 늙으니까 잠도 없어지고, 괜찮다. 그나저나...”


원장 수녀는 낑낑대는 론멕에게 말했다.


“너도 이젠 어엿한 수녀로구나. 그 악동 론멕이 이렇게나 일찍 일어나서 빨래를 하다니, 옛날엔 매타작을 해도 안 일어나던 것이...”

“수녀님도 참. 옛날 이야기를 다 하신다.”

“이런게 주님의 기적이 아니면 뭐겠니? 놀랍구나. 놀라워...”

“기적이랄 것 까지야...”


오르막은 어느새 잘 닦인 돌길로 변해있었다. 성당의 후문을 지나며, 론멕은 나지막히 원장 수녀에게 말했다.


“은혜를 아주 많이 졌는걸요. 버려진 저를 거둬주신 것 부터, 입혀주시고 키워주시고...”

"..."

“이렇게 직접 해보니까 좀 알겠다 싶네요.”

“쉬운 게 하나도 없지?”

“네. 어휴, 말도 못 해요. 빨래부터 시작해서 챙겨야 될 게 얼마나 많은지. 애들은 극성이고, 몸이 두 개여도 모자랄 판이라니까요.”

“그런게 바로 사랑이란다. 너는 이곳의 아이들에게 사랑을 나눠주고 있는 게지.”

“원장님이 제게 해주신 것 처럼 말이죠?”


원장 수녀는 말 없이 미소를 지었다. 여명의 두 수녀는 그저 침묵을 지키며 발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떠오르는 해가 성당 건물을 환하게 비추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성당 내부의 고아원에 도착한 둘의 침묵을 깬 것은 원장 수녀였다.


“햇빛이 잘 드나드는 곳에 널어두렴. 그래야 잘 마르지.”

“알겠어요 수녀님.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저도 이제 다 컸는걸요.”

“아무리 신의 기적이라도, 너를 어떻게 믿겠니?”


깔깔 웃기 시작한 론멕을 뒤로 하고, 원장 수녀는 다른 건물을 향하며 말을 이었다.


“그러면 좀 있다 보자꾸나. 테드 녀석에게 아침 꼭 먹이는것 잊지 말고.”

“오늘 아침 메뉴가 뭐였죠?”

“감자 샐러드에 아보카도 수프란다.”

“맙소사. 큰 기대는 안하시는게 좋을것 같아요.”


= = = = =


점점 멀어지는 원장 수녀의 뒤에서, 한 숨을 쉰 론멕은 빨래통을 내려놓았다.


욱신거리는 팔의 통증에, 수녀는 손을 탈탈 털며 자신의 연약한 근육을 달랬다.


원장 수녀가 집무실이 있는 건물로 들어가자, 론멕은 그제서야 입을 열었다.


“고마워요 어머니.”


누군가에게 받은, 그리고 누군가에게 나눠줄 사랑으로 가득 찬 미소를 지은 론멕은


얼마 지나지 않아 입꼬리를 조금씩 내리며 싸늘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정말 고마운데... 난 이곳이 너무나도 지루한걸요."


작가의말



‘앞점멸 소녀’ 는 정통 판타지 어드벤처 소설입니다.

고난을 겪으며 성장하는 주인공이기에 이야기의 흐름이 비교적 느립니다.

긴 이야기를 구상했기에, 느린 전개를 참고 봐 주신다면 절대로 실망시켜드리지 않겠습니다.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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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페트나 베리미온 +17 20.05.24 1,266 107 11쪽
21 환자의 협박 +8 20.05.24 1,212 90 10쪽
20 모험의 왕국 +15 20.05.23 1,535 105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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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심연 속에서 +18 20.05.11 2,858 161 9쪽
3 그녀와의 첫만남 +15 20.05.11 3,019 159 9쪽
2 목걸이의 목소리 +19 20.05.11 4,011 182 9쪽
» 이야기책. 그리고 론멕 +29 20.05.11 8,122 291 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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