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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아지박이 님의 서재입니다.

반로환동이 너무 많다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퓨전

통무
작품등록일 :
2021.12.15 15:43
최근연재일 :
2022.01.22 23:59
연재수 :
30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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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166,778

작성
21.12.28 2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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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2. 기괴(奇怪)

DUMMY

골 아프다.


정천은 제 수레에서 여섯 종류의 무기를 꺼내고 비무대에 섰지만 아직도 정신이 멍했다.


‘빌어먹을 무림맹. 중요한 규칙을 바꿨으면 공지를 해야 할 거 아니야.’


정천이 멍청하거나 일 처리가 미흡해서 몰랐던 것이 아니었다. 심판의 말에 주위의 사람들도 기겁하듯 놀랐으니까. 심지어 대문파의 제자들도 그런 기괴한 규칙은 듣도 보도 못했다는 듯 혀를 찼다.


하지만 별 수는 없다. 일단 지금은 문사처럼 규칙에 문제가 있다며 따지는 유약한 반응을 보일 때가 아니라...


꾸욱...!


경지를 내보이더라도 저 광인을 줘 패서 정신을 차리게 해주는, 군자의 길을 걸어야 할 때니까.


”흐, 이제야 좀 정신 집중이 되나?“


능글거리며 웃는 모습을 보자 과연 진짜로 머리가 아픈 건지, 머리가 아픈 척을 하는 건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비무를 건 상황을 생각해봐도 그러했다.


예선이 끝나기 1시진 전, 자신과 싸우고 나서 다음 상대를 찾기에는 시간이 너무나도 부족할 그 시간을 딱 맞춰서 비무를 걸었으니까.


”이렇게 싸우는 건 오랜만인데, 그 기괴한 문제를 주고서도 너는 그닥 그립지 않나봐?“


조부께 들었다. 광인이 하는 말은 나에게 하는 말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내 모습에 겹쳐 보이는 광인의 상상 속 친구에게 하는 말과 같다고. 간단히 말하면, 무시해도 된다고.


정천은 그저 칼을 꽉 부여잡았다. 그의 무공은 다양한 무기를 쓰며 천변만화의 묘리를 다루지만 한 가지의 규칙이 있다.


‘시작은, 검(劍).’


가장 균형이 잡힌 무기, 가장 어중간한 무기, 그리고 가장...


육합개천공(六合開天功)

천의무봉(天衣無縫)


완벽한 무기. 그렇기에 숙련된 검수의 검로(劍路)는 흔들리지도 꺾이지도 않는다. 그저 검수가 생각한 완벽에 치우친 일격을 보여줄 뿐.


폭발적으로 솟아난 기세에 주변의 만물이 눌려 저 멀리로 뻗어나갔다. 경기장 주변에 있다가 애꿎은 폭풍을 맞게 된 관객들은 먼지에 놀라 눈을 찌뿌렸고, 그랬기에 볼 수 없었다.


말 그대로 눈을 깜빡거리는 사이에 일어난 수십 합의 공방을.


....쾅! 쾅! 쾅!


그리고 시간이 지나서야 들려오는 굉음을 들으며 기겁할 수 밖에 없었다. 저 두 무인의 칼날에는 누가 더 길다고 할 것 없이 올곧은 검기가 서려 있었으니까.


검기는 그 자체로써 경지의 증명이다. 일류에 오르지 못한 무인에게서는 검기를 볼 수 없고, 일류의 무인이 익숙해진다면 흐르는 강물처럼 일렁이는 검기를 볼 수 있으며, 완숙한 절정의 무인에게는 또 다른 검이 보인다.


철과 야장의 피로 만들어진 유형의 검을 뒤덮고 있는, 만물의 정기와 무인의 피땀으로 만들어진 무형의 검이.


그랬기에 검기가 정련된 칼처럼 날카롭게 서 있다는 건 그 자체로써 경지의 증명이었다. 그리고 비무대 위에는 명인이 정련한 네 자루의 검이 무엇이라도 베어보이겠다는 듯 예리한 칼날을 세우며 반짝여댔다.


‘눈 깜짝할 새에 몸통이 베인다.’


칼날이 번쩍인다. 칼에 뇌기가 서렸기 때문은 아니다. 칼의 빠르기가 비정상적이라 칼의 경로가 차츰 끊어져 보이고, 끊어져 있다 못해 칼의 경로가 선이 아닌 점(點)으로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칼이 빠르기에 번쩍이고, 그 더 없이 빠른 칼에 뇌전이 흐르기에 번쩍인다. 말 그대로 눈이 아픈 파상공세에 저 칼보다 짧은 검으로 대응하기란 불가능했다.


쾅!


정천은 순간적으로 진각을 밟았다. 그것도 두 번이나.


첫 번째 진각과 두 번째 진각은 큰 간격을 두지 않았다. 그 자리를 보는 누구나 정천이 한 번 진각을 밟았다고 착각했을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주관후는 느낄 수 있었다. 강화된 자신의 시력을 속일 요량으로 한 번 진각을 밟고, 그 뒤 내공을 터트리는 식으로 다시 진각을 밟았다는 것을.


제 아무리 청강석이나 여타 귀한 광석을 섞어 만든 비무대라고 해도 작정하고 그 속살을 까보려는 진각을 막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결국 두 번의 충격 끝에 비무대 바닥은 터져나가고 그 텁텁한 속살을 내보였다.


휘익...!


그리고 무기는 바뀌었다. 천방지축의 칼을 막아서기 충분한 채찍으로.


...쫙! ....쫘악! ...쫙!


채찍은 여러모로 불편하고 익힌다고 해서 다른 무기보다 강하다는 보장이 없었다. 특히 절정의 경지에 오르면 채찍 같은 기병(奇兵)을 쓰는 무인과도 익숙해져 싸움이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모든 단점을 감수하더라도 정천의 조부는 대낮에 채찍을 애용했다.


”크하하!“


채찍이 가질 수 밖에 없는 단 하나의 강점. 번개의 속도를 거의 따라잡은 저 광인에게도 통할 법한 강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쫘악!


땀방울이 떨어지는 소리, 두 무인의 숨 소리, 길다란 채찍이 무언가를 후려치는 소리, 그 모든 소리보다도 빠른 속도를 가질 수 있는 무기. 그건 어떠한 무기여도 불가능했다.


순간적으로 그 모든 소리보다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채찍이 아니라면.


정천이 팔을 휘두르자 채찍 긑이 수십 개의 변화를 만들어내며 주관후에게 달려들었다. 그 채찍질은 상대하는 입장에서는 수십 마리의 독사가 자신을 물기 위해 달려드는, 살풍경스러운 광경이었다.


주관후는 정천의 팔을 보고 채찍의 경로를 예측하려 했지만, 그는 채찍의 명수와 상대해 본 지 너무 오래되었다는 사실을 실감하지 못했다.


쫘악...!


채찍의 명수는 채찍이라는 기병이 가진 약점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읽히기 쉽다. 그 어떤 무기보다도 채찍이라는 무기는 팔의 연장선 상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그 팔을 보면 경로를 읽을 수 있고, 그 눈을 들여다보면 그 목적도 엿볼 수 있다. 그건 채찍을 쓰는 사람이라면 익히 걱정해야 할 요소였다.


저번 마교대전 동안 정천의 조부는 이러한 단점을 고치기 위해 안간힘을 쏟았다. 그리고 두가지 답을 찾아냈다.


......쫙!


경로를 읽더라도 반응하지 못할 정도로 빠르게.


”하하!“


하지만 여전히 주관후가 더 빨랐다. 그렇다면...


휘익!


”계산하지 못할 정도로 망측스럽게.“


채찍의 시작점이 손등이나 손목, 혹은 다른 손목과 닿으며 쉽게 구부러졌다. 채찍의 위력은 그 시작점이 아닌 맨 끝에서 나오는 법. 게다가 많은 변수가 끼어들면 예측하기도 그만큼 어려워진다.


그리고 한 순간, 주관후의 발이 들어가서는 안되는 곳으로 들어섰다.


육합개천공(六合開天功)

전미개오(轉迷開悟)


채찍 한 갈래가 나뉜다. 그 무엇보다도 빠르게. 그것은 나뉘는 기척보다도 빠르게 나뉘어 누구도 반응하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난잡하기 이를 데 없는 채찍의 움직임이 상대를 홀리기 시작했다.


천파만파 채찍의 수가 늘어만 가는데도 주관후는 웃었다. 오랜만에 보는 저 미친듯한 변화 속에서도 살 길은 분명 있었고, 지금의 자신은 얼마든지 그 변화를 파고들 수 있었다.


천변(千變)과 만화(萬化). 그 정신 나갈 것 같은 공세 속에서 주관후는 잠시 평범하게 생각했다. 농사를 짓던 농민과, 글만 쓰던 서생도, 저 거리의 삼류무사도 공유하는 시간 속으로 빠져들었다.


한 순간 모든 짐을 내려놓은 그는 해방감을 맛봤고... 다시 짧게 생각했다.


보통 사람이 1초라고 느낄 법한 시간을 10분지 1로 쪼갰다. 그 시간 속에서도 아직 채찍의 변화는 보이지 않았다.


짧아진 시간을 다시 10분지 1로 쪼갰다. 그 시간 속에서 채찍의 줄기가 약간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다시금 시간을 쪼갰다. 그제서야 원래 살던 시간대 속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아직도 느리기 그지없다. 주관후는 한 순간에 정신을 일념에 맡기고 다음 시간 속으로 빠져들었다.


채찍의 줄기가 선명히 보이는 시간, 아직 부족하다.

채찍의 끝이 끊어지듯 보이는 시간, 아직도 부족하다.

채찍의 끝이 흐리게만 보이는 시간, 아직도 부족하다.


쪼개고, 쪼개고, 또 쪼갠 끝에 남은 것은, 채찍의 끝이 명확하게 보이는 시간.


자신의 몸이 따라가지 못하는 시간 속에서 주관후는 천천히 칼을 뻗었다.


굼벵이가 자신의 칼보다 더 빠를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수십 일의 세월 속에서 검로를 하나하나 교정해가며 저 미친듯한 변화의 끝에서 자신을 맞이할 열반을 기다렸다.


한 달. 파릇파릇한 새싹이 점차 돋아나 줄기가 되며, 갓 태어난 강아지가 털이 돋고 자라기 시작하고, 처음으로 무를 배운 손자가 마보를 어느 정도 할 줄 알게 되는 시간.


그 짧다면 짧고 길다면 아득하게도 긴 시간 동안 주관후는 그저 검을 내질렀다.


...

.....

.......


콰아아앙-!


저 서양의 피부 허연 오랑캐가 말하길, 힘은 그 무게와 시간을 곱한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 세상의 그 누구도, 단순한 칼에 한 달이라는 세월을 담지 못했다. 그 막대한 힘은 얄팍한 채찍에 밀리지 않았다. 오히려 제 눈 앞의 모든 것들을 밀어버리고, 갈아버리며 그 자리에 도달했다.


완벽한 패도(覇道).


그 누구도 쉽게 부정할 수 없는 패도의 정점이 정천의 눈 앞에 있었다.


”어때? 자네가 준 수수께끼를 잘 풀어본 것 같나?“


하지만 그 어떤 무인보다 긴 삶을 살아온 도객은 자신을 괴롭히던 난관의 해답을, 겸사겸사 얻어낸 열반과 함께 자랑하며, 환히 웃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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