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구와 시작의 도시
골목에서 나온 론멕은 새로운 풍경에 그만 넋을 잃고 말았다.
물비린내가 진동하는 도심의 사이로는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각기 다른 발걸음으로 분주히 어디론가 이동하고 있었다.
연기가 피어나오는 대장간에서는 아직 채 식지도 않은 쇠사슬을 망치로 두들기는 소리가 울려퍼졌고, 저 멀리의 항구에서는 성당의 것과는 많이 다른, 가볍고 경쾌한 종소리가 쉴 새 없이 들려왔다.
“여기는...”
론멕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역시 모르겠어요. 여기가 어딜까요?”
위니는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그 나이가 되도록 주변에 어떤 도시들이 있는 지도 몰라?]
“그러게요. 저도 감회가 새로워요.”
[그러게. 나도 감회가 새롭다 야.]
하늘색 엘프의 형상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인간들도 정말 많이 발전했구나. 온통 신기한 것들 천지네.]
항구에 정박한 거대한 배를 흥미롭다는 듯 바라보던 위니에게, 론멕은 의심스럽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아까 토툽스 제국 이야기도 그렇고, 엘프란 것도 그렇고. 당신 대체 몇 살이길래 그러시는 건데요?"
그 말을 들은 하늘색의 엘프가 이마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적어도 네 생각보다는 훨씬 옛날 사람... 아니, 엘프란 것만 알아 둬. 그보다 너 입으로 말하는 것 좀 어떻게 해봐.]
“그건 갑자기 왜요? 아...”
머리를 행주로 묶은 한 남자가 그녀를 이상하다는 듯이 쳐다보는 광경을 보고 나서야, 론멕은 무엇이 문제인지를 깨달았다.
[내 말소리와 모습은 나와 결속된 네게만 보여. 그렇게 혼잣말을 계속 했다간 정신이상자 취급을 받거나... 의심받기 딱 좋다고.]
“그럼 어떻게 당신에게 말을 걸죠?”
위니가 손으로 관자놀이를 두드리며 말했다.
[간단해. 내게 말을 거는 것처럼, 할 말을 상상해봐.]
론멕은 골목의 입구에서 오도카니 선 채, 집중하려는 듯 지긋이 눈을 감았다.
‘... 이렇게? 들리세요?’
위니는 대답 대신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론멕은 그런 위니의 모습을 보고는, ‘마음 속으로 말하기’ 를 계속했다.
‘그러면 이제 여기가 정확히 어디인지를 확인해 보죠. 그런 다음엔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할 지를 제게 알려주세요.’
무엇인가를 생각해내려는 듯, 텅 빈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던 엘프의 형상이 론멕에게 말했다.
[아마 서쪽으로 가야 할 거야. 정확한 건 네 말마따나 이곳이 어디인지를 알아보고 나서 이야기해보자고. 그리고 그 전에··· 중요한 할 일이 하나가 있어.]
론멕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위니에게 말했다.
‘중요한 일이라뇨?’
[그게··· 너도 알다시피 나는 정말 오랜 시간동안 잠들어 있었단 말이지. 그래서··· 나는···]
하늘색의 엘프가 몸을 배배 꼬며 말을 이었다.
[나는··· 쌓인 욕구가 많단 말이야··· 그러니까 잠시만 네 몸을 빌려서··· 헤헤···]
“안 돼. 절대로!”
몇몇의 행인들이 론멕을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며 그녀의 곁을 지나쳤다. 얼굴이 홍당무가 된 수녀는 부끄럼에 어쩔 줄을 몰라하며 위니에게 말했다.
‘용납할 수 없어요. 절대 안 돼.’
행인들과 마찬가지로, 질색을 하는 그녀를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던 위니가 말했다.
[나는 뭔가 맛있는 걸 먹고 싶단 이야기를 하려던 거였는데, 너 대체 무슨 생각을 한 거야? 너 수녀 맞냐?]
그 말을 들은 론멕은 고개를 숙여, 폭삭 익은 얼굴을 애써 감추었다. 위니는 그런 론멕을 바라보며 혀를 차고는, 이내 도심의 한 식당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저거다! 나 저거 먹어볼래!]
= = = = =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을 피해가며, 론멕은 말끔하게 포장된 돌 길 위를 걷고 있었다.
위니는 그런 그녀의 옆에서, 입을 삐죽 내민 채 론멕에게 말했다.
[거지.]
론멕은 애써 그 말을 무시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깍쟁이. 짠순이.]
참다 못한 론멕이 한 숨을 쉬고는 말했다.
‘어쩔 수가 없잖아요. 성당에서 돈 쓸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게다가 그 상황이 여비를 챙길 만한 상황이었다고 생각해요?’
[흥!]
팔짱을 낀 엘프가 론멕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그런 그녀를 보며 수녀는 어이가 없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애초에 이런 상황을 만든 건 당신이잖아요.’
[나를 주운 건 너잖아.]
‘참 내, 어이가 없어서. 생각해보니 큰일이네. 돈이 한 푼도 없는데··· 이제 어쩌죠? 이게 다 당신 때문이라고요.’
[거지.]
소리없는 전쟁을 벌이던 그 둘은 이내 동시에 옆을 바라보았다.
론멕은 커다란 나무 판자에 붙여진 대형 지도 앞에 멈춰섰다. 지도에는 도시의 이름과 함께 휘갈긴 글씨체로 무엇인가 적혀 있었다.
(항구 도시 유베르논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유베르논은 신의 부름을 받았다고 여겨지는 항해사이자 성직자, 성 유베르논의 이름을 딴 도시로서 성국의 주요 무역 요충지중 하나이자 항해술의 선지자들이 모인··· ··· ···)
(*소매치기 조심)
(*정당한 절차를 거치지 않은 소유의 이전에 대해 유베르논 당국은 일절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나무 판자를 보던 론멕은 금이 간 안경을 고쳐쓰며 위니에게 말했다.
‘유베르논··· 들어 본 적이 있어요. 아마 큰 항구가 여기 어디에 있을 거에요. 그럼 이제 어디로 가야 하죠?’
위니는 그녀의 손으로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항구라··· 그럼 일단 배를 타고 최대한 서쪽으로 가 보자. 우리가 가야 할 곳은 에르딘이란 도시야. 그곳은···]
아는 이름이 나오자, 론멕은 눈을 반짝이며 위니의 말을 가로챘다.
‘아, 지리 시간에 배운 적이 있어요. 대륙 극서단에 위치한 에르딘··· 그곳은···’
위니와 론멕은 동시에 말했다.
[환상적인 마법의 도시지.]
‘악으로 가득 찬 이단의 도시죠.’
위니는 손으로 머리를 쓸어넘기며 말했다.
[너 정말··· 알 수 없는 것에 대해 편협한 생각을 갖는 게 얼마나 멍청한 건 지 알아?]
‘끔찍한 마법 목걸이에 몸을 뺏길 뻔한 사람들이라면 적어도 다들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까요?’
하늘색의 엘프는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입을 꾹 닫은 위니는 머쓱하다는 듯 그녀의 텅 빈 눈동자로 그저 바닥을 응시할 뿐이었다.
그런 그녀를 뒤로 한 채, 론멕은 한 숨을 쉬며 말했다.
‘아무튼··· 결국 배를 타야 한다는 건데, 문제는 제가 한 푼도 갖고있질 않단 거에요. 대체 어떻게 배를 타야···’
팔짱을 낀 채 난처하다는 듯 지도를 바라보던 론멕은, 순간 어깨에서 느껴지는 손가락의 감촉에 몸을 움찔했다.
등돌린 론멕의 눈에는, 어느새 누군가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떡 벌어진 어깨와 지저분한 더벅머리, 터질 것 같은 팔근육에 닻 모양의 문신을 새긴 남자가 론멕의 눈을 응시하며 말했다.
“당신··· 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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