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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뇽하세용

앞점멸 소녀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퓨전

윤코
그림/삽화
세씨
작품등록일 :
2020.05.11 12:39
최근연재일 :
2021.10.12 16:08
연재수 :
230 회
조회수 :
139,266
추천수 :
9,715
글자수 :
1,573,623

작성
20.05.14 00:00
조회
2,123
추천
126
글자
11쪽

지평선호

DUMMY

“혹시 수녀님 아니십니까?”


더벅머리의 남자가 침을 튀겨가며 론멕에게 말했다. 그의 체구가 어찌나 큰 지, 론멕은 그의 그림자 속에서 하늘이 사라진 듯 한 느낌을 받았다.


“네. 수녀님이십니다.”


당황하여 말이 헛 나온 론멕은 순간 그녀의 입을 스스로 틀어막았다.


금이 간 안경 속에서 론멕의 검은 눈동자가 미친 듯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아는 듯 모르는 듯, 더벅머리 남자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디로 가시렵니까?”

“예?”

“어디로 가실 생각이시냐구요.”


투박한 그의 말투에, 론멕은 그 의중을 파악하기 위해 한참동안이나 머리를 굴려야 했다.


“아. 최대한 서쪽으로 갈 생각이에요. 정확하게는···”


론멕은 더벅머리 남자에게서 서서히 시선을 돌리며, 그의 옆에서 여전히 바닥을 쳐다보고 있는 하늘색의 엘프에게 속으로 소리쳤다.


‘도움! 도움!’


론멕의 신호를 들은 위니는 고개를 들어 이것이 어찌 된 영문이냐는 듯 더벅머리 남자를 쳐다보더니, 이내 환하게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했다.


[일단 세드나 반도로 가겠다고 말해. 성자 이름을 딴 도시가 그동안 이름이 바뀌진 않았을 거 아냐.]


론멕은 부리나케 시선을 옮기며 말했다.


“아.. 하하··· 세드나 반도로 가려구요. 심방이 잡혀 있어서···”


더벅머리 남자는 머리를 벅벅 긁으며 입을 열었다.


정체모를 입자들이 그의 머리털에서 떨어져 나오는 것을 본 위니는 질색을 하며 그에게서 물러났다.


“그래요? 꼴이 말이 아니신데... 심방을 참 멀리도 가십니다요. 아무튼, 수녀님을 부른 이유는 그 뭐시냐···”


남자가 그의 엄지로 배 한척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의 팔뚝에 새겨진 닻 모양의 문신이 바닷가의 태양 아래에서 더욱 돋보이는 듯 했다.


“저는 저어기 무역선에서 선원으로 일 하고 있지요. 사실 배에는 여자를 태우지 않는 게 원칙이긴 합니다마는···


그는 무역선을 가리키던 손가락으로 다시금 머리를 긁으며 말을 이었다.


“선장님께서 독실한 신자셔서 말입니다. 혹시 가시는 방향이 같다면, 안전한 항해를 위해 기도를 해 주셨으면··· 하시지 뭡니까?”


안경을 고쳐쓴 론멕이 냉큼 그의 말에 대답했다.


“네! 할게요!”


더벅머리 남자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흔쾌히 대답하는 론멕을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더니, 이내 무역선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그럼 선장님께 그렇게 말 해 두겠습니다. 곧 출발하니 짐을 챙겨서 배에 오르시지요. 갈아입을 옷은 있으십니까?”


론멕은 손사래를 치고는, 이내 더벅머리 남자의 뒤를 쫓으며 말했다.


“짐이랄 게 별로 없어서요. 그냥 지금 탈게요.”

“굳이 안 그러셔도 되는데··· 하여튼 알겠습니다요.”


론멕이 무역선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자, 위니는 마치 질질 끌려가듯, 그녀와 함께 움직이기 시작했다.


깃발처럼 흔들리던 엘프의 형상은 텅 빈 눈동자를 하염없이 굴리며 말했다.


[젠장··· 될 대로 되라지.]



= = = = =



항구에서는 배의 출항을 알리는 종소리가 쉴 새 없이 울려퍼졌다.


거대한 배가 바다 위를 가로지르며 육중한 마찰음을 내뿜었고, 그 소리에 놀란 갈매기떼가 일제히 바닷가의 하늘 위를 날아올랐다.


넋을 놓고 항구의 전신을 바라보던 론멕이 탄성을 내질렀다.


‘이야···’


위니는 그런 그녀를 흘긋 쳐다보며 말했다.


[정말 진지하게 물어보는 건데, 너 항구도 처음 와 보는 거니?]


론멕은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책으로는 많이 봤죠.’


하늘색의 엘프는 질렸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그녀의 사이로, 말끔한 제복을 입은 한 남자가 론멕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제안에 응해주신 걸 감사드립니다 수녀님.”


제복을 입은 남자는 각진 모자를 벗어 론멕에게 인사하며 말을 이었다.


“저는 무역선 ‘지평선호’의 선장인 마르폴이라고 합니다. 마침 저희도 서쪽에 경유지를 두고 있으니, 겸사겸사 해서 수녀님을 세드나에 내려 드리지요.”


론멕은 공손하게 두 손을 모아, 깍지를 낀 채 선장의 말에 대답했다.


“저야말로 선장님의 호의에 감사 드립니다. 지평선호와 그녀의 여정에 신에 가호가 있기를.”

[진짜 환장하겠네. 그런 아무 의미 없는 말 몇마디보다 대규모 보호막 마법이 몇 배는 더 도움이 되겠다.]


위니를 흘긋거린 론멕은 항구와 지평선호를 연결하는 경사로를 올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선박의 위로 올라선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배의 승선로를 둘러싼 열댓명의 우락부락한 뱃사람들이었다.


“오오··· 오오오···.”

“여자··· 여자다! 이건··· 이건 기적이야!”


선원들의 열광적인 환영인사에 마르폴 선장은 기겁을 하며 소리쳤다.


“이 자식들이··· 수녀님께 그게 무슨 말버릇이냐! 빨리 제 자리로 안 돌아가?”


론멕은 머쓱하게 고개를 까딱이며 선원들에게 인사했다.


그런 그녀를 본 선원들은 기쁨의 환호성을 지르기 시작했고, 한심한 선원들의 모습에 한 숨을 쉰 마르폴 선장은 모자로 얼굴을 가리며 론멕에게 말했다.


“선원들의 무례를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불편하시다면 홀로 쓰실 방을 하나 안내해 드리지요.”


론멕은 생긋 웃으며 그 말에 대답했다.


“아니에요. 바람을 좀 쏘이고 싶어서요. 그냥 여기 있을래요.”


그 말을 들은 선원들은 일제히 주먹을 하늘로 치켜세우고는, 이내 다시 환호하기 시작했다.


“우와아아아!”

“날 가져요 수녀님!”

"이 놈은 쓰레기입니다! 제 고해 성사나 들어 주시지요!"


마르폴 선장은 발을 거세게 구르며 소리쳤다.


“이 벌레 같은 놈들아. 빨리 제 위치로 안 돌아가?”


선원들은 선장의 질타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입을 모아 기쁨의 비명을 질렀다.


"예! 알겠습니다 선장님! 유베르논의 위대한 나침반을 위하여!!"


선원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며 자신의 자리를 찾아 로프를 손에 쥐었다.


흰 바탕의 돛이 활짝 펴지고, 배의 출항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자 지평선호는 그제서야 서서히 항구에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뱃머리에 턱을 괸 론멕은 끝이 보이지 않는 바다를 보며 감탄해 마지않았다. 그런 그녀의 귀에 들려온 것은, 입맛을 다시는 위니의 목소리였다.


[이야... 쟤들 근육좀 봐라. 역시 네 몸을 한번쯤은 빌리는 게...]


수녀는 순간 사색이 되어 뒷걸음질쳤다. 겁에 질린 수녀를 바라보며 피식 미소지은 위니는, 이윽고 손을 내두르며 말했다.


[에이 야 당연히 농담이지. 쫄기는.]



= = = = =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중천에 떠올랐던 해는 이제 서서히 수평선 위에 몸을 맡기기 시작했다.


지평선호는 노을이 지는 녹색의 바다 위를 미끄러지듯 가로지르고 있었다. 활짝 펼쳐진 돛은 허리를 한껏 젖혀 바람을 유혹했고, 짙은 갈색의 갑판에서는 선원들의 분주한 발걸음 소리가 울려퍼졌다.


뱃머리에 걸터앉은 론멕은 눈을 지긋이 감은 채 두 손을 모아 무엇인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지평선호를 위해 기도하는 그녀의 빨간 머리칼이 바닷바람을 맞아 세차게 휘날렸다.


[넌 정말 신이 있다고 믿는 거야?]


하늘색 엘프의 시큰둥한 말에, 기도를 멈춘 론멕이 입을 열었다.


‘당신은 모르겠지만, 그건 굉장히 어려운 질문이에요.’


한 숨을 쉰 수녀가 기지개를 펴며 말을 이었다.


‘그러면 당신은 왜 마법을 사용하게 된 건데요?’


지평선호의 난간에 누운 위니가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며 말했다.


[간단하니까. 이치와 논리로 이루어진 거고. 당연한 거니까.]

‘··· 원했던 대답도 아니고, 이해할 수도 없네요.’

[그게 얼마나 매력적인 건지 너는 평생 모를 거다.]


하늘색의 엘프가 뒤척이며 말을 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만약 그런 당연한 이치를 ‘당연하다는 듯이’ 무시하고, 어기는 놈이 있다면··· 그건 정말 이 세상에 존재하는 신이라 볼 수 있겠지.]


‘그게 누군데요?’


돌아누운 위니가 별 것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그냥 그런 게 있어··· 그런 년이···]


론멕은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얼빠진 수녀의 모습에 피식 웃음을 터트린 위니가 말했다.


[아무튼 간에, 다시 물어보자. 너는 정말 신이 있다고 믿어?]


안경을 고쳐쓴 론멕이 위니에게 말했다.


‘적어도 사랑은 있다고 믿어요. 그리고··· 아무리 돈이 없어도 이렇게 배도 얻어 타고··· 일이 잘 풀렸잖아요? 이 모든 게 다시 말하자면 신의 은총이라 할 수 있겠죠. 뭐.’

[그렇게 자애로운 신이 왜 너에게 나를 줍게 했을까?]

‘그건···’


당황하는 론멕의 모습에, 위니는 깔깔 웃으며 말했다.


[그럴 수 있지 뭐. 그런데 네 말을 듣다보니 갑자기 생각난 게 있는데···]

‘그게 뭔데요?’

[생각해봐. 너는 지금 좋은 일이 생기면 전부 신의 은총이라 치부하는 식이잖아?]


론멕은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음··· 잘 모르겠어요. 섣불리 대답하기 힘든 이야기네요.’


위니는 하늘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그냥 그런 생각이 들어. 너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 갑자기 이유 없이 나쁜 일이 생긴다면 그것을 뭐라 부를까··· 악마의 농간? 이단의 수작?]


벌떡 일어난 엘프가 재밌다는 듯 미소지으며 말을 이었다.


[뱃사람들은 이렇게 말하겠지. ‘아, 배에 여자가 타면 역시 불운이 찾아온다.’ 라고. 재밌지 않니?]


그 말에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말을 잃은 론멕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위니가 허둥대며 말했다.


[어··· 이해 못 했어? 그러니까 내 말은, 신이나 악마를 믿는 것 만큼이나 미신을 믿는 게 멍청하단 이야기었어.]

"..."

[아 시발. 설명이 필요한 유머는 망한 유머라는데, 지금이 딱 그 꼴이네.]


론멕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기분 상한 거야? 미안. 네 믿음을 조롱할 의도는 아니었···]

‘그게 아니에요. 어쩌면··· 어쩌면···’


론멕의 눈동자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겁에 질린 수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나지막히 신음했다.


‘···신 처럼··· 미신도··· 전부 사실일지도···’


무엇인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위니는 급하게 고개를 젖혀 뒤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하늘빛 눈동자에는 어느새 수평선 위로 서서히 떠오르는 검은 해적기가 비치고 있었다.


작가의말








관심 갖고 봐주시는 모든 분들께 정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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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돌격 앞으로 +18 20.05.12 2,625 145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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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심연 속에서 +18 20.05.11 2,858 161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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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목걸이의 목소리 +19 20.05.11 4,012 182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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