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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뇽하세용

앞점멸 소녀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퓨전

윤코
그림/삽화
세씨
작품등록일 :
2020.05.11 12:39
최근연재일 :
2021.10.12 16:08
연재수 :
230 회
조회수 :
139,255
추천수 :
9,715
글자수 :
1,573,623

작성
20.05.15 00:00
조회
1,960
추천
129
글자
12쪽

바다 위에서

DUMMY

“해적··· 해적이다!”


돛대에 걸터앉아 바다를 주시하던 한 선원이 망원경을 접으며 다급하게 소리쳤다.


심상치 않은 선박의 분위기에,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론멕이 위니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까 분명 말씀하셨죠? 대규모 보호 마법이니 뭐니···”


하늘색의 엘프가 굳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쓸만한 마법이야 이것저것 많지만··· 네 마나통이···]


론멕은 침을 꿀꺽 삼켰다. 수녀는 그녀와 마찬가지로 입을 살짝 벌린, 해적기에 그려진 살벌한 두개골을 그저 넋을 놓고 바라볼 뿐이었다.


한참동안이나 해적기를 응시하던 론멕은, 머지않아 안경을 고쳐쓰며 배 안의 상황을 살폈다.


열댓명의 선원들은 그들이 하던 것을 멈추고는 그저 얼어붙은 채 저 멀리에서 나부끼는 해적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유령에 홀린 사람들 처럼, 그들은 어쩔 줄을 몰라 하며 손 안에 놓인 일감들을 하나하나 갑판 위로 떨어트리기 시작했다.


-딸그랑

-털썩


밧줄과 쇠사슬이 힘없이 갑판 위에 뭄을 뉘였다. 지평선호는 음산한 바닷바람에 몸부림쳤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바다 위의 공포에 억눌린 것은 선원들 뿐만이 아니었다.


“이건... 말도 안돼.”


키에서 손을 놓은 선장 마르폴은 선원들과 마찬가지로, 이제는 수평선 위를 완전히 떠올라 태양 속에서 나부끼는 해적기를 그저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해적선은 얼마 지나지 않아 그것의 완전한 모습을 드러내었다. 해골이 그려진 검은 해적기의 밑으로, 이곳 저곳을 넝마로 기워낸 돛이 마치 터지기라도 하려는 듯 부풀어 올라 있었다.


지평선호를 향해 맹렬히 돌진하는 해적선의 뱃머리에는 양 손을 가슴에 포갠 여성의 모습을 한 새하얀 석고상이 붙어 있었다. 마치 바다의 비극을 알리러 온 전령처럼, 그녀는 지평선호를 바라보며 차분한 발걸음을 옮겼다.


“유베르논의 해역에··· 해적이··· 이건···”


선장 마르폴은 나지막이 신음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야··· 불가능해···”


쉴 새 없이 중얼거리던 선장이 갑판 위에 얼어붙은 선원들에게 소리쳤다.


“전원! 정신 차려라! 전속력으로 이곳을 탈출한다! 돛을 더욱 펼치고, 노를···”


다급한 듯 소리치던 선장의 말을 끊은 것은 돛대에 걸터앉아 수평선을 감시하던 선원이었다.


“선장님··· 바람이 바뀌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지평선호의 모두가 일제히 돛으로 시선을 옮겼다. 아까의 위세가 무색한 듯, 돛은 축 쳐진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지평선호가 멈춰섰다. 먹잇감을 발견한 해적기의 해골은 소름끼치는 미소를 지었고, 해적선의 뱃머리에 달린 석상은 눈을 살포시 감은 채 그저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



= = = = =



지평선호의 모두가 다급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내려가! 노··· 노를 저어라!”


“노가 있는 곳엔 짐이 가득 실려 있잖습니까! 그곳으로 들어가기는 커녕, 짐을 거두어내는데도 한참이 걸릴 겁니다!”


“이런··· 이럴 수가···”


마치 복잡하게 얽힌 매듭처럼, 예상치 못한 상황에 모든 일들이 꼬인 듯 했다. 아우성과 외침으로 가득 찬 아비규환 속에서, 론멕과 위니는 끊임없이 말을 나누고 있었다.



‘하지만··· 당신이 직접 말했잖아요! 당신은 생각보다 강력하다고! 뭐라도 좀 해보는 게···’

[야, 나도 말했지? 네 마나통은 좁다 못해 없는 수준에 불과하다고. 그렇다고 회복이 빠른 것도 아니잖아? 마법을 한 번 쓰는것도 기적에 가까운 상황인데. 날 보고 뭘 하라는 거야?]

‘날 이런 사지로 내몬 건 당신이잖아요! 당신이 책임져야지!’

[이게 보자보자하니까 못하는 소리가 없네. 그 잘난 신에게 기도라도 해 보던가.]

‘당신··· 내가 죽기를 바라는 거죠? 그래서 일부러 이런 상황에 나를···’


답답함에 주먹쥔 위니가 소리쳤다.


[이 바보야! 네가 죽으면 나도 죽는다고! 내가 괜히 그 감옥에서 널 빼낸 것 같냐? 한술 더 떠서, 나라면 이 상황이 달가운 줄 알아? 너 진짜 최악이라고!]


점점 가까워져 이제는 코 앞에 놓이다시피 한 해적기를 사이에 두고, 위니는 론멕에게 계속해서 소리쳤다.


[그거 알아? 너 진짜 모자란 애란 거? 모험이 그렇게 하고 싶었으면, 하던가! 하기 위해서 힘을 기르기라도 하던가! 적어도 이런 상황이 닥쳤을 때 뭐라도 해 볼 수 있도록 노력이라도 하던가!]

"..."

[그것도 아니고, 심지어 마음 껏 그 ‘모험’ 이란걸 해 볼수 있는 상황인데도, 하는 말이, 뭐? 나보고 뭐라도 좀 해 보라고?]


잠시 멈칫한 론멕은, 이내 지지 않고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붇기 시작했다.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모르면서 함부로 입 놀리지 마.'

[...뭐?!]

'너는 아무 것도 몰라! 난 그런 걸 접할 새도, 생각할 새도 없이 아무 것도 모르는 채 살아왔다고!'

[이... 이게...!]

'너는 모르겠지. 그곳이 얼마나 지루한 곳인지를! 그럼에도 내게 얼마나 소중한 곳인지를! 그리고 그 사이에 놓인 나의 상황을! 너는 아무 것도 몰···’


그녀들의 소리없는 전쟁을 종식시킨 것은 식은 땀에 젖은 생쥐꼴이 된 선장이었다.


“수녀님. 성 유베르논의 이름을 걸고, 이 곳은 해적이 있을 수 없는 곳입니다. 있어서는 안 되는 곳입니다!”


선장은 두려움에 흔들리는 눈으로 론멕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유베르논의 교단은 무엇을 했단 말입니까! 성기사단은 무엇을 했단 말입니까! 대체 어떻게 저들이 이곳에 들어온 것이란 말입니까! 이건··· 이건···”


정신이 반쯤 나가 횡설수설하던 선장은 질겁을 한 론멕을 바라보았다,


그녀에게 이 일의 책임을 묻는 것이 얼마나 멍청한 일인지를 깨달은 선장은, 이내 차분히 심호흡을 하며 론멕에게 말했다.


“수녀님. 선장실 입구로 들어가 왼쪽 구석의 귀퉁이를 보면 작은 은신처로 향하는 문이 있습니다. 어서 그곳으로 피하십시오. 절대 소리를 내거나 움직이지 마셔야 합니다.”


침을 꿀꺽 삼킨 론멕이 선장에게 말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선장은 애써 미소지으며 말했다.


“괜찮을 겁니다. 애초에 수녀님께 먼저 탑승할 것을 물어본 건 저희가 아니겠습니까? 우리를 위해 기도해주신다면, 성 유베르논의 이름으로, 우리는 괜찮을 겁니다.”


해적선이 점점 더 가까워졌다. 이제는 해적들의 난무하는 욕지거리까지 지평선호에 들려오기 시작했고. 그것을 들은 선장은 다급히 뒤돌며 소리쳤다.


“수녀님! 시간이 없습니다! 어서 숨으십시오!”



= = = = =



선장실의 문이 세차게 열렸다.


론멕은 허겁지겁 선장실의 구석에 있는 빈 틈새를 더듬고는, 이내 그것을 열고 은신처로 향하는 사다리를 붙들었다.


사람 한 명이 간신히 들어갈만한 공간 속에서, 론멕은 몸을 웅크린 채 벌벌 떨며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신이시여··· 항해의 성자 유베르논이시여··· 부디 우리를 굽어 살피십사···’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그녀는 묵직한 충격이 그녀의 등을 강타하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소란스러운 아우성 소리가 수녀의 귀에 울려퍼졌다.


욕지거리와 비명, 칼과 칼이 부딫히는 소리가 한데 모여 어우러져 그녀의 정신을 헤집는 듯 했다. 갑작스레 찾아든 혼란에, 두 손을 모은 론멕은 그저 하염없이 기도할 뿐이었다.


[야.]


암흑 속에서, 하늘색의 엘프는 수녀에게 말했다.


[론멕.]

‘왜요··· 조용히··· 조용히 해야···’

[우리 지금 마음으로 대화하고 있어 이 멍청··· 아휴. 아까 말한 건 사과할게. 네 말마따나 나는 네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도 모르고, 네가 어떤 환경에 놓여 있었는지도 몰라.]

‘나는··· 이런 걸 원한 건 아니었어요.’

[그것도 충분히 이해해. 근데 이렇게 얼타다 뒈지는 게 한 순간이라는 거 혹시 아니?]


위니는 웅크린 채 팔에 고개를 파묻은 론멕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모두가 모험을 꿈꾸지. 환상적인 이야기와 낭만적인 여행을 떠올리면서. 그렇게 거짓 속에서 살아가는 거야. 그런데...]

"..."

[이건 모험이 아니라, 현실이라고.]

‘나는··· 나는 몰랐어요···’

[아이고 참... 왜 이렇게 새 가슴이야? 걱정하지 마. 이 이야기가 끝나기 전까진, 나는 너를 최대한 도울 생각이니까.]


그 말을 들은 론멕은 슬쩍 고개를 들며 하늘색의 엘프에게 말했다.


‘몰랐어요··· 나는··· 나는···’



순간, 무엇인가 섬뜩함을 느낀 위니가 몸을 움찔했다.


암흑 속에서, 그녀는 무엇인가를 보았다. 하늘 색의 엘프는 흔들리는 텅 빈 눈동자로 무엇인가를 바라보며 말했다.


[너...]


승자를 알 수 없는 갑판 위의 난투가 끝이 난 듯 했다. 놀랍도록 조용해진 지평선호 안에서, 위니는 론멕에게 말했다.


[아까 감옥에서도 그렇고... 너... 도대체 왜 그렇게 웃는 건데?]


벌벌 떨던 론멕은 주체할 수 없이 입꼬리를 비틀며 웃고 있었다. 실성한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위니에게 말했다.


‘나는 이런 걸 원한 게 아니었어요. 나는 몰랐어요....

...이게... 이렇게나 재미있을 줄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론멕은 후들거리는 다리로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당신이 말한 그 마나라는 거, 지금 얼마나 회복이 됐죠?’



= = = = =



“크핰핰핰하!”


누군가의 갈라지는 웃음소리가 성스러운 유베르논의 바다를 뒤덮었다.


“멍청한 것들 같으니라고. 멍청해 빠졌어!”


해적 선장은 손잡이가 녹슨 칼을 과시하듯 휘두르며 섬뜩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정말 괜찮을 줄 알았나? 유베르논의 가증스럽기 짝이 없는 외침이, 700년이 지난 지금도 너희들 귀에 들릴 줄 알았나? 아앙?!”


허리춤에 칼을 수납한 그가 지저분한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모든 건 변하는 법이다. 제군들.”


선원들은 질긴 밧줄로 포박당하여 무릎을 꿇은 채 해적 선장의 앞에 모여있었다. 그런 그들의 주위로, 꾀죄죄한 해적들은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위협하고 있었다.


“이 바다는! 모든 걸 변하게 만들지! 배에는 따개비가 가득! 돛에는 구멍이 가득! 죽어 말라비틀어진 성자의 외침에는 이끼가 가득!”


검은 수염의 해적 선장은 칼을 다시 뽑아 그것을 어깨위로 올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너희들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겠다. 천천히 갑판 위를 걷다 상어의 맛난 간식 거리가 되던가··· 아니면 우리들과 함께 하던가!”


그 말에 지평선호의 선원들을 둘러싼 해적 무리가 환호하기 시작했다. 선원들은 고개를 숙이며 신음했고, 해적 선장은 씨익 웃으며 누런 이빨 사이에 끼워진 금 이빨을 보이며 말했다.


“다시 말하지! 바다는 모든 걸 변화시킨다! 죽음에서, 삶으로! 삶에서! 죽음으로! 지루해 짝이 없는 교단의 교리에서, 피와 황금으로 가득 찬 바다의 낭만으로!”


검은 수염의 해적 선장은 칼을 들어보이며 말을 이었다.


“사람을! 변하게 하···.”


순간, 선장실의 문이 세차게 열렸다.


그것의 소리에, 화들짝 놀란 선원들과 해적들은 동시에 선장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선장실의 입구에는 어느새 깨진 안경을 쓴 적발의 수녀가 서 있었다. 한 쪽 발을 든 채 해적들과 선원들을 내려보던 그녀에게 하늘색의 엘프가 말했다.


[이정도면 충분해. 팔에 힘을 빼고···]


선원실의 문을 발로 걷어차며 갑판으로 나온 론멕의 오른 팔이 허공을 춤추기 시작했다.


허공을 가르지르는 그녀의 손가락 끝에서는 눈부신 하늘색의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해가 지는 바다에 때를 모르고 날아오른 반딫불이는, 이내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며 빛의 궤적을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그녀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당황한 해적 선장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론멕은 그녀의 앞에 그려진 하늘빛의 오망성을 향해 손바닥을 펼치고는 이내 소리쳤다.


“<서큘러스 인탱글(Circulus Entangle)>!!! 모두 묶여라!!”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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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조련사는 무엇을 조련하는가 +15 20.05.27 1,243 88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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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의사의 집에서 +12 20.05.25 1,244 96 12쪽
23 낮의 그림자 +19 20.05.25 1,236 102 11쪽
22 페트나 베리미온 +17 20.05.24 1,266 107 11쪽
21 환자의 협박 +8 20.05.24 1,212 90 10쪽
20 모험의 왕국 +15 20.05.23 1,535 105 11쪽
19 떠나다 +27 20.05.22 1,802 98 14쪽
18 무역상인 +18 20.05.21 1,321 102 11쪽
17 성국의 흉악범 +15 20.05.20 1,376 101 12쪽
16 두 번의 살인 +26 20.05.19 1,449 101 14쪽
15 13일의 금요일 +14 20.05.18 1,465 102 14쪽
14 세드나의 정오 +11 20.05.17 1,458 103 11쪽
13 광대와 여관 +13 20.05.17 1,555 111 14쪽
12 등불과 불운의 도시 +16 20.05.16 1,810 119 11쪽
11 항해의 끝 +19 20.05.16 1,875 122 11쪽
10 미소짓다 +22 20.05.15 1,876 137 11쪽
» 바다 위에서 +28 20.05.15 1,961 129 12쪽
8 지평선호 +12 20.05.14 2,123 126 11쪽
7 항구와 시작의 도시 +10 20.05.13 2,556 122 7쪽
6 돌격 앞으로 +18 20.05.12 2,625 145 9쪽
5 탈출 +16 20.05.11 2,610 150 8쪽
4 심연 속에서 +18 20.05.11 2,857 161 9쪽
3 그녀와의 첫만남 +15 20.05.11 3,019 159 9쪽
2 목걸이의 목소리 +19 20.05.11 4,011 182 9쪽
1 이야기책. 그리고 론멕 +29 20.05.11 8,122 291 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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