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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스톤의 서재입니다.

종말의 경계를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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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센스톤
작품등록일 :
2023.05.10 10:11
최근연재일 :
2023.10.04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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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2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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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04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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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3쪽

278화. 에필로그

DUMMY

영종도의 주석궁에서 이제 국가비상대책위원회의 위원장으로 사년 째 계속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도지희 위원장이 이제는 마지막 잔이 될지도 모를 커피를 아껴 마시며 창밖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억지로 쥐어짜는 것도 이제는 한계에 왔어...근해 조업으로 식량을 대체해서 근근이 꾸려가고는 있지만...이런 추세로 가면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삼년...어쩌면 일 년도 못 버틸지 몰라...’


여느 때처럼 바쁘고 힘들었던 오늘의 일과도 마치고, 청사의 부속실에 마련 된 관사로 퇴근하기 위해 책상 위의 서류를 정리하는 도지희가 오늘 따라 더 푸른빛을 비추는 블루문을 올려다보며, 블루문보다 더 차가웠던 푸른 눈빛의 류한준과 이성령 대장의 모습이 불현듯 머릿속에 떠올랐다.

‘마치 알렉산더 대왕이 단칼에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잘라내듯이...도저히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김승희의 세력을 단칼에 모두 처단하고 나머지 숙제는 나에게 남겨주고 가버렸어...하지만 이 일은 애초부터 나 같은 평범한 인간이 극복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어...‘


도지희가 블루문에서 눈을 떼고 자리에 일어서는 순간, 위원장실의 문이 거칠게 열리며, 마수방어선의 총책임자로 있는 박종수가 들어서며 도지희에게 고함을 치듯이 말했다.

“위원장님!....지금...웜홀의 위험지대가 빠르게 썰물처럼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


자신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놀란 눈으로 자신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도지희에게 종수가 흥분에 찬 음성을 가다듬고 재차 말했다.

“조금 전부터...웜홀에 침식된 지역이 빠르게 회복되고 있습니다...내일 날이 밝는 대로 웜홀까지 들어가 보겠습니다만...이 정도의 속도로 회복이 되고 있다면...어쩌면...”


“....웜홀 자체가 소멸될지도 모른다는 말씀이군요....그렇다면 두 분이 화이트 홀로....”

흥분에 붉게 물든 종수의 얼굴을 마주보며 도지희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할 때, 전 세계의 중요지역과 연결 된 비상 핫라인들의 전화기에서 벨소리들이 시끄럽게 울리기 시작했다.






에우리아를 휩쓸었던 마수팽창이 잠잠해지면서, 마수들에게 짓밟혔던 동대륙의 대지에도 조금씩 모든 것들이 정상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십삼 년 전 검은 악마의 마수 군단의 직격탄을 맞았던 아난드라와 에센 공령 그리고 아카드가 가장 많은 피해를 보았었고, 그 중에서 에센 공령의 테레니아 대공과 예전 제국의 칼로스 공작이 마인으로 변한 후 의문의 실종이 되고, 이후에 서북의 에센 공령은 자연스럽게 아난드라의 보호령으로 흡수되면서 동대륙의 세력에도 많은 변화가 생겼다.

아카드의 수도인 아카디아 또한 십삼 년 전의 위기는 무사히 넘겼지만, 그 이후에 카르마의 카마프라로 경제의 축이 바뀌면서, 지금은 카마프라 성세가 아카디아를 앞서면서 동대륙 최대의 도시로 거듭나고 있었다.


카마프라의 백석궁에서 오늘 열리는 카르마의 계승자로서 왕위를 계승하는 이엘라 공주의 대관식이 본관의 중앙 홀에서 엄숙히 거행되고 있었다.

건국왕 루한 준 코레아가 검은 악마를 물리치고 나서 행방이 묘연한지 십년이 지나면서, 섭정인 제인 테베 공작이 이엘라의 계승을 선포했고, 테라의 국왕과 나가슈의 대공까지 이를 추인하면서 이엘라가 합법적인 게승자로 오늘에서야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높은 단의 중앙에는 이엘라와 제인이 나란히 앉아있었고, 조금 떨어진 좌측의 귀빈석에는 테라의 국왕과 나가슈의 이안나 대공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이엘라를 보고 있었다.


“이엘라가...아니 이제는 카르마의 국왕이니 함부로 이름을 못 부르겠군...카르마의 여왕 전하가 갈수록 예전의 루네시스 전하를 닮아가는군요...어릴 때 보고는 오늘 처음 보면서..루네시스 전하가 아닌지 사실 좀 놀랐다오.”

테라의 국왕인 김태현이 옆자리의 이안나에게 나직이 말했다.


“저 역시 그랬었지요..지금 제가 보는 저 장면이..현자의 예지에 나왔었던 그 장면이 아닐지 모르겠군요...높은 단위에 나란히 앉아서 카르마의 여러 신하들을 굽어보고 있는 저 광경을 ...제인도 직접 체험했었다고 하더군요.”

이안나가 제인에게 들었던 예지를 떠올리며 김태현에게 답했다.


“루한의 전기에도 현자가 이 장면을 예지했던 것을 써 두었지요...이엘라가 전기를 읽고 나서 왕위를 받기로 마음을 정했다고 해서, 나 또한 책을 쓴 보람을 느꼈지요...그러고 보니..이 모든 것들이 운명의 순리대로 흘러 온 것이 아닌가 하오.”


“전하께서 쓰신 카르마 국왕의 전기를 저도 읽어보고 싶지만...다른 차원의 글로 쓰여 있다고 하니..저로서는 아쉬울 따름입니다.”


“하하...대략적인 이야기는 나가슈의 대공께서도 아시는 이야기지요...루한과 루네시스 전하가 세계를 구하기 위해 북국으로 떠나는 이야기로 제가 서술한 전기는 마무리가 되지만..그 이후에 이루어진 일들은 사실로만 첨언이 되어 있을 뿐입니다...마수의 팽창과 검은 악마의 출현...그 위기 또한 카르마의 국왕이 해결했다는 것은 아난드라의 엔닐이 보증할 뿐 아니라, 엔키께서도 확인하셨다니...어느 누가 거기에 이의를 달 수 있겠습니까.”


“고귀하신 분들이 세상에 나오셔서 이엘라의 보호자를 스스로 자처하신 것은..에우리아가 생기고 처음이 아니겠습니까...이엘라가 왕위에 오르지 않았어도 그것만으로도 세계의 왕으로서 자격을 갖춘 것이겠지요.”

이안나가 엔닐이 포고했던 문서에 나왔던 엔키의 이름을 떠 올리며, 이엘라의 이름을 속으로 말했다.

‘이엘라 루시아 카르마....루한과 시아라라는 위대한 이름을 딴 루시아라는 중성은 앞으로 카르마의 국왕만이 쓸 수 있는 이름이라고 했지.’


물결처럼 굽이치는 백금발 위에 황금의 왕관을 쓰고 옆자리에 앉아서 제신들의 인사를 받고있는 이엘라를 바라보며, 제인이 이제야 무거운 짐을 내린 것처럼 나직이 숨을 내쉬었다.

‘루한...시아라...성령 언니...이엘라가 이만큼 자라서 예지의 모습 그대로 이 자리에 앉아있어 ...다른 세상 어디에 있을지 모르겠지만, 보고 있을 거라고 믿어...’


제신들이 모두 같이 예를 올리는 모습에 같이 묵례를 올리며 화답을 한 이엘라가 자신에게는 엄마와 같은 제인을 돌아보며 미소를 지으며 나직이 말했다.

“제인 이모...무슨 생각을 하세요...이모도 답례를 해 주셔야죠.”

시아라를 꼭 닮은 이엘라가 제인을 보며 말할 때, 이엘라의 왼손에 찬 은색팔찌가 반짝하면서 빛을 내곤 다시 정상으로 돌아갔다.




루한과 시아라가 세계수로 합치되고 생명을 창조한지 셀 수 없을 만큼의 시간이 흐르면서, 태양의 세 번째 행성을 돌던 커다란 달도 조금씩 멀어져 루한이 처음 보았었던 달 보다는 조금 더 작아져 있는 밤이었다.

판게아라고 부르는 거대한 대륙에서 엘프들이 마수들을 조율하는 황금시대를 지나서, 에르피안들이 인간들과 함께 은의 시대를 열면서 수많은 왕국들이 명멸해나갔다.

그 이후에 오랜 세월이 흘러서, 그런 에르피안들이 인간들에게 쫓겨나고, 지금은 인간들이 만들었던 왕국들이 하나의 거대한 제국으로 통합되었다가 다시 분열로 가고 있는 혼란 된 세상이었다.


최초의 생명을 창조한 유일한 신을 모시던 세상에서 지금은 인간들이 만들어 낸 잡다한 신들을 모시는 세상으로 바뀌면서, 세계의 중심이라는 바이칼의 분지에 서있는 세계수의 근처에는 얼마 남지 않은 수백여 명의 에르피안들만이 남아서 루와 시아라는 유일신을 모시고 있을 뿐이었다.


세계수의 줄기가 자연스럽게 만들어낸 오두막집들 중에서 가장 높은 곳에 지어진 오두막에 앉아있는 늙은 남자 앞에서 젊은 여자 한 명이 공손한 자세로 서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고대에 인간들에게 문명을 전수해 주었던 엘프들께서도 나오지 않으신지 오래되었고...무도한 제국의 황제가 신성한 세계수를 잘라서 황궁을 짓는 목재로 쓴다고 마법사와 군대를 보내는 지경까지 왔으니...이것이 말로 종말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제사장님...신성한 산맥의 결계가 인간 마법사에게 무용지물이 된지는 벌써 오래입니다...그나마 양식 있는 일부 인간들의 온정에 기대어 이곳이나마 지킬 수 있었지만.. 이제는 그마저도 사라져...얼마라도 남아있는 일족이라도 보존하기 위해서는 지금이라도 북쪽의 숲으로 들어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루와 시아를 모시는 젊은 사제인 이엘이 안타까운 눈빛으로 에르피안의 마지막 제사장인 오니야스에게 간청하듯이 말했다.


“이엘...세계수가 사라지면 모든 생명이 사라질 것이 뻔한데..도망을 간들 어디로 갈 수 있겠느냐....수십만의 에르피안들이 인간 귀족들의 성노리개로 전락된 지도 천 년이 넘었고.. 이제 겨우 한줌만 남은 우리들이 세계수마저 사라진 세상에서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조용히 마지막을 세계수와 함께 함께하는 것만이 우리의 마지막 운명이겠지....”

오니야스가 더 이상의 말도 의미 없다는 듯이 눈을 감고 고대로 부터 이어져 온 루와 시아의 찬송문을 암송하기 시작했다.


이엘이 눈을 감은 채 주문을 암송하고 있는 오니야스에게 고개를 숙이고 물러나와 자신들의 거주지이면서 필요한 모든 것들을 받고 있는 세계수의 가지로 난 길을 따라 내려오면서 갈등했다.

‘이렇게 무력하게 남아 있다가...제국의 병사들에게 잡혀가 능욕을 당하는 것이 과연 옳은 선택일까...창조의 여신 시아님....어찌해야 하는지...차라리 이렇게 무도한 세상이라면, 파괴의 신이신 루님께서 오셔서 이 무도한 세상을 징치하는 것이 더 낫지 않겠습니까...’


세계수의 하단부에 옹기종기 만들어진 오두막들이 있는 조그만 광장에는 삼백 명도 않되는 에르피안들이 모여서 제사장과 면담을 마치고 내려오는 이엘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엘님...제사징님은 어찌 하신다고 하십니까?...이제 곧 결계가 깨어지고 인간들이 쳐들어 올 건데...뭐라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제사장님은...세계수와 마지막을 같이 하시려고 합니다...여러분들까지 강요하지 않겠습니다...이곳을 떠날지...남을지는 여러분 스스로 결정하시기를...”


“이엘님은...어떻게 하실지...저희와 같이 떠나지 않으실 겁니까?”

일행들의 리더인 젊은 남자가 이엘도 같이 가기를 열망하는 눈빛으로 말했다.


“저 또한 사제의 신분이니... 제사장님과 같이 남아있어야겠지요....저는 걱정 마시고 어서 떠나시길...”

이엘이 예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수인의 예를 맺으며 담담하게 말했다.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각자의 짐을 등에 지고 떠나는 남녀노소의 무리들을 세계수의 가지에 올라 바라보는 이엘의 어깨위로 여명의 햇살이 쓸쓸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이제 모두 떠나고...세계수를 지키는 에르피안은 이제는 단 둘 뿐이구나...’


이엘이 저녁에 먹을 간단한 약식을 담은 나무통을 들고 제사장의 오두막으로 들어갔다.

“제사장님...식사를....”

이엘이 채 말을 끝내지 못하고 오두막 한 켠에 기대어 죽어가고 있는 오니야스를 보곤, 찬합통을 내던지고 오니야스에게 뛰어갔다.


자신의 앞에 꿇어앉아 울먹이는 이엘을 바라보며 오니야스가 마지막 숨을 들이쉬며 나직이 말했다.

“...이엘...미안 하구나...마지막을 세계수를 같이하려 해도...어머니 세계수가 잘려지고 불태워지는 것을 차마 내 눈으로 볼 자신이 없구나...사람들이 모두 떠난 것을 알고 있다...너도 떠나지...왜 남아 있는 것이더냐...”


“...저 역시...루와 시아님을 모시는 마지막 사제이지 않겠습니까...”


“그렇구나...마지막을 너에게 넘기고 가는 나를 용서 하거라....”

마지막으로 이엘을 담은 오니야스의 늙은 눈에 빛이 사라지면서, 판게아의 세계에 마지막으로 남았던 신관이 눈을 감았다.


밤새도록 오니야스의 시신 곁에서 머물던 이엘이 새벽의 여명이 비치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세계수의 가장 높은 곳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마지막 끝의 가지를 밟고 올라선 이엘의 눈에 이곳을 둘러싼 성스러운 산맥의 봉우리가 비슷한 눈높이로 보이기 시작할 때, 그 봉우리들을 싸고도는 안개의 벽이 흩어지고 있는 장면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인간 마법사들이 마지막 결계마저 깨트렸어...’


안개가 흩어지는 남쪽 봉우리의 뒤편으로 수천의 군대로 이루어진 병사들이 세계수를 해체할 장비들을 끌고 넘어오는 모습들이 이엘의 눈에 보였다.

‘이제 정말 마지막이구나....나의 하찮은 마법으로는 강력한 마법사들의 마법에 단 일분도 대항하지 못하겠지...어이해 마법의 조종이라는 엘프들의 후손인 에르피안들이 인간들의 마법에 뒤지게 되었을까...’

이엘 또한 제사장님처럼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마지막으로 세계수의 끝단을 끌어안으며 마음속으로 온 힘을 다해 루와 시아를 부르며 절망했다.


절박한 이엘의 머릿속으로 생소한 신비로운 소리가 갑자기 울려 퍼졌다.

-이엘....아니 시아라라고 부르면 기억이 나겠어?...환생의 유희도 이것이 마지막이겠구나..


이엘의 머릿속으로 들어오는 신비한 목소리에 이엘이 화들짝 놀라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주변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어디서 말씀하시는 것입니까...시아님이십니까...아니..남자의 목소리니...루님이신가요?”


-이엘....나무를 잡고 집중을 해...이제 그만 돌아 올 때가 되었어...


이엘의 주변으로 흰색의 광망이 터지면서, 이엘의 머릿속으로 수많은 정보가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빛이 사라지고 이엘의 감았던 눈이 떠지면서, 예전의 이엘이 아닌 다른 존재의 이엘이 나뭇가지를 밟고 서서 멀리 산봉우리를 타고 내려오는 수천의 병사들과 로브를 입은 수십여 명의 마법사들을 바라보면서 중얼거렸다.

“...그렇구나...이엘의 삶을 살고 있었어...루한의 말대로 이것이 마지막 삶이 되겠구나...”


-다른 곳에서..또 다른 삶을 시작하면 되겠지...이제 그만 들어오는 것이 좋겠어...


“이제는 정말 떠날 시간이구나...이엘의 삶을 살면서 마지막 기회를 찾아보려 했지만...나의 능력이 그만큼 미치지 못하니...


-어느 누구라도 지금의 상황을 바꾸긴 힘들었을 거야...어차피 예정된 시간이 왔을 뿐...이만큼 기다려 준 것으로도 충분하겠지....예전에 아누가 했던 수확 후의 무가 아닌...새로운 시작을 위한 것이니...억겁의 시간이 지나면...새로운 생명이 나고 또 다른 운명이 시작할 거야...시아라도 알잖아...죽음이 마지막이 아니라는 것을...


이엘이 기대고 있는 세계수의 가지와 합쳐지면서, 이엘의 모습이 사라지고 거대한 세계수가 이글거리는 광염에 휩싸여가자, 산을 타고 내려오는 마법사들이 크게 놀라며 부르짖었다.

“세계수에서 엄청난 마력이 나오고 있어...피해!!”


행성의 최고봉과 심해의 해저까지 포함한 모든 지표면에 뻗어있는 세계수의 뿌리가 행성 전체를 그물망처럼 뒤덮으며 이 곳 성스러운 산맥이라고 부르는 결계내의 대지에서도 예외 없이 이글거리는 광염이 흐르는 뿌리들이 땅에서 솟아오르며, 수천의 인간들이 그 그물 같은 뿌리들에 사로잡히면서 순식간에 빛 알갱이가 되어 사라져갔다.


인간들은 물론이고 마수들 외에도 땅과 바다에 살고 있는 생물들과 공중을 날고 있는 모든 살아있는 것들이 세계수의 뿌리가 만들어낸 세밀한 그물망을 벗어날 수 없었다.

그 모든 것들이 차 한 잔 마실 시간도 걸리지 않아 깨끗하게 사라진 후의 세계에는 미세한 생물정도나 남아있을 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적막한 세상에는 인간들이 만든 인공의 구조물들만이 남아서 이 행성에 누군가가 살았다는 흔적을 말해줄 뿐이었다.


모든 생명을 빨아들인 세계수의 뿌리가 행성의 지표면에 다시 내려앉으면서 번쩍이는 충격파가 한 번 더 휩쓸고 지나가자, 인간은 물론이고 개미나 벌들이 만든 조그만 구조물들까지 원래의 흙들로 사라지면서, 황토색의 분지에 홀로 서있는 세계수만이 이곳이 예전에 생명으로 충만했었던 곳이라는 것을 증명할 뿐, 지금은 최초에 루한과 시아라가 나섰던 시원의 세계로 되돌아가 있었다.


판게아라 부르는 거대한 대륙에 이제는 홀로 서있는 세계수마저도 사라지려는 듯 점점 줄어들기 시작하면서 다시 한 번의 번쩍임과 동시에 검은 구체의 모습으로 변한 뒤에 하늘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서서히 떠오르는 검은 기운으로 뭉쳐있는 구체가 한 순간에 빛처럼 사라지고 나서, 정오의 태양아래 보이지 않던 달의 모습이 새파랗게 한번 그 모습을 한번 보여주곤 다시 태양빛 아래로 그 모습을 감추었다.

그렇게 다시 원시의 행성으로 돌아간 세계의 지각이 갈라지고 몇 개의 대륙으로 갈라지는 동안 생명의 진화를 새겨둔 세포들에서 다시 생명들이 시작했고, 그렇게 억겁의 시간이 흐르면서 인간들의 모습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어두운 밤이었다.

세상에 이변이 생기면서,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 이외에는 길을 걸어다는 행인은 보기 힘든 주택가의 도로를 한 여학생이 낚시가방 같은 목검집과 커다란 스포츠백을 어깨에 올려 메고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넓은 정원이 딸린 커다란 주택에 걸음을 멈춘 여학생이 벨을 누르는 대신, 주머니에서 대문 열쇠를 찾으며 오늘도 푸른빛을 뿌리고 있는 푸른 달을 올려다보았다.

대문을 열고 정원을 걸어가는 여학생의 눈에 여느 때와 다르게 불이 켜지지 않은 캄캄한 창문들을 바라보며 현관문을 열기 전에 걸음을 잠시 멈추었다.

‘집에 아무도 없나...일하는 아줌마까지 나가지는 않았을 건데...’


한 달 후에 벌어질 전국 대회를 대비한 합숙훈련을 마치고 오늘 하루 밤만 쉬고 갈 집에 들른 성령이 기이한 불안감을 억누르고 현관문의 손잡이를 잡고 당기자, 문은 잠기지 않았는지 부드럽게 열렸다.

현관문에 들어선 성령이 전등의 스위치를 올리자, 항시 정돈되어있던 거실이 어쩐지 어수선하게 보였다.

자신의 방으로 올라가는 이층의 계단 입구로 걸어가는 성령이 부모님의 방에서 흘러나오는 고약한 냄새에 걸음을 멈추고 조금 열려있는 방문 틈으로 다가서자, 비릿한 냄새가 지독하게 나오는 것에 놀라며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오빠도 보이지 않고...다들 어디에 있는 것일까...’


스포츠 백을 내려놓은 성령이 방문을 밀며 창으로 비치는 달빛에 의지해 안쪽을 살펴보다가 숨을 삼키고 뒤로 물러섰다.

자신에게 항상 차가운 눈길로 바라보던 계모의 머리가 몸통에서 분리 된 채 핏물에 잠겨있었고, 바쁜 와중에 한 번씩 보던 아버지도 신체의 일부가 몇 개 사라져 있었다.

‘...변종체!....누가...’


어깨에 맨 검집에서 연습용 목검을 꺼내든 성령이 이층으로 올라갈 생각을 버리고 현관으로 몸을 돌리며 호주머니의 휴대폰을 잡을 때, 부속방으로 들어가는 통로에서 쿵하는 소리가 들리면서 온몸에 피를 묻힌 괴물이 튀어나왔다.

한 손에는 피에 절은 인간의 신체로 보이는 것을 들고 붉은 눈을 한 변종체 인간이 성령을 보고 입맛을 다시는지 피에 젓은 이빨을 벌리며 공격의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변종체가...오빠라니...일하는 아줌마까지 죽였어...’

비록 배다른 오빠였지만, 계모의 싸늘한 말에 상처를 받았던 어린 시절의 성령에게 따뜻한 말을 건네주었던 사람이 예전의 얼굴이 아닌 뒤틀린 짐승같은 얼굴로 성령을 먹이감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성령이 휴대폰을 잡았던 손을 놓고 목검의 손잡이를 두 손으로 꼭 잡은 채, 언제 덮칠지 모를 짐승을 경계하며 자세를 잡아가는 순간 변종체가 빠르게 달려와 성령을 잡아채왔다.

좌측으로 비켜서며 변종체의 오른팔을 강하게 베어가자, 헛손질에 오른팔까지 세게 두드려 맞은 변종체가 짐승의 소리를 내며 두 번째의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현관문으로 나가는 방향도 막혀버렸어...목검으로는 상대할 수가 없어..’

만일 목검이 아니라 진검이었다면 충분히 상대할 수 있었겠지만, 변종체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일격의 찌르기만이 유효한 공격이 될 것을 직감한 성령이 변종체의 공격방향을 예감하며 예전에는 오빠였던 괴물의 붉은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성령에게 한번 당했던 변종체가 이번에는 쇼파를 가로질러 계단 쪽으로 돌아가면서, 성령이 커다란 거실 창을 마주보며 같이 돌아가고 있을 때, 창밖으로 푸른빛이 강하게 터져 나오며 넓은 거실 전체가가 푸른빛으로 가득 찼다.

성령이 흠칫 놀라며 거실 창에 가득한 푸른빛에 온 몸을 드러내는 순간, 성량의 몸이 얼음처럼 싸늘하게 굳어오고 있었다.

‘...푸른빛이 터지고....몸이 얼어붙었어...’


긴박한 순간에 굳어버린 몸을 어떻게 하지 못하고 당황하고 있을 때, 온 몸으로 극심한 고통이 밀려오면서 다시 서서히 몸이 풀리기 시작하는 것을 느끼면서, 이것이 말로만 들었던 각성의 징조라는 것을 성령이 깨달을 때, 블루문의 섬광에 잠시 공격을 주춤했던 변종체가 소파 위로 올라서서 깔아뭉갤 것처럼 성령을 덮쳐왔다.


아슬아슬하게 비켜간 성령이 우측으로 몸을 돌리면서 변종체의 눈을 향해 목검을 찔러갔다.

전에 느껴보지 못한 기이한 힘이 들어간 목검의 끝이 변종체의 눈을 관통하고 목뒤로 뚫고 나오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변종체의 머리에 꽂혀버린 목검을 놓아버리고 성령이 물러서자, 뇌를 관통당한 변종체가 부들거리면서 바닥으로 쓰러지고 있었다.


그렇게 블루문이 섬광을 터뜨린 날에 변종체에게 가족을 잃었고, 그런 변종체를 없애버린 성령이 푸른빛으로 다시 돌아간 하늘의 블루문을 멍하니 올려다보고 있었다.


열여덟 살 성령이 각성을 하는 그날, 같은 서울의 한 산부인과 병원에서 한아이가 태어나고 있었다.

아기가 자연 분만으로 모체에서 나오는 그 순간, 분만실 밖의 어두운 하늘이 새파랗게 밝아지면서, 의사와 간호사가 깜짝 놀랐지만 익숙한 솜씨로 후처리를 하며 양수에 젓은 신생아를 조심스럽게 닦고 나서 산모에게 보여주며 안심을 시키며 말해주었다.

“...건강한 남자 아기예요...”


아내의 손을 잡고 산고의 막바지에서 힘들어 하는 아내를 안타까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던 류수호 역시 갑자기 생긴 이변에 넋이 나갔다가, 연이어 들려오는 아기의 울음소리에 마음을 쓸어내리며 간호사가 보여주는 자신의 아이를 같이 보고 있었다.

‘블루문이 처음 생겼을 때 이런 현상이 있었는데...오늘도 비슷한 현상이 또 생겼어....한필이면 우리 아들이 태어나는 날....그렇더라도 이것 때문에 별일은 생기지 않겠지...’


류수호가 돌아가신 선친이 아들이 태어나면 부르라고 미리 지어놓았던 이름을 속으로 조용히 불러 보았다.

‘...류한준...할아버지가 지어주신 너의 이름이란다...앞으로 준이라고 불러야겠구나.’


블루문 이후 급격히 떨어진 출생율로 신생아실에는 몇 않되는 아기들이 조그만 침상에 간간히 누워있었다.

한준이 세상에 나온 지 사흘도 되지 않은 아직 사물조차 분간하지 못하는 눈으로 창밖에 떠있는 푸른 달을 흘린 듯이 바라보고 있다가, 그런 블루문을 잡으려는 듯이 조그마한 손을 들어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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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의 경계를 걷다.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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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78화. 에필로그 +1 23.10.04 194 8 23쪽
277 277화. 창조 23.10.04 182 5 20쪽
276 276화. 돌아온 블루문 23.10.03 166 5 16쪽
275 275화. 성령의 목소리 23.10.03 156 3 16쪽
274 274화. 검은 악마를 마주하다. 23.10.02 157 4 16쪽
273 273화. 루한의 정체 23.10.02 159 4 15쪽
272 272화. 마인으로 변한 마스터 23.10.01 156 3 16쪽
271 271화. 불타는 아얀프라 23.10.01 154 3 15쪽
270 270화. 검은 악마의 진격 23.09.30 156 4 17쪽
269 269화. 검은 악마 23.09.30 174 4 16쪽
268 268화. 아누의 유희 23.09.29 167 5 16쪽
267 267화. 아누 23.09.29 160 5 15쪽
266 266화. 세계수와 아라트 23.09.28 171 5 17쪽
265 265화. 에리두의 결계 23.09.28 160 5 16쪽
264 264화. 북쪽의 여정 23.09.27 164 7 17쪽
263 263화. 영원한 이별 23.09.27 166 6 19쪽
262 262화. 운명에 따르는 결정 23.09.26 172 8 20쪽
261 261화. 스태프의 빛 23.09.26 173 6 17쪽
260 260화. 이엘라의 탄생 23.09.25 176 7 18쪽
259 259화. 왕의 귀환 23.09.25 187 6 17쪽
258 258화. 노비에타를 접수하다. 23.09.24 199 7 15쪽
257 257화. 운명의 흐름 23.09.24 196 7 15쪽
256 256화. 새로운 생명 23.09.23 197 7 15쪽
255 255화. 바깥의 존재 23.09.23 191 5 17쪽
254 254화. 엔키 엘 아시드 23.09.22 188 6 17쪽
253 253화. 현자를 만나러 가다. 23.09.22 195 5 18쪽
252 252화. 족쇄를 풀다. 23.09.21 196 7 17쪽
251 251화. 전쟁의 마무리 23.09.21 194 3 15쪽
250 250화. 감춰진 진실 23.09.20 189 6 16쪽
249 249화. 결투의 조건 23.09.20 189 4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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