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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아지박이 님의 서재입니다.

반로환동이 너무 많다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퓨전

통무
작품등록일 :
2021.12.15 15:43
최근연재일 :
2022.01.22 23:59
연재수 :
30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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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7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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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12 2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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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쪽

6. 반로환동이 너무 많다.

DUMMY

낯선 천장... 아니 어딘가 낯 익은 천장이다. 게다가 코를 찌르는 강한 약재들의 향과 따끔거리는 몸이 이곳이 어딘지 알려줬다.


의객실. 천룡비무대에서 으스러진 무인들이 모이는 곳.


그곳에 왔다는 것은, 결국...


“졌구나. 정말로.”


뭔가 손에 힘이 쫙 풀리고, 처참한 상태의 몸에서는, 그리고 가슴에서는 끔찍한 고통이 밀려왔다. 몸에 무리가 갈만한 비방들을 그렇게 사용했으니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몸보다는 마음이 더 쓰라렸다. 상처에 쓰디쓴 약초라도 발랐는지 눈물도 조금 새어나오고, 아무래도 이 무림맹 돌팔이들이 약을 잘못 썼나보다.


정천은 한 점의 소리도 새어나오지 않는 조용한 의객실에서 몸에 부담가지 않게 조용히 신음을 삼켰다.


정천은 분명 속상했다.


화경의 벽을 눈 앞에 둔 고수가 무슨 상관인가 싶기도 하고, 끊임 없이 무공만을 단련해온 제 인생이 무엇인지 회의감도 들었다. 정천은 분명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마음 한 구석에서는 그런 몸에서의 고통과 마음의 쓰라림을 장작으로 삼아 활활 타오르는 무언가가 고개를 들이밀고 있었다.


정천이 비무를 되돌아보며 무엇을 잘못 했는지 차근차근 생각하고 있다 보니 그 불길은 점차 모든 고민, 후회, 미련을 집어삼키며 점차 정천의 가슴을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


결국 정천의 마음 속에서 새어 나온 기쁨과 호승심의 불꽃이 정천의 차가운 이성마저 뜨겁게 달궈버리자, 정천은 모든 고민을 잠시 접어두고 제 몸 상태를 관조했다.


빠른 시간 안에, 행운과 다시 한 번 붙어서... 그 때는 이겨보기 위하여, 정천은 끔찍한 고통을 잊고, 몸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전왕호심결을 운기했다.


거의 반 작살이 난 단전에서 통증이 올라오긴 했지만 무사히 한 줄기의 내력이 정천의 수중에 들어왔다. 세어보면 3년 정도의 적은 내공이었지만, 정천은 자신 있었다.


뚝, 뚜두둑...!


제 주위에 꽂힌 침을 차례대로 빼서 정리했다.


다친 혈도에서 나오는 사기를 막기 위해 꽂힌 목이나 팔목, 다리의 침을 제외하고 모든 침을 빼낸 정천은 천천히 단전을 다스렸다.


‘세 시진... 대충 한 네 시진은 걸리겠군.’


몇 식경 쯤 단전을 다스렸을까? 정천은 단전을 다시 꿰메어 놓기 위한 시간을 계산했고, 주변을 지나는 의원에게 그나마 멀쩡한 새끼손가락과 가운데 손가락을 이용해 주변의 침을 하나 던졌다.


픽..!


“아, 따가!”


정천은 목에도 꼼꼼히 침이 꽂혀 있었기에 잠시 목을 쓰다듬다가 길을 가는 의원을 말로 붙잡지 못했고, 천천히 다시 침을 날려 의원의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침 하나를 더 던져 팔뚝에 꽃혔다.


“정천 소협? 소협이 그러셨습니까?”


정천은 목을 끄덕이는 것도 힘들어서 천천히 손가락을 끄덕거렸다.


의원은 조금 고민하다가 몇가지, 젊은 무인이 듣기에는 너무 버거운 말을 들려줬다.


“어... 저기, 아... 이런, 쓰읍... 너무 충격받지 말고 그냥 들으십쇼. 무슨 수를 쓰신 지 짐작이 안될 정도로 지금 소협의 몸은 완전히, 예. 완전히 망가졌다고 보셔야 합니다.”


의원은 아직 말도 잘 하지 못할 환자가 가장 궁금해 할 것을 말해주었다.


“그... 무공은 앞으로 못쓰신다고 봐야 할 거 같습니다.”


조용한 정적이 의객원을 메꿨다. 심장에 추를 올려놓는 것 같은 침묵에 숨이 막힌 의원이 먼저 말을 꺼냈다.


“이게, 그 용봉지회의 큰 부상자들에게 주어지는 청명단입니다. 내공이나 다른 효용은 크지 않지만 상처 회복 하나는 훌륭하게 해내죠. 일단 한 시진 뒤에 이걸 드시면 됩니다. 아직 아까 피워놓은 불미향이랑 인형삼의 기운이 남아있을 테니...”


의원은 제 할말을 겨우 마쳤다는 듯 후다닥 의객실을 달려나갔다.


불혹의 나이도 되지 않아서 화경의 경지를 목도할 수도 있었을 전도유망한 후기지수에게 무공을 쓰지 못한다는 소리가 얼마나 가혹한 소리인지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과 상관 없이 정천은 제 몸에 있는 침 몇 개를 더 빼냈다.


의원의 말대로 지금 제 몸 상태가 더 이상 무공을 익히기에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빠르게 몸의 기틀을 잡고 한 달 정도는 요양해야지 원래의 몸을 되찾지 않겠는가.


정천은 의원의 말을 통해 제 몸에 귀한 인형삼과 불미향의 기운이 남아있다는 걸 알았으니 더 쉬워졌다.


정천은 단전에서 나온 3년 정도의 내공을 제 오장육부에 둘러 인형삼의 약효를 빼내 가슴팍으로 인도했다.


이미 의원들이 가공해 놓았는지 인형삼의 기운은 순수한 약효만이 남았다.


정천은 격통을 참고 인형삼의 약효를 간에 집중했다.


간은 목의 기운이 가장 많아 인형삼(蔘)의 기운을 북돋을 수 있는 장기이자, 모든 해독과 정양을 보조하는 치료에 중요한 장기.


정천은 일단 간을 먼저 살리기로 마음 먹었고, 반 시진이 지나서야 간은 원래 상태를 되찾을 수 있었다.


오행(五行).


많은 무공의 원리이자 인체의 주요 원리이기도 한 오행에 따라 정천은 간을 살리고는 간에서 심장으로, 심장에서 위장으로, 위장에서 폐와 대장으로, 폐와 대장에서 신장과 방광으로 기운을 진도하였고...


마지막에는 다시 간으로 기운을 되돌려 길지만 완벽한 상생 구조를 만들어 오장육부를 치료했다.


하지만 정천의 몸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두 망가진 상황, 그는 피부에 맺힌 향초의 기운을 최대한 몸에 흩뿌려 근방의 피부와 근육에 깃들게 도왔다.


그렇게 오장육부의 조화를 맞추고 나니 의객실에 또 다른 손님과 여러 명의 의원들이 들어왔다.


정천은 목에 꽂혀 있는 침을 간신히 빼내고 아까처럼 침을 던져서 의원 하나를 불렀다.


“저... 소협? 이렇게 침을 던지시는 것도 조금...”


우연찮게도 아까 봤던 의원이었다. 그는 호리호리하고도 이목구비가 여려 아녀자로 착각할 법도 했지만 정천은 의원의 아랫도리가 조금 불룩한 것을 보고는 제 하반신에 침을 꽂았다.


“빼... 주시오...”


“헉!”


정천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하자 그는 마치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놀랐다. 그가 알고 있는 바로, 정천은 지금 송장을 치워도 이상하지 않았을 상태였기 때문이다.


“말을 할 수 있으세요?”


‘아니 이미 말을 했으면 믿어야지. 꽤 힘들게 말했건만.’


정천은 새끼 손가락으로 의사표현을 대신했다.


아까보다도 더 크게 휘적거리는 손가락을 보고 의원은 진짜로 화들짝 놀라 뒤에서 농땡이를 피우던 선배 의원에게 말을 걸었고, 마찬가지로 화들짝 놀란 선배는 금방 정천도 얼굴을 알 정도로 유명한 의원을 모셔왔다.


노란색 머리의 정수리 부분을 완전히 삭발한 의원은 병상에서 입었다고 생각되긴 힘들 정도로 귀한 자주색 옷감과 검정 천을 덧댄 괴상한 옷을 입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서 정천도 그가 누군지 깨달았다. 서양제일의, 마태(馬駄).


저 먼 서양에서부터 의술을 익히며 수많은 사람들을 치료해 온 의원, 스스로는 서양승이라고 소개한 기인이 기이한 냄새를 풍기는 탕약을 들고서 정천의 상태를 살피고 있었다.


“콤마... 아니, 혼수 상태에서 빠져나온 지 하루도 되지 않은 게 맞나요?”


“예. 신부님.”


그는 말도 안된다는 듯 꼬부랑 말을 쓰고선 다시 익숙한 말로 상황을 설명했다.


“그러니까, 이 기사가 전신의 뼈가 부러지고, 근육도 찢기고, 심지어는 로드... 아니 혈도까지 망가졌는데도 이 상태를 유지한다고요? 지금?”


“예. 그렇습니다 신부님.”


마태가 천천히 머리와 양 어깨를 짚고는 빠르게 양 옆의 의원들에게 부탁했다.


“아무래도 정상적인 몸은 아닌 거 같군요. 원래대로라면 수술로도 치료가 불가능할 것 같았는데 이 정도면 수술은커녕 후유증도 남지 않게 생겼군요.”


마태는 천천히 고민하다가 저처럼 머리 노란 서양인에게 무언가 말했다.


‘서양인들은 다 저런가?’


마태의 뒤에 서 있던 서양인들은 익숙한 외모는 아니었지만 하나 같이 이목구비가 훤칠하고 키도 아담한 것이 이국에서는 서시나 왕소군에 비견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정천이 저들이 제자가 아니고 마태의 첩인지 의구심이 들 정도로 그들의 미모는 출중했다.


부탁을 들은 서양인은 뭐라고 반발하는 듯 했지만 마태가 뭐라고 속삭이자 납득하고는 부리나케 어딘가로 달려갔다.


“저, 정천 소협? 아마도 이렇게 기이한 상황이라면 이미 소협도 몸 상태를 알고 계시겠지요. 아니면 소협이 이 모든 기사를 이루어 내시었던지.”


마태의 말은 어딘가 어눌한 부분이 있었지만 정천은 어눌한 부분을 깔끔하게 무시하고 듣는 방법을 선택했다.


저 마태라는 의원이 제 조부께서 말한 것에 반이라도 따라간다면 괜시리 환자가 자신을 무시한다고 해서 해꼬지를 할 만한 인물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가 ...의 은혜를 ... 정천 소협께 ..별..한 ..회..를 드리고 싶...니다. 큰 대...는 ...지도 않고 그저 한 주에 한 번 회당에 ....서 한 번 만...을 ....고 싶습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마태는 그 자신도 흥분했는지 안 그래도 꼬이던 발음이 더 꼬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정천이 듣기로, 그리고 느껴보기로 마태라는 의원에게 자신에 대한 적개심이나 호기심은 그리 크지 않았다.


괜히 제안을 받아들였다가 어딘가 해부당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정천은 흔쾌히 새끼 손가락을 끄덕였고, 그 모습을 본 마태도 웃으며 뒤의 서양인이 들고 온 기이한 생김새의 구조물을 받아 정천의 옆에 놓았다.


“이건... 그 등불입니다. 자기 전, 깬 다음, 정오에 한 번씩 이 등불을 키고 운키행콩... 이런, 죄송합니다. 운기행공을 하시면 몸 상태가 놀랍도록 나아질 겁니다. 주무실 때에는 등불 하나만 키시면 됩니다.”


그 외에도 많은 설명이 같이 이어졌지만, 정천이 알아들은 것은 반절도 되지 않았고, 결국 마태가 두 세 번 더 설명하던 끝에 제 어여쁜 제자를 붙여놓고 다른 환자를 보러 떠났다.


“처기... 정쭨 소협? 이 Candle은...”


하지만 이 아리따운 서양인 소녀는 아예 중원 말이 익숙하지 않은 지 제 모국어도 섞어가며 정천에게 설명을 이어나갔고, 정천은 그냥 포기하고 알아들었다고 말할 수 밖에 없었다.


어처피 지금 내보내나 반 시진 뒤에 내보내나 알아들은 것에 차이도 없을 것 같았다.


자신이 꽤나 중원말을 잘 한 줄 알았는지 싱글벙글 걸어가는 서양인 소녀를 보며 정천은 마음 한 구석이 뜨끔했다.


제가 다루는 활보다도 도드라지는 곡선에 잠시 염치도 없는 상상을 한 것이다.


자신을 키운 조부님의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행동을 하겠다며 다시 한 번 다짐한 정천은 자꾸만 떠오르는 곡선을 뒤로하고 가장 아름다운 곡선을 다듬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가 지고 그 해가 다시 고개를 들이밀 때까지, 정천은 미음과 물, 고기가 들어간 미음, 통돼지 구이를 먹으며 상처입은 몸을 치료했다.



****



“... 영광이 아버지께 있사옵니다... 아멘.”


“아-멘.”


다음 날 점심이 되자, 정천은 마태의 제자와 함께 그들의 기도문을 외우며 등불에 대한 효과에 대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놀랍게도 정천의 근골은 평범한 사람의 수준까지 나아져 있었고, 정천의 혈도는 더 이상 터져나가거나 나빠지지 않았다.


하루도 채 안되는 시간 동안 일어났다기엔 너무나도 놀라운 기사였다. 게다가 이런 기사에 정천의 가슴팍에서 금이 간 채로 발견된 녹색 보주의 도움도 없었다면 더더욱이.


그 놀라운 이적을 실감한 정천은 아침부터 돼지를 통으로 구운 요리를 한꺼번에 뜯어먹고는, 마태의 제자에게 이적에 큰 도움을 주었을 등불에 대해 물어보았다.


“이 그... 권들? 권들이라고 하셨습니까? 참으로 놀랍더군요.”


정천이 먼저 말을 꺼내자 등불을 살피던 마태의 제자, 의원과는 어울리지 않는 이름을 가진 마라(魔羅)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제가 믿는 신에 대해서 찬양을 늘어놓았다.


물론 정천은 절반도 채 알아듣지 못했다.


하지만 정천에게는 놀라운 절정 고수의 직감과 태생적인 감각이 있었고, 조부께 배운대로 마라의 말 끝을 따라하는 형식으로 대화에 끼어들어, 급기야 그들이 신성시한다는 고강한 무인에 대한 기도문도 같이 따라 읽기 시작했다.


마라는 평소 태도와는 달리 정천이 기도문에 관심을 보이자 주변의 의원을 끌어들여 발음을 친절하게 가르쳐 주는 등 놀라운 의지를 보였다.


그 결과 정천은 마라와 함께 기도문을 외웠고, 그 기도문을 외우자 신비로운 등불에 담긴 기운이 조금 더 이끌리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진언인가?’


정천은 다시 한 번 기도문을 외웠고, 마라는 뛸 듯이 기뻐했다. 그리고 정천도 마찬가지로 기뻐했다.


‘놀랍군. 아무런 지식도 없이 그저 외우는 것만으로 이렇게나 큰 효능을 보여주다니.’


정천은 이들이 믿는 신의 무위가 얼마나 되는 지 알 겨를이 없었다.


귀한 진언도 아니고 새로운 신자에게 가르쳐준다는 흔한 진언이 이 정도라면 귀한 진언은 어찌나 강력할까.


실제로 그들의 선대들 중 하나는 바다를 일검에 갈랐다고도 하니 정천은 자연스레 서양의 무인들에 대한 호승심이 끓어올랐다.


마라는 남녀칠세부동석도 모르는 지 아녀자의 손으로 외간 남자, 정천의 손을 잡더니 흔들며 기뻐했다.


차마 보기 부끄러운 움직임이 정천의 시선을 위로 돌렸으나, 마라는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이 먼 동방에 새로운 신자가 늘어났음을 주께 알리며 기도했다.


‘아 마리아! 너는 참 훌륭한 아이야!’


마라, 아니 마리아는 제 놀라운 성과에 기뻐하며 촛불에 불을 붙이고는 제 스승에게 이 놀라운 성과를 알리려고 떠나갔다.


제 스승에게 성과를 알리고는 헤실헤실 웃으며 돌아온 마리아를 반기는 것은, 깔끔히 정리된 침상과 탁자였다.


깨끗이 정리된 탁자.


마리아의 얼굴이 싸해지며 주위를 둘러봤지만 어디에도 신성한 토마스의 촛불은 보이지 않았다.


마리아는 비명을 지르며 쓰려졌다.



***



정천은 예선전에서처럼 접객당에서 무기를 받았지만 연약해진 몸으로는 이 산더미 같은 무기를 다 짊어질 수 없어 결국 수레 하나를 빌렸다.


수레를 질질 끌며 천룡비무장을 떠나는 정천과 다르게 사람들은 점차 천룡비무장에 밀려들고 있었다.


고함소리도 크게 들리고, 당가와 벽력문이 준비한 폭죽 소리도 높이 울리는 것을 보니 아마 결승이 시작될 모양이었다. 아니면 준결승이 시작되고 있던지.


하지만 정천은 결승이건 준결승이건 그닥 보고 싶지 않았다. 지금 자신이 호승심에 휩싸여 봐야 어디 쓸까. 괜히 나아진 혈도를 자극하지 말고 천천히 몸을 회복하는 것이 먼저였다.


게다가 정천에게는 저런 비무를 보지 않아도 꽤나 훌륭한, 아니 완벽한 경험을 쌓을 길이 열려 있었다.


‘어처피 정가장으로 돌아가면 숙부가 원하는 대로 한 세 번은 싸우고 나와야겠지.’


용봉지회에서 우승하지 못한 이상 정천은 숙부와 조금 다른 계약을 맺어야 했다. 그 생각만 해도 골머리가 아팠지만 어쩌하리. 결국 정천은 그 괴물같은 소림승에게 지고 말았는데.


‘최대한 좋은 소문이 나길 빌어야겠군.’


천룡비무장을 터덜터덜 빠져나오는 정천의 어깨에 누군가의 손이 살포시 얹어졌다.


“소협! 몸은 좀 어떠십니까! 아니 이렇게 돌아다니셔도 괜찮습니까?”


그는 이번 용봉지회 동안 정천과 안면을 깊게 익힌 맹원... 이름이... 천맹원이었다.


“하하. 부끄럽습니다. 이리 걱정을 끼치게 만들어서야. 몸은 멀쩡하니 형장께서도 맡은 바 직무를 다하러 가보시지요.”


정천은 애써 웃으며 천맹원에게 말을 더 하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표했다.


천맹원은 제 희망의 동앗줄이 그닥 굵지 않았다는 것을 직시하고는 한숨을 내쉬며 정천에게 고급진 초대장을 건넸다.


“사실 여기까지 온 것은 다름이 아니라 이걸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이건?”


정천은 제 손에 들린 초대장을 보고는 어리둥절했다.


자신이 절정을 조금 넘은 실력을 드러내긴 했으나 유력가들의 시간은 정해져 있었고, 그들은 아무리 절정지경의 무인이라지만 8강전에서 떨어진 사람에게 이렇게 고급진 초대장을 보내려 하지 않았다.


“피로연의 초대장입니다. 16강에 든 무인들이라면 아무런 상관 없이 받는 초대장이지요. 오시면 광동에서 온 숙수부터 사천, 아니 그냥 중원 모든 유명 숙수들의 요리부터 시작해서 내상을 입으신 분들을 위해 후식으로는 백년설삼을 달여 만든 차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정천은 초대장을 꼭 부여잡았다. 무림맹이 돈이 넘쳐나는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로 넘치는 줄은 몰랐다.


백년설삼, 그 귀한 것을 차로 달여 마시게 해주는 수준이라니.


“형장. 내가 귀한 은혜를 입었습니다. 이번 용봉지회가 끝나면 보기로 했던 곳에서 뵙죠.”


“예, 예... 그렇게 하죠.”


천맹원은 일단 쓸만한 끈을 더 만들어 놓고 싶었고, 정천도 조부의 가르침대로 꽌시를 많이 만들어 놓고 싶었다. 결국 행사 끝에 남는 것은 그런 것 밖에 없었으니까.


힐끔.


정천은 아픈 몸을 무릎쓰고 천맹원과 뜨거운 꽌시의 포옹을 하는 와중에 이상한 시선을 눈치챘다.


있다고 하기에도 그렇고 없다고 하기에도 그런 애매한 시선이 정천을 잠시 스치고 지나갔지만, 정천은 그 속에 숨겨진 놀라운 감정을 눈치챘다.


‘이게 사람이 받을 수 있는 감정인가?’


정천이 살면서 느낀 감정들 중 가장 복잡하고도 악의적인 감정. 모든 악감정의 집합체가 정천을 향해... 아니, 천맹원을 향해 은밀히 쏟아지고 있었다.


정천은 무슨 일인 지 모르겠지만 일단 천맹원에게 고마움의 표시로 말을 건넸다.


“천 형. 조심하십시오. 아무래도 미행이 따라붙은 것 같습니다. 그대로 행동하시고, 저도 누가 붙었는 지는 모르겠으나 확실한 건 정상적인 놈은 아니라는 겁니다.”


정천의 말을 들은 천맹원은 한 치의 어수룩한 반응도 없이 자연스러운 연기를 이어나갔다.


“고맙습니다 소협. 혹시 방향도...?”


“제가 가면서 손으로 가르키겠습니다.”


정천과 천맹원은 겉으로 웃으며 헤어졌다.


정천은 앞으로 걸어가며 그 복잡한 악의가 느껴졌던 쪽으로 손을 쭉 내밀고는 뒤로 돌아 천맹원에게 인사했다.


그 방향은 천룡비무장의 가장 위쪽.


무림맹의 중진들만 들어갈 수 있다는 곳에서부터 쏘아진 감정이 천맹원에게 어떤 영향을 줄지 모르는 정천은 그저 객잔으로 돌아가서는 천천히 짐을 풀었다.


‘촛대는 삼 일 뒤에 열린다는 집회 때 가져다 드려야겠군.“


괜히 챙긴 촛대를 잘 보관한 뒤, 피로연이 끝나고 금방 떠날 준비를 마친 정천은 반만 남은 전낭을 챙겨서는 귀한 옷을 파는 포목점으로 들어섰다.


화려한 듯 화려하지 않게 차려입은 옷, 정갈하게 씌워진 영웅건. 깔끔하게 무기는 세 개만 들고다니기로 했고, 고급진 서양식 장갑도 한 벌 맞추기로 했다.


이런 게 다 유행을 선도하는 젊은 후기지수의 귀감이 아니겠는가.


모든 준비를 하고 나와보니 밖은 이미 저녁에 가까웠고, 천룡비무장에 몰렸던 사람들은 거리로 나와 떠들썩하게 웃고 떠들며 용봉지회의 마지막을 가장 성대하게 태우기 시작했다.


과언이 아니었다. 진짜로 천룡비무대의 천장은 불타고 있었다. 무림맹에서 준비한 놀라운 폐막식은 매 회차가 지날 수록 더 화려해진다 하였는데 그 말이 허언이 아닌 듯 싶었다.


무림맹주들이 가면 갈수록 놀라운 인상을 주고자 과한 일을 벌이다보니, 이제는 천룡비무장이 아무리 돌로 이루어져 있다지만 지붕에 불까지 붙이게 된 것이다.


하지만 정천은 만족스러웠다.


‘화려하군.’


산골에서 올라온 촌놈, 정천은 흡족히 웃으며 미친 듯이 폭죽을 쏘아대는 사천당가와 벽력문의 광기를 무시한 채, 개봉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천명누각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이번 용봉지회의 끝을 알리는 피로연이 시작된다.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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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4. 등용문(登龍門) +1 22.01.03 193 14 16쪽
13 3. 구주팔황 복잡기괴(九州八荒 複雜奇怪) 22.01.01 186 11 15쪽
12 3. 구주팔황 복잡기괴(九州八荒 複雜奇怪) +3 21.12.31 195 8 12쪽
11 3. 구주팔황 복잡기괴(九州八荒 複雜奇怪) 21.12.30 213 9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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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2. 기괴(奇怪) 21.12.27 242 9 12쪽
7 2. 기괴(奇怪) 21.12.25 253 14 11쪽
6 2. 기괴(奇怪) 21.12.24 288 16 10쪽
5 2. 기괴(奇怪) 21.12.23 360 16 10쪽
4 1. 입신(立申) +1 21.12.22 397 13 10쪽
3 1. 입신(立申) 21.12.21 476 25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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