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장 잃어버린 시간 - 9막 비밀(祕密)~1
상실(喪失) - 청연(靑燕)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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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리지 타워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곳,
그곳 천장을 저항 없이 관통한 한 줄기의 태양 빛은 ` 수안그룹 회장 한재규 ` 라고 새겨진 유리 명패를 보석처럼 빛나게 했다. 명패에 굴절된 빛은 일곱 가지 색깔의 찬란한 무지개를 뿜어내었다. 재규는 의자에 등을 기댄 채 텅 빈 허공을 넋이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힘없이 팔걸이에 걸쳐져 있던 아래로 늘어트린 재규의 손에서 뿌연 연기를 피우며 외로이 홀로 타는 담배만이 반쯤 떨어져나간 담뱃재를 부여잡고 아슬하게 버티고 있었다. 단 한 모금도 빨지 않은 담배가 거의 필터 부근까지 홀로 타 버렸을 때, 재규의 손가락은 따가워짐을 느끼며 반사적으로 움찔 하였고 그와 동시에 마치 이탈하였던 유체가 제자리로 돌아온 것처럼 넋이 나가있던 재규는 본능적으로 정신을 차렸다.
재떨이에 몇 번이나 구겨지고 비벼진 꽁초는 아직도 살아있는 끈질긴 생명력을 과시하며 천장을 관통한 햇빛 속으로 가녀린 연기를 희미하게 희석시켰다.
` 뚜--- 뚜--- 뚜--- `
적막한 분위기가 감돌던 회장실,
회사의 내선 전화벨 소리가 숨이 멎을 듯이 먹먹했던 장시간의 침묵을 흔들어 깨웠다. 재규는 재떨이의 불씨를 마저 짓이겨서 마무리 짓고는 끝이 살짝 그을린 손가락으로 ` 뚜—뚜-- ` 소리를 내던 내선 전화기의 버튼을 눌렀다.
“ 내가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말 했잖아! ”
격앙된 재규의 목소리가 수화기가 아닌 실제 육성으로 문밖의 비서실까지 날아갔다. 하지만 그와는 전혀 반대인 차분한 느낌의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흘러나왔다.
“ 회장님, 문실장님 오셨습니다 ”
재규는 비서가 전하는 ` 문 실장 ` 이라는 말에 다소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철기에게 지시했던 임무가 며칠은 걸릴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 뭐? 문실장이? 들어오라고 해 ”
회장실 안으로 들어온 철기의 손에는 노란 파스텔 톤의 차트가 들려져 있었다. 재규의 시선이 그것으로 향했다. 철기는 그것을 재규의 책상 위에 올려놓고 뒷걸음질로 두어 걸음 물러난 그 자리에 섰다.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하던 재규의 입술은 이미 닫혀있음에도 불구하고 점점 더 힘이 들어갔다. 이어서 ` 흐음~ ` 하고 한숨을 몰아 쉰 재규의 입에서 느릿하면서도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이건가? ”
재규의 물음에 철기는 말 없이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재규의 시선은 여전히 차트를 향해 있었고 고뇌에 쌓인 재규의 표정은 쉽사리 풀어지지가 않았다. 이미 벌어진 일임에도 불구하고 심적인 갈등을 겪고 있기 때문이었다. 재규의 손이 차트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차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 방법이 없어! 결국은 이렇게 되는구만! ”
혼잣말을 하던 재규의 손이 자신의 등뒤, 책장 속에 숨겨진 조그만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책장이 양쪽으로 갈라지면서 이동했고 그 자리에 높이가 어린 아이의 키 만한 커다란 금고가 나타났다. 재규는 차트를 금고 제일 깊숙한 곳에 넣어 두었다. 그리고 금고 문을 닫자마자 양쪽으로 물러났던 책장들이 다시 ` 스르륵 ` 이동하여 감쪽같이 금고를 숨겨주었다. 오직 철기와 재규만이 알고 있는 비밀 금고였다.
“ 이봐! 문실장! ”
“ 네. 회장님! ”
무언가 말을 꺼내려던 재규는 다시 입을 닫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철기는 재규가 하려던 말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재규가 느끼고 있는 복잡한 감정이 어떤 것 인지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철기는 그에 대한 어떤 물음도, 대답도 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지금 저질러지고 있는 일에 대한 옳고 그름의 판단은 본인의 몫이 아니라는 것과 그리고 모든 판단은 재규의 몫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철기에게 재규는 또 다른 아버지였다. 재규가 아니었으면 아직도 인생의 밑바닥, 더러운 흙탕물에서 뒹굴고 있을 철기였다. 재규는 그런 철기에게 재기의 발판을 마련해준 사람이었고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지원 해준 사람이었다. 하지만 철기는 지금의 상황을 이 지경에 이르게까지 만든 곳이 자신과 자신의 아버지가 함께 했던 ` 흑월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마음 한 켠이 너무나도 무거워졌다.
바위로 만든 문처럼 열리지 않을 것 같았던 재규의 무거운 입술이 천천히 움직였고 입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에는 침통함이 묻어났다.
“ 만약에 말이야…… 만약에 자네가 내 입장이라면 어떻게 할 것 같은가? ”
철기는 대답을 하는 대신에 무거운 마음과 똑같이 닮은 무거운 얼굴을 유지했다. 그 표정을 보고 철기의 마음을 알아차린 재규는 탄식에 가까운 한숨을 쉬었다.
“ 하아…… 미안하네! 자네한테 내가 대체 무슨 소리를…… 수고했네 문 실장! 그만 나가보게! ”
미안한 듯이 멋쩍은 웃음을 짓던 재규의 얼굴에서는 그 웃음 뒤에 가려진 형언할 수 없는 착잡함이 보였다.
철기는 그만 나가보라고 하던 재규의 말에 고개를 숙일 여유 조차 없을 정도로 어두운 재규의 얼굴을 보았다. 하지만 철기는 그런 재규를 뒤로 하고 회장실을 나올 수 밖에 없었다. 철기 스스로가 할 수 있던 것은 지금은 아무 것도 없었으니까.
감사합니다.
- 작가의말
9막입니다.
여기까지 달려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또 한번 사건의 전말을 예고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전에 6~7 막에서 철기가 생각했던 ` 흑월 ` 의 연관성은 이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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