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장 나의 그리움은 너의 뒤에 - 4막 우연(偶然) ~ 1
상실(喪失) - 청연(靑燕)
감사합니다.
승아는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철기의 손에 붙잡힌 자신의 손목을 신경질적으로 빼내었다. 그리고는 입술을 손등으로 훔치며 말했다.
“ 저 변태새끼가…… 내 입술에……. “
승아는 진우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이 닿았던 아찔한 순간만을 생각할 뿐, 도둑키스의 주체가 진우가 아니었다는 사실까지는 전혀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승아에게는 이것이 첫 키스였다. 달콤하고 로맨틱하기만을 바랐던 소중한 첫 키스를 이런 식으로 허무하고 어이없게 날려 버렸으니 어쩌면 승아가 이렇게 화를 내는 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 내, 내가 뭐, 뭐를요? 내가 왜 변태에요? 진짜 변태는 그쪽 같은데……. “
진우는 억울한 마음에 말대꾸를 해보지만 눈에 독기를 품고 있던 승아가 무섭기는 한 모양인지 몸을 슬금슬금 뒤쪽으로 내빼고 있었다. 승아의 손에 한번 맞아 봤으니 그 고통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침대 위에서 깔짝거려봐야 얼마나 도망갈 수 있겠냐 마는, 진우는 침대의 난간 끝부분까지 도망가서 모서리부분에 엉덩이를 걸치고 위태롭게 몸의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 아가씨! 진정하세요. “
두 사람 사이에 냉랭한 기운이 흐르자 보다 못한 철기가 중재에 나섰다. 하지만 철기는 자신이 직접 목격한 상황까지는 말하지 않았다. 분명히 승아가 먼저 진우를 덮쳤다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음에도 말이다. 물론, 사실을 말한다면 지금의 이런 웃긴 상황이 깔끔하게 정리되겠지만 대신 그 이후에 벌어질 승아의 잔소리를 받아줘야 했기 때문이었다. 천하의 철기도 그것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철기의 중재에 승아는 병실 밖으로 나가려고 몸을 돌렸다. 그 순간,
- 끄아악!
진우가 침대의 난간에서 바닥으로 떨어져버렸다. 갑작스런 움직임을 보인 승아의 모습에 움찔한 진우가 균형을 잃고만 것이었다. 승아는 단지 몸을 휙 돌리기만 했을 뿐인데도 말이다. 하긴 몸을 돌리던 승아의 한쪽 어깨가 진우 쪽으로 움직였으니 바짝 긴장을 하고 있던 진우가 놀랐던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 흐으윽! “
진우가 신음했다. 아프긴 엄청나게 아팠던 모양이었다. 그러면서도 진우는 아직도 놀란 가슴이 진정되지 않았는지 계속해서 승아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낙상의 아픔보다 승아의 손바닥이 더 무서운 진우였다.
진우의 시선을 의식한 승아는 꼴도 보기 싫다는 표정을 짓고는 병실 밖으로 나가버렸다.
“ 괜찮아? “
철기가 진우를 부축해주며 물었다. 사실 별 것 아닌 일이지만 직접 합의를 봐야 하는 입장이기에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어서였다. 하지만 진우는 승아가 나간 병실 문만을 바라볼 뿐, 그런 것까지 생각하지 않는 듯 했다.
철기의 물음에 진우가 대답했다.
“ 에, 예에. 저는 괜찮아요. “
진우는 말을 하면서도 계속 병실 문을 주시하고 있었다. 언제 또 들이닥칠지 모르는 승아를 경계하고 있는 것이었다. 조금 전에 보았던 매서운 승아의 눈빛을 보아서는 분명히 해코지를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런 진우의 모습에 철기는 병실 문을 닫아버렸다. 그리고 본론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말을 어떻게 꺼낼지 조심스러웠던 철기는 우회를 하고 있었다. 최대한 재규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처리해야만 했으니까.
철기가 말했다.
“ 귀는 좀 어때? “
“ 예? 아, 저는 괜찮아요. 그런데 그보다도 저, 그냥 나가면 안될까요? “
진우는 시계를 쳐다보며 대답했다. 순간적으로 ‘ 아차! ‘ 싶었기 때문이다.
약 세 시간 전,
진우는 ‘ 돗대음료 ‘ 로고가 새겨진 트럭을 타고서 한강공원을 찾았다. 이곳에서 체육대회를 하는 수안그룹에 음료배달을 하기 위해서였다. 정말 오래간만에 단체주문이 들어온 터라 진우의 옆 좌석에 앉은 돗대음료 대리점 점장님은 신바람이 났다. 더구나 때가 때인지라 요즘 같은 불경기에는 오늘처럼 큰 주문을 받기가 매우 힘들었기 때문에 점장의 기분은 하늘을 날고 있었다.
“ 하하하. 진우야! 오늘은 회식이다! 빡세게 하고 목구녕에 기름칠 좀 허자! “
점장은 룰루랄라 콧노래까지 불러가며 트럭을 주차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으로 같은 모양의 트럭이 뒤 따라서 주차 칸으로 들어왔다.
사실 배달 일 따위는 하지 않던 점장이지만 오늘은 주문 물량이 엄청났기 때문에 대리점에 근무하는 전 직원이 총출동을 했다. 그래 봤자 고작 점장 포함 네 명뿐인 인원이었지만 평상시대로라면 진우 혼자서 해야 하는 일이었다.
네 명이 바삐 움직이니 트럭에 가득 실린 음료박스들은 금새 나를 수가 있었다. 지금 진우가 끌고 가는 손수레가 마지막 물량이다. 음료가 쌓여있는 한 켠에 수레를 갖다 댄 진우는 능숙한 손놀림으로 음료들을 차곡차곡 내려 놓았다.
“ 이만 들어가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진우는 인사를 마치고 가벼워진 손수레를 끌고서 발걸음을 돌렸다. 하지만 진우는 몇 걸음 못 가서 발걸음을 멈출 수 밖에 없었다. 따스한 햇살아래 방금 피어 오른 싱싱한 꽃처럼 아리따운 여자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방금 내리기 시작한 부드러운 보슬비가 그 꽃을 더욱 싱그럽게 만들어 주었다. 촉촉하게 물기를 머금은 아름다운 꽃.
‘ 첫눈에 반한다는 표현을 이럴 때 쓰는 걸까? ‘ 진우는 한동안 넋을 놓고 여자를 바라보았다. 벤치에 앉아서 여우비속으로 생겨난 무지개를 올려다보는 여자의 모습은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진우의 심장은 터질 듯이 뜀박질을 하고 있었다.
“ 진우야! 우리도 그만 가자! 빨리 와라! “
같이 왔던 트럭 한대는 이미 빠져나간 주차장에서 점장이 소리를 질렀지만 진우에게 그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진우는 마치 구미호에게라도 홀린 사람처럼 벤치에 앉아있는 여자만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진우의 헤벌어진 입으로는 침인지 빗물인지 모를 액체가 흐르고 있었다.
진우가 잠깐 그러고 있는 사이, 먼 하늘에서부터 ‘ 쿠쿠쿵! ‘ 하는 천둥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더니 수증기 같았던 여우비가 순식간에 장대비로 바뀌어버렸다. 정신이 문득 든 진우는 주차장을 향해서 전속력으로 달렸다.
“ 어어? 너 어디가? “
차에 있던 우산을 빼낸 진우에게 점장이 말했다. 하지만 진우는 점장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차 문을 닫아버리고는 다시 공원 쪽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진우는 자신의 마음을 사로잡은 꽃이 피어있던 벤치를 향해서 달려가고 있는 중이었다.
벤치 앞에 도착한 진우의 손에는 우산이 들려져 있었고 진우는 비를 쫄딱 맞고 서 있었다. 그러나 벤치 위에는 꽃이 피어있지 않았다.
눈으로 쏟아져 들어오던 빗물을 손등으로 대충 훔쳐낸 진우는 공원 위쪽으로 이어진 계단을 보았다. 계단은 비를 피하기 위해서 도로 위로 올라가려는 사람들로 아수라장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바로 그 계단 아래쪽에는 벤치에서 처참히 꺾인 한 송이의 꽃이 물웅덩이에 버려져 있었다.
진우는 뛰었다. 그리고 버려진 가엾은 꽃을 조심스럽게 주워들었다. 하지만 예쁘기만 한지 알았던 꽃에는 날카로운 가시가 있었다. 가시에 찔린 진우는 눈알이 튀어나오는 고통을 느끼면서 소중한 고막 한쪽을 잃어버려야만 했다.
트럭의 와이퍼가 앞 유리의 빗물을 걷어내자 점장의 눈에 진우가 보였다. 하지만 장대비는 곧 바로 점장의 시야를 가려버렸다. 잠시 후, 와이퍼가 한번 더 움직이자 이번에는 진우가 어떤 여자를 끌어안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 모습에 점장은 슬쩍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위자에 목을 기댄 채로 눈을 감고 진우를 기다렸다.
빗소리가 잦아들자 점장은 눈을 떴다. 시간이 한참이나 흐른 것 같은데 아직까지 진우가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한강공원 어디에도 진우의 모습은 보이지가 않았다. 그래서 진우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휴대폰의 벨 소리는 차 안에서 울리고 있었다.
다시 한번 묘한 미소를 짓던 점장은 트럭를 몰고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점장이 짓던 웃음의 의미는 아마도 즐거운 데이트를 즐기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남의 속사정도 모른 채 말이다.
“ 안돼! “
철기는 단호하게 거절해버렸다. 순간적으로 화까지 내면서 말이다. 진우의 물음을 전혀 예상치 못했기 때문에 천하의 철기도 약간 당황을 한 것이다. 더구나 합의를 보지 않고 나가겠다는 진우의 말이 철기에게는 언제라도 고소할 수 있다는 말처럼 들려왔었다. 그러하기에 철기는 더욱 다급해 질 수밖에 없었다.
철기는 미리 준비한 합의서를 진우의 앞에 꺼내 놓으며 말을 이었다.
“ 학생! 우리 서로 좋게 합의하고 빨리 끝내자. “
철기는 부드럽게 이야기했지만, 좋게 합의하자는 말은 좋은 말로 할 때 합의 하자는 협박의 말이었다. 하지만 진우는 전혀 그런 걸 눈치채지 못했다. 그리고 사실 합의에는 관심도 없던 진우였다.
“ 예? 합의요? 그런 건 됐고요. 그냥 보내주시면 안 되나요? “
진우는 합의고 나발이고 지금 당장 나가야만 했다. 직장 동료들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더구나 점장이 맛있는 것을 사준다고 했었다. 그래서 더욱이 나가야만 했다. 점장의 성격상 단 한 사람이라도 빠지면 회식은 기약도 없이 다음 기회로 넘어가게 될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되면 같이 근무하는 직장 동료들의 따가운 눈초리가……. 진우는 무조건 여기서 나가야만 했다.
감사합니다.
- 작가의말
4막 ` 우연 ‘ 편 입니다.
진우와 승아의 첫만남은 상당히 아찔했습니다.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지고 만났네요.
누구는 변태로, 또 누구는 설렘으로 ㅋㅋ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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