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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설란 님의 서재입니다.

족쇄를 벗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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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설란
작품등록일 :
2018.05.04 23:33
최근연재일 :
2018.08.08 19:00
연재수 :
70 회
조회수 :
10,476
추천수 :
74
글자수 :
395,495

작성
18.06.06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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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모르겠다

DUMMY

떠나기 전에 새롭게 산 생필품을 등에 둘러맸다. 줄리엣 또한 본인의 몫을 맨 채 나를 따라오고 있었다.

세투스 마을에서 라스 성으로 갔던 길을 그대로 거슬러 올라가니 점차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런 나에게 줄리엣이 말을 건넸다.


“아저씨. 슬슬 점심 먹을까?”

“어? 응. 그래.”


모처럼 건조 식량이 아닌 나름 호화로운 음식을 꺼내어 먹었다. 그래봤자 나중에는 건조 식량뿐이겠다만은. 식사가 끝나갈 때쯤 줄리엣이 배낭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짠! 어때? 옛날 생각나서 사봤는데.”


그러면서 줄리엣이 종이상자에 예쁘게 포장되어 있는 케이크를 내게 건넸다. 아, 이거 나탈리가 좋아하던 케이크네.

씁쓸한 케이크를 먹고 마저 여행길에 떠났다. 떨리는 마음은 감출 수가 없는지 줄리엣이 중간중간 내 의식을 떼어갔다. 고맙게도.


* * *


과연 그곳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수풀이 가득해졌을까. 나는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까. 복잡한 시선 가장자리로 세투스 마을의 정경이 보였다.

군데군데 무너져있는 울타리. 그 안으로 소름 끼칠 정도로 고요한 마을이 있었다. 분명 그때 시체 몇 구가 남아있었음에도 이미 그것들은 사라져 있었다. 마치 그날의 일은 일어나지도 않았다는 양.

나도 모르게 멈췄던 발을 움직여 그 안으로 들어갔다.


“여기가 아저씨 고향이야?”

“그런 셈이야.”

“그래?”


내 말에 줄리엣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저긴 마르코 집. 저기는 에밀의 집. 저긴 나탈리 집. 그건 디에고의 집. 꽤 많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나는 막힘없이 그들의 보금자리를 알아볼 수 있었다.

어딘가는 겉으로만 보고, 어디는 안쪽까지 가보던 줄리엣은 이내 흥미를 잃었는지 내게 돌아왔다. 하긴. 사람 사는 곳은 다 거기서 거기니까.


“아저씨는 안 둘러봐?”


내가 갈 곳은 정해져 있었으나 그곳에 줄리엣을 데리고 가기엔 꺼려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안 데려갈 수도 없었기에 줄리엣을 데리고 발걸음을 옮겼다.

마을을 벗어나 뒤쪽의 숲으로 들어갔다. 지저귀는 새의 소리. 그리고 새와 함께 합창을 했던 에밀의 노랫소리가 귀에서 맴돌았다.

머리를 몇 번 털고 더욱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내 발이 순찰 경로를 따라 걷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몸이 인도하는 대로 따라가기를 몇 분. 눈앞에 광활한 평지가 펼쳐졌다. 그곳을 장식하는 삐뚤삐뚤한 묘비를 보자 손에 힘이 들어갔다.


-쿵. 쿵. 쿵.


있어선 안 될 소음에 눈을 돌려 범인을 찾았다. 갈색 머리의 사내가 무덤 앞에 꿇어앉아 머리를 바닥에 부딪히며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다.


“미안하다! 죄송합니다! 으, 으히. 이히히. 그만, 그만! 죄송합니다! 죄송하다고! 그러니까 이제 그만해! 그만하라고!”


한참 전부터 그러고 있었는지 바닥에 피가 말라붙어 있었고, 그 위를 사내의 머리에서 흘러나온 새로운 피가 장식했다.

그러면서 사내는 간헐적으로 자신의 귀를 긁어댔다. 그 때문에 귀가 떨어질 듯 찢어지며 그 사이로 또 피가 흘러나왔다.


“시끄럽다! 그만! 그만! 으아악! 그만!”


-쿵. 쿵. 쿵.


“으히히. 으헤헤. 으하하하. 그렇게 평생을 해봐라. 이미 죽은 놈들이. 크흐흐.”


어떨 때는 울면서, 어떨 때는 웃으며 계속해서 절하는 사내. 그에게서 느껴지는 광기가 내 발을 붙들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그게 아닐지도 모른다.


“아저씨, 저 사람 뭐야?”


물어보지 마. 다가가지 마. 다시 돌아가자. 하지만 그런 내 바람은 목에 걸려 밖으로 나올 수 없었다.


“여기서 뭐 해?”


끝내 줄리엣이 그런 사내에게 다가가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사내가 벼락이라도 맞은 듯 몸을 부들부들 떨더니 뒤를 돌며 말했다.


“잘, 잘못했습니다. 으히. 드디어 왔구나. 빨리 날 죽여라. 으하. 내, 내가 한 게 아니야. 키히. 잘못은 무슨 잘못. 난 정당한 짓을 했을 뿐이다. 욱. 우웩. 아니다. 나는 끔찍한 짓을...”


그런 사내와 눈이 마주쳤다. 흐리멍텅한 갈색 눈. 그를 둘러싼 날카로운 눈매. 빌어먹을.

사내도 나를 알아봤는지 내게 천천히 기어왔다. 다리를 다치기라도 했는지 팔만을 이용해 질질 자신의 몸을 끄는 사내가 내 다리에 몸을 붙이며 입을 뗐다.


“미안하다. 아니, 죄송합니다. 크흐. 죄송은 무슨. 죽어 마땅한 새끼들인데. 으흐흐. 이히히. 날 죽여다오. 빨리. 죽여! 으아악! 시끄럽다. 닥쳐. 닥치라고!”


차라리 날 보며 죽일 듯 달려들기를 원했다. 아니면 대단한 사명을 위해 무고한 생명을 앗아갔다고 말해줬으면 했다. 하다못해 그저 데쿠스 왕국민이 싫어서 벌인 짓이라고 뻔뻔스레 말하기를 바랐다.

이건 아니잖아. 이렇게 정신이 붕괴되어 자신이 하는 말조차 알아듣지 못하고, 그저 자학만을 계속하는 그를 차마 볼 수가 없었다.

왜, 왜 이러는 건데. 이제 겨우 놓아주려 하는 내게, 도대체 왜 이러는데. 어디까지 사람을 놀려 먹어야 속이 시원해지는 거냐.

화가 났다. 슬펐다. 악에 받쳤다. 살의가 들끓었다. 공허했다. 허탈했다.

그런 나에게 줄리엣이 다가와 손을 잡아주었다. 그럼에도 내 마음은 진정되기는커녕 더욱 타올랐다. 동시에 마음속 내용물이 새어나가 조금씩 안이 비어갔다.

일단, 지금은. 지금은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너, 너도 죽여버릴 거다. 아니다! 아니라고! 잘못했다. 잘못했으니 빨리 날 죽여다오. 얼른!”


* * *


복잡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다시 마을로 돌아왔다. 차마 마을 안으로도 들어가기가 싫어 그 앞에 대충 앉으니 줄리엣이 따라 앉았다.

줄리엣이 내게 무어라 몇 마디를 던진 것 같았으나 머리는 그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도중에 포기했는지 곧 주위에 고요함이 감돌았다.

그 고요함이 내 생각을 찢어놓아 하나씩 늘어놓았다. 뭐가 문제일까.

예전부터 생각하고 싶지 않았으나 이곳은 누군가의 의지가 틀어 막히는 경우가 있었다. 그것은 디에고가 그랬으며, 때로는 세투스 마을 주민들 모두가 그러했고, 프랑코, 지그문트의 예시도 있었다.

그렇다면 그렇게 되어버린 자들의 행동에는 잘못이 없는 것일까? 정말로? 정말로 본인의 의지가 아니므로 잘못은 없는 걸까?

한구석에서 그것은 잘못이 없다고 작게 읊었다. 하지만 그를 곧 커다란 분노가 뒤엎었다.


그럼 그들은 누구한테 죽었는데? 나탈리는? 에밀은? 카를로는? 소피는? 스벤은? 마르코는? 나머지 모두는?

잘못이 없는 거 알고 있잖아. 소피가 그랬고, 여관에서 그랬고, 프랑코가 그랬듯. 거기엔 자신의 의지가 없었잖아.

그러면 그들은. 걔들은 왜 죽은 건데. 왜 죽었냐고. 그게 정말로 잘못이 없다고?

.......


모르겠다. 뭐가 맞고, 뭐가 틀렸는지. 어딘가에서 올라오는 의문을 감정으로 밀어버릴 수는 있어도 끝내 지울 수는 없었다.

결정적으로, 지금 저 사내의 모습에서 디에고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자신의 잘못을 누군가에게 사과하던 그가. 속죄하고 싶어 하던 그가.

빌어먹을.

깊은 한숨과 함께 감았던 눈을 떴다. 내 몸 옆에 붙어있던 줄리엣이 내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괜찮아?”

“아니.”

“그래...?”


살짝 짜증이 일었다. 다만 이 짜증은 오로지 나 때문에 생긴 것이었다. 나를 걱정해주는 줄리엣이 고마웠으며, 그런 걱정을 떠미는 내가 짜증 났다.

슬쩍 줄리엣의 머리를 만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게?”

“끝을 맺어야지.”


* * *


다시 무덤으로 돌아갔다. 사내는 여전히 바닥에 머리를 찧으며 횡설수설하고 있었다. 내가 조금 더 다가가자 사내가 전처럼 내게 달라붙으며 뒤죽박죽 나열되는 말들을 던져댔다.

그를 전부 무시하며 내가 필요한 말을 했다. 최대한 진정하려 했지만 거칠게 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름.”

“으히. 으헤헤. 잘못했습니다. 크흐흐. 잘못..”


세게 한 대 후려쳐줄까 하다 옆이 그들의 안식처라는 것을 깨닫고 그저 사내의 멱살을 쥐었다. 기분 탓인지 그의 광기가 약간 누그러진 것 같았다.


“이름.”

“키히. 크하하. 랄프. 내 이름을 랄프. 으흐. 으흐흐.”

“왜 그들을 죽였지?”

“으하하. 그거야 당연히.. 아니야. 닥쳐! 제발 좀 닥쳐! 흐. 후우. 흐으. 그건 순전히 내 잘못이다. 히. 흐히히.”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냐.”


손에 조금 힘을 줬는지 랄프가 기침을 하며 답했다.


“컥. 크헉. 쿨럭. 소리가.. 소리가 들린다. 내 잘못을 꾸짖는 소리가.. 이 망할. 닥쳐! 내가 잘못했으니 닥치라고!”


.......

손에서 힘이 풀렸다. 그러자 랄프가 땅바닥에 널브러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다 입을 열었다.


“널 죽이고 싶다. 네놈 때문에 소중한 사람들이 죽었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빌어먹을. 디에고만 아니었어도. 네놈의 사지를 갈기갈기 찢어버렸을 텐데.”


랄프의 손목을 잡고 꺾었다. 어차피 오러 유저인 이상 이런 부상은 금세 회복할 수 있었으니까.


“크아악!”

“잘 들어라. 네가 정말로 잘못을 저질렀다고 생각한다면, 이렇게 퍼질러 있지 말고 일어나라. 그리고 네가 죽인 사람들만큼 다른 이를 도와줘라.”


그렇다고 너의 죄가 사라지진 않겠지.


“하, 하지만 나는.......”


고통 때문인지 약간 정신이 돌아온 랄프가 얼굴을 찡그리며 중얼거렸다. 팔을 잡고 있던 손을 놓으며 신랄하게 말을 내뱉었다.


“정말로 네가 용서받고 싶다면, 그만큼 사람들을 구해라. 네 죄를 뉘우치고 싶다면, 너와 같은 이들이 벌이는 참상을 막아라.”


그런다고 내가 용서할 일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죽은 이는 돌아오지 않기에.

그 말만을 남기고 등을 돌렸다. 더는 그를 마주보기가 싫었다. 그렇게 걸어 숲을 벗어날 때쯤에 줄리엣이 슬쩍 말했다.


“죽여도 괜찮았어.”

“뭐?”

“지난번에 복수는 괜찮다고 했잖아.”

“...그래도.”

“응?”

“거기에 무슨 의미가 있겠냐.”


나름 장난치듯이 던져보았으나, 그 안에 담긴 씁쓸함을 감출 수는 없었다. 내 대답에 곰곰이 생각하던 줄리엣이 내 손을 잡으며 물었다.


“그걸로 괜찮겠어?”


괜찮냐고? 어느 누가 괜찮을 수 있을까. 그렇지만 나는 그를 차마 죽일 수 없었다. 아마 디에고 또한 그와 같았을 테니까.

만약 디에고가 저지른 잘못이 그에게 찾아왔다면, 난 그를 살리기 위해 복수를 막지 않았을까? 그러면서 이딴 변명이나 지껄이겠지.


‘그는 그때 본인의 의지가 없었어요. 누가 그를 조종했다고요!’


그래. 다 똑같았다. 이 엿 같은 상황에서 장기판 위의 말 같은 우리에게 잘못은 없는 거겠지?

빨리 잘했다고 해줘요, 디에고. 벌써부터 후회할 것 같으니까.


“괜찮겠지.”

“정말로?”

“괜찮다는데 말이 많아.”


시끄럽게 하는 줄리엣의 머리를 누르며 괴롭혔다. 도망가지도 않고 조용히 날 따라오며 그 손짓을 받던 줄리엣이 장난스럽게 질문했다.


“그럼 손은 왜 꺾은 거야?”

“화풀이지, 뭐.”

“우와. 속 좁네.”


가볍게 힐난하는 줄리엣 덕분에 입가에 마른 웃음이 피어났다. 그런 날 보며 줄리엣이 화제를 돌렸다.


“그럼 이제 뭐 할 거야?”

“글쎄.”

“할 거 없으면 여행이라도 할까?”


여행이라. 복잡한 마음을 달래기엔 좋은 선택 같네.


“좋아.”

“그럼 가자!”


일부러 힘차게 나를 끌어당기는 줄리엣에게 끌려갔다. 일부러 끌어올린 줄리엣의 입가에서 약간의 위안을 느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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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용병 생활 18.05.18 171 1 14쪽
19 삶의 방식 18.05.17 182 2 16쪽
18 용병길드 라스지부 18.05.16 165 1 14쪽
17 테네벨 18.05.15 162 2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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