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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로 시작하는 정복군주 생활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퓨전

두천斗天
작품등록일 :
2022.10.30 21:51
최근연재일 :
2022.11.30 06:00
연재수 :
26 회
조회수 :
2,889
추천수 :
297
글자수 :
130,936

작성
22.11.03 0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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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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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1쪽

001. 신분 세탁의 시작은 짐꾼으로(2)

DUMMY

4.


이 세계에서 조금이라도 사치스러운 것들은 많은 인건비를 요구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사람의 손을 탄 이상 그 값은 터무니없이 비싸지기 마련이었다.


“으아! 절절 끓는다, 끓어.”


늦은 아침.

뜨겁게 데운 물로 목욕을 마치고 시원한 우유까지 들이키니 극락이 따로 없었다.

이것만으로도 일반 가정의 일주일 치 생활비가 빠져나갔으나 소백한은 전혀 아까워하지 않았다.


‘어차피 곧 전쟁 터질 건데 뭘.’


땅도, 집도 의미가 없는 세대라면 즐기는 것밖에 더하겠는가?

오랜만에 제대로 된 사치 겸 휴가를 즐긴 소백한은 다시 현실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조금 우울해졌다.


‘에휴. 이 짓도 이번으로 끝나야 할 텐데.’


물론 도굴하고 위장하고 도망치는 게 생업이긴 했다.

하지만 익숙해지고 무뎌질 뿐 결코 달가울 수 없는 것이 우리네 인생 아니던가.


더구나 한번 쾌락을 맛본 인간은 본능적으로 쾌락을 추구할 수밖에 없다.

이왕 은퇴하기로 한 거, 소백한은 매일매일을 이렇게 보낼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했다.


‘심양에서 벗어나면 진짜 이민도 진지하게 생각해봐야겠어. 이 돈 가지고도 편히 못 지낸다는 게 말이나 되는 거냐고.’


난세라 해도 내 한 몸쯤 지킬 수 있는 무력이 있다면 적어도 엄한 일로 비명횡사하진 않으리라.

지도까지 펼쳐 들며 밤새 궁리하던 소백한은 소집 시간보다 조금 이르게 도착했다.

그러자 가장 연배가 높아 보이는 쟁자수가 두 눈을 부라렸다.


“뭘 멀뚱멀뚱 보고 있나? 왔으면 일해야지.”


“아, 옙.”


소백한은 소매를 걷어붙이고 열심히 짐을 날랐다.

어디서든 텃세는 존재하기 마련이다.

어차피 이번 한 번만 보고 말 사람들인데 괜히 얼굴 붉힐 필요는 없잖는가.


그런 노력이 먹혀들었는지 더 이상 그를 건드리는 이는 없었다.

그렇게 소백한은 자연스럽게 사람들 사이로 녹아들었다.



5.


“음. 여기서 저녁을 먹어야겠군. 다들 준비해라.”


“옙!”


요 며칠간 열심히 걷다가 솥에 불을 지피는 나날이 이어졌다.

딱히 일이 힘든 건 아니었다.

하지만 특실에서 거하게 즐겨놓고 이 지랄을 하고 있다니.

소백한은 마치 서민 체험이라도 하는 것 같아 기분이 묘해졌다.


‘정치인들이 보여주기식으로 하는 그런 건가.’


그 사이 밥이 다 됐는지 구수한 향기가 코끝을 찔렀다.


“배식이다. 다들 그릇 가져 와.”


“많이 좀 주십쇼. 헤헤.”


느긋하게 그릇을 휘적거리는 소백한과 달리 다른 쟁자수들은 후다닥 식사를 마쳤다.

그러곤 오순도순 모여 앉아 열띤 토론을 벌였다.

귀를 열고 얼핏 들어보니 나라의 미래가 어쩌고저쩌고 아주 가관이었다.


“내가 보기엔 말이야. 일단 윗대가리들부터 싹 다 갈아치워야 해. 다른 나라랑 내통하는 새끼들은 전부 쳐내야 한다니까.”


“이번에 공표한 법령도 오랑캐들한테 너무 유리한 내용 아니요? 겉으론 국적과 직업을 내어주는 대신 의무복무를 시켜서 병력을 확충하겠다는 건데. 곧이곧대로 믿을 수가 있겠냐고.”


“에잉. 이러다 정말 전쟁이라도 터지면 다 도망갈 게 뻔하지. 누가 자기 나라도 아닌데 목숨 걸고 지키려 들겠어?”


배부르고 등 따뜻한 게 무조건 좋은 건 아닌가 보다.

바닥에 돗자리를 깔고 앉은 그들은 마치 전문가라도 된 것처럼 쉴 새 없이 논평을 늘어놓았다.

그리고 그 대상은 아직 나이가 어린 왕자와 공주도 예외는 아니었다.


“차기 왕권은 역시 강경파가 맞겠지? 초상화 보니까 왕자님이 얼굴도 훤칠하시고 아주 훌륭해 보이던데.”


“공주님을 둘러싸고 있는 온건파는 영 소문이 좋지 않더라고. 얼마 전에 도성에서 온 관리가 그랬다며. 국경선에 있는 무인들을 잠시 뒤로 물려야 한다고 상소를 올렸다던가?”


“쉬벌. 빌어먹을 매국노 새끼. 남의 후장이나 빨다가 질식해서 뒤질 새끼. 진짜 새끼인 새끼.”


쉴 새 없이 말을 퍼부어댄 그들은 이제 소백한에게까지 마수를 뻗쳐왔다.


“자네는 할 말 없나?”


“아무리 그래도 전쟁은 피해야죠. 그걸 위해선 뭐라도 해야 하지 않습니까?”


“뭐라도? 그럼 주권이고 뭐고 다 팔아먹어도 된다는 거야? 엉?”


동방의 패자 중 하나인 대천제국에서 신문이란 이름의 선전도구를 발명한 이후.

사람들의 정보력과 지적 수준은 큰 폭으로 상승했다.

하지만 제대로 된 뜻도 모른 채 무작정 입에 올리는 이들이 훨씬 더 많다는 게 문제였다.


‘무엇보다 뭐가 진실인지 모르고 선동당하는 놈들이 왕창 늘어나 버렸지. 그러면 장기판의 말밖에 더 되겠냐고.’


“어우. 저는 정치 잘 모릅니다. 그냥 운동이나 할래요.”


쓸데없는 논쟁에 끼고 싶지 않았던 소백한은 아예 자리에서 일어나버렸다.

그에 쟁자수들은 저마다 묘한 표정을 지었다.


“아 또 그거?”


“큭큭. 그런다고 힘이나 쓸 수 있겠어?”


‘후우. 빌어먹을 놈들. 엿이나 먹어라.’


비웃음을 뒤로 하고 미리 봐둔 공터에 나온 소백한은 진지한 얼굴로 삽화에 기록된 동작을 따라 했다.

하지만 조금 전에 들은 얘기 때문인지 괜히 그런 쪽으로 생각이 흘러갔다.


‘백성들의 가슴을 보듬어, 보듬어...... 에잇. 싯팔. 왜 꼭 체조를 해야 운기조식이 되는 거야. 엉?’


확실히 동작 하나하나만 보면 오해를 불러일으킬 만했다.

그렇게 자신과의 싸움을 벌이던 소백한은 간신히 기본 동작 한 바퀴를 끝마쳤다.

그런데 그 모습을 유심히 보던 노인이 말을 걸어왔다.


“호오. 자네 혹시 무공을 익힌 적 있는가?”


“아, 예. 건강에 좋다고 해서 조금 배웠습니다.”


저잣거리에서 팔아대는 삼재 어쩌고나 도문에서 배포용으로 뿌리는 도인체조 정도는 어렵지 않게 배울 수 있는 잡기였다.

그걸 꾸준히 하느냐 마느냐는 또 다른 문제였지만.


“부지런한 젊은이군. 내 이름은 한원일이라 하네. 얼마 전까지 이 근방에서 행정관을 맡고 있었지.”


“아. 고명하신 이름은 익히 들어왔습니다.”


소백한은 허리까지 굽혀가며 포권을 취했다.

무협지에선 대충 이렇게 응대하면 너 같은 녀석은 모르겠으니 엿이나 먹으라는 뜻이라던데.

정작 한원일은 그 말을 진심으로 여겼는지 흡족한 얼굴로 말했다.


“허허. 그렇게 말해주니 민망하구먼. 한데 듣자 하니 자네도 반전주의자인가?”


얘기하는 걸 보니 조금 전 나눴던 대화를 엿들었나 보다.

하긴 여기선 말 섞을 사람이 없으니 적잖이 심심했겠지.

그렇다고 수준 떨어지게 욕지거리해대는 놈들이랑 놀고 싶지는 않을 테고.


‘후. 적당히 받아주고 끝내야지.’


속으로 한숨을 내쉰 소백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은 그렇습니다.”


“음. 그럼 장양의 치(治)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


장양은 유나라의 재상으로 사실상 황제 다음가는 권한을 누리고 있는 인물이었다.

당장이라도 설명과 훈계를 늘어놓을 것 같은 분위기가 흐르자 소백한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전 정치에 관심 없는데요.”


“관심이 없다니. 그게 무슨 소린가?”


“제가 누굴 뽑을 수도, 명령을 내릴 수도 없는데 관심이 다 무슨 소용입니까. 그저 유왕께서 현명하신 판단을 하시길 기도할 따름이죠.”


“그래도 나름의 이유와 생각은 있을 텐데.”


끈질기군.

속마음을 삼킨 소백한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재상께서 어떻게든 병력을 늘리려는 것도 이해는 갑니다. 하지만 눈앞의 싸움에만 급급해하는 것보다 아예 그런 일이 없도록 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왕이시여. 정치를 좀 대국적으로 하십시오.’


대놓고 말하진 않았으나 한원일은 그런 일갈을 들은 것 같아 괜히 마음이 불편해졌다.

애꿎은 수염만 매만지던 그는 어떻게든 왕의 장점을 찾아내려 애를 썼다.


“그래도 당대 유왕의 모친은 일개 시비 출신이잖은가. 그런 만큼 서민들의 애환과 고달픔을 이해할 수 있을 테니 정책에도 반영이 될 걸세. 재상도 당연히 같은 뜻이겠고.”


그 말에 소백한은 속으로 헛웃음을 쳤다.


‘하. 이렇게 순진할 수가. 그러니 관직에서 쫓겨났겠지.’


그가 보기에 출신은 그저 공감대 형성을 위한 첫걸음에 불과했다.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 수많은 정치인을 봐왔으나 흙수저 출신이라고 해서 고결하고 민중에 헌신하리라는 법은 없었다.

초심을 지키는 건 상상 이상으로 어려운 일이었으니까.


‘사적인 욕심이 있는 것까진 인정. 부귀영화를 누리고 싶은 마음이야 사람인 이상 어쩔 수 없으니까. 그럼 능력이라도 있어야지 않겠어?’


물론 소백한은 이 나라의 정치인에게 어떠한 기대도 하지 않았다.

그런 인물이라도 등장하여 나라를 구원할 확률은 상당히 희박했기에.

소백한의 표정이 떨떠름해 보이자 곧바로 한원일이 물어왔다.


“하면 너는 어찌해야 한다고 보느냐?”


“일단 영웅이 필요하겠죠. 정말 밑바닥에서부터 올라와 기적적인 행보를 그려 나갈 불세출의 초인이.”


대천제국이 내심 기대하는 붉은 혁명이라든지,

사방이 포위당하다시피 한 유 나라의 형국이라든지.

이 모든 불리한 상황을 뒤엎을 수 있는 능력은 물론이거니와 민중의 지지까지 받아야만 난세를 헤쳐 나갈 수 있으리라.


“자. 꾸물거리지 말고 일어나라! 밤이 되기 전에는 저기 보이는 언덕을 넘어야 한다.”


표사의 외침에 다들 구시렁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그때.

주변을 경계하고 있던 무사 하나가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습격이다! 노야를 지켜라!”


그와 동시에 대열의 앞뒤로 복면인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미리 준비라도 해놓은 것처럼 일사불란한 모습이었다.


“허어.”


갑작스러운 상황에 한원일의 얼굴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그에 덩달아 소백한의 표정도 심각하게 변했다.


‘아. 이거 제대로 꼬여버렸네. 저 새끼 진짜 켕기는 게 있었다는 거잖아.’


마음 한구석에서 은근히 싸움이 벌어지길 바라긴 했다.

무공의 위력을 알아보려면 사람을 상대로 한 실전이 필요했으니까.


하지만 그건 그저 막연한 바람에 불과했을 뿐, 정말로 그러길 바라는 것은 아니었다.

황급히 마차 뒤에 숨은 소백한은 고개만 쏙 내밀어 전황을 살폈다.


“으악!”


“죽어라!”


복면인들의 실력 자체는 그리 뛰어나지 않았으나 숫자가 상당히 많았다.

표사와 무사 하나당 두셋씩 붙어서 차륜전을 펼쳐버리니 뭘 어떻게 도우러 갈 수도 없었다.

그 모습에 쟁자수들은 겁에 질려 벌벌 떨어댔다.


“도, 도망가야 하나?”


“항복하면 살려줄까?”


조금 전까지 나라의 운명과 천하의 대업을 논하던 패기는 죄다 어디로 갔는지.

소백한은 그들의 마음이 이해는 되면서도 슬슬 열이 뻗쳤다.


‘책임은 지기 싫으면서 권리만 누리려는 놈들이 다 그렇지.’


하지만 이대로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었다.

날로 먹는 인생을 위해 간신히 여기까지 왔건만, 이대로 허망하게 죽는 것은 말이 안 되잖은가.


‘하. 정치인 같아서 이런 짓까진 안 하려고 했는데.’


소백한은 이를 악물고 마차 천장 위에 올라섰다.

그러곤 큰 소리로 외쳤다.


“외세의 침략이다! 우리 유나라 사람이 이걸 그냥 두고 보기만 할 텐가!”


어디 벌써부터 포기하려고 들어.

내가 어떻게든 싸우도록 만들어주마.

너희들의 영웅이자 초인이 되어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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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011. 심양성을 구원하라(1) +1 22.11.30 15 1 11쪽
25 010. 돌파(3) +1 22.11.29 18 1 11쪽
24 010. 돌파(2) +1 22.11.28 26 1 11쪽
23 010. 돌파(1) +2 22.11.26 34 2 11쪽
22 009. 돌이킬 수 없는(3) +3 22.11.25 33 3 11쪽
21 009. 돌이킬 수 없는(2) +2 22.11.24 35 3 11쪽
20 009. 돌이킬 수 없는(1) +2 22.11.23 37 2 11쪽
19 008. 마인들의 습격(2) +2 22.11.22 39 2 11쪽
18 008. 마인들의 습격(1) +2 22.11.21 46 4 11쪽
17 007. 출정(2) +4 22.11.19 52 4 11쪽
16 007. 출정(1) +3 22.11.18 54 5 11쪽
15 006. 여행 준비(3) +3 22.11.17 61 3 11쪽
14 006. 여행 준비(2) +3 22.11.16 72 7 11쪽
13 006. 여행 준비(1) +3 22.11.15 69 5 11쪽
12 005. 군주의 자질(2) +2 22.11.14 100 9 11쪽
11 005. 군주의 자질(1) +2 22.11.12 92 3 12쪽
10 004. 소문은 백수도 열사로 만든다(2) +2 22.11.11 91 3 11쪽
9 004. 소문은 백수도 열사로 만든다(1) +2 22.11.10 99 3 11쪽
8 003. 외적에게 죄를 물으시다(2) +2 22.11.09 120 6 11쪽
7 003. 외적에게 죄를 물으시다(1) +2 22.11.08 131 9 11쪽
6 002. 떡잎부터 남다른 선동가(3) +2 22.11.07 156 7 12쪽
5 002. 떡잎부터 남다른 선동가(2) +2 22.11.05 184 9 11쪽
4 002. 떡잎부터 남다른 선동가(1) +2 22.11.04 233 16 11쪽
» 001. 신분 세탁의 시작은 짐꾼으로(2) +5 22.11.03 297 43 11쪽
2 001. 신분 세탁의 시작은 짐꾼으로(1) +5 22.11.02 336 51 13쪽
1 000. 서장 - 노후 대비로 큰 거 한탕 했다 +23 22.11.01 460 95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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