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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선죽람(藍仙竹籃)

혈마의 후예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남채화
작품등록일 :
2019.03.30 21:27
최근연재일 :
2019.09.08 23:00
연재수 :
30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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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06 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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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쪽

이장 틈결지벽 2

DUMMY

흑웅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정확히는 아무런 반응을 할 수 없었던 것이 맞으리라. 승패의 결과를 받아들이지 못하니 반응을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흑웅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그와는 전혀 다른 이유로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도박꾼이 보통 이런 식으로 큰돈을 잃으면 여러 모습을 보이게 마련이다.

주저앉아 우는 이들도 있고, 허탈감에 혼절해 버리는 이들도 있다. 무림인이라면? 백이면 백 난동을 피우게 마련이다.

무림인들이 드나드는 도박장이라면 이러한 일에 대비책이 있게 마련이다.

조백은 정말로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려 풍대인을 바라본다. 풍대인은 일촉즉발의 상황이 재밌는지 소리 없이 웃다가 조백과 시선이 마주친다.

그리고는 조용히 악종기를 가리킨다.

조백이 눈살을 찌푸리자 풍대인은 어깨를 으쓱 하고는 만다.

“오십삼 점이 말이 된다고 생각 하냐!”

바로 그때 흑웅이 폭발하였다.

흑웅은 괴력을 발휘해 반월형의 탁자를 발로 거칠게 찬다. 탁자는 묵직한 소리를 내며 좌우로 부러져 버린다. 그리곤 한손에 든 계조원앙월을 마구 휘두르며 정체를 알 수 없는 고함을 내지른다.

그제야 모여 있던 구경꾼들은 비명도 내지르며 이리저리 도망을 치기 시작한다.

조백 역시 처음엔 도망을 치려했다.

다만 흑웅이 계조원앙월을 휘두를 때마다 꼬박꼬박 손목을 돌리는 행동을 보면서 중얼거린다.

“그렇게 화가 난건 아닌가.”

한편 악종기는 거치도를 천천히 뽑아든다. 맹렬한 살기를 전방으로 방출하면서 흑웅의 주의를 끈다.

흑웅이 몸을 돌려 악종기쪽을 향하자, 악종기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한다.

“조가장이 그렇게 나쁜 곳은 아니야.”

“혈아도? 혈아도 악종기?”

흑웅은 기억 저편에 있던 악종기의 별호와 이름을 떠올렸다.

“미친놈아 너 같으면 백 이십 냥을 잃었는데 그딴 말이 귀에 들어올 것 같아!”

흑웅은 그렇게 고함을 치며 악종기를 향해 달려든다.

날카로운 계조원앙월과 거친 거치도가 격돌하니 불꽃이 튀며 요란한 소리가 들린다.

흑웅은 악종기를 알아본 직후 어느 정도 이성이 돌아왔는지 적당히 손을 휘둘러가며 문 쪽으로 점점 움직이기 시작한다.

악종기 역시 흑웅의 의도를 읽은 듯 적당히 계조원앙월을 피해가며 그와는 반대방향으로 움직였다. 흑웅이 조백이 서있는 문 쪽으로 움직이지만 않았어도 그는 훌륭하게 도망칠 수 있었을 것이다.

악종기의 전신에서 짙은 살기가 피어오르며 거치도를 양손으로 잡고 아래에서 위로 급박하게 올려 벤다.

턱 밑에서 거치도가 자신을 물어뜯을 듯 솟구쳐 올라오자 흑웅은 황급히 계조원앙월을 휘둘러 막았다.

[끄그그그극]

기이한 톱날 갈리는 소리와 함께 흑웅은 하마터면 계조원앙월을 손에서 놓칠 뻔 했다.

흑웅은 지끈거리는 손목의 통증을 무시하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선다. 그리고는 이를 악물고는 선풍수의 기수식인 선풍발수(旋風發手)를 펼치며 악종기와 거리를 벌린다.

기수식(起手式)은 보통 상대와 정식으로 대결할 때 하는 인사와 같은 것이다.

흑웅은 선풍수의 와류절(渦流絶)과 기병의 묘만을 이용한 좀 전과는 달리, 정식으로 무공을 펼치고 이 자리를 벗어나겠다는 뜻을 선풍발수로 보인 것이다.

악종기는 양손으로 쥔 도의 끝을 하늘 높이 들어 올렸다가 팔을 쭉 편채로 내린다. 악종기가 익힌 파쇄도법(破碎刀法)은 원래 아미파의 금광도법(金光刀法)에서 발전한 것이다.

금광도법은 본래 계도(戒刀)라는 비구니들이 머리 깎을 때 사용하는 작은 칼로 사용하는 도법이다. 그렇다보니 초식 자체가 상대의 상반신과 머리를 공격하는 형태가 많고, 굉장히 날카로운 초식들로 이루어져있다.

그러한 금광도법이 거치도를 사용하는 파쇄도법으로 변화하였으니 그 안에 담긴 독랄함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방금 악종기가 사용한 동작은 파쇄도법의 기수식으로 압정파풍(押釘破風)의 일부다.

이러한 사항을 알 리 없는 흑웅은 악종기의 동작이 [두 말 필요 없이 너의 머리를 부숴버리겠다.] 라는 의도로 보였다.

흑웅은 단숨에 승부를 볼 생각으로 기합을 내지르면서 선풍수의 대와무궁(大渦無窮)을 사용했다.

선풍수의 초식은 대부분 양손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대와무궁은 그중에서도 가장 파괴적인 초식이다.

양손이 거대한 원을 연속적으로 그리면 소용돌이치는 장력이 형성된다. 상대와 격돌하게 되는 순간 양 손이 서로 다른 속도와 크기로 원을 그려 장력과 장력 사이에 기이한 역류가 발동한다.

흑웅은 양손의 속도를 달리한다거나 원의 크기를 달리할 정도로 뛰어나질 못해 계조원앙월과 같은 기병을 이용한 것이다.

한편 악종기의 거치도는 역으로 갈지자를 그리며 올려 벤다. 층첩분격(層疊分擊)의 초식으로 대와무궁을 파훼하려는 시도였다.

하지만 대와무궁에서 발생하는 역류가 생각보다 강해 악종기의 거치도는 뜻대로 잘 움직여주질 않았다. 악종기는 역류를 거스르지 않고 어깨에 힘을 빼며 역류에 거치도를 맡긴다.

순간 거치도의 이빨과 이빨 사이의 움푹 들어간 부분에 계조원앙월의 한 부분을 살짝 건드리게 된다.

악종기는 바로 그때 온 힘을 다해 거치도를 끌어당긴다. 톱날과도 같은 날에 걸려 계조원앙월이 손쉽게 딸려온다.

흑웅은 그런 악종기의 시도를 비웃으며 악종기쪽으로 한걸음 다가서며 와류절을 사용한다.

단순한 손목의 회전이지만 악종기의 거치도가 위로 밀려 올라가버린다. 바로 그때 흑웅은 계조원앙월의 손잡이 좌우에 나있는 칼날로 악종기의 어깨를 깊이 찌른다.

악종기는 그 다음에 올 공격을 짐작했는지 급히 내공을 끌어올려 얼굴을 포함한 상반신을 보호한다. 흑웅은 당연히 그러한 사실은 알아차리지 못한 체 계조원앙월을 쥔 손을 한 차례 꿈틀 거린다.

일순간 정적이 흐른다.

우모침같은 것은 발사 되지 않았다.

둘 다 예상한 공격이 발휘되지 않자 당황한다. 악종기야 그 이유를 알고 있었지만, 흑웅은 그렇지 않았다. 흑웅은 지금 당장 자신이 처한 상황도 잊은 채 입을 쩍 벌리고는 당황하고 있었다.

악종기는 도를 좌우로 흔드는 것만으로 계조원앙월을 바닥으로 떨어지게끔 한다. 그리고 그대로 가볍게 내려찍는다.

흑웅의 귀가 찢겨나가며 핏물이 뿜어져 나온다.

흑웅은 비틀거리며 몇 걸음이나 물러선다. 귀가 찢겨져 나간 것보다 심적인 타격이 큰 상황. 그는 귀를 부여잡고는 악종기를 노려본다.

악종기는 조용히 고개를 돌려 조백의 눈치를 살핀다. 고작 귀가 찢겨나간 정도. 하지만 조백이 이런 식으로 노골 적으로 피를 본적이 없었기에 안위를 살핀 것.

뜻밖에도 조백은 방금 전의 일전이 마음에 들었는지 눈빛을 반짝거리고 있다.

순수한 호기심의 눈빛.

조백의 그런 눈빛에 악종기는 살기를 뿜어내기 멋쩍어 졌다. 그리고 살기와 함께 거치도를 거둬들인다.

흑웅은 그 틈을 타서 바로 등 뒤에 있던 창문으로 뛰어든다. 이곳은 사층 정도의 높이였지만 흑웅이 도망가기엔 무리가 없는 듯 했다.

난장판이 되 버린 방안을 살피던 풍대인은 부서진 창문을 슬쩍 보며 한마디 던진다.

“또 보세.”

풍대인의 한마디에 악종기가 풍대인을 힐끗 쳐다본다.

“귀 좀 잘렸다고 도박을 못하는 것이 아니라네.”

풍대인의 말투는 마치 잘 알고 있을 텐데 같은 느낌이었다. 악종기는 딱히 상대하고 싶지 않았기에 조백쪽으로 성큼 다가간다.

조백의 눈동자는 맑은 빛을 뿌리고 있다.

젊고 선명한 눈빛이지만 실제로 눈동자에 비치는 무엇인가를 보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심상투인가.’

심상투(心象鬪)는 무공을 배우는 자들이 마음속에서 가상의 상대를 만들어서 싸우는 것을 말한다.

하는 법은 어렵지 않으나, 심상투로 성과를 내려면 일정 수준의 실력을 보유하고 있어야 한다. 언제든지 필요하면 심상투를 끝낼 정도의 정신수양이 반드시 필요하기도 하다.

‘대체 무엇이 내 눈을 가린 것일까.’

악종기는 어째서 자신이 조백의 자질을 몰라봤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시험하는 마음으로 패검과 삼류의 무공비급을 줘보기도 한 것이다.

하지만 더 이상의 관심은 불필요했다. 애초에 조수형이 넌 저시 경고를 하지 않았던가.

더욱이······.

‘내가 가르칠만한 제목이 아니다. 최소한 구대문파정도는 돼야 하겠지.’

악종기는 조용히 손뼉을 한번 친다.

그 소리로 인해 조백은 정신을 차렸는지 한 차례 비틀 하고는 눈을 몇 번 깜빡거린다.

“돌아가시죠.”


*** *** ***


섬서성의 중심부 쪽에는 소화산(小華山)이라는 산이 있다.

이름은 화산(華山)과 흡사하나 사실상 공동산으로 이어지는 산맥의 일부며, 매화가 천지인 화산과는 달리 소화산은 기암괴석이 널려있는 편이다.

또한 자연적으로 형성된 동굴 또한 많은 편이다.

흑웅이 숨어있는 이름 없는 동굴은 그가 임시거처로 사용하는 곳이며, 간단한 상비약과 옷가지 등이 숨겨져 있는 곳이다.

흑웅은 찢겨져 나간 귀의 상처를 지혈하고 금창약을 뿌린 뒤 붕대로 대강 묶고 나서야 바닥에 주저앉아 숨을 돌린다.

긴장이 풀어지자 흑웅은 눈이 절로 감겼다.

그렇게 막 혼절해 쓰러질 것 같았지만 금 삼십 냥을 잃었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눈을 번쩍 뜬다.

“쓰레기 같은 여운장 새끼들.”

주사위가 오십 삼 점이 나왔을 때 흑웅은 여운장에서 자신을 농락한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십팔대투가 있기 전까지 연승한 것이나, 십팔대투를 하는 자리에 악종기와 같은 고수가 자리하고 있었다는 점 등등.

사방이 자신의 패배를 위해 판을 짜고, 난동을 부릴 것을 대비해 한 수까지 준비해 둔 것. 이성적이라면 여운장쪽으로는 오줌도 싸지 말아야 할 것이다. 도박이라면 치를 떨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흑웅은 다른 쪽으로 치를 떨기 시작한다.

“내가 조만간 여운장을 주사위로 박살낸다.”

자신이 무림인인 것도 망각하고, 여운장이 조가장에 종속된 도박장인 것도 망각한 말.

그리고 그 독백에 대답하는 이도 있다.

“여운장은 언제나 승부사를 환영하는 바입니다.”

뜻밖의 목소리에 흑웅은 놀라서 용수철마냥 벌떡 일어선다. 동굴의 입구엔 비대한 체구의 풍대인이 뒷짐을 진체 서있었다.

귀로 온 신경을 집중하던 흑웅은 피식 웃는다.

“빚 받으러 온 거면 헛걸음 이야.”

흑웅이 풍대인이 홀로 온 것임을 눈치 체고는 살기를 내뿜는다. 진득한 살기에 풍대인은 겁먹은 듯 걸음 물러서며 신음을 흘린다.

평소의 흑웅이라면 의기양양하게 풍대인을 죽이거나 기절시키고 도망을 쳤을 것이다. 풍대인이 뒷걸음질 칠 때 그의 뒤에서 창백한 얼굴의 소동(小童)이 서있지 않았다면 분명히 그랬을 것이다.

흑웅이 파악하지 못한 소동을 경계하는 와중에 자세를 바로잡은 풍대인은 소동에게 묻는다.

“혈로(血爐)는 가지고 왔느냐.”

소동이 한번 고개를 끄덕이자 풍대인은 품속에서 작은 술병을 꺼낸다.

은은한 술의 향기가 동굴 속에 조금씩 퍼지기 시작한다. 풍대인은 흑웅을 향해 손을 뻗친다. 무형의 기세가 뻗어나가며 흑웅을 꼼짝 못하게 옭아 멘다.

흑웅은 눈을 부릅뜨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포박된 상태로 풍대인을 향해 조금씩 끌려가고 있는데도 말이다.

그렇게 질질 끌려온 흑웅이 풍대인에게 멱살 잡히자마자 가장 먼저 당한 것은 억지로 술을 먹는 일이었다. 풍대인은 흑웅을 물건처럼 입을 쩍 벌리게 하고는, 술병의 술을 모조리 흑웅의 목구멍 속으로 흘려 넣는다.

술병의 술이 모조리 비워지자 흑웅은 뱃속에서 불길이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그 불길은 너무나도 뜨거워서 마치 온 몸의 피가 끓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흑웅은 그 열기를 입으로 토해내고 싶었으나 그것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풍대인이 조용히 흑웅의 입을 닫아주었기 때문.

뱃속에서 일어나는 열기는 점점 흑웅의 전신으로 퍼지고, 흑웅의 피부에서 어떠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처음엔 붉은 반점이 흑웅의 전신에 돋아나는가 싶더니 이내 피처럼 붉게 변하기 시작한다. 머리카락부터, 눈동자, 손톱까지 모조리 붉게 변해 마치 혈인과도 같은 모습이다.

흑웅의 전신이 붉게 변했을 때 풍대인의 놀고 있던 손이 그의 정수리를 가볍게 두드린다. 그러자 흑웅의 정수리에서 핏 빛 안개가 뿜어져 나온다.

핏 빛 안개는 몇 차례 일렁이다가 어느새 소동이 꺼내든 붉은 옥으로 된 향로를 향해 빨려 들어간다. 향로에 빨려 들어간 핏빛 안개는 점차 농축되기 시작하더니 스스로 원형의 구체로 변하기 시작한다.

풍대인은 흑웅의 시체를 한쪽 구석으로 던져 버린다.

잠자코 있던 소동은 향로를 두 손으로 공손하게 풍대인에게 받친다.

“음. 크기가 조금 부족하군.”

향로 안에 담긴 혈환(血丸)을 보던 풍대인은 아쉬운 듯 입을 연다.

“어차피 양보단 질. 목표는 채웠다. 너는 뒷정리를 하고 돌아오도록 해라.”

풍대인의 말에 소동은 공손하게 고개를 숙인다.

“아차. 양손은 꼭 잘라 오도록 해라. 빚을 감당치 못하면 손목이라도 내 놔야지.”

풍대인은 그렇게 말하고는 동굴 밖을 떠났다.

소동은 품속에서 작은 단도 하나를 꺼내든다. 손목 정도는 단숨에 잘라버릴 것 같은 날카로운 단도다.


그렇게 한 명의 고수가 기이한 죽음을 경험할 때 송운록(松雲鹿)은 근처의 동굴을 뒤지고 있었다.

송운록은 일전에 이곳에서 행운의 증표와 같던 술잔을 찾은 일이 있었기에 세심하게 동굴 안을 살폈다. 눈에 익은 좌대와 오래전 사람이 살았던 흔적을 보아 그가 찾던 동굴임에는 확실하다.

“아. 그때 그 술잔이 마지막이었나.”

송운록이 허탈한 한숨을 내뱉을 때 그의 뒤에서 누군가가 헛기침을 한다.

송운록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뒤를 돌아봤는데 그쪽에는 오척 단구의 노인이 서있었다.

“도둑이냐?”

왜소한 체구에 입고 있는 옷도 온통 낡아 빠져있다.

송운록이 비록 무공은 것은 모르지만 이런 노인 정도는 단숨에 쓰러뜨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예전에 여기서 세 개의 술잔을 주운 적이 있는데······. 노인장 물건입니까?”

자신감의 말로였는지 송운록은 솔직하게 묻는다.

“그렇다 본래 열 개지만 두 개는 잃어버리고, 여덟 개는 도둑맞았지.”

“혹시 비싼 물건입니까?”

“비싸면 내가 이런 곳에 살성 싶으냐.”

노인의 대답에 송운록은 혀를 차면서 좌대에 걸터앉는다.

“실은 내가 그중에 세 개를 훔쳤소. 최근에 비싼 값을 주고 팔았는데 또 다른 훔칠 거리가 있나 해서 왔소이다.”

송운록은 마치 자신의 안방인양 노인을 손짓해 앉으라고 권한다. 그리고 품속에서 육포를 꺼내 둘로 쪼개 노인에게 건네며 말을 하기 시작한다.

“조가장의 둘째 공자가 의외로 사람이 좋더이다. 정황으로 볼 때 내가 속임수 쓴 것도 알 텐데 목적인 술잔을 사니까 탈 없이 보내주질 않나······.”

“조가장의 둘째 공자면 조백을 말하는 것이냐?”

노인이 대꾸하자 송운록은 눈을 크게 뜨고는 노인을 달리 본다.

“이런 곳에 살아도 눈과 귀 정도는 있다.”

“아무튼 술잔을 훔쳤던 곳에서 다른 물건을 또 훔쳐서 가져가면 조공자가 사주지 않을까 싶어서 그만······.”

송운록은 뒷말을 줄이면서 노인을 슬쩍 쳐다본다.

그 눈길은 마치 그 술잔들이 정말 노인의 것이요? 라고 묻는 듯한 눈길이다.

“내 이름을 걸고 그것들은 내 물건이 맞다.”

“노인장 이름이 뭐 얼마나 대단한 이름이기에 걸고 말고 하십니까?”

“내 이름은 혈마(血魔)다.”

송운록은 노인장이 자신의 이름이 혈마라고 주장하자 박장대소한다.

그도 그럴 것이 혈마라는 이름은 그야말로 공포의 존재다.

백 년 전 마교가 창궐했을 때 천마신군은 세 명의 제자를 두었다. 그들은 본래의 이름을 버리고 천마신군이 부여해준 칭호를 이름삼아 무림을 종횡했다.

혈마는 그중 가장 지독하고 무시무시한 자로 그의 손에 죽은 무림인들의 수는 수천이 넘는다고 전해진다. 더욱이 혈마는 사부인 천마신군을 죽이는데 성공해 마교를 이어받은 사람이다.

그야말로 마도의 정수. 천하마도의 조종(祖宗)과도 같은 이름이 바로 혈마.

송운록은 간신히 웃음을 멈추며 혈마라 자칭한 노인에게 묻는다.

“설마 백 년 전 혈마 그 본인이십니까?”

“그래.”

송운록은 간신히 웃음을 멈추며 혈마에게 묻는다.

“그런 대단한 분이 왜 이런 곳에 사십니까?”

송운록의 질문에 혈마가 조용하게 웃는다. 하얀 이빨이 동굴 속에서 음산하게 빛나자 송운록은 잠깐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너 같으면 이름이 혈마인데 돌아다니고 싶겠느냐?”

송운록은 이름이야 밝히지 않으면 그만 아닌가 싶었지만 굳이 더 물어보고 싶진 않았다.

“조가장의 조백이라는 놈이 술잔을 모으고 다닌다고?”

“듣기로는 한 벌 다 모았답니다.”

송운록의 대답에 혈마는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긴다.

“인연이 있군.”

혈마의 중얼거림에 송운록은 대충 씹던 육포를 삼키며 속으로 중얼거린다.

‘이 노인의 망상벽이 의외로 깊네.’

송운록은 자칭 혈마의 망상벽에 슬쩍 동참하기로 마음먹는다.

“고작 술잔인데 무슨 인연입니까. 그리고 노선배의 신물이라면 마교에 있을 것 아닙니까? 인연이 있다면 마교에 있겠죠.”

송운록이 핀잔하듯 말하자 혈마는 담담하게 대답한다.

“마교에 남겨두었던 내 물건은 내가 쓰던 검과, 사부님께 받은 거울. 그리고 나의 권위를 상징하는 반지뿐이다.”

송운록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본래 천마검이던 물건을 부러뜨리고 다시 만든 것이 혈마의 잔양마검(殘陽魔劍)이다. 천마경(天魔鏡)과 고마환(高魔環)은 원래 마교를 상징하는 보물.

“마교가 다시 나오려면 세 가지가 모두 필요한데, 지금 마교가 세상에 발호하고 있느냐?”

혈마의 물음에 송운록은 고개를 가로 젓는다.

“하지만 그 술잔은 내가 은거한 후에 사용하던 개인적 물건이지. 그것을 누군가 다 모았다면 충분히 인연이 있는 것이지.”

혈마의 말을 잠자코 듣던 송운록은 문득 어떤 생각에 언성을 살짝 높인다.

“그럼 나도 노선배의 무공 한 두개 배울 수 있는 거 아닙니까? 인연이 있는데.”

“예전에 다섯 개를 한 번에 훔쳤던 녀석을 때려죽일 때 그 생각도 했었지.”

혈마가 웃으며 그런 소리를 하자 송운록은 마른침을 한번 삼킨다.

“감히 내 물건을 팔아서 그 돈으로 도박 따위를 해? 그때 나는 분노를 참을 수 없어 그 녀석을 산체로 찢어 죽였다.”

혈마가 살벌한 소리를 해대자 송운록은 식은땀을 흘리며 그를 진정시킨다.

“그 이후로 노선배는 수양을 많이 하신 것 같습니다. 저를 안 죽인거 보면.”

송운록의 말에 혈마가 껄껄거리고 웃는다.

“그 녀석은 나의 존재도 부정하고, 오히려 나를 죽이려 했거든.”

혈마는 그렇게 말하고는 몸을 일으킨다.

“자 가자.”

“어딜요?”

“조백이라는 놈 얼굴이나 봐야지.”

혈마가 앞장서고 송운록은 자신도 모르게 그 뒤를 따랐다.


작가의말

짜르기 애메해서 이렇게 올립니다.

다음 주 토요일에 봐요


2019/05/11 선풍장->선풍수 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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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십일장 용호쌍격 2 19.09.08 162 1 13쪽
29 십일장 용호쌍격 1 19.08.17 240 3 13쪽
28 십장 칠할강변 3 19.08.10 296 3 13쪽
27 십장 칠할강변 2 19.08.03 396 4 13쪽
26 십장 칠할강변 1 19.07.27 452 3 13쪽
25 구장 혈마잔양 2 19.07.20 486 5 11쪽
24 구장 혈마잔양 1 19.07.20 493 4 12쪽
23 팔장 건목고엽 3 19.07.13 540 6 10쪽
22 팔장 건목고엽 2 19.06.08 613 8 14쪽
21 팔장 건목고엽 1 19.06.01 685 10 9쪽
20 칠장 일일연마 3 19.05.25 681 11 11쪽
19 칠장 일일연마 2 19.05.18 716 9 11쪽
18 칠장 일일연마 1 19.05.18 754 12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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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육장 오해중첩 2 19.05.11 755 12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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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오장 득오거보 1 19.05.04 968 16 11쪽
11 사장 화향취호 3 19.04.27 993 16 7쪽
10 사장 화향취호 2 19.04.27 1,041 16 11쪽
9 사장 화향취호 1 19.04.27 1,237 12 12쪽
8 삼장 명약관화 3 19.04.13 1,261 16 10쪽
7 삼장 명약관화 2 19.04.13 1,277 14 12쪽
6 삼장 명약관화 1 19.04.13 1,456 17 10쪽
» 이장 틈결지벽 2 19.04.06 1,578 17 19쪽
4 이장 틈결지벽 1 19.04.06 1,774 15 13쪽
3 일장 고량자제? 3 19.03.31 1,863 17 12쪽
2 일장 고량자제? 2 19.03.31 2,045 2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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