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장 나의 그리움은 너의 뒤에 - 10막 계륵(鷄肋) ~ 3
상실(喪失) - 청연(靑燕)
감사합니다.
씁쓸한 표정을 짓던 중현은 안주머니에서 꺼낸 두툼한 봉투를, 외투를 건넨 여인의 빈손 위에 올려 놓으며 말했다.
“ 이것 좀 전해 주시지요. “
여인은 약간의 미소를 머금은 표정으로 가벼운 목례만 하고는 봉투를 들고서 들마루 모퉁이를 지나 모습을 감추었다. 여인이 사라진 곳을 아주 잠시간 쳐다본 중현도 이내 발걸음을 돌려서 대문 밖으로 무거운 걸음을 옮기었다.
중현의 걸음이 무거웠던 이유는 버릴 수 밖에 없었던 형근이라는 패 때문이었다. 사실 형근을 만나기 전, 그리고 서로 대화를 나눌 초반만 하더라도 중현에게 형근이라는 패는 아주 구미가 당기던 영양가 높은 먹잇감이었다. 그러나 중현의 속내를 반증이라도 하는 듯 했던 형근의 수작은 중현으로 하여금 입안에 든 먹이를 씹어 삼키지 못하도록 만들어 놓았다. 그도 그럴 것이 형근은 금전적인 뇌물공세 외적으로도 중현의 딸인 현미까지 들먹이고 있었다.
그것은 이미 충분히 많은 뒷조사를 당했다는 의미. 하지만 현미는 외국에 유학을 내보낸 지가 오래였다. 그런 사실에도 불구하고 현미의 이름을 언급했다는 것 자체가 아깝지만 형근을 버릴 수 밖에 없게끔 만든 결정적인 이유였던 셈이다.
물론, 위험하지만 떠안고 가고자 한다면 얼마든지 갈 수도 있었다. 중현에게는 그럴 만한 힘이 있었고 만에 하나 일이 잘못 된다고 할 지라도 그때 가서 쥐도 새도 모르게 형근을 매장시킬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던 게 바로 현미라는 존재였다.
중현은 고개를 좌우로 휘휘 저었다. 그러면서 자신의 피가 섞인 딸, 현미를 떠올렸다.
가짜 기훈이가 진짜 기훈이라는 이름을 걸고 처음으로 집에 발을 들여놓던 날, 그때 중현은 똑똑히 보았었다. 공들여서 쌓은 계획이 현미로 인해서 산산조각 부서질 수도 있다는 걸 말이다. 그때는 비록 어렸지만, 그렇기에 아무것도 몰랐지만, 시간이 지나고 어느 정도 자신의 주관이 뚜렷해진다면 분명히 상황은 달라지게 되어있었다.
중현은 그걸 막아야만 했었다. 그래서 견문을 넓힌다는 명분으로 현미를 한국땅에서 내보냈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현미를 언급하다니?
허나 형근은 이런 중현의 속사정까지 알지는 못할 것이다. 그래서 아까도 형근의 입에서 현미라는 단어가 튀어나왔을 때, 중현은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을 수가 있었다. 설사 형근이 현미와 연락이 닿는다 해도 현미가 순순히 응하지는 않을 터. 게다가 만약에 응한다고 할지라도 아직 현미는 모든 진실의 내막을 모른다. 단지 중현이 두려운 건 가족인 오빠 기훈이 아닌 가족이 아닌 남자로서 기훈을 사랑했던 현미의 마음이었다. 친구하나 없이 집안에서만 갇혀 지낸 아주 어렸던 그날의 그때처럼 말이다.
의지할 곳 하나 없던 현미에게 기훈은 전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니까. 게다가 자신의 친 오빠가 아니라는 사실까지도 물론 알고 있었으니까.
중현이 방을 나가고 십여 분 뒤, 짧게 자른 머리의 호리호리한 체구의 남자가 형근이 있던 방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리고는 형근의 맞은편, 다시 말해 중현이 앉아있던 자리에 삐딱하게 앉고는 앞에 놓인 사케잔에 손을 가져갔다.
남자는 사케잔을 입 속에 털어 넣더니 마치 입안을 헹구어 내듯이 사케로 가글을 해댔다. 그리고는 사케를 단번에 목구멍으로 넘겨버렸다.
“ 크으으! 아따 성님, 일은 어찌되셨소? 잘 되고 있는 거지라? “
부드러운 고급 사케를 소주를 마시듯이 삼킨 남자는 빈 잔에 술을 한잔 더 따라 부으며 말했다. 그러자 형근도 자신의 잔에 든 술로 입술을 적시며 반 모금 정도 목을 축이듯이 살짝 넘겼다. 그리고는 잔을 상 위에 내려 놓으며 자신 만만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 이거 보게, 덕필 아우. 설마 나를 못 믿는 건 아니지? “
형근의 말에 덕필은 눈가에서 광대뼈까지 대각선으로 길게 나있는 흉터를 움찔거리며 술을 입 안에다가 털어 넣었다. 그리곤 조금 전과는 사뭇 다른 험악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 크하아, 나가 성님을 뭣할라고 믿는다요? 그라고 쪼까 거시기헝께 아우라는 말은 안 혔으면 쓰것는디. “
덕필은 술잔에 술을 더 따라 붓고는 다시 입 속으로 털어 넣었다. 그리고는 형근이 앉은 쪽을 향해서 술잔을 날렸다. 덕필의 손에서 출발한 술잔은 일직선으로 날아가더니 형근의 등 뒤에 있던 벽에 부딪히며 산산조각으로 부서져 내렸다.
- 퍽! 후두둑.
덕필은 형근이 움찔하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입안에 머금고 있던 술을 목구멍으로 넘겼다. 그리고 야릇하면서도 차가운 얼굴로 형근을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 크으으, 분명히 경고허는디 만약에 일이 빠그라지면 그땐…… 뭐, 뒈져봐야 저승 맛을 아는 법 아니것소? 그란다고 나가 그리 몹쓸 놈은 아니지라. 솔찬히 정도 많응게 지레 겁부터 집어먹을 것 없소. 다 성님 허기나름 아니것소? “
덕필의 말에 형근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그저 듣고만 있을 뿐이었다. 그러자 덕필이 다시 입을 열고는 나직하게 말을 이었다.
“ 어이, 성님? 우째 대답이 없소? “
“ 그, 그래. 아, 알겠네. “
형근의 말에 덕필은 눈가에 나있던 흉터를 이죽거리며 얼굴에는 억지 웃음을 지었다. 그제서야 덕필은 자리에서 일어나 다다미방의 문을 열고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 아, 성님? 몸뚱아리 간수 잘 허시오. 뒈져불면 나가 헐 일이 없잖소! “
마지막 말을 남기고 사라지던 덕필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형근은 고개를 푹 숙이고서 마음을 추스르고 있었다. 그리고 앞으로 있을 일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계획된 일이야 어쨌든지 잘 되어야 하는 것이 맞지만, 형근은 일이 잘 되던 잘못되던지 간에 분명히 자신의 신변이 위험해 질 것이라는 불안한 생각 또한 들고 있었다. 그러나 딱히 그걸 피할 수 있는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더구나 도망갈 곳도 마땅치가 않았다.
‘ 방법은 그것 밖에 없는 것인가? ‘
형근은 일단, 무조건 중현을 붙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게 그들이 원하는 일이었고 또 훗날 자신에게 닥쳐올 위험에서 벗어날 길이기도 했다. 단, 자신을 통해서만 모든 일이 가능하게 만들어야만 했다. 그렇지 못할 시에는 이용할 가치가 없어진 형근은 이미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어질 것이 뻔했다.
형근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미리 준비한 두 번째 작전에 들어가기로 마음 먹었다. 그 두 번째 작전이란 이미 중현이 이곳을 나가면서부터 시작이 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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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꽤나 높이 솟아오른 아침 해가 따사로운 온기를 사방으로 뿌려대고 있었다. 투명한 이슬을 머금은 나뭇잎 사이로는 지지배배 지저귀던 작은 새들이 몸 단장을 하느라 부산스러운 아침이 찾아왔다.
“ 어? 아가씨! 식사 안 하시고 어디 가세요? “
“ 다녀오겠습니다. “
집사가 거실로 뛰어 나오며 승아를 불렀지만 이미 승아는 성의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던 외마디의 말과 함께 현관문을 나가버린 뒤였다. 하지만 집사는 그런 승아의 모습을 보며 빙긋이 웃음을 지으며 주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거실의 테라스 너머로 마당을 가로질러서 대문을 열고 나가는 승아의 모습이 너무나도 즐거워 보였기 때문이었다.
“ 집사님? 저 녀석 어딜 저렇게 급히 가는 거에요? “
주방으로 돌아온 집사에게 식사를 거의 마친 재규가 말을 걸었다. 그러나 집사는 재규에게 딱히 해줄 말이 없었다. 승아가 어디를 가는 지, 무엇을 하러 나간 건지는 자신도 알 길이 없었기에.
“ 치, 친구를 만나러 가신다고 들었습니다. 회장님. “
재규의 대각선 맞은편 자리에서 식사를 하던 철기가 집사가 우물거리는 사이 대신해서 말을 만들어 주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여태껏 오늘처럼 승아가 어딜 간다는 말도 없이 움직인 적은 없었기 때문에 집사도 그렇지만 철기에게도 마땅한 변명거리가 없던 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철기는 승아의 목적지가 어디인지 눈치를 챘었다. 그래서 대충 말을 지어낸 것이었다.
“ 승아가 친하게 지내는 친구가 있었던가? “
“ ……. “
재규의 물음에 철기는 일부러 크게 밥 한 숟갈을 떠서 자신의 입안에 쑤셔 박았다. 그리고는 대충 뭐라고 웅얼거리며 사람의 이름을 말하는 듯한 입 모양을 취했다. 그러자 다행히도 재규는 더 이상의 질문을 하지 않았다.
철기는 꾸역꾸역 입 안으로 밀어 넣은 밥 때문에 턱이 빠질 지경이었으나 한편으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재규가 이러한 사실을 알아채는 날에는 난리가 날 것임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철기는 자신이 뱉었던 변명거리가 앞뒤가 맞지 않는 모순투성이라는 걸 재규의 물음을 통해서 알아챘다.
“ 그런데, 문 실장 자네는 어서 안 나가보고 뭐하나? “
재규의 말에 순간적으로 아차 싶었던 철기는 씹지도 않은 밥을 물과 함께 대충 목으로 헹궈서 넘기고는 자리에서 급하게 일어났다. 넘어가지 않던 밥 알에 목이 꽉 메여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하지만 철기는 거실 테라스 섀시창 너머로 보인, 시커먼 자동차가 움직이는 모습을 보고는 다시 제자리에 슬며시 엉덩이를 갖다 붙였다.
“ 저, 회장님. 오늘은 제가 모셔야 할 것 같습니다만……. “
“ 그거 보게. 승아는 기다리는 걸 제일 싫어한다고 말하지 않았나? 허허허. “
철기는 조심스럽게 뱉은 말에 별다른 의심 없이 받아준 재규가 그저 감사할 뿐이었다.
한편, 승아는 재규의 운전기사인 황씨가 운전하는 차를 차고서 이제야 막 골목길을 빠져 나가고 있었다.
“ 아저씨. 빠, 빨리요. 우윽. 배, 배가 너무 아파요. 빨리요. 서둘러 주세요. “
승아의 어설프기 그지없는 연기에 농락당하던 황씨는 승아의 아프다는 말에 부랴부랴 운전을 하며 점점 속도를 올리고 있었다. 아침 식사를 마친 재규를 태우고서 지방 행사에 참석해야 한다는 것도 잊은 채 말이다.
감사합니다.
- 작가의말
형근은 ‘갑’ 과 ‘을’ 사이에서 계륵이 되었습니다.
형근이라는 사람은 스토리의 초중반 쯤에서 한번 등장한 적이 있었는데
눈치 채셨습니까?
오래간만에 글을 올립니다.
요즘 정신이 없어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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