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장 나의 그리움은 너의 뒤에 - 7막 교우(膠友)
상실(喪失) - 청연(靑燕)
감사합니다.
“ 우리 사귀는 사이, 그런 거 아닌데……. “
사귀는 사이냐는 순진의 말에 혼잣말처럼 얼버무리고 만 진우의 얼굴에는 쑥스러운 듯한 웃음기마저 살짝 비쳐졌다. 그것은 마치 첫사랑의 대상에게 고백을 앞둔 사춘기 소년의 순수한 넋두리와도 같았다. 그 대상에게 얻어맞은 손자국이 아직까지 그대로 남아있던 귓불의 얼얼함도 잊은 채로 말이다.
“ 에에~, 사귀는 거 맞구나? “
그런 진우를 보며 고개까지 옆으로 살짝 틀어버린 순진의 곁눈질에는 장난기마저 묻어났다. 그러면서 ‘ 나는 너의 모든 비밀을 알고 있으니 숨길 생각일랑 하지 말아라. ‘ 라고 하는 듯한 얄미운 말투까지. 이런 말투는 분명히 학창시절, 가깝게 지내는 친구에게나 할 법한 말이었다. 하지만 순진은 진우와 초면임에도 불구하고 스스럼없이 이런 장난을 걸고 있다. 순진은 정말로 대단한 오지랖을 가지고 있다.
“ ……. “
하지만 진우는 순진의 오지랖에 대꾸를 하지 않았다. 그냥 얼굴만 붉히고 있을 뿐이었다. 순진의 말처럼 승아와 잘 될 것만 같다는 생각 때문에? 아니면 말뿐이라도 정말 그랬으면 싶어서?
아니었다. 사실 진우는 말을 하면 할수록 순진에게 뭔가 말려들어간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어서 그랬던 것뿐이다. 게다가 대꾸를 해줘 버릇하면 틈만 나면 순진이 계속해서 병실을 들락날락 할 것만 같은 불길한 느낌이 들어서였다. 그것도 입원을 해있는 보름 동안 말이다.
“ 거봐, 거봐. 내 말이 맞잖아요! 호호홍. “
하지만 무언의 부정은 긍정이라고 하던가? 상기된 얼굴로 입을 닫아버린 진우를 보면서, 순진은 끝까지 제대로 된 오지랖의 끝판 왕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러나 낚시도 입질이 없으면 재미가 없어지는 법이다. 진우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순진은 금새 싫증을 느껴버렸다.
“ 필요한 거 있으면 호출하세요. VIP병실만의 특권이랍니다. 호호홍~. “
아쉬움을 남기고 병실 밖으로 나가던 순진. 그러나 문밖으로 나가는 그 순간까지도 진우를 향한 순진의 곁눈질은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정말 끝까지 순진하지 못한 장난질을 해대는 순진이었다.
병실의 문밖으로 순진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그제서야 진우의 입에서는 지친 한숨이 터져 나왔다.
“ 어휴, 이제야 조금 살 것 같네. “
그랬다. 안정이 우선이었던 진우는 병실에 들어오고 나서부터 단 10분도 제대로 된 휴식을 취한적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병실에 처음 들어왔을 때는 날카로운 승아 때문에 쭈뼛거릴 수 밖에 없었고 그 다음은 완강했던 철기와 합의 문제를 놓고 대화를 나눠야만 했다. 그것도 말이 좋아서 합의였지 사실은 철기의 일방적인 통보가 아니었던가? 진우가 말했던 ` 나는 괜찮으니 내보내 주세요. ` 라는 의지도 철저히 무시당한 채 말이다.
게다가 승아와 철기가 병실을 빠져나간 이후로는 곧바로 진우의 회사 동료들이 문병을 왔었다. 그것도 말이 좋아서 문병이었지 그들은 자기들끼리 이야기 꽃만 피우다가 돌아가버렸다. 아니, 오히려 진우에게 부담만 안겨주고 돌아간 꼴이었다. 그들과는 전혀 상관도 없는 병실의 입원비용 얘기만 하지 않았어도 순진의 입에서 툭 하고 튀어나온 백 만원이라는 부담스러운 말을 듣지 않아도 됐으니까.
회사 동료들이 모두 나가고 나서 순진은 또 어땠었나? 환자를 돌보는 간호사로서의 볼일이 없으면 그냥 나가주는 게 맞다. 하지만 순진은 괜한 오지랖을 부려서 진우의 마음을 싱숭생숭하게 흔들어 놓았었다. 승아와 진우가 사귀는 사이던 아니던 그게 순진하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가뜩이나 진우는 설렘과 공포라는 감정을 승아라는 울타리 안에 가둬 놓은 상태였는데 말이다.
하지만 순진이 병실 밖으로 나가자 승아에 대한 복잡미묘한 감정도 진우의 고단함에 약간씩 사그라지고 있었다. 사실 고단함 보다는 급작스럽게 찾아온 어리둥절함에 아직 감정의 정리가 되지 않은 것이겠지만. 여하튼 그런 어리둥절함이 고단함을 불러 일으킨 것만은 분명했다.
이런 저런 생각들은 접어둔 채, 진우는 일단 쉬기 위해서 침대에 몸을 눕혔다. 그때,
“ 유 진우? “
이번엔 병실 문 안쪽으로 왠 남자의사가 불쑥하고 들어오며 말했다. 이어서 그 남자는 진우를 똑바로 쳐다보며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한번 더 물어왔다.
“ 진우니? 유 진우 맞아? “
그래서 진우는 침대에 등을 대자마자 다시 몸을 일으켜 세울 수 밖에 없었다. 오늘 진우는 애석하게도 마음 편히 쉴 수 있는 날이 아니었다.
진우는 병실 안으로 들어온 남자를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분명히 어디선가 낯이 익은 얼굴이었지만 기억이 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의사가운 가슴부분에 파란색 자수로 쓰여있던 ‘ 최 기훈 ‘ 이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도 없었다.
“ 진우 맞지? 상록수 진우? “
기훈은 진우에게 삿대질까지 해가며 또 한번 물어왔다. 이번엔 확신에 찬 미소까지 지으면서 말이다.
기훈이 몇 발치 앞으로 다가오고, 그제서야 진우는 ‘ 아! ‘ 하고 떠오르는 인물이 있었다. 그건 아주 오래 전, 정확히 13년이나 지났던 오랜 친구의 얼굴이었다. 그 친구의 이름은 양 덕현. 그러고 보니 기훈의 이목구비가 덕현이와 많이 닮았다고 느끼던 진우였다. 비록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그것만큼은 확실히 알아 볼 수가 있었다. 그러나 기훈은 진우가 떠올리던 오래 전 친구, 덕현이의 이름이 아니었다.
진우는 자신의 오랜 기억을 더듬었다. 상록수 보육원과 연관된 사람 중에서 기훈이라는 이름이 있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하지만 결국 나온 말은.
“ 누구…… 시죠? “
어리벙벙하게 물어오는 진우가 마냥 웃기기만 한 듯, 기훈은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기훈이 생각하던 진우의 모습이 그 옛날의 어리숙했던 진우와 하나도 변함없이 똑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때도 진우는 저렇게 바보스러웠었다.
“ 나야, 나. 짜샤! 덕현이! “
기훈이 진우의 곁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기훈은 자신이 그 옛날에 덕현임을 밝혔는데도 진우는 아직까지 얼이 빠진 사람처럼 기훈을 쳐다보기만 했다. 예나 지금이나 한결 같은 아둔함에 기훈은 또 한번 웃음을 터트린다. 그러면서 기훈은 기어이 진우의 어깨를 툭 치며 말을 건넸다.
“ 덕현이라고! 나라고, 양 덕현! 이 자식아! 하하하. “
“ 아, 그래! 맞지? 양 덕현이? “
그제서야 제 정신이 돌아온 듯, 진우의 얼굴에도 미소가 번져갔다.
“ 그래, 나야 나. 정말 오랜만이다. 그런데 넌 어쩌면 이렇게 하나도 안 변했냐? “
“ 으응, 뭐, 너도 하나도 안 변했어. “
“ 그런데도 몰라보냐? 난 딱 보고 알겠던데? “
두 사람은 그렇게 잠시 동안 서로의 안부를 묻고 있었다. 안부라고 해봐야 어떻게 지냈는지, 잘 살았는지, 요즘 하는 일은 뭔지 등등 이런 사소한 것들이 주된 이야깃거리였지만.
“ 그런데 너 이름 바꾼 거야? 최 기훈? “
진우가 물었다. 13년 만에 만남이기도 했지만 최 기훈이라는 낯선 이름이 아무래도 이질감이 들어서였다. 마치 다른 사람과 대화를 하고 있는 느낌? 진우에게는 그런 게 없지 않아 있었다.
“ 응, 부모님이 지어주신 이름이니까. “
“ 아, 그래, 맞다! 너희 부모님을 찾았다고 했었지? 그런데 너 이 병원에 근무해? “
“ 응, 아직 실습생이야. 내년에 인턴과정 밟아야지. “
“ 벌써? “
진우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도 그럴 것이 의대는 보통 6년 과정이 아니던가? 하물며 실습은 3, 4학년 때 나온다고 쳐도 내년에 벌써 인턴과정이라니? 22살의 나이를 생각하면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 것인지.
진우의 물음에 기훈은 간단하게 설명만 대충 해주었다. 어차피 거짓으로 살아온 모든 과정을 전부 이야기 할 수는 없었으니까. 물론 그것 때문에 이렇게 남 부럽지 않게 살아가는 것이지만.
“ 유학 다녀와서 엘리트 코스를 밟았어. 대학도 일찍 들어갔고. 부모님을 잘 뒀지 뭐, 우리 집안 자체가 엄청나게 부자더라. 운이 좋았지. “
“ 아, 잘됐다. 그런데……. “
- 삐빅삐빅삐빅.
진우가 뭔가를 다시 물으려고 할 때, 기훈의 허리춤에서 호출기가 울어댔다. 호출기를 확인한 기훈은 병실을 급히 나가며 말했다.
“ 교수님 호출이다. 이따가 다시 올게. 나중에 얘기하자. “
“ 어, 그…… 래. “
진우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기훈은 쏜살같이 병실을 빠져나갔다.
이제서야 들락날락하는 사람 없이 병실은 충분한 휴식을 취할 수 있을 정도로 조용해졌다. 하지만 진우는 침대에 눕지 않았다. 오랜 친구인 기훈을 만난 이후로 만감이 교차하는 기분이 들어서였다. 단짝 친구였던 덕현, 그 친구를 기훈이라는 이름으로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이야 어디 상상이나 했을까?
진우는 13년 전, 상록수 보육원 시절을 떠올렸다. 더욱 정확하게 말하자면 기훈이 보육원을 떠나던 그날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때 진우는 떠나가던 기훈을 보며 정말 기뻐했지만 내심 부러운 마음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마음보다는 단짝이었던 친구를 이제 볼 수 없다는 슬픔이 더욱 컸었다. 그땐 10살이었으니까.
그런 덕현이를, 아니, 기훈이를 여기서 만나게 되다니…….
진우는 그날 기훈이와 마지막으로 나눴던 작별인사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 덕현아! 우리 꼭 다시 만나자. 안녕……. ‘ 이라고 했던 인사. 그 말이 정말로 주문이 되었던 것일까? 오랜 벗을 만난 진우의 얼굴에는 다시 한번 미소가 번져갔다.
진우는 그제서야 침대에 등을 대고 누웠다.
감사합니다.
- 작가의말
쉬고 싶은 진우... ㅠ
허나 오래 전 벗을 만났습니다.
드디어 진우와 기훈의 만남이 이루어졌네요.
초반에 막 뿌려놓은 사건에 과연 무슨 관련이 있었던 걸까요?
감사합니다.
Comment '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