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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비작가 윤도경의 찻집

신도림역 7번출구

웹소설 > 자유연재 > 추리, 드라마

윤도경
작품등록일 :
2023.05.10 10:25
최근연재일 :
2023.06.18 20:00
연재수 :
80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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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글자수 :
373,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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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06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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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절망, 그리고 또 다시 천반산으로...

DUMMY

<도림> “설령 그렇다 해도 지금 이 때에


오이디푸스가 웬 말이며 이오카스테가 웬 말이야?


천반산 그이도 내게 저주의 신탁 따위가 있단 얘기는 안 했잖아.


맞아. 난 아직 아무하고도 결혼 같은 거 안 했어.


이오카스테라니, 말도 아니지!”



하지만 이렇게 애써 위안을 삼아도


도림은 불편한 마음을 그녀 자신에게만큼은 숨길 수 없었다.


전생에서의 ‘흐름’에 비추어보면 꼭 유정과 결혼을 하게 될 것만 같았고


장차 그의 아이를 낳게 될 것만 같았다.


‘운명’은 그녀가 바랐던 길로는 절대로 가지 않았으니까.


또 그녀가 원치 않았던 길로는 반드시 흘렀으니까.



더욱이 이생에서도 계속되는 ‘저주’를 바라보는 마음은


이미 유정과의 결혼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도림> “그걸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는 있을까?”



따지고 보면 전생에서 있었던 일은 오직 그녀 혼자만이 간직하고 있는 기억이었다.


그러니 실제 원치 않는 일들이 벌어지더라도


그냥 모르는 체 하고 지내면 그뿐인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유정 역시도 전생에 다녀오게 된다면,


그것도 두 사람이 결혼한 뒤에 다녀온다면,


그래서 결혼한 사람이 자신의 엄마였음을 안다면


눈 앞에 펼쳐진 일들 앞에서 자신을 숨기고 싶은 마음을 그가 어떻게 감당할까 싶었다.



<도림> “그런 일이, 혹시라도 그런 일이 일어나면 천목님은 내게 알게 하겠지.


몰랐으면 좋을 일이니까 굳이 알게 하겠지.


보통 짓궂은 게 아니니까.


딱한 내 아들 같으니!”



그랬을 때 유정은 별론으로 하더라도


도림 자신은 이 일을 감당할 수 있을지 자신하기가 어려웠다.






<도림> “이젠 어떡해야 하나? 유정이를 떠나야 하나? 그래야 한다면 어떻게 떠나야 하나?”



이 순간 도림은 천반산 목소리가 그렇게 야속할 수가 없었다.


초등학교 5년의 기억을 소멸시켜서 고통을 한 다발 안겨 주더니


전생의 기억을 회복시켜서 또 다른 고통을 안겨 주고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난처한 상황에 부닥치게 했다는 이유였다.



그녀에겐 단 하나의 길밖에 보이지 않았다.



<도림> “이 시간, 그리고 앞으로 이어질 시간을 ‘잃어버리면’ 되는 거야.


초등학교 때 잃어버린 5년처럼.


그때는 내 의지와 무관하게 잃어버렸지만


지금은 내 의지로 잃어버린다는 것 말고는 다를 건 없어.”



하지만 도림은 미심쩍었다.


‘잃어버리기로’ 작정한 지금 순간의 지각과 자각과 기억이 너무나도 또렷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걱정이 되었다.



고개를 떨군 그녀의 눈으로 천반산 목소리가 주었던 거울이 들어왔다.


도림은 거울을 슬며시 집어 들었다.



<도림> “볼까? 앞으로 지금 이 순간을 잃어버리는지 아닌지? 잃어버린다면 어떻게 잃어버리는지?”



그랬어도 그녀는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머뭇거리기만 했다.


지금 순간을 잃어버린다면 별 문제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앞으로 꾸역꾸역 견디며 살아야 할 인생에서 간절히 알고 싶었던 것을 볼


딱 한 번의 기회를 어이없이 날려버리고 말겠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자각이 뚜렷한 지금 상태대로라면 그때처럼 옥상에서 떨어진다 하더라도


지금 이 순간을 잃어버릴 것 같지가 않았다.



<도림> “가자. 가면 되지.”



도림은 다시금 천반산에 가기로 작정하였다.



<도림> “가서 기억을 소멸시켜 달라고 부탁하면 되는 걸 뭘 고민이야.


간 김에 나한테 도대체 왜 이러는지도 한번 물어보지.


별 의미는 없겠지만.


쳇, 보고 싶으면 말을 하지 사람 오라 가라야. 귀찮게시리.”



그녀는 처음 천반산 죽도관문에 갔을 때처럼 때가 되어,


또는 할 말이 있어 천반산 목소리가 부르는 거라고 생각하자고 마음을 다잡았다.


물론 천반산에 가려는 목적은 기억의 소멸을 바라서였지만,


이리저리 합리화를 하는 것은 지금의 또렷한 기억에


뭔가 변명을 해 줘야 할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아는 이의 뒷모습은 두려움과 걱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한번 경험해 봤다지만 내생으로 가는 것은 여전히 미지의 세계로 가는 것이어서,


어떤 식으로도 알지 못하는 세계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버릴 수는 없었다.


더군다나 지금은 엄마의 마음이 있어서


‘이생’에 유정을 홀로 버려두고 떠나는 것 같아 짙은 안쓰러움이 남았다.


하지만 마지막 때가 되면 짙은 ‘닭살스러움’을 감수하고라도


까톡도 하고 전화로 평소에 안 하던 말도 하는 것에 비하면


지금 그녀는 유정을 마주 볼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하여 이튿날 그녀는 학교 등나무 벤치에 앉은 유정을 먼발치에서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도림> ‘이 결정이 맞는 것인지는 정말 모르겠지만,


나중에 이오카스테의 밧줄(註1)을 네가 안다면 이해해 줄 거라 믿어.


미안하고 대견하고 자랑스럽다. 너의 행복을 엄마가 빌어줄게.’



그녀는 유정이 혹시 전생에 다녀온 뒤 그녀가 엄마라는 것을 알았을 때를 생각했다.



<도림> ‘전생 같은 거, 믿지 않는댔지?


그 믿음 굳게 지켜서 혹시 천반산이 부르더라도 전생 따위로는 가지 마라.’



그녀는 고개를 떨구었다.


환청처럼 ‘어린’ 유정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괜히 눈시울이 시큰해졌다.



<도림> ‘또다시 우는 딸을 곁에 둔 아빠(註2)가 된 것만 같네.’



그러더니 그녀는 실없이 웃고 말았다.



유정이 전생에 무엇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실상은 그녀의 전생과 현생이 유정의 이번 생에 걸쳐 있으므로,


그가 전생으로 다녀오는지 여부에 상관없이


엄마의 실체를 알 수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그의 전생이 윤정이 알던 사람 중에 2001년 1월 이전에 죽은 사람이 아니라면.


그리고 그런 사람은 그녀의 기억에는 없었다.






이튿날 도림은 천반산에 갈 생각으로 진안행 고속버스에 몸을 실었다.


물론 이 일로 고속버스터미널에 가기까지 마음에 고민과 갈등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유정과의 관계로 인한 문제를 풀기 위해 ‘천반산’을 택하긴 하였으나,


실행에 옮기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도림> ‘이미 안전벨트를 맨 것, 의미 없는 일이지.’



그녀는 후회라고 해야 할지 미련이라고 해야 할지


알 수 없는 마음들이 머릿속을 헤집고 돌아다니는 것이 불편하여 이 말을 계속 되뇌었으나,


쉽사리 진정이 되지는 않았다.



세 시간쯤 지나고 그녀는 진안 터미널에서 내렸다.



해주에게 당했던 그 날, 그리고 격정적인 마음에 무턱대고 천반산행을 결정했던 그 날,


그녀에게는 3년(1997년 12월 - 2001년 2월경)이 지났지만


이생에서 시간이 멈춘 사람들의 시간으로는 불과 한 달도 되지 않는 시간밖에 지나지 않은


진안 터미널의 모습은 그때 그날처럼 여전히 ‘유리방’을 연상케 했다.



추우니 문이라도 닫고 있었으면 모르겠지만,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꼭, 그리고 여전히 한쪽 문을 열어놓고 있었다.



<도림> ‘플랫폼에도 의자가 있었으면 좀 좋아!’



그녀는 버스(시내버스)를 기다리기 위해 대합실 안으로 들어갔다.


이번에는 다를까 싶었지만 불쾌함은 그때에 비해 조금도 덜하지 않았다.



이윽고 천반산행 버스가 들어왔고,


짧은 순간 이 차를 보내고 다음 차를 탈까 망설이다가


어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서서 뗀 발걸음은 몹시도 무거웠다.


그녀가 그리한 이유는 진안엔 차가 하루에 한두 대밖에 다니지 않았기 때문인데,


그러자니 이 차를 놓치면 언제 다음 차를 탈 수 있을지 장담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이 차를 놓치면 하룻밤 잘 곳이 마땅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도림> ‘웃기네. 여기까지 와서 하룻밤 잠자리를 걱정했다니······.’



도림은 저도 모르게 자꾸만 뒤를 돌아보았다.


물론 그녀의 눈에는 빈자리밖에 들어온 것은 없었다.



차창 밖으로 들어온 용담호는 고요했다.


여느 호수라면 나무데크(註3)로 된, 다리와 같은 구조물로 길을 내었을 테지만,


상수원답게 그런 것은 없었다.


그리고 주위를 서성이는 사람도 없었다.



<도림> ‘칫, 그렇다고 아무것도 없을 건 또 뭐야.’



목적지에 다다라 도림은 차에서 내려, 그때처럼 꾸역꾸역 걸었다.


죽도관문에 다다랐을 때 탁 트인 낭떠러지는 시야에 거칠 것 없이 시원하기만 했다.


일전에는 홀로그램처럼 보이는 벽들이 그녀를 가두어 바깥을 보지 못하게 하였지만,


이번에는 그런 것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 주석


註1. 소포클레스의 희곡 ‘오이디푸스 왕’에서 왕비 이오카스테는 마지막에 그녀가 결혼한 오이디푸스가 자신이 낳은 아들임을 알고는 침실로 달려가 밧줄에 목을 매어 숨을 끊는다.


註2. 희곡 ‘오이디푸스 왕’에서 오이디푸스는 왕비 이오카스테가 그의 어머니임을 알고 눈을 찔러 실명을 한다. 그 뒤 그는 자신을 추방하여 테베(오이디푸스가 다스리는 도시)에서 더러움을 제거해 달라고 크레온(이오카스테의 오빠)에게 부탁한다. 그때 오이디푸스가 하는 말이 다음과 같다. “아이들을 만지며 내 슬픔을 울고 싶다. ······ 그 애들을 만질 수만 있다면 내 곁에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으련만. ······ 내 귀에 들리는 것은 귀여운 두 딸이 흐느껴 우는 소리가 아닌가. 크레온이 나를 불쌍히 여겨 아이들을 보내 준 것인가?” 도림이 말한 것은 이 장면에서의 오이디푸스이다. 그리고 소설 문장에서 ‘또다시’는 ‘다시 한번’의 의미가 아니라 ‘기어이’ 정도의 의미로 보면 된다. 참고로 희곡에서 오이디푸스의 딸의 이름은 ‘안티고네’이다.


註3. ‘데크’는 배의 갑판이라는 뜻이지만 실제 ‘데크’로 이름 붙일만한 것들은 배에 한정되지 않는다. 오히려 야외무대나 다리, 산의 보행로에 놓인 길 등의 바닥을 ‘데크’라고 말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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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신풍역 1번출구-신풍역 가는 길 23.06.12 8 0 9쪽
67 거울-아줌마, 나 도림이예요... 23.06.12 8 0 16쪽
66 거울-정인, 도태휘를 듣다... 23.06.11 8 0 10쪽
65 거울-도림, 정인을 만나다... +3 23.06.11 12 1 10쪽
64 거울-아기를 찾는 비밀 이름 23.06.10 8 0 10쪽
63 거울-그를 해코지하려 했던 사람들 23.06.10 8 0 10쪽
62 거울-두 개의 기사 23.06.09 8 0 10쪽
61 거울-거울이 들려준 잃어버린 5년 3... 23.06.09 8 0 10쪽
60 거울-거울이 들려준 잃어버린 5년 2... 23.06.08 8 0 10쪽
59 거울-거울이 들려준 잃어버린 5년 1... 23.06.08 8 0 10쪽
58 거울-도림 곁에 살아있는 전생의 인연들 2... 23.06.07 7 0 10쪽
57 거울-도림 곁에 살아있는 전생의 인연들 1... 23.06.07 9 0 10쪽
» 거울-절망, 그리고 또 다시 천반산으로... 23.06.06 9 0 10쪽
55 거울-이오카스테의 저주 23.06.06 9 1 10쪽
54 거울-Z 보육원의 그 아기 23.06.05 9 0 10쪽
53 거울-거울로 보고 싶은 세 가지... 23.06.05 9 0 10쪽
52 도림의 바다-아기를 두고 다시 천반산으로... 23.06.04 8 0 10쪽
51 도림의 바다-태휘의 죽음 23.06.04 9 0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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