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풍역 1번출구-정말... 전생에서 오셨습니까?
도림에게서 병록의 이름이 나오자 정인은 심장이 멎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정인> “X 그룹 회장의 부친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도림> “그거 말고, 그분이 변호사님께서 나 죽이려고 했던 시기에 돌아가셨다는 것도 알고 계시죠?”
<정인> “그런가요? 그건 잘 모르겠군요.”
<도림> “그분을 변호사님께서 죽이셔놓고 왜 모르쇠로 나오십니까?
내가 어디까지 아는지 궁금하지 않아요?”
<정인> “허튼소리. 계속 그런 소리 할 거면 여기서 당장 내쫓을 겁니다.”
<도림> “해보세요. 도병록 씨 사건도 아직 공소시효가 남아 있다는 것쯤 아실 텐데······.
변호사란 분이 생각이 일개 고등학교 졸업생보다 짧아서야.
게다가 도병록 씨는 살인 기수죠.
그 건을 도태홍이 안다면 아무리 도태홍이라고 해도 변호사님, 무사하실 수 있을까요?
아, 그리고 도병록 씨 사건 덮으려고 나,
그러니까 해주한테 학교폭력으로 시달리는 아이의 두 다리를 잡고
옥상에서 건물 밖으로 덤블링을 시키셨죠.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도병록 씨 사건을 모를 것 같지만,
그리고 그 사건 영원히 덮였을 줄로 생각하시겠지만, 이걸 어째?
내가 아는데?
증거도 수두룩 빽빽인데?”
<정인> “원하시는 게 뭐죠?”
<도림> “말씀을 하세요. 말씀을 안 하시면 벌거벗겨서 법정에 세울 테니까.
변호사가 아니라 수의를 입고 피고인석에서 판사를 우러르며
‘존경하는 재판장님’을 부르실 수 있으세요?
그러실 생각이신가요?
해 보세요. 자신 있으시면.”
정인은 진퇴양난이었다.
이미 두 건 범행에 대해 도림에게 들켰다.
지금 배후를 밝히지 않으면 변호사 타이틀이 문제가 아니라
사람들의 외면과 지탄을 동시에 받는 변호사가 될 것 같은데,
그렇게 되면 지금까지 변호사로서 이룬 모든 것들이 수포로 돌아가고 말 터인데,
그렇다고 배후를 밝히자니 그 배후는 그녀 자신인지라
도림에게 살인(2014년 도병록 건)과 살인미수(2014년 신도림 건),
그리고 강간살인미수(註1)(2021년 신도림 건) 세 건으로
추궁을 받게 될 처지에 놓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강간살인미수(2021년 신도림 건) 건의 배후,
즉 뒷배가 정인이냐 하는 부분에서는, 법적 판단은 다를 수 있으나 부인할 수 없는 것은
그 시작이 ‘정인의 간청’이라는 것이었다.
그녀는 그것이 ‘본인의 일’이었으므로 이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당시 지후는 정인이 병록 사건을 올레안드린을 이용해서 잘 처리했다고 말한 점,
두 사람이 계획을 공유한 점,
정인이 지후만 믿겠다고 말한 점 등을 생각한다면,
그녀가 그 건에 관하여 교사의 책임을 질 수도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는 것이
왠지 모르게 께름칙했다.
그러니 ‘뒷배’라는 말에 쉽사리 시인이나 부인을 못 하고
그렇다고 딱히 항변도 못 하는 것이었다.
정인은 할 수 없이 지후의 이름을 댔다.
<도림> “허지후. 결국 그 이름이 변호사님의 입에서 나오는군요.
허지후의 입에서 채정인의 이름이 나오지 않기를 기도하십시오.”
도림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회의실 밖으로 나간 그녀의 손에는 구겨진 물컵이 쥐여 있었다.
도림이 이 말을 하자 그녀를 부르는 정인의 초조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지만,
도림은 이를 무시하고 법인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며칠 후 도림은 지후와 만났다.
이 자리는 정인이 어쩔 수 없이 마련해 준 자리였다.
장소는 H 법무법인 회의실이었고, 지후가 미리 나와서 커피를 홀짝이며
초조한 기색으로 도림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도림이 도착하자 지후가 인사를 건넸다.
고개를 바짝 숙이며 최대한 정중하게.
60 다 돼 가는 남자가 이제 갓 스물 넘은 여자에게 이런다는 것은
분명 사람들이 보지 않아서 망정이지, 과했다.
도림은 짧게 목례 정도로 인사를 했다.
그리고 정인에게 나가 있을 것을 주문했다.
<도림> “채 변호사님한테 대충 들으셔서 아실 줄로 믿어요.”
<지후> “네. 이번 건으로 심히 상심하셨을 텐데 먼저 위로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도림> “그런 거 하실 필요 없구요, 정당한 처벌을 받으시면 됩니다.”
<지후> “그럼 이 자리는 왜?”
<도림> “재미가 없어요, 재미가.
내가 2014년에 거의 사경을 헤매고 이번에도 또 죽을 뻔 하고 성폭행까지 당해서
기자님을 비롯한 세상 사람들 요깃거리가 됐는데, 재미는 있으셨나요?
그 대가로 어느 구중궁궐에서 하루 삼시 세 때 공짜 밥 얻어먹고
운동도 하고 취직해서 돈도 버시는 기자님이나 변호사님이란,
무엇보다 저한테 재미가 없어요.
거기다 몸 아프면 치료도 공짜로 해 줘,
여자라고 해도 성폭행 따위는 절대로 안 해.
누가 봐도 불공평하지 않아요?
나는 당했는데.”
<지후> “그럼 원하시는 것이 뭡니까?”
<도림> “Q 신문 편집국장님이시라고 들었어요.
1997년에는 IMF 여파라 그랬는지 Q 신문에서 잘리셨는데,
어느새 편집국장까지 되시고, 세월이 참······.”
지후는 흠칫 놀랐다.
지금 도림이 말한 것은 그의 지근거리에 있는 사람이라면
정인이나 태휘 정도밖에 모르는 내용이었다.
<도림> “거기에 날 희생양 삼으신 게 꽤 되죠?
나와 내 가족으로 아주 뽕을 뽑으시는군요.
이생에서나 전생에서나.”
<지후> “정말, ······ 전생에서 오셨······습니까?”
<도림> “어떨 것 같으신가요?”
<지후> “솔직히 채변이 불안해하고 채변의 많은 일들을 자세히 아시니까
그럴지도 모르겠다 짐작은 해 봤지만, 잘 믿기진 않았거든요.
근데······.”
<도림> “그럼 이건 어때요?
나랑 채정인 씨랑 신풍역 1번 출구로 걸어 나가는 사진을 찍어서
내 마누라한테 전해 주셨잖아요?
난 아직도 궁금한 게, 그 사진은 왜 보내신 거예요?”
도림은 일부러 자신이 전생에 태휘인 척,
전생에서 윤정을 ‘내 마누라’라고 지칭하여 말했다.
물론 이 말을 듣고 지후는 몹시 혼란스러웠다.
그것은 사진에 대한 진실이 어긋나서였는데,
태휘는 정인과 함께 신풍역 1번 출구를 걸어 나간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
당연하다. 그 사진은 지후가 그린 극사실주의 그림일 뿐이었으니.
그러니 설사 아내인 윤정이 받은 사진을 보았다고 해도
자신이 그 게이트를 걸어 나갔다고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지후> “정말, 전생에 도태휘 씨였습니까?”
<도림> “난 다 안다니까요.”
지후는 또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그것은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지금 들은 내용이 정리가 안 되기 때문이었다.
<도림> “이렇게만 해주세요.
Q 신문에 편집국장님 직권으로 기사 하나 내주세요.
도태홍이 어떻게 도태휘의 X 매트를 갈취했는지와
현재 그 아들이 살아 있는데도 X 그룹을 내놓지 않는 이유에 대해 써 주세요.
내가 조사를 하다 보니 시간이 하도 오래 지나서 인지청구도 불가능할 것 같아,
그렇다고 상속회복청구도 안 돼.
어떻게 할 도리가 없어요, 도태홍이 결단을 내리지 않는 한은.
그리고 바이라인은 ‘허지후’로 해 주세요.”
하지만 도림의 요구는 지후로서는 받을 수 없는 조건이었다.
태홍이 X 매트를 빼앗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준 것이 그였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설사 태홍이 그런 결정을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주주들이나 채권자들이 그 결정을 받아들일지는 미지수였다.
‘정당한 상속자’라는 이름으로 경영의 ‘경’자도 모르는 ‘꼬마’가
그룹 회장 자리를 차지한다는 것을 누가 받아들일 수 있을까.
설령 밑바닥부터 일을 배운다고 해도 그런 ‘사닥다리’를 곱게 볼 사람이 있을까.
도림도 X 매트 갈취에 지후가 역할을 했을 것으로 짐작은 하지만
정확한 내용은 몰랐기 때문에 이를 강하게 요구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한편 도림이 강하게 요구했더라도 사실상 태홍의 광고로 먹고사는 Q 신문이
그의 눈 밖에 나는 기사를 쓴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에 지후는 역으로 제안을 했다.
<지후> “그러지 마시고, 제가 도태홍 회장을 만나 보겠습니다.
조카가 살아 있으니 원래 조카 몫이었던 재산은 돌려주시는 게 어떻겠느냐고.”
<도림> “국장님이 나 스무 살처럼 보인다고 너무 물로 보시네.
내가 몸은 스무 살이지만 마음은 환갑이라는 걸 모르시나요?
똑똑히 알아두세요.
그 회사 경영은 도태홍 그놈보다 내가 먼저 했다는 거.
그리고 기자님답지 않게
돈 앞에 부자지간도 없다는 걸 내가 모르는 것처럼 연기를 하시네요, 순진하게끔.
하물며 숙질지간?
개가 웃고 지나갑니다.”
<지후> “그럼 아드님이 진짜 도태홍 회장의 조카라는 증거가 있어야 기사도 낼 수 있고
도태홍 회장도 수긍을 할 것 아닌가요?
그 증거는 있나요?”
<도림> “기자님. 내 뒷조사는 하시면서 우리 아들 뒷조사는 안 하셨습니까?
우리 아들이 도태홍 때문에 살기 위해 피눈물을 흘린 사실을 모르는 겁니까
아니면 모르는 척을 하시는 겁니까?”
<지후> “누가 누굴 뭘 한다고 그러세요?”
지후는 손을 내저었다.
=== 주석
註1. 이 건에서 배달부의 강간 행위는 지후의 교사 범위에 포함되지 않으므로 교사의 초과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즉 교사의 초과가 인정되면 배달부가 강간살인미수로 처벌받더라도 지후는 살인교사로 처벌받을 수 있다. 정인에게도 혹시 교사의 책임을 묻게 된다면 책임 범위는 지후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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